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중, 고등학교 국사 시간에 공주 석장리, 연천 전곡리, 웅기 굴포리``` 줄줄 외우며 구석기 유적지 공부를 하던 생각이 난다. 그때 고대 유적은 마치 ‘유서 깊은’ 몇몇 지역에서만 나타나는 축복 받은 지역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다.
1990년대 이후 상황이 좀 달라졌다. 구석기 유물 출토가 전국적인 현상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지역에서도 대구는 물론 칠곡, 상주, 밀양, 경주 등지에서 구석기 유적이 보고되었다. 호남, 충청, 강원은 물론 제주도에서 출토된 고대 유물도 그 지역의 역사를 수만~수십만 년씩 끌어올렸다.
이젠 각 지역에서 단순히 구석기 시대의 존재 여부를 논하는 차원에서 전기, 중기, 후기의 세분화나 유적의 특징, 국내외 전파 경로를 조사하는 차원으로 지평이 확대되고 있다.
대구로 범위를 좁혀 보자.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대구에서 고대사는 청동기시대로 한정되었다. 그러나 1998년 서변동, 상동에서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되면서 대구는 역사의 상한을 5천 년이나 끌어올릴 수 있었다. 당시 지역 학계에서는 이 발굴을 기념하여 ‘대구 5천 년전(展)’ 등 대규모 기념행사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런 축제의 여흥이 채 가시기도 전인 2006년 대구 월성동에서 구석기 유적이 발견되었다. 지역 학계는 들떴다. 대구의 역사를 수만 년 소급시킬 획기적인 발굴이었기 때문이다.
타 유적에 비해 구석기 유물은 성격이 좀 다르다. 지역의 역사를 최고 상한점까지 끌어올릴 고고학적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학문적 성과는 지역민의 긍지와도 연결된다. 지역이 문화의 태동지요, 역사의 출발지라는 자부심은 대단한 것이다. 일본의 지방자치단체들이 지방의 고고학적 유적지를 복원하여 지역민의 자긍으로 삼는 것도 같은 이유다. 아예 지자체 이름에 ‘구석기 도시’라는 별칭을 달아 자치단체를 홍보하고 있는 곳도 있다. 연천군이 대표적이다.
경북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한 월성동 구석기 유적은 약 1만~2만여년 전 유적으로 후기 구석기에 해당하며 연원(淵源)은 짧은 편이다. 그러나 그 유물의 성격이나 해석으로 넘어가면 얘기는 달라진다.
월성동 유적에서 주목받는 유물은 흑요석과 좀돌날이다. 364점이 발견된 흑요석은 특히 주목을 끌었다. 남한에서 발견된 흑요석은 대부분 백두산이나 일본 큐슈 지방에서 전래된 것이 주류를 이룬다. 이 사실은 구석기시대 때 이미 한반도에 백두산이나 일본 규슈를 연결하는 교통망이 존재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기 때문에 발굴의 의미가 크다. 그런데 대구에서 출토된 흑요석은 성분상 백두산도 규슈도 아닌 제3의 성분임이 밝혀져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좀돌날도 재미있다. 좀돌날 역시 후기 구석기를 대표하는 유물로 유라시아 지역에 근원을 두고 있다. 북방 대륙에서 꽃핀 구석기 문화가 대구에 그 흔적을 남겼다는 것은 여간 흥미로운 게 아니다. 구석기시대 때 러시아-시베리아-몽골-한반도를 연결하는 문화벨트가 형성되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대구에 신석기 문화의 존재를 처음 알린 서변동 빗살무늬토기도 흥미롭다. 한국의 신석기 문화는 대체로 유라시아, 바이칼, 연해주 지방에 근원을 두고 있다. 즐문토기는 시베리아를 거쳐 한반도 북동해안으로 유입된 후 남해, 서해, 남부 지방으로 연결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즐문토기의 전파 과정을 들여다보면서 대구가 남한 신석기 문화의 허브로 작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북방에서 전래된 토기 문화를 한반도 남부와 일본 열도로 전파하는 터미널로로 작용했던 것이다.
국내 최초로 온전한 상태의 전신(全身) 인골이 출토된 달성군 예현리, 평촌리 유적도 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당시 20호분에서 발굴된 인골은 청동기시대 지역 선조들의 유전적, 해부학적 계통을 연구하는 데 직접적인 자료로 평가되었다. 출토 인골이 대부분 건장한 남성으로 밝혀져 당시 전사(戰士)형 남성이 지배층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학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유네스코급 유물인 고인돌이 대구에서 훼손, 많은 시민들이 안타까워하는 내용도 다뤘다. 근대에 대구 사서(史書)들을 보면 대구경북에 5천여 점, 대구에만 3천여 기의 고인돌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대구 수성들에 대오(隊伍)를 지어 늘어서 있던 수백 기의 거석(巨石)들은 일제의 식민통치 과정에서 훼손돼 버렸다. 남아 있던 유적들도 산업화, 주택건설 과정에서 포클레인의 삽날에 들려나가 버렸다. 프랑스의 카르낙 열석(列石)과 비교되던 대구의 고인돌은 지금 겨우 100여 기만 남아 그 흔적만 더듬을 수 있을 뿐이다.
