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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9 반 바스텐)
- 유소년 시절 -
마르코 반 바스텐은 1964년 네덜란드 유트레흐트에서 태어났다.
그 무렵 마르코의 아버지인 요프 반 바스텐은 네덜란드 1부 리그 소속의 유트레흐트 클럽에서 왼 쪽
사이드백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그런 아버지의 영향으로 인해 마르코는 어릴 적부터 축구를 친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아버지 요프는 프로 선수 생활을 일찍 마감하고 그 후에 암스텔담에서 식료품
가게를 운영했다고 한다.)
6살 때 유소년팀인 UW유트레흐트에서 축구를 시작한 반 바스텐은 어릴 때 키가 몹시 작았고 게다가
허약 체질이어서 부모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녀석은 나이 답지 않게 악착 같이 운동을 했다. 반 바스텐의 꿈은 단순한 프로 축구 선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네덜란드의 국민적 영웅인 요한 크루이프와 같은 위대한 플레이어가 되는 것이었다. 그 꿈을 그리며 뛰고 또 뛰었다.
그러한 정성과 노력에 하늘도 감복했는지 반 바스텐은 12살이 됐을 때 또래 아이들 보다 무려 키가 10cm 이상 컸다. 또한 기량도 또래 아이들하고는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해 있었다.
반 바스텐은 15세 때 에린베이크 유트레흐트 유소년팀의 에이스로 군림했다. 그러자 네덜란드의 명문 클럽팀의 스카우터들이 그를 눈여겨 봤다. 당연히 암스텔담 아약스도 그에게 관심을 표명했다.
그런 재능있는 선수를 아약스가 놓칠 리 있겠나! 결국 반 바스텐은 16세 때 아약스 유소년팀에 스카웃됐다.
- 아약스 톱팀 데뷔 -
반 바스텐이 아약스 유소년팀에 입단했을 무렵 아약스 톱팀에는 요한 크루이프가 현역으로 뛰고 있었다. 반 바스텐은 선망의 대상인 요한 크루이프와 같은 팀에서 함께 뛰는 걸 꿈꾸고 있었다. 반 바스텐의 기량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고 예상 보다 훨씬 빨리 아약스 톱팀에 승격됐다.
반 바스텐의 아약스 톱팀 데뷔전은 1982년 4월 3일이었다.
아약스에 입단하고 나서 1년여 만에 17세의 어린 나이로 톱팀 벤치에 후보 선수로 앉게된 반 바스텐. 이 날 상대는 네이메겐이었다. 경기장 안에선 14번 크루이프가 노련한 경기 운영을 보여주고 있었다. 반 바스텐은 벤치에서 ‘어쩌면 오늘 존경하는 크루이프와 함께 뛸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맹랑한 꿈을 꾸고 있었다. 경기가 시종 아약스 우세로 진행되자 데 모스 감독은 벤치에 대기하고 있던 후보 선수들에게 몸을 풀도록 지시했다. 당연히 반 바스텐도 벤치 뒷 쪽으로 가서 워밍업을 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요한 크루이프와 함께 뛸 수 있다!'는 생각에 반 바스텐은 심장이 터질 듯 했다.
그런데 데 모스 감독은 반 바스텐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요한 크루이프를 교체하려는 것 아닌가.
(현역 생활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크루이프의 체력 안배 때문이었다.)
게다가 크루이프와 교체되어 들어갈 선수는 자기가 아닌 다른 녀석이었다. 반 바스텐은 망연자실했다. 그러나 그 때 교체되어 나오는 크루이프가 데 모스 감독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 놈 말고 반 바스텐을 넣으십시오'라고!! 그 순간 반 바스텐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고 한다.
그 당시 크루이프는 팀에서 감독과 거의 동등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데 모스 감독은 크루이프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마르코 반 바스텐이 그 날 톱팀 데뷔전을 치룬 것인데 반 바스텐은 투입된 후 골까지 터뜨렸다! 반 바스텐의 그 골은 승리를 결정 짓는 골이기도 했기에 의미는 더더욱 컸다.
어느 날 마르코 반 바스텐이 요한 크루이프에게 ‘14번 유니폼을 갖고 싶습니다‘라고 말을 하자 크루이프는 자기 유니폼을 건네주면서 반 바스텐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머지않은 장래에 이번에는 내가 너의 유니폼을 받게 될 것 같다.‘라고. 크루이프는 이미 그 때부터 반 바스텐의 재능을 알아본 것이다.
