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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군란의 발생 배경>
1873년 부터 진행된 대원군의 실각으로 드디어 실세가 된 고종과 명성황후는 초기에는 상당히 유연한 정책을 펼쳤다.
첫번째로 대원군의 실각을 야기한 상소를 올린 최익현을 방면했다. 그리고 대원군의 측근인 박규수, 이경하 등을 발탁했고, 대원군 반대파인 이유원, 이최응, 김병국에게 벼슬을 제수(除授)했으며, 동시에 오랜만에 안동 김씨들을 불러들여 조정을 안정시켰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책인 호포제, 사창제는 고수했고, 서원 복구 요구도 들어주지 않았다.
앞서 말한 뼈속까지 중화주의자 최익현 상소의 가장 주요 내용이었던 명나라 황제에게 제사를 지내는 만동묘 복구도 고종은 복구는 했지만 제사를 관가에서 주관하게 하면서 만동묘의 권위조차 조정의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고종은 대원군에게 승지와 종친을 보내 문안하며 자신이 불효자가 아님을 보여주려 했지만 적극적이진 않았다. 오히려 존호를 바치고 대소사를 궁궐의 최고 어른이고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준 조대비인 신정왕후를 찾아가 문안을 드리는 등 신정왕후를 극진히 모셨다. 그러나 신정왕후는 궁궐실세인 명성황후를 두려워 해 찾아오는 고종을 일부러 멀리 했다고 한다.
그리고 고종이 사방에 가득한 대원군의 세력으로부터 권력을 보전하기 위해 발탁한 세력이 명성왕후의 일가인 여흥 민씨였다.
이때부터 명성황후 척족인 여흥민씨 세력이 권력을 잡아 간다.
그 중 흥선대원군 부인인 부대부인 여흥민씨의 친동생 민승호가 매형인 흥선군을 버리고 명성황후 편에 서서 과거 안동김씨 김좌근이 그랬던 것처럼 조정의 실세가 되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민승호는 1년 후에 누군가가 보낸 폭탄에 의해서 가족들과 함께 폭살 당한다.
고종과 여흥민씨 세력등은 당연히 흥선대원군 측이 벌인 일이라고 확신은 했지만 증거는 없었다.이처럼 권력에서 물러난 흥선 대원군은 얌전히 앉아있지만 않았다.
일단 당장 실권을 잃었다고는 해도 대원군이 집권한 기간만 10년이었다.
대원군은 본래 중앙 정권에서 밀려나 있었던 왕실 종친, 남인 등 노론 이외의 사색당파 잔당, 차별받는 신분이던 서얼, 중인 등을 골고루 등용하고 끌어들였다. 그 때문에 대원군의 세력은 사회 각층과 조정에도 뿌리 깊게 널리 퍼져 있었다.
무엇보다도 흥선대원군의 '왕의 생부'라는 위치는 고종조차도 대원군을 제거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흥선대원군은 정권을 잃어버린 기간에 집요하게 복권을 시도했다. 사실상 흥선 대원군이 살아 있을 때 조선에서 일어난 거의 모든 정변에 크건 작건 흥선대원군이 연루되어 있었다.
흥선대원군은 아들 고종을 몰아내려고 쿠데타를 몇 번 기도하기도 한다.
첫 번째가 1881년의 이재선 사건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중간에 걸리면서 일망타진 된다. 이 사건으로 흥선군 서자인 이재선과 측근 안기영, 권정호 등만 사형당한다. 대원군은 국왕의 아버지라는 이유로 면책된다.
그 뒤에도 장남 이재면을 왕위에 앉히려 했으나 실패한다. 이때에도 이재면이 고종의 친형이었으므로 모두 면책된다. 그 뒤엔 손자 이준용을 왕위에 앉히려고 기도한다. 손자 이준용은 아버지나 삼촌들과는 다르게 적극적이고 호탕한 성격이라 대원군과 죽이 잘 맞았다. 그러나 이 마저도 실패하고 만다.
