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도 총인구 통계, 삶은 유한하지만 앎은 끝이 없다, 동호지필 외
한국교육자선교회 김형태 이사장님이 나누신 글입니다.^^
■ 최근 발표한 통계네요♡천천히 보시면♡남은 인생관리에♡도움이 될 듯 합니다🤲
🍒2019년도 총인구 통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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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100세 시대"라고 하니 "100살까지 살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그러나, 아래 자료를 보면 80세까지 사는 것도 대단한 행운이요, 축복인 것 같습니다.
(1)우리나라 총인구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2019년 6월말 기준 인구는 대한민국 총 51,801,449명입니다.
🧒♂️남자 : 25,861,116 명
👧♀️여자 : 25,940,333 명
🏠세대수 : 21,825,601
(2) 도시와 도의 인구 :
•서울~9,814,049 명
•부산~3,455,611 명
•인천~2,953,883 명
•대구~2,469,617 명
•대전~1,494,878 명
•광주~1,460,745 명
•울산~1,159,594 명
•세종~ 330,332 명
•경기~12,975,176 명
•경남~ 3,377,483 명
•경북~ 2,681,090 명
•충남~ 2,122,220 명
•전남~ 1,887,991 명
•전북~ 1,844,639 명
•충북~ 1,595,772 명
•강원~ 1,544,843 명
•제주~ 663,526 명
(3) 연령별 인구 :
•71세 277,387명
•72세 240,644명
•73세 239,246명
•74세 202,376명
•75세 182,172명
•76세 171,489명
•77세 153,481명
•78세 133,408명
•79세 126,300명
•80세 102,370명
•81세 97,963명
•82세 91,308명
•83세 75,676명
•84세 65,002명
•85세 52,099명
•86세 36,728명
•87세 31,684명
•88세 26,992명
•89세 24,019명
•90세 16,019명
•91세 12,396명
•92세 9,969명
•93세 7,273명
•94세 5,117명
•95세 3,975명
•96세 2,602명
•97세 1,773명
•98세 1,071명
•99세 648명
(4) 연령별 생존확률 :
•70세 생존확률 86%
•75세 생존확률 54%
•80세 생존확률 30%
•85세 생존확률 15%
•90세 생존확률 5%
🔞즉 90세가 되면 100명 중, 95명은 저 세상으로 가시고, 5명만 생존한다는 통계이고
🔞통계적으로 80세가 되면 100명 중, 70명은 저세상으로 가시고, 30명만 생존한다는
결론입니다.
🎯확률적으로 건강하게 살수 있는 평균 나이는 76세~78세입니다.
🔊모쪼록 동창 또는 친구분들 만나시면 기쁨과 친절 가득히...
배려속에 웃음으로 대화 나누시고 좋은 우정을 만들어 가시길 바랍니다.
😅이세상 사는날까지 늘 건강하게 즐겁고 행복한 삶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통계청/국민연금공단/ 건강보험공단 공동조사]
■ 내가 죽는 날■
내가 죽는 날은 비가 와도 좋다
그것은 나의 죽음을 상징하는 슬픔의 눈물이 아니라
예수의 보혈로 내 죄 씻음을 받는 감격의 눈물이기 까닭에.
내가 죽는 날은 바람이 불어도 좋다
그것은 내 모든 이 세상의 시름을 없이하고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내 길을 준비함이기 때문에.
내가 죽는 날은 눈이 부시도록 햇빛이 비치어도 좋다
그것은 영광의 주님 품안에 안긴
그 얼굴의 광채를 보여줌이라.
내가 죽는 시간은 밤이 되어도 좋다.
캄캄한 하늘이 내 죽음이라면
저기 빛나는 별의 광채는 새 하늘에 옮겨진 내 눈동자이어라
오 ! 내가 죽는 날
나를 완전히 주님의 것으로 부르시는 날
나는 이 날이 오기를 기다리노라.
다만 주님의 뜻이라면 이 순간에라도 닥쳐오기를
번개와 같이 닥쳐와 번개와 함께 사라지기를.