- 네덜란드 리그 완전 접수 -
아약스 톱팀에 데뷔하고 나서 3년 째가 되는 83-84시즌에 반 바스텐은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82-83시즌까지는 반 바스텐이 팀의 붙밖이 주전 멤버가 아니었으나 크루이프가 83-84시즌에 아약스의 최대 라이벌팀인 폐예노르트로 이적하면서부터 반 바스텐이 아약스 주전 센타포워드로 완전히 자리를 굳히게 됐다. 팀 관계자들은 크루이프 이적 후 큰 공백을 우려했으나 반 바스텐은
크루이프 자리를 완벽히 메꿨다.
반 바스텐은 83년 9월 네덜란드 대표팀에 선발이 됐고, 그 해 처음으로 리그 득점왕(28골)에 올랐다.
그 후 반 바스텐은 3년 연속 리그 득점왕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는데 특히 86-87시즌에는 37골을
기록했다. 이 기록은 그 해 유럽 리그 득점왕 가운데 가장 많은 득점 수이기도 했다.
반 바스텐은 아약스에서 리그 및 컵 대회 등을 포함해서 총 148골을 기록하며 네덜란드 리그를 완전
접수했다.
(AC밀란 시절)
- AC밀란 입단 -
AC밀란이 SERIE-A 최강팀으로 군림하고 또한 세계 최강으로 불리우게 된 것은 마르코 반 바스텐과 ‘검은 튤립’ 루드 굴리트가 입단한 87년 경부터이다. 당시 AC밀란 구단주인 실비오 베를루스쿠니 회장은 강력한 센타포워드를 찾고 있었다. 그의 집무실에는 후보로 올라있는 세계적 센타포워드들의 득점 장면이 담긴 비디오가 10개 가까이 있었다. 물론 반 바스텐이 네덜란드 리그에서 37골을 터뜨렸을 때의 화면이 담긴 비디오도 포함되어 있었다. 베를루스쿠니 회장은 반 바스텐 비디오를 끝까지 보지 않았다. 반 바스텐이 14골까지 넣는 장면을 보고 바로 스톱시켰다. 그리고 책임자인 엘리어드 블라이더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장 네덜란드로 날아가서 반 바스텐을 데리고 와라. 돈은 얼마든지 낼 테니까!‘라고.
이렇게 해서 반 바스텐이 87-88년 시즌에 약 45억원의 이적금으로 루드 굴리트와 함께 이태리 AC밀란으로 이적하게 된 것이다. 당시 반 바스텐과 굴리트의 이적은 이태리 국내에서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큰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반 바스텐은 입단한 지 얼마 안되서 오른쪽 발목에 부상을 당했다. 반 바스텐에게는 큰 불운이었다. 어떻게 보면 반 바스텐의 불운은 이 때부터 시작 되었는지 모른다.
결국 발목 부상으로 인해 반 바스텐은 경기에 출전 못하고 부상 치료 및 재활에 전념할 수 밖에 없었다. 기나긴 재활 훈련 끝에 반 바스텐은 88년 4월 AC밀란 벤치로 돌아왔다. 컴백한 반 바스텐은 디에고 마라도나와 카레카(브라질)가 버티고 있는 나폴리戰에 교체 투입 되어 결승골을 터뜨렸는데 AC밀란에 있어서 당시 나폴리戰은 우승 결정전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중요한 경기에서 반 바스텐이 천금의 결승골을 터뜨린 것이다. 결국 그 시즌에 AC밀란이 나폴리를 승점 3점 차로 누르고 무려 9년 만에 SERIE-A 우승을 차지했다.
- EURO88 우승/ 챔피언스컵 우승 -
이러한 상승세를 타면서 반 바스텐은 88년 6월 서독에서 개최된 EURO88을 맞이했다.
그러나 네덜란드 대표팀의 리누스 미셸 감독(스타 클래식 36)은 반 바스텐의 몸상태가 완전치 않다고 판단했는지 반 바스텐에게 백넘버 12번을 달게 했고 조별 예선 소련戰에 그를 주전으로 기용하지 않았다. 반 바스텐은 이에 반발할 수도 없었고 불만 조차 가질 수 없었다. 토탈사커의 창시자인 ‘장군’ 리누스 미셸 감독 앞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시건방을 떨 수 없었으니까......천하의 요한 크루이프도.
