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vBASryoiD44?si=fBKsV9LB0aJFBfDX
Puccini - La Bohème - Sono andati? - Licia Albanese, Jan Peerce - Toscanini (1946)
페데리꼬 가르시아 로르까 <세 강의 발라드>
과달끼빌은 흐르네
오렌지와 올리브 나무 사이로,
그라나다의 두 강은
눈덮인 산에서 보리밭으로 흘러 내려오네.
아아, 사랑은
가고 돌아오지 않네!
과달끼빌은
흑색의 수염을 가졌네.
그라나다의 두 江
하나는 눈물, 하나는 피라네.
아아, 사랑은
허공으로 사라져버렸다.
돛잔배를 위하여
세빌리야가 길을 터주고
그라나다의 물줄기는는
외로운 한숨의 노만 젓네.
아아, 사랑은
가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네!
오렌지 밭의 높은 탑과
바람은 과달끼빌 강.
다우로와 헤닐은
저수지 위에서 죽은 작은 탑이라는데,
아아, 사랑은
허공으로 사라져버렸다
하류가 지질한 절규의 불을
지니고 있음을 그 누가 말할까!
아아, 사랑은
가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네!
안달루시아는 올리브꽃
레몬꽃을 바다로 나르네.
아아, 사랑은
허공으로 모습을 감춰버렸네.
페데리꼬 가르시아 로르까 <세 강의 발라드>
내가 시를 잘 못 쓴 건 이들이 내 시를 도둑질해갔기 때문이다. 소월의 '진달래꽃' '산유화'
청마의 '깃발' 미당의 '국화 옆에서' 조지훈, 박목월을 비롯해 김영랑, 박용철, 정지용 그리고
김춘수의 '꽃' 김수영의 '달나라의 장난' 전영경의 '여기 쓰레기를 버리지 마시오' 등이다.
이 말은 서어서문과 교수인 민용태가 중남미 작가들의 작품에 있는 시들처럼 쓰고 싶었는데
우리 시인들의 시가 로르까를 비롯한 여러 중남미시인들의 시와 비스무리해 자신이 쓸 내용을
이들이 다 사용했다는 넋두리다. 그만큼 중남미와 우리정서가 같다고 봐야겠다.
어쨌거나 짧은 생애지만 20세기 유일한 음유시인으로 대중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토스카니니의 생애
1886년 6월 30일 이탈리아 로시 오페라단과 그 오케스트라가 브라질의 리오 데 자네이로에서 ‘아이다’를 공연했다. 막이 오르기 직전에 지휘자와 악단사이에 언쟁이 일어났고, 화가 난 지휘자는 오케스트라를 떠나 버렸다. 할 수 없이 부지휘자가 대신해보려 했으나 관중들의 야유 속에 물러나야했다. 어쩔 줄 몰라하는 흥행주에게 몇몇 단원이 말했다. “혹시 가능하다면 우리 젊은 첼리스트에게 지휘를 맡겨 보는게 어떨까요? 저 사람은 악보란 악보는 죄다 외우고 있거든요.”
스물 한 살의 젊은 첼리스트가 졸지에 지휘대에 서게 되었다. 관중들은 이번에도 야유나 퍼부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다시 객석에 앉았다. 그런데 이 왜소한 첼리스트는 보면대에 놓인 악보를 걷어 버리고서 거침없이 지휘를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관중들은 넋을 잃었고, 결국 1막이 끝나자 기립박수가 터져 나왔다. 거장 중의 거장,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흔히들 토스카니니는 동시대를 살았던 지휘자 푸르트뱅글러와 비교되곤 한다. 푸르트뱅글러가 유명한 고고학자를 아버지로, 화가를 어머니로 둔 것에 비해 토스카니니는 가난한, 그러면서도 바람둥이인 재봉사의 아들로 태어나 먹는 것조차도 곤란을 받던 사람이었다. 어릴 적에 어머니의 키스 한 번 제대로 받아 본 적이 없다고 그는 회고했다. 푸르트뱅글러가 어려서부터 가정교사를 통해 고도의 치밀한 교육을 받았고 그리스, 이탈리아 등지를 여행하면서 견문을 넓힌 지적 교양인이었던 데 비해, 토스카니니는 전적으로 공적인 교육에 의존했으며 일개 첼리스트가 되는 것이 꿈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혼자서 이루어가야 했다.
여기에다 독일인과 이탈리아인이라는 기질 상의 차이도 더해진다. 푸르트뱅글러의 음악이 시대의 고뇌를 한 몸에 짊어진 듯 깊고 화성적인 음악 만들기에 열중한 것이라면, 토스카니니는 마음먹은 대로 행동하면서도 거대한 스케일을 창조해냈다. 그는 거짓말이라곤 못하는 성격이었고, 도덕적 의식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가 반 파시스트주의자였고, 반 나치주의자가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언젠가 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일생동안 민주주의자였다. 그러나 음악에 있어서는 독재자였다.” 무솔리니 정권이 그에게 당가인 ‘조바네차’를 연주하라고 했을 때, 그는 “이 따위 노래는 음악이라 할 수 없어.”라면서 의연히 거부했다. 나치가 유태인을 박해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요컨대 그는 전형적인 이탈리아 열혈한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80의 나이에도 계단을 두 칸씩 밟고 올라가지 않으면 안되는 성미였으며, 3~4시간 밖에 잠을 자지 않았으며, 한 번도 큰 병에 걸린 적이 없었으며, 정히 아팠을 때는 혼자 몰래 치료를 받았으며, 죽을 때까지 무언가에 몰입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런 인간이었음을 증언한다.
그 역시도 자기 성격의 단점을 알고 있었다. 80세의 토스카니니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노인이다. 그런데 어째서 하나님은 17세 소년의 피로 나를 괴롭히는 것일까?”