그 다음은 내게 묻지 말아다오
내가 옮겨진 그 나라에서만 내 소식을 알 수 있을 터이니.
내 얼굴을 볼 수 있을 터이니.
(김 정준 목사)
● 이런 정도의 사생관을 가지려면 정말 확실한 구원과 내세의 소망을 가져야 한다.
이 세상에 있으나 저 세상(천국)에 있으나 똑같다 주님 품안에 있기는 마찬가지니까.
시험에 자신이 있는 자는 시험 치는 날을 기다린다.
시험을 치뤄야 상장과 장학금을 받을 수 있으니까.
빌리 그래함 목사가 100세에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몇 주전 친구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여보게 조만간 내가 죽었다는 부고를 받을텐데 전혀 믿지를 말게. 난 단지 주소지를 하늘로 옮기는 것 뿐이니까."
여러분도 이렇게 되기를 바랍니다.그러나 한번쯤 짚어 봅시다.내 부고를 듣고 나서 어떤 느낌을 갖게 될까?
* 참 아쉽다. 좋은 사람이었는데....
*아, 드디어 그 악종이 사라졌구나!
* 날마다 죽는게 사람인데 그가 누군지 어떻게 알아.또 안들 뭐하겠어!
■삶은 유한하지만 앎은 끝이 없다/ 장 자■
제후들의 정치가 각기 다르고 백가의 주장들이 서로 달라 인식의 기준이 될 수 없다. 인식에도 주관과 객관이 모순되는 한계가 있다.
이에 대해 장자는 "우리의 삶에는 끝이 있지만 앎에는 끝이 없다. 끝이 있는 것으로써 끝이 없는 것을 좇으면 위태로울 뿐이다"라고 말했다.
하늘의 푸른색이 과연 본래의 색인가?
한 개체의 생명은 유한하므로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볼때 하나의 물방울에 불과하다.
그래서 문제를 상대적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장자의 비유를 들어보자.
"식견이 얕은 자의 지식은 식견이 깊고 풍부한 자의 지식을 이해하지 못한다.
짧게 사는 존재는 오래 사는 존재를 이해하지 못한다.
아침에 생겨나 저녁에 죽는 버섯은 한 달에 그믐과 초하루가 있는걸 모른다. 아침에 태어나 저녁 때 죽는 쌍쌍매미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알 수 없다. 수명이 짧기에 알지 못하는 것이다.
초나라 남쪽에 있는 명령수는 천 년을 한 살로 삼는다. 먼 옛날에 살았던 대춘수는 1만 6천년이 한 살이었다.
팽조는 겨우 8백년을 살고는 장수한 사람으로 유명해져서 사람들이 앞다투어 그를 닮으려고 한다.
그러나 팽조도 명령수나 대춘수와 비교하면 단명한 사람에 속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팽조와 같아지려고 하니 이 또한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짧게 산 사람은 오래 산 사람을 알 수 없으며, 살아있는 것들은 죽음 뒤의 일을 알지 못한다.
살아 있을 때 죽은 뒤를 생각한다면 함부로 살지 못할것이다.
현직에 있는 자들은 퇴임 후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권불십년, 화무십일홍' 이기 때문이다.
항상 '문패' 보다 '비석'이 중요하다. '문패'(명패)는 자기 손으로 만들어 붙이지만 '비석'은 남들이 만들어 세우기 때문이다.
먼 훗날 역사와 후손들이 지금 나와 내 팀들이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고 처신했는지 기억하고 평가할 때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도록 하자.
아무리 속이려해도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알고, 상대가 알고 있지 않는가?
"소수의 사람들을 오랫동안 속일 수 있고, 다수의 사람들을 얼마동안 속일 수 있다. 그러나 다수의 사람들을 오랫동안 속일 수는 없다." (에이브러햄 링 컨)
집권자들이 항상 각골명심 해야 할 금과옥조이다.
