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을 미움으로 갚지 말라
우리가 세상을 맑고 아름답게 살려면 인과를 알고 믿고 실천해야 한다. 그리고 좋은 일을 많이 하면 복 받고, 나쁜 일을 많이 하면 벌 받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어야 한다. 복과 벌을 받는 시기가 정해져 있지 않을 뿐, 지은 대로 받는 때가 반드시 온다는 것을 믿지 않더라고 오게 되어 있다.
『증일아함』4권 제9「일자품(一字品)」제5-6경에 보면, 부처님이 사위국 기원정사에 계실 때의 일을 말씀하고 있다. 어느 날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지옥 가기가 얼마나 쉽고 극락 가기가 얼마나 쉬운지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어떤 사람이 지옥에 떨어질지 미리 안다. 그가 마음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를 관찰하면 마치 팔을 굽혔다가 펴는 것처럼 쉽게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지옥에 떨어지는 것은 이유가 있다. 마음속으로 나쁜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사람이 지금 화를 낸다면 그에게 말하리라. 만약 지금 그대가 목숨을 잃는다면 바로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으로 악한 행을 했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어떤 사람이 극락에 갈지 미리 안다. 그가 마음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는 지를 관찰하면 마치 팔을 굽혔다가 펴는 것처럼 쉽게 극락에 태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극락에 태어나는 것은 이유가 있다. 마음속으로 착한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사람이 지금 착한 일을 한다면 그에게 말하리라. 만약 지금 그대가 목숨을 잃는다면 바로 극락에 태어날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으로 착한 행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행자들이여. 그대들은 항상 마음을 항복 받아 나쁜 생각을 하지 말고, 착한 생각을 해야 한다. 깨끗한 생각을 내고 더러운 행을 하지 말라. 그대들은 반드시 이렇게 공부를 해나가야 한다.”
조계종 종정이셨던 월하(月下)스님이 살아계셨을 때, 불자들에게 인과를 주제로 법문하셨다. 옛날 어떤 스님이 탁발을 나갔다가 날이 저물어 어느 신도님 댁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게 됐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는데 주인과 하인이 이상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마당쇠야, 엊그제 윗마을 박첨지가 죽었다는데 지옥에 갔는지 극락에 갔는지 알아봤느냐?” “예. 알아보니 박첨지는 죽어서 지옥에 갔습니다.” “그러냐? 아랫마을 김첨지가 죽었다는데 어떻게 됐는지 알아보고 오너라.”
마당쇠는 김첨지 집에 다녀오더니 주인에게 이렇게 고했다. “김첨지 댁에 다녀왔는데, 그 어른은 극락에 갔습니다.” “음. 그렇구나. 매우 잘된 일이다.”
두 사람의 맹랑한 대화를 들은 스님이 아침 밥상을 받는 자리에서 주인에게 물었다. “죽은 사람이 지옥에 갈지, 극락에 갈지는 오랫동안 수행한 저도 모르는 일입니다. 거사님 댁 하인이 어떻게 그걸 알 수 있는지요?”
주인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야 간단하게 아는 법이 있지요. 어떤 사람이 죽었는데 동네 사람들이 ‘아무개는 나쁜 일만 하고 남을 못살게 굴었으니 잘 됐다’고 하면 그는 지옥밖에 갈 데가 없을 겁니다. 반대로 ‘아무개는 남을 잘 도와주고 아주 착한 사람인데 죽어서 아깝다’고 하면 그는 반드시 극락에 갔을 것입니다.”
스님은 크게 느낀 바 있어 절로 돌아와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도인이 되었다고 한다. 극락이나 지옥에 가기는 어려울 수도 있고 쉬울 수도 있는데, 모두 자기 하기 나름이다. 선행을 하면 반드시 복을 받고, 악행을 하면 반드시 벌을 받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사람을 이를 알고 믿어서 걱정되지 않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이를 몰라서 믿지 않아서 걱정이다.
『증일아함』16권 제24「고당품(高幢品)」제8경에 보면, 부처님이 코삼비의 코시타 동산에 계실 때의 일을 말씀하고 있다. 코삼비의 비구들은 서로 욕하면서 칼이나 막대기를 휘둘러 다치게 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들을 찾아가 타일렀다. “너희들은 서로 싸우지 말고, 시비하지 말라. 한 스승을 섬기는 제자들이니 물과 젖이 어울리듯 화합해야 하거늘 왜 싸우는가. 미움으로 미움을 갚지 말라. 미움을 끝내려면 미움을 버려야 인내와 용서로 평화로울 수 있다. 이것은 변치 않는 진리이다.”
그러나 비구들은 말을 듣지 않았고, 도리어 이렇게 말대꾸했다. “이 일은 저희의 일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걱정하실 필요가 없으니, 참견하지 마십시오.”
부처님은 다시 이들에게 부모를 죽인 원수를 갚기 위해 나섰던 장생왕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옛날 장수왕의 아들 장생이 아버지를 죽인 원수 범마달왕을 죽이지 않고 용서했듯이,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라는 것이었다. 원한은 용서해야 갚아진다는 가르침이었다. 부처님은 거듭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행자들이여, 알아야 한다. 옛날 세속의 왕들도 싸우는 것이 어리석은 줄 알고 서로 참고 견디었다. 집을 나와 도를 닦는 그대들은 견고한 믿음을 가지고 탐욕과 미움과 어리석음을 버려야 하거늘, 서로 화합하지 않고 참을 줄도 모르고 참회하여 고치지 않으니 안타깝구나. 수행자들이여, 그대들은 한 스승의 제자이므로 싸우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니 부디 싸우지 말라. 싸우지 말고 시비하지 말며, 서로 사랑하고 가엾게 여겨 일체중생을 괴롭히지 않는 것이 모든 부처님이 바라는 바이니라.”
