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에 있는 스페인의 마요르카 섬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온화한 공기와 기후, 환상적인 풍광, 이슬람 유적들, 반짝이는 유리 제품과 도자기들, 골목 구석구석 커피향기 진동하는 이국적인 카페들,
올리브, 야자, 종려, 선인장, 오렌지, 레몬, 알로에, 장미, 석류 등 각종 아열대성 꽃과 열매로 뒤덮이는 곳, 작열하는 태양과 코발트 빛 바다, 그리고 밤이면 하늘 가득한 별 떨기가 환상적인 빛을 발하는 지중해의 낙원입니다.
* 프레데릭 쇼팽
그러나 이 섬이 무엇보다도 우리들을 부르고 있는 것은 비범한 두 예술가 - 여류 소설가 조르주 상드와 음악가 프레데릭 쇼팽 - 이곳에서 2년을 살았다는 사실입니다.
* 조르주 상드
아직도 여성의 사회진출을 미심쩍어 하던 19세기, 프랑스 출신의 조르주 상드는 여류 소설가로서 뿐만 아니라 남장을 한 채 남자 문필가들과 당당하게 어울리는 여걸다운 풍모를 여지없이 보여주었던 여성이었습니다.
게다가 시인 뮈세와 작곡가 쇼팽과의 질풍노도와도 같은 애정행각을 벌였습니다. 그녀는 문학뿐 아니라 쇼팽의 음악적 창조에 결정적 기여를 하면서 음악사에도 자신의 이름을 길이 남기게 됩니다.
* 조르주 상드
상드는 파리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일찍 여윈 아버지를 대신하여 걸출한 지식인 데살틀을 가정교사로 만나 뛰어난 잠재적 소질을 꽃피우는 계기를 맞습니다. 가정교사 데살틀은 이 영특한 소녀가 정신과 육체의 완벽한 조화를 이룬 훌륭한 인격체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육체적으로 성장해 가는 소녀의 몸과 마음이 좁은 스커트와 코르셋 속에 속박되는 것을 안타까워 한 그는 그녀에게 남자아이들의 옷을 입혔습니다. 그래서 상드는 바지를 입고 남자애들처럼 들판을 뛰어 다니고 축구를 하며 말도 타기도 합니다.
그것은 다만 놀이에 그쳤던 것이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그녀의 눈과 자세도 바꿔버렸습니다. 이후 그녀는 수녀원을 졸업하고 열여섯 살 때 지방의 귀족과 결혼을 하지만 두 아들을 낳고 이혼합니다. 파리로 나온 그녀는 이제 생활비를 스스로 벌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 마요르카 섬
그녀가 이때 선택한 것은 어릴 때 경험했던 남장 차림과 상드라는 필명으로 글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남장을 하고 다니면서 콘서트, 오페라, 연극, 카페, 남성전용 클럽 등을 스스럼없이 드나들게 됩니다. 이는 그녀에게 당시 여성들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많은 경험과 넓은 시야를 제공하게 됩니다.
그런 상드에게 연하의 시인 뮈세와 세간을 떠들썩하게 하는 사랑에 빠집니다. 그러나 성격이 예민했던 두 사람은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고 헤어집니다. 그런 상드에게 나타난 새로운 남자가 바로 바르샤바에서 온 프레데릭 쇼팽이었습니다.
파리 살롱가에 혜성같이 나타나 사교계를 들썩이게 만든 쇼팽의 그 때 나이는 겨우 21세였습니다. 그의 연주는 탁월했으며 음악은 독창적이었습니다. 당시 파리는 이탈리아 오페라가 절정기에 있었습니다. 당연히 쇼팽도 오페라 분야로 나아가리라 예측했으나 그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 마요르카 풍광
그는 오페라가 아닌 소품을 자신의 주무기로 택했고, 극장을 상대한 것이 아니라 몇 사람의 소수정예 관객만을 위한 살롱을 무대로 택하는 파격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지금이야 쇼팽의 이런 선택이 현명했다고 볼 수 있겠지만 당시는 상당한 모험이었습니다. 그런 그를 확실하게 알아본 사람이 조르주 상드였습니다.
그들의 사랑이 꽃 피울 무렵 30대 중반의 쇼팽은 폐결핵이 악화되면서 건강이 안 좋았습니다. 상드에게는 그도 그녀가 돌보아야하는 사랑의 대상이었습니다. 두 아들과 연하의 애인 뮈세 다음의 네 번째 아이가 된 것입니다.
상드가 병약한 애인의 건강을 위해 파리를 떠나 택한 곳이 지중해 섬 마요르카 섬의 발데모사였습니다. 그러나 발데모사의 생활은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먼저 그들이 선택하였던 집이 최악이었습니다. 두 아들을 포함한 네 식구는 네 번이나 이사해야 했습니다. 더구나 그 해 겨울의 마요르카는 비가 너무 많이 내렸고, 유난히 추웠습니다.
* 발데모사 거리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쇼팽의 창작열을 식을 줄 몰랐습니다. 바람이 많이 불어 쇼팽이 ‘바람의 집’이라고 부른 그곳에서 쇼팽은 바로 저 유명한 <전주곡집>의 곡들을 작곡합니다. 이 전주곡집에 그 유명한 ‘빗방울 전주곡’이 들어 있습니다.
쇼팽이 세상을 떠나고 난 6년 후에 상드는 그녀의 회상록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쇼핑을 하기 위해 아들 모리스와 함께 외출을 했다. 그런데 비가 내리더니 점점 심해졌다. 게다가 갑자기 불어난 급류로 길도 막혀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길을 돌아서 평소보다 몇 시간이나 늦게 집에 도착했다.
* 발데모사의 쇼팽 기념관 내부
집 지붕에서는 장대 같은 비가 기왓장을 때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그는 슬픈 표정으로 피아노 앞에 앉아 빗방울 소리를 피아노로 치고 있었다. 그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말했다. ‘나는 이 비에 당신들이 모두 죽었다고 생각했소’ 빗방울은 그의 가슴 속에서 눈물로 변했던 것이다.“
쇼팽과 상드는 마요르카로부터 돌아와 서로가 멀어집니다. 2년 후 쇼팽은 돌보는 사람 없이 파리 방돔 광장의 호텔 방에서 서른아홉 살의 짧다면 짧은 생을 마칩니다. 누이가 그의 임종을 지켰습니다. 상드는 끝내 장례식장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