■ 75세 노인이 쓴 산상수훈 ■
내 굼뜬 발걸음과 떨리는 손을 이해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그가 하는 말을 알아듣기 위해 오늘 내 귀가 얼마나 긴장해야 하는가를 이해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내 눈이 흐릿하고 무엇을 물어도 대답이 느리다는 걸 이해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오늘 내가 물컵을 엎질렀을 때 그것을 별 일 아닌 걸로 여겨 준 자에게 복이 있나니.
기분 좋은 얼굴로 찾아와 잠시나마 잡담을 나눠 준 자에게 복이 있나니,
나더러 그 얘긴 오늘만도 두 번이나 하는 것이라고 핀잔주지 않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내가 사랑 받고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게 해주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내가 찾아갈 기력이 없을 때 내 집을 방문해 준 의사에게 복이 있나니.
사랑으로 내 황혼녘의 인생을 채워 주는 모든 이에게 복이 있나니,
내가 아직 살아 있을 수 있도록 나를 보살펴 주는 내 가족들 모두에게 복이 있나니,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라.
하늘나라가 바로 그들의 것이라.
(마태복음 5: 3 ~ 10)
(그랙 맥도럴드 지음)
● 우리들의 형편과 입장에 따라 각자 자기 나름의 '산상수훈'을 만들어 봅시다.
■동호지필 /춘추좌씨전■
춘추 시대 진나라에서 있었던 일이다. 대신인 '조 천'이 무도한 왕 '영공'을 시해했다.
당시 재상격인 정경 '조 순'은 영공이 시해되기 며칠 전에 그의 학정을 피해 망명길에 올랐으나 국경을 넘어가기 직전에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도성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사관(역사 기록 담당자)인 동호가 국가 공식 기록에 이렇게 적었다.
"조 순, 그 군주를 시해하다"
조 순이 이 기록을 보고 항의하자 동호는 이렇게 답했다.
"물론 대감이 직접 시해자는 아닙니다. 그러나 당시 대감은 국내에 있었고, 도성으로 돌아와서도 범인을 처벌하거나 처벌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대감은 공식적으로 공범 시해자가 되는 것입니다 "
조 순은 그것이 도리라고 생각하여 그대로 죄목을 뒤집어쓰고 말았다.
훗날 공자가 그 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동호는 훌륭한 사관이었다. 법을 지켜 올곧게 직필하였다.
그런데 조 순도 훌륭한 대신이었다. 직접 왕을 시해하지 않았지만 당시 책임있는 자리에 있었기에 법을 바로 세우기 위해 오명을 감수한 것이다.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은 그당시 그가 국경을 넘어 외국에 있었더라면 그 책임을 면했을 것인데 말이다."
죄에는 두가지가 있다.
응당 해서는 안되는 일을 저지르는 자범죄가 있고, 응당 해야할 일을 하지 않는 무위죄가 있다.
구약성경의 울법에는 '행하라'는 권법과 '행하지 말라'는 금법이 있다. 세상사가 잘못 가고 있을 때 아무일도 하지 않고 방관하거나 외면하거나 침묵하고 있는 죄도 큰 범죄이다. 특히 내막을 알고 있는 자들의 침묵과 눈감아줌은 그 자체로 공범인 것이다.
"불의가 법이 될 때 국민 저항은 의무가 된다" (아인쉬타인)
"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 이웃들이 숙청당해도 침묵만 지키고 있었더니 마침내 그들이 나를 잡으러 왔을 때는 도와줄 사람이 하나도 없더라"는 마르틴 니묄러의 시가 생각난다
오늘 '너'의 문제가 내일엔 '내' 문제일 수 있고 그것은 곧 '우리'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모든 섬들이 바다 밑으로 대륙과 연결돼 있듯이 우리들도 보이지 않는 끈으로 서로 연결돼 있는 것이다. 네가 죽으면 나의 일부(같은 인류로서)가 죽은 것이다. 우리는 다 한 공동체의 구성원이기에 내 이웃들이 다 불행한데 나 혼자만 행복할 수는 없는 일이다.
가장 연약한 네이웃에게 한 것이 곧 하나님께 한 것이요, 그들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하나님께 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 윤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