한국 고고학 최초 출토 사례인 동천동 우물 유적도 독자들이 많은 관심을 보인 기사였다. 청동기인들의 치수(治水) 흔적을 보여주는 유적으로 자연수를 그대로 먹던 신석기시대와 확연한 차이를 입증한 유적이었다. 우물은 인류가 처음으로 시도한 수리(水利)시설이었고 그 실체가 지역에서 밝혀졌다는 점에서 동천동 우물 유적은 큰 의의를 지닌다.
달성 37호분에서 출토된 ‘출자’(出字)형 금동관을 다룬 연재도 학계의 관심사였다. 고고학계에서는 지역 수장(首長)의 왕관설과 신라 왕실의 하사품설이 대립하고 있었다. 고분 축조 시기가 4, 5세기였고, 그 당시 달구벌 세력이 이미 신라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는 점에서 경주 왕실의 선물이었다는 의견으로 모아지지만, 그 시기나 성격에 대해 아직도 이견(異見)이 있는 게 사실이다. (금동관이 ‘하사’되었다는 그 시점에도 달구벌 세력의 정치적 파워가 경주 세력에 밀리지 않았다는 학설도 있다.)
대구에서 출토된 국보급 유물인 ‘안테나식동검’에 대해서도 다뤄 보았다. 이 동검은 스키토 시베리아에 기원을 둔 북방 문화가 어떻게 한반도에 전래되었는지, 그 경로를 파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길이 32.2cm, 너비 3cm, 칼자루 12.5cm인 조그만 동검엔 유라시아의 청동기 코드가 모두 녹아 있기 때문이다. 이 검 양식이 대구에서 3점이나 출토돼 초기 철기시대 때 대구엔 유라시아를 넘나드는 국제 교류망이 형성되었음이 입증됐다.
머리 성형의 일종인 편두(褊頭)를 본지에서 처음 기사화해 많은 주목을 받았다. 머리를 돌이나 나무로 눌러 납작하게 만드는 이 의식은 성형이나 의술이라기보다는 공동체적 관습에서 비롯됐다는 게 정설이다. 김해 예안리 고분에서 처음으로 출토가 보고돼 학계의 주목을 받다가 대구 성산리 고분에서도 그 사례가 확인되자 삼국시대 미용, 성형, 공동체적 관습을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 밖에 방제경(倣製鏡)이나 만촌동의 광형동과(廣形銅戈)처럼 동북아를 넘나들며 고대사에서 논란의 중심에 있는 유물들도 다뤘다. 청동기시대 남한에서 제작된 청동기 양식과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이 유물들은 일본 열도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학계에서는 추측하고 있다.
일본의 사학계에서는 일본의 청동기 문화가 한반도로 역수출되었다는 이론의 근거로 위의 두 유물을 증거로 제시한다. 여기엔 식민사관, 국수주의 사관 등 다양한 시각이 개입돼 사실(史實)보다 본질이 흐려진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역수출’ 이론 자체가 엉성한데다 설사 맞다 해도 일본 고대 문화의 근원이 한반도라는 사실엔 한 치의 흔들림도 없기 때문이다.
대구의 수만 년 고대사를 27회 분량으로 다루기에는 지면이 제약됐고 무엇보다 저자의 역량과 식견이 이에 미치지 못했다. 이번 연재를 위해 나름대로 준비를 해왔지만 대구의 고대사 전반을 아우르기에는 본인의 역사 지식이 보잘것 없었다.
오자(誤字), 탈자 지적 항의 전화는 수없이 받았고 가장 기초적인 고고학 상식도 갖추지 못했다는 호된 꾸지람도 들었다. 그럼에도 이번 기회를 통해 대구 고대사를 간략하게나마 일별(一別)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음을 큰 보람으로 생각한다.
이번 연재를 무사히 마친 배경에는 음양으로 많은 가르침을 주신 분들의 도움이 있었다. 시리즈 전반을 다듬고 조율하는 데는 이청규 영남대 문화인류학 교수, 박승규 영남문화재연구원장, 함순섭 국립대구박물관장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이분들의 조언과 도움이 없었다면 시리즈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발굴 자료, 사진 파일은 대부분 영남문화재연구원과 경북문화재연구원, 국립대구박물관에서 제공받았다. 박재홍 경북문화재연구원장님은 연구원의 모든 사진 파일과 발굴 보고서를 열람할 수 있도록 협조해 주었다.
잦은 전화에도 싫은 내색 없이 자문에 응해 주신 김세기 대구한의대 교수, 윤용진 전 경북대 교수님께도 감사드린다. 보잘것없는 기획물이 수상 후보에 오르고 이렇게 단행본으로 출판에까지 이르게 된 것은 본사 이상훈 편집국장님의 지도와 가르침 덕분이다. 전 연재물을 빠짐없이 모니터하며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다.
무엇보다 6개월간 주말마다 현장으로 뛰어다니는 가장의 빈자리를 말없이 이해해 준 아내, 아빠의 부재를 감수해 준 딸 지원(智媛)이와 연재 종결의 아쉬움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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