브라질에서 느닷없이 지휘자로 데뷔한 후 이탈리아로 돌아온 젊은 토스카니니는 그해 토리노에서 카탈라니의 오페라로 지휘자의 길을 시작, 맹렬히 질주했다. 1898년 토리노에서 가진 43번의 연주회를 전부 암보로 지휘하여 전 단원들을 놀라게 했다. 그해 나이 31세였던 토스카니니는 라 스칼라에 전격 기용된다. 이때부터 스칼라를 떠나는 1908년까지 토스카니니의 이탈리아 오페라 개혁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의 타협을 허용치 않는 개혁정신은 결국 라 스칼라를 등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1908년 그는 메트로폴리탄으로 갔다. 그러나 경비를 고려하지 않고 너무 완벽한 상연을 하려는 그의 기질로 인해 그는 메트마저 떠나야했다. 이후 메트가 끊임없이 그를 다시 불러들이려 했지만 토스카니니는 결코 잊어버리지도 용서하지도 않는 그런 사람이었다. “메트로폴리탄의 잿더미 위에서라면 지휘하겠다.” 이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1920년 라 스칼라로 돌아온 토스카니니는 이번에도 파시스트 정부와 맞부딪혔다. 1929년 62세의 토스카니니는 다시 스칼라를 떠나 뉴욕필에 섰다. 이 시점, 그러니까 1898년 스칼라 입성에서 1929년 뉴욕필로 옮기기까지의 시기가 토스카니니의 이탈리아 오페라 개혁 시기라 할 수 있다.
1936년 그는 뉴욕필도 떠났다. 69세의 나이였고 모든 사람들은 이제 토스카니니가 은퇴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1937년에 데이비드 사르토프의 NBC 방송국이 밀라노에서 쉬고 있는 그에게 손짓했다. 내용인 즉 토스카니니만을 위한 새로운 오케스트라를 조직하여 그 연주를 전국에 라디오 방송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 계획에 마음이 움직였고, 마침내 1937년 12월부터 다시 지휘활동을 계속하게 된다.
이 악단은 기존의 NBC 방송국 오케스트라에서 31인을 선발하고 나머지는 일반 공모하여 세계 각지의 유명연주자들을 끌어 모았다. 최종적으로 92명으로 편성된 오케스트라가 결성되었다. 12월 25일 70세 된 토스카니니의 지휘봉이 다시 움직였다. 이날 라디오를 통해 이 전설적인 연주회를 청취한 사람들은 4천 만 명에 육박했다고 한다. 1948년부터 52년까지 10회의 콘서트는 텔레비전에 의해 생중계되기도 했다.
자료를 보면 일생동안 그가 다룬 레퍼토리는 53명의 작곡가가 남긴 117개의 오페라와 175명의 작곡가가 남긴 480개의 관현악곡으로 집계되었다. 토스카니니의 작업을 지켜본 지휘자 피에르 몽퇴는 ‘한사람의 머리 속에 그 만큼의 양을 집어넣는다는 것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일’이라고 말한 바 있다. 푸치니의 표현을 따르자면 토스카니니는 ‘기적과 같은 사람’이었다.
토스카니니의 천재성을 이야기할 때면 빠뜨릴 수 없는 것이 그의 신비스러운 암보 능력이다. 1886년 그의 데뷔사건부터 1954년 그의 마지막 공연 때까지 항상 그의 암보력은 화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정작 토스카니니가 악보를 외울 수밖에 없었던 사연은 간단했다. “나는 눈이 너무 나쁘거든...”
1954년 4월 4일, 84세 생일을 막 넘긴 날, 그의 마지막 공연이 이었다. 라디오를 통해 전국에 방송되는 이 공연에서 ‘탄호이저’의 바하날을 연주하는 도중에 갑작스레 그 정확하던 지휘봉이 멈춰 버렸다. 순간적인 의식 장애였다. 통제실에 앉아 있던 그의 제자 귀도 칸텔리가 엔지니어에게 방송중지와 함께 브람스의 음악을 틀라고 했다. 다행히 30여초가 지난 후 토스카니니는 기력을 되찾아 다시 바하날을 이어갔다. 그러나 이 사건은 그 누구보다도 토스카니니에게 충격이었다. 평생을 통해 완벽을 추구했던 토스카니니는 결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87세의 이 열혈한은 결국 그 유명한 고별사를 끝으로 지휘대를 떠났다. “본의 아니게 지휘봉을 놓고 나의 오케스트라와 작별을 고하지 않으면 안 될 슬픈 때가 왔습니다.”
지휘대를 떠난다면 그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이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957년 1월 16일 뉴욕, 그는 역사 끝으로 잠들었다. 90세를 두 달 앞둔 시점이었다. 그의 시신은 밀라노 성당으로 옮겨졌고 베르디의 레퀴엠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한 거장의 전설이 막이 나려졌다.
토스카니니는 단 한명의 제자도 배출하지 않았다. 귀도 칸텔리가 있었지만 36세로 요절했다. 그러나 그가 심어준 악보의 중요성과 명확하고 힘있는 리듬은 많은 작은 토스카니니들을 만들어냈다.
그가 죽자 17년간 활동해 온 NBC 심포니도 자진 해산했다. 이 악단은 어디까지나 토스카니니를 위한 악단이었던 것이다. 이후 이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심포니 오브 더 에어’라는 이름으로 재결성하여 순회공연을 마쳤는데, 그때에도 지휘대는 공석으로 비워두고 공연했다. 토스카니니만한 지휘자는 없다는 뜻에서였다.
출처-글: 조회창 월간 ‘객석’ 기자
파바로티가 부르는 <그대의 찬손>
https://youtu.be/DadPpOLc-y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