그런데 네덜란드가 조별 예선에서 소련에게 1대0으로 덜미를 잡힌 것이다. 그 1패는 네덜란드로서는 치명적이 될 수 있는 패배였다. 리누스 미셸 감독은 그 다음 경기인 잉글랜드戰에 반 바스텐을 주전 스트라이커로 기용하며 총력전을 펼쳤다. 반 바스텐은 잉글랜드戰에서 보란 듯이 헤트트릭을 기록하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또한 반 바스텐은 독일과의 준결승전에서도 종료 직전 천금 같은 결승골을 터뜨렸다. 네덜란드는 결승전에서 소련과 재대결했다. 조별 예선에서 쓴 맛을 안겨줬던 소련을 맞아 네덜란드는 초반부터 맹공을 퍼부었다. 이 날 1대0으로 앞선 상황에서 후반전 초반, 반 바스텐이 소련 페널티에이리어 안에서 환상적인 발리슛으로 골을 성공시켰는데 그 무렵 세계 3대 골키퍼 중 한 명이었던 소련의 다사예프도 전혀 손을 쓸 수 없는 기가 막힌 슛이었다.(이 장면은 20세기 최고의 슛팅(득점)으로 기억될 것이다.)결국 네덜란드가 소련을 2대0으로 누르고 EURO88 우승을 차지했고 반 바스텐은 대회 MVP와 득점왕(5골)을 동시에 수상하면서 전세계 축구팬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확실히 알렸다. 그 해 반 바스텐은 유럽 연간 최우수 선수상을 수상했다.
(EURO88 때의 반 바스텐)
반 바스텐의 쾌진격은 그 이듬 해인 89년에도 계속 됐다.
89년 5월 유럽 챔피언스컵 결승전에서 2골을 터뜨리며 팀에 우승을 안겼고, 그 해 12월 도쿄에서 열린 도요타컵(AC밀란VS 콜롬비아 나시오날 메데진)에서도 날카로운 플레이를 보여주며 1대0 승리에 공헌했다.(당시 나시오날 메데진에는 그 유명한 콜롬비아 대표팀 골키퍼인 이기타가 소속되어 있었다.)
이러한 활약으로 반 바스텐은 88년에 이어서 또 다시 유럽 연간 최우수 선수상을 수상했다.
AC밀란은 88년에 세계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인 프랑크 라이카르트(스타 클래식 14)까지 영입하면서 팀 전력을 한층 더 강화했다. 그 당시 AC밀란 주요 멤버는 프랑코 바레시, 타소티, 코스타굴타, 마르디니, 도나도니, 안첼로티, 에바니, 시모네, 맛사로 그리고 오렌지 3총사였는데 반 바스텐은 최전방에서 맛사로 혹은 굴리트와 투톱을 이루며 무서운 공격력을 과시했다. 당시 아리고 사키 감독이 추구한
AC밀란의 스팩타클 사커는 전세계적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기회가 닿으면 [스타 클래식]에서
아리고 사키 감독도 다뤄볼 예정으로 있는데 당시 AC밀란의 스팩타클 사커에 관해서는 그 때 가서 말씀 드리도록 하겠다.)
- 90년 이태리 월드컵에서의 부진 -
그 무렵 반 바스텐은 브라질의 카레카와 세계 넘버원 스트라이커 자리를 다투고 있었다.
그러나 반 바스텐은 기대했던 90년 로마 월드컵에서 그의 명성에 먹칠을 하고 말았다.
인생 최대의 슬럼프가 하필 90년 이태리 월드컵 때 들이닥친 것이다.
이태리 월드컵을 앞두고 많은 전문가들은 강력한 우승 후보로 주최국인 이태리와 브라질 그리고 네덜란드를 꼽았다. 전문가들이 네덜란드를 이태리, 브라질과 함께 우승 후보로 꼽은 이유는 바로 마르코 반 바스텐이라는 걸출한 스트라이커가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90년 이태리 월드컵에 출전한 네덜란드 대표팀은 반 바스텐을 필두로 루드 굴리트, 프랑크 라이카르트, 얀 보우타스, 쿠만 형제 등 기라성 같은 멤버들(EURO88 우승의 주역들)로 구성 되었던 터라 충분히 우승이 가능한 전력이었다.
그런 네덜란드가 16강전에서 독일에게 그만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이 대회에서 반 바스텐은 한 골도
기록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플레에 내용 면에서도 몹시 부진한 모습을 보여줬다. 대회 후, 반 바스텐은 16강전 탈락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많은 비판을 받았다.(사실 이태리 월드컵에서 네덜란드는 반 바스텐 뿐 아니라 다른 선수들 역시도 좋은 컨디션이 아니었다. 굴리트도 무릎 부상으로 인해 큰 활약을
못했고....)
- 도요타컵에서의 부활 -
슬럼프에 빠져있던 반 바스텐이 부활한 건 그 해 12월 도쿄에서 벌어진 도요타컵을 통해서다.
