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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아버지 사도세자가 할아버지의 손에 목숨을 잃는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했고 청년이 된 후에도 홍인한, 정후겸 무리의 공격으로 인해 위태로운 세월을 보내야 했던 왕이다. 즉위한 후에는 영조 말년 권력을 쥐고 흔든 척신들을 단호히 숙청했으며, 벽파와 시파, 남인, 소론 간의 탕평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한편으로는 사도세자의 신원을 이루기 위해 자주 사도세자의 무덤이 있는 수원으로 행차를 갔고 그곳에 수원 화성을 지어 기거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정조는 각종 문제들로 인해 골치가 아픈 와중에도 누구보다 빛나는 자질을 보여주었다. 공부를 좋아하고 학문에 능했으며 항상 책과 붓을 가까이 했다. 정치적인 식견이나 인재를 보는 안목도 뛰어났다. 골방에 앉아 책만 읽는 선비인 것도 아니어서 태조 이성계의 모습을 엿볼 수 있을 만큼 무예에 능했다. 신하들과 활쏘기를 하러 나갔을 때 일부러 모두 명중시키지 않기 위해 1발은 남기고 50발 중 49발을 명중시켰다는 일화가 있다. 검소하고 성실한 자세를 보였으며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까지 가지고 있었다.
이런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던 정조는 여러 병폐를 앓고 곪아 가는 조선을 되살리겠다고 굳게 마음을 먹었다. 그는 사대부들이 당색에 찌들고 패관문체구전 설화나 소설 문체에 물들어 있는 것을 심각한 문제라고 여겼다. 그래서 사대부 정치를 복원하기 위해 학문 연구 기관인 규장각을 설립했고, 당하관들을 대상으로 시험을 보고 성적이 뛰어나면 상을 내리는 초계문신제를 실시하였다.
패관문체를 쓴 신하들을 질책하기도 했다.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도 이 때문에 반성문을 요구받았지만 오히려 반성문을 잘 써서 칭찬을 들었다)
유학에 한해 경학을 중요시하는 보수적인 학문관을 가지고 있던 그였지만, 백성들을 위한 정책에 대해서는 개혁적인 입장을 보였다.
대표적인 개혁 정책으로는
① 신해통공을 실시해 시전 상인들의 금난전권을 폐지한다.
② 서얼들에 대한 차별을 금지한 것
③ 궁궐에 소속된 공노비들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도망간 노비를 쫓는 관리인 추쇄관을 없앤 것
④ 왕실 재정을 관리하는 내수사에서 백성들에게 함부로 요구를 할 수 없게 한 것 등이 있다.
정조는 개혁 정책을 편 것도 있지만 관리들이 백성을 수탈하는 일이 없도록 엄정하게 관리한 부분이 높게 평가받는다. 궁녀나 내관, 후궁의 기강을 단속했고 수령들에 대해서도 부정을 저지르지 못하게 했다. 자주, 그리고 자세한 매뉴얼을 동반해 암행어사를 내려 보냈으며 비리를 저지른 것이 확인된 수령을 강력하게 처벌하였다. 또 흉년과 역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구휼하는 데에도 세세하게 신경을 썼다.
홍역이 돌아 아들 문효세자가 죽었으나 슬픔을 이겨내고 백성들을 구휼하는 것을 가장 최우선할 정도였다. 이렇듯 엄정한 단속과 선정 덕분에 정조 시대의 백성들은 적어도 그 이후보다는 편안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이외에도 《경국대전》이나 《속대전》 등의 법전을 종합한 통일 법전인 《대전통편》, 역대 군왕들의 치적을 기록한 역사서 《국조보감》, 조선의 외교 문서들을 모아 책으로 펴낸 《동문휘고》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책을 편찬하게 했다.
개인적으로도 주자에 관한 책을 여럿 남기거나 매일 빠짐없이 쓴 일기를 모아 《일성록》을 펴내었는데, 《일성록》은 조선 왕들의 전통이 되어 순종 시절까지 이어진다.