그러나 그들은 끝내 부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 부처님은 이들을 더 이상 설득하기가 어려운 것을 알고 코삼비를 떠나 밧지국으로 가셨는데, 아니룻다와 난디와 캄빌라가 수행하고 있었다. 그들은 규칙을 정해서 어떤 사람이 걸식을 나가면 남아있는 사람이 청소했다. 음식이 넉넉하면 넉넉한 대로, 모자라면 모자라는 대로 나눠 먹었다. 서로 미워하거나 시기하지 않았다. 부처님은 이들을 칭찬하시면서 남은 우기 동안 함께 안거했다.
부처님이 생존해 계실 때, 교단은 분열의 위기가 두 번 있었다. 한 번은 데바닷다가 교단을 장악하려고 음모를 꾸민 일이고, 또 한 번은 코삼비에서 수행하던 비구들의 다툼이었다. 특히 코삼비에서 일어난 사건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었다. 경전에 기록된 것처럼 거친 말뿐만 아니라 서로 주먹다짐까지 했다.『법구경』에 보면, 부처님은 이들을 간절한 마음으로 타일렀다. “미움으로써 미움을 갚으려 하지 말라. 미움을 끝내려면 미움을 버려야 한다. 인내와 용서만이 평화를 얻게 해준다. 이것은 변치 않는 참다운 진리라네(不可怨以怨 終以得休息 行忍得息怨 此名如來法)”
이처럼 부처님이 만류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관여하지 말라’면서 싸움을 계속했다. 부처님은 무척 마음이 상하셔서 말없이 코삼비를 떠났다. 이 사건의 후일담은 남전 율장『마하박가』에 상세하게 나온다. 코삼비의 불자들은 부처님이 떠난 후에 그곳 수행자들에게 공양도 올리지 않고, 합장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할 수 없이 그곳을 떠나 부처님을 찾아가 참회하고 화해했다. 미움과 분노는 남에게도 상처를 주지만, 스스로 자기를 해치기도 한다. 몸속에 나쁜 피를 돌게 해서 건강에도 좋지 않다. 이를 바로 알아서 언제나 남을 사랑하고, 용서와 인내로 화합해야 한다.
『증일아함』18권「사의단품(四意斷品)」제6경에 보면, 부처님이 사위성 기원정사에 계실 때의 일을 말씀하고 있다. 어느 날 아난존자는 부처님의 늙은 육신을 보고 슬픈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거룩하신 몸도 과거와는 다르옵니다. 거룩하신 몸이 왜 이렇게 쪼글쪼글하나이까?” “네 말처럼 나의 몸은 이전과 다르구나. 왜냐하면 사람의 몸이란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니라. 나도 벌써 늙어 나이가 80세가 넘었구나.”
다음 날 부처님은 아난존자와 사위성으로 걸식을 나갔다가 파세나디 왕의 궁전 앞을 지나게 되었다. 궁전 앞에는 낡아서 부서진 수레가 여러 대 버려져 있었다. 아난다는 그 수레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저 수레도 옛날에는 매우 아름답더니 오늘 보니 부서진 기와 조각과 같나이다.” “그렇구나. 네 말처럼 저 수레들도 옛날에는 매우 아름다웠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낡고 부서져 다시는 쓸데가 없게 됐다. 물건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사람 몸이겠느냐. 비록 백 년을 산다 해도 이 몸은 무너져 죽음으로 돌아가느니라.”
그때 마침 수행자들에게 아침공양을 올리던 파세나디 왕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여래의 몸도 늙음과 병듦과 죽음이 있나이까?” “그렇다. 여래에게도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다. 여래도 사람일 뿐이다.”
부처님은 탁발을 마치고 기원정사로 돌아와 수행자들에게 말씀했다. “세상 사람들은 네 가지를 좋아한다. 젊음과 건강과 장수와 은애를 좋아한다. 또 네 가지를 싫어한다. 늙음과 병듦과 죽음과 은애가 모였다가 흩어지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나 누구도 좋아하는 것만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 사실을 깨닫고 거룩한 계율과 삼매와 지혜와 해탈의 도를 배우면 생로병사의 뿌리를 끊고 다시는 후생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들은 나지도 않고 늙지도 않고 병들지도 않으며 죽지도 않는 고요한 열반을 성취하도록 하여야 한다.”
인간은 낡고 부서진 수레처럼 누구든 생로병사 피할 수 없어 속절없이 지나가는 허무한 삶 후회 없는 인생으로 가꿔가야 남자들이 술자리에서 하는 농담 가운데 이런 말이 있다. 나이 50이 넘으면 배운 여자나 못 배운 여자나 똑같고, 60이 넘으면 화장한 여자나 안 한 여자나 똑같다. 70이 넘으면 남편 있는 여자나 없는 여자나 똑같고, 80이 넘으면 돈이 있는 여자나 없는 여자나 똑같다. 90이 넘으면 죽은 여자나 산 여자나 똑같다….”
이 농담은 은근하게 여성들의 미모나 성적 매력에 관한 것을 주제로 삼는 것이어서 점잖지는 않다. 농담의 대상을 여성에게만 적용하는 것도 객관적 진실에 부합하는 것이 아니다. 남성의 경우도 이 비유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농담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인생의 나이 듦과 삶의 허무’에 대한 것이다. 시간의 속도는 나이에 비례한다고 한다. 10대의 시간은 10km로 가지만 20대는 20km... 50대는 50km, 70대는 70km로 달린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