그러다 맞이하게 된 것이 임오군란이다.
흥선대원군에게 다시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임오군란은 여러가지가 복합되어 일어난 사태이지만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두 사람이 있다.
그 두 사람은 얼마 전 kbs2에서 절찬 방영한 '장사의 신(원작 객주)'에서 크게 활약 했다. 장사의 신은 김주영 원작소설 객주를 드라마화 했다. 오래 전에도 방영을 했던 기억이 있다.
장사의 신 드라마는 구한말을 배경으로 한다.
그 드라마를 잘보면 그 당시 시대상황과 일반백성들의 생활상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시대 지도층을 상징하는 두 사람이 나온다.
지칠 줄 모르는 탐욕으로 승승장구하는 김보현과 민겸호이다.
김보현은 장사의 신 처음부터 등장한다. 그는 개경 유수로서 주인공 천봉삼 아버지와 갈등을 빗는다. 그러면서 조선말기 전형적인 탐관오리로서 어떻게든 백성들로부터 돈을 뜯어 낸다. 그 돈으로 더 높은 벼슬을 사고 승승장구를 한다. 그리고 드디어 그가 꿈에 그리던 '선혜청당상관'을 맡는다.
'선혜청당상관'은 지금으로 말하면 국세청장에 해당된다. 당시는 거의 모든 세금을 쌀로 냈기에 선혜청당상관은 국가의 모든 재정을 한 손에 잡을 수 있었다.
김보현은 거액을 들여 산 선혜청당상관 자리였기에 투자한 돈의 몇 십배로 뽑아 내기 위해서 별 짓거리를 다한다.
김보현 등과 같은 탐관오리들의 부정부패와 명성황후 측에 의한 궁궐의 사치 그리고 외세침탈에 대한 대응으로 조선의 국가재정은 바닥났다.
그런데도 궁궐에서 사용해야하는 비용은 끝이 없었다. 호조나 선혜청에 저축해 놓은 것조차 모두 바닥이 나 군인들 월급도 제대로 지급하지 못했다.
그래도 5군영 소속 군인들에게는 군량이 정상적으로 지급되던 흥선대원군 집정 시대와는 달리 명성황후 집권 동안에는 13개월 동안이나 군료(軍料)가 미지급되는 등 녹봉을 자주 지급하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군인들에게 녹봉도 지급하지 못하는 나라가 존재한다는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당연히 군인들 사이에서 불만이 고조되었고 불온한 기운까지 감돌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명성황후 측의 개화정책에 따른 제도개혁으로 정부기구에는 개화파 관료가 대거 기용되었다. 그 일환 중 하나로 1881년, 일본의 후원으로 신식군대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했다.
1882년에는 종래의 훈련도감·용호·금위·어영·총융 5영(營)을 무위영(武衛營)·장어영(壯禦營) 2영으로 개편하는데, 여기에 소속된 옛 영문의 군병들은 자기들보다 월등히 좋은 대우를 받게 된 신설 별기군을 왜별기(倭別技)라 하여 증오했다.
이런 와중에 김보현의 비리가 발각되어 선혜청당상관이 바뀐다. 이번에는 명성황후 척족인 민겸호가 그 자리를 맡는다. 그런데 바뀐 민겸호는 김보현 보다 한 술 더 뜨는 위인이었다.
탐욕비리로 물러 난 자리에 더 탐욕스런 인물을 임명했다. 아무리 조선말기라고해도 그 중요한 자리에 어쩜 꼭 그런 인물들만 골라서 임명하는 지 당시 임명권자들의 정신상태부터가 썪을대로 썪어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민겸호가 선혜청당상관이 된 후 1882년 7월 19일 전라도에서 쌀을 싣은 선박이 도착하자 선혜청 도봉소(都捧所)에서는 우선 무위영 소속의 옛 훈련도감 군병들에게 1개월분의 급료를 지불하게 했다.