이처럼 정조는 많은 치적을 남긴 임금이었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그가 추진했던 정책들이 대부분 폐단을 전면적으로 개혁하는 것보다는 더 커지지 않도록 단속하는 것에 가까웠다는 점이다. 당시 백성들에게 가장 큰 고통이었던 환곡이나 사대부들에게 가장 큰 문제였던 한양 출신의 벼슬 독점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해결을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세종 이후 조선 군왕들 중 가장 뛰어난 자세와 자질을 보여준 임금은 정조였다. 아래 글은 신하들이 정조를 기억하며 그의 묘비문을 장식한 글이다.
왕은 성인이셨다.
사도(斯道, 유교에서의 도덕)의 정체를 밝혀내고 사도가 지향해야 할 바를 주장하셨다.
왕께서 하신 일은 복희, 신농, 문왕, 무왕께서 하신 일이며 왕께서 하신 말씀은 공자, 맹자, 정자, 주자께서 하신 말씀이셨다.
앞으로 천세 후에 옛것을 논하는 자가 있다면, 아마 이를 《시경》의 악장에 실어
연주하게 하고 한 사람이 창을 하면 세 사람이 감탄하리라.
여기에는 남들의 귀와 눈에 배어 있던 천덕과 왕도만을 추려서
굉장한 유자이자 현철한 임금이셨던 왕의 법도를 이 정도로 소개했을 뿐이다.
🎎재미있는 세계사에 재미있는 정조이야기
정조가 유례 없는 성군이자 군자였던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정조는 상당히 인간적인 모습도 함께 보여준 임금이었다. 특히 언행 부분에서는. 오늘과 다음 시간에는 정조의 인간적인 모습들에 대해 알아보도록 합니다.
몇 년 전 정조 어찰첩이라고 하는 귀중한 사료가 발견되었다. 정조가 벽파의 영수이자 영의정인 심환지에게 1796년부터 1800년까지 정기적으로 보낸 300여 통의 비밀 편지였다. 본래 왕이 보낸 편지는 읽은 즉시 그 자리에서 태워버리는 것이 법도였지만, 심환지는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릴 경우를 대비했는지 하나하나 간직하고 있었다. 그 덕에 우리가 흥미로운 사실들을 많이 알게 되었으니 어떻게 보면 좋은 일을 한 셈이다.
편지의 내용은 대부분 심환지에게 현재 돌아가는 정치 상황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막후 정치에 능했던 정조답게 심환지에게 이러이러한 상황을 연기하라고 지시해서 자신의 뜻대로 조정의 흐름을 끌고 나가려고 한 대목도 보인다. 정조는 심환지를 한 세력의 영수로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생각하였고, 개인적으로도 신하들을 사로잡는 위엄을 갖고 있다고 칭찬하거나 그를 생각하는 마음이 각별하다는 등 신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기존에 정조와 노론 벽파를 그저 정적 관계로만 설명했던 노론 음모론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다. 정조는 벽파 세력을 함께 정국을 끌고 나갈 파트너로서 대우했다. 나중에는 아예 '우리 벽패'라고 언급하면서 그 자신이 벽파와 상당히 가까워진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노론에서 정조를 독살해서 갑작스러운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정조 독살설도 이 편지를 통해 논파되었다. 왕은 몇 년이 흐르는 기간 동안 심환지에게 점점 심해지는 자신의 병세를 한탄했다. 이 병세의 진행 과정이 상당히 복잡하고 현대 의학으로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에 정조가 과로와 스트레스로 병이 심해져서 사망했다는 설명이 설득력을 얻었다.
무엇보다도 흥미로운 점은 부드러운 유학 군주로 여겨졌던 정조가 사실 매우 화끈한 성격과 뛰어난 언변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한자로 편지를 쓰던 중간에 '뒤쥭박쥭(뒤죽박죽)'이라고 한글로 어휘를 쓰기도 했고, '주둥아리를 놀리다', '눈코 뜰새 없다' 등의 속담도 자주 인용했다.
'가가可可'를 사용해서 웃음소리 '껄껄'을 나타내는 의성어를 표현하기도 했다! 문체 반정을 주장하며 패관문체를 없앨 것을 명한 것과는 이질적인 모습이다.
또한 현대 기준으로도 창의적이고 심한 욕설도 구사했다. 정조가 사용한 대표적인 어휘 몇 가지를 알아봅니다.
"갈수록 입조심을 안 하는 생각 없는 늙은이"
"떡이나 주워먹고 입 다무시오"
- 심환지 본인에게
"호로 자식"
- 서영보에게
"사람 꼴을 갖추지 못하고 졸렬한"
- 김의순에게
"이놈들이 어떤 놈들이기에 그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리느냐"
- 황인기와 김이수에게
"입에서 젖비린내 나고 사람 같지도 않는 놈"
"경박하고 어지러워 동서도 분간 못하는 놈"
- 김매순에게
🔊정조의 인간적인 면이 돋보이든 내용들
* 매정한 면이 있었으나 한번 마음 줄때는 확실히 줌.
* 좋아하는 후궁들 옆에 있는 전각에 살았음.(사랑꾼?)
ex) 의빈성씨 - 창덕궁 연화당이 처소인데 그 주변에서 정조가 일하거나 잠잤음
수빈박씨 - 창경궁 집복헌. 당시 정조의 처소는 주변에 있는 영춘헌. 정조는 영춘헌에서 승하했음.
👍바른 말 하는 사람 좋아함. 말 바꾸는 사람은 극혐함
👍의외로 기분파임. 속에 있는 말을 내뱉는 경우도 있음
물론 그래놓고 다음날 되면 후회함.
👍자기 자랑 쩔음. 물론 본인도 그럴 능력이 충분이 있긴하지만...
👍개혁적인 인물이긴 하나 우리가 생각하는 개혁과는 다른 의미의 개혁적인 인물이였음.
👍청나라 안 좋아함. 오히려 청나라보다 조선이 낫다고 생각함
👍처음엔 사람 잘 안믿음. 사람 막 떠보다가 마음에 드는 면이 있으면 속에 있는 말 다 함.
👍의외로 굉장히 외롭고 여린 사람임.
👍그런데 무서운 면도 있음. 속에 능구렁이 몇 마리 있는 사람임.
👍자식들 자랑도 함. 자식바보임 아들 똑똑하다고 신하들 앞에서 자랑하지만 나만큼은 아니다 라고 함 ㅎㅎㅎ 이와중에 자기자랑함.
👍자기한테 불리하면 모른척 함.
👍 정조에게 정약용은 자신의 아끼는 사람들중에 한사람이였음.
우리가 생각하는 것 만큼 정조의 온리원은 아님.
👍딸바보임. 딸 좋아하는 영조 손자답게 딸내미 좋아함.
영조와는 다르게 아들도 사랑함.
👍살아생전에 자식들한테 작호 하나 내려 본적 없음.
(작호는 왕의 자식들 및 종친에게 내려준 군호 같은 거임.
xx옹주, xx공주, xx대군, xx군 등)
👍사람들이 생각하는 독살설과 거리가 멈. 실제로 죽기 7년전부터 건강이 안 좋았음.
👍정조는 할머니인 영빈이씨(사도세자 생모, 후궁)를 원망했음. 아버지를 죽인 영조보다도 더 원망함.
👍사도세자 묘 옮길때 영조가 쓴 사도세자 제문(맞는지 정확하지는 않음)을 다 놔두고 옮김. 그 제문들이 실상은 사도세자를 꾸짖는 내용임.
👍실은 정조는 '사도'라는 말을 별로 안좋아함... 사도는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요절하다'의 의미였기 때문.
그래서 정조는 '장헌'으로 바꿈.
그러나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사도로 기억하고 있음... 정조 또르르...
👍정조와 외가의 관계는 생각보다 좋았음.
외삼촌한테 그림도 그려서 보내줌...
외가랑 친목회도 만들었을 정도. but, 외가에 쌓인 오해는 안풀어줌. 엄마인 혜경궁 홍씨가 서운해 함.
👍여동생들이랑 사이 좋았음 여동생한테도 보고 싶다고 편지씀.
👍혜경궁 홍씨와는 그저 평범한 모자 이상의 관계를 보여줌. 서로서로를 많이 의지함 ㅇㅇ
👍의외로 사도세자는 그리 좋은 아버지는 아니였음. 병이 심해서 아들인 정조와 교류가 많이 없었음
👍할머니인 정순왕후와는 정치적동반자이자 정적이였음.
사이가 나쁘지 않음.
--지식백과에서정리한글과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