그러나 민겸호 집안 하인이 맡았던 선혜청 창고지기의 농간으로 군병들에게 급료로 지급되는 쌀에 겨와 모래가 섞였을 뿐 아니라 두량(斗量)도 절반 정도 로 속여서 지급했다. 이에 격분한 무위영 군병들은 군료의 수령을 거부하고 따졌다.
그러나 민겸호의 하인인 군료 지급 담당자는 항의하는 군병들에게 안하무인격으로 불손한 언동까지 했다.
당시 민겸호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으며 민겸호 하인들까지 내놓고 수탈을 하면서도 안하무인격으로 뻔뻔하기 그지 없었다.
이에 군병들은 격노했다. 그동안 쌓여왔던 것이 한 꺼번에 폭발했다.
옛 훈련도감 출신 김춘영·유복만·정의길· 강명준 등을 선두로 한 군졸들은 선혜청 창고지기와 무위영 영관(營官)에게 돌을 던지고 몰매를 때렸다. 그리고 도봉소를 습격하여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이를 도봉소 사건이라 한다.
한편, 이 소식을 들은 민겸호가 도봉소사건의 잘, 잘못을 따지기는 커녕 무조건 군란 주동자 체포령을 내렸다. 곧 김춘영·유복만 등 군인 네 다섯 명이 포도청에 잡혀 갔다. 잡혀간 후 그들이 혹독한 고문 당하고 있다는 것과 그들 중 두 명이 곧 사형되리라는 소문이 군병들 사이에 퍼졌다.
이 소문을 접한 군병들은 김장손·유춘만 (유복만의 동생)을 필두로 투옥된 군병의 구명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피눈물을 흘리면서 통문을 작성한다
“ 굶어죽는 것이나 법에 따라 처형당하는 것이나 죽는 것은 똑같다. 마땅히 죽일 놈은 죽여서 우리의 억울함을 풀겠다.”
7월 22일(음력 6월 8일), 흥선대원군 친형인 이최응이 별기군을 동원하여 폭동을 진압할 것을 국왕에게 건의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 소문에 사건에 가담한 군병들은 더욱 흥분했다.
그러나 흥분을 삼키고 일단 7월 23일(음력 6월 9일)에 김장손과 유춘만을 선두로 한 무위영 군병들이 당시 흥선대원군과 가까운 무위대장 이경하 집에 가서 민겸호 위법사실과 잡혀간 군병들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했다.
그러나 이경하는 자신에게 군료 관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내세워 편지 한 통을 써주고 민겸호에게 직접 호소하도록 했다.
자기 관할이 아니다는 이유로 책임을 회피하기만 하는 그들의 직속상관인 이경하에 실망한 군인들은 민겸호의 집으로 몰려갔다. 군병들은 문제를 일으켰던 도봉소 창고지기를 민겸호 집 앞에서 발견하자 더 흥분하여 민겸호의 집안으로 난입했다.
하지만 그들은 폭도가 아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현직 군인으로서 명예를 지키려 했다.
흥분은 했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소리쳤다.
“ 이곳에서 1전이라도 집어가는 자는 죽인다.”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썩은 지도층에 현명한 백성들이 너무 많이 등장한다. 임진왜란 의병활동, 조선말기 민란, 동학혁명...
군병들은 순간의 흥분으로 폭도처럼 변했지만 그래도 정도를 지켰다. 군병들은 빼앗은 재물들을 마당에 한꺼번에 쌓아 놓고 불을 질렀다. 기름을 끼얹자 재물들은 성난 군병들의 심정처럼 하늘 높이 활활 타올랐다.
성난 군병들이 쳐들어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민겸호는 미리 가족들을 피신시킨 뒤 자신도 모처에 숨었다가 안전한 궁궐로 도피했다.
매천 황현이 쓴 목격담에 의하면 당시 민겸호 집에서 불타오른 재물에서는 '비단, 주옥, 패물들이 타 불꽃에서는 오색이 나타났고, 인삼, 녹용, 사향노루가 타면서 나오는 향기는 수 리 밖에서도 맡을 수 있었다.라고 진술했다.
군인들에게 녹봉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고 그 돈으로 자신의 배만 채우던 탐관오리의 탐욕의 불꽃이었다.
이제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고 판단한 군병들은 본격적으로 폭동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이에 일부 일반 한양 백성들도 합세하기 시작했다.
군병은 군민으로 변했다.
민씨 정권의 보복을 예상한 김장손과 유춘만 등 군병들은 흥선대원군이 있는 운현궁으로 달려갔다. 흥선대원군을 만난 군병들은 그동안의 사정을 설명하고 대원군이 자신들을 이끌어 달라고 요청했다.
흥선대원군은 권력을 다시 되 찾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직감했다. 그러나 노련한 흥선대원군은 겉으로는 군병들의 소요 사태에 대해 무위영 군졸 장순길 등에게 명하여 그들을 달래는 태도를 취하며 밀린 군료의 지급을 약속하고 해산하도록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흥선대원군은 김장손과 유춘만 등을 따로 불러 비밀 지령을 내리고 대원군 심복인 허욱을 군복을 입은 군병으로 변장시켜 군민들을 선동하고 지휘하게 했다.
이에 대원군과 연결된 군민들은 좀 더 대담하고 조직적인 행동을 개시하기 시작했다. 군민들은 무기고를 습격하고 포도청에 난입한 후 김춘영·유복만 등을 구출했다. 이어서 의금부를 습격하여 척사론자인 백낙관등 죄수들을 석방시켰다.
다른 군민일부는 경기감영을 습격하여 무기를 약탈하고 또 나머지 일부는 강화유수 민태호를 비롯한 척신과 개화파 관료의 집을 습격, 파괴했다.
또 그 날 저녁에는 군민들이 일본 공사관을 포위·습격했다.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등 일본 공관원 전원은 인천으로 도피했고, 공사관 건물은 불탔다.
이어서 군민들은 별기군 병영 하도감을 습격해 일본인 교관 호리모토 레이조 공병 소위를 살해하고, 일본 순사를 포함해 일본인 열 세 명을 살해하는 등 일본 공사관 습격을 마지막으로 하여 이 날의 폭동은 끝났다.
7월 24일(음력 6월 10일)은 흥선대원군의 밀명에 따라 돈령부 영사 흥인군 이최응과 호군 민창식을 살해하고, 창덕궁 돈화문까지 진입한 후 곧 명성황후를 제거하기 위해 궐내로 난입했다.
사건의 와중에 민겸호는 폭동으로 변한 군민들을 강압적으로 진압시키려다 실패하고 다시 피신한다.
그러나 피신하던 중 민겸호는 한성부 도심에서 군민에 붙잡혔다. 결국 민겸호는 전임 선혜청 당상인 지중추부사 김보현 과 함께 포승줄에 묶여 궁중에 끌려갔다가 군병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그들의 시신은 군민들에 의해 난도질 당해 형체도 알아 볼 수 없었다.
군민들은 그 만큼 그 두 사람으로 대표되는 탐관오리들을 증오했다.
궁궐로 난입한 군민들은 명성황후의 행방을 찾아다녔다. 명성황후가 살아있으면 그들에게 보복할 것이 분명했기에 그들로서는 반드시 명성황후를 제거해야만 했다.
이러한 위급한 상황에서 궁녀 옷을 입고 궁녀모습으로 변장한 명성황후는 무예별감 홍계훈의 등에 업혀 충주 장호원(長湖院)의 충주목사 민응식의 집으로 피신한다.
여기서 또 홍계훈과 명성황후의 아릿한 사랑이야기가 영화나 뮤지컬로 나오기도 하지만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다.
당시 상황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해서 임오군란은 성공으로 막이 내리고 흥선대원군이 다시 권력을 잡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