90년 12월 일본 도쿄 요요기 국립 경기장 벌어진 이 대회에서 이태리 AC밀란은 파라과이의 올림피아를 상대로 3대0 완승을 거두었는데 이 게임에서 반 바스텐은 폭발적인 스피드에 이은 화려한 개인기로 전세계 축구팬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당시 이 게임은 MBC에서 위성 생중계를 때려줬던 걸로 기억된다.)
이 날 반 바스텐은 이태리 월드컵에서의 부진을 만회하려는 듯 탁월한 개인기로 올림피아 수비진들을 전,후반 내내 춤추게 만들었다. 한 마디로 이 날 게임은 반 바스텐의 '단독 콘서트'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비록 이 날 반 바스텐이 득점을 올리지는 못했지만 AC밀란이 뽑은 3골 가운데 2골이
반 바스텐의 플레이에 의해서 나왔을 정도로 그의 활약은 대단했다.(89-90시즌에 이어 91-92시즌에도 SERIE-A 득점왕에 오른 반 바스텐은 92년 FIFA및 유럽 최우수 선수상을 또 다시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 센타포워드의 교과서 -
마르코 반 바스텐은 명실공히 '역대 세계 최고의 센타포워드'로 불리우고 있다.
우선 반 바스텐은 센타포워드로서 188cm/80kg이라는 완벽한 체격 조건을 갖췄다.
반 바스텐은 과거 게르트 뮐러-보비 챨튼-쟈일징요 등의 전설적 스트라이커들 보다 체격 조건이 좋고, 에우제비오-루이지 리바(이태리)-마리오 캠페스 등의 장신 스트라이커들 보다 테크닉과 우아함 면에서 한 수 위다.
반 바스텐은 상대 수비수들을 압도하는 체격에 파괴력있는 스피드와 강력한 슛팅을 장기로
삼는 '전형적인 센타포워드'인데 동적인 상황, 정적인 상황을 가릴 거 없이 어떠한 자세에서도 수비수를 따돌릴 수 있는 개인기까지 겸비했다. 겉으로는 들어나질 않지만 반 바스텐의
몸은 보디빌더를 연상시킬 만큼의 근육질로 되어 있다.
마르코 반 바스텐은 플레이 면에서 뿐만아니라 성격적으로도 스트라이커가 아주 잘 어울리는 선수였다. 반 바스텐은 마음 먹은대로 게임이 풀리지 않을 경우 전반전 휴식 시간 혹은 경기가 끝난 직후
라커룸에 들어와 라커룸 안에 설치되어 있는 케비넷 등을 주먹 또는 발로 때려 부수는 등 자기 표현을 아주 적극적(?)으로 하는 성격이었다. 그마 만큼 승부욕이 강했다는 것이다.
반 바스텐과 함께 AC밀란 전성 시절을 이끌었던 프랑코 바레시와 파울로 마르디니는 '반 바스텐 만큼 무서운 스트라이커는 보질 못했다!'고 말했다. 또한 베르캄프는 인터밀란 시절 어느 인터뷰에서 '현재 SERIE-A 넘버원 플레이어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로베르토 바지오다. 테크닉과 판타스틱한 드리블이 최고다. 다만, 부상에서 회복만 된다면 넘버원 플레이어는 당연히 마르코 반 바스텐이다'라고 답했다.
현재 유럽 무대에서 뛰고 있는 공격수들 대부분은 반 바스텐을 '우상' 내지는 '선망의 대상자' 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반 바스텐은 한 마디로 '센타포오드의 교과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 바스텐의 단점을 감히 들어 본다면 기복이 조금 심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반 바스텐은 컨디션이 좋을 때는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을 만큼의 무서운 공격력을 보여 주는데 반해서 컨디션이 나쁠 때는
간간히 게임을 망치는 경우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기복이란 것은 아마 부상에 대한 두려움
내지는 후유증 때문이 아닐까도 생각된다.
- 부상 그리고 은퇴 -
반 바스텐은 86년 아약스 시절 그로닝겐과의 경기 때 수비수와 부딪히며 오른 쪽 발목을 크게 다쳐서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그 부상으로 인해 4개월 이상 운동을 하지 못했는데 그것이 반 바스텐의 최초 부상이었다. 그 이듬 해에는 왼 쪽 발목을 다쳐서 2개월을 쉬었다. 그리고 AC밀란에 입단한지 얼마 안되서 오른 쪽 발목에 부상을 당해 1년 간 고생했다. 89년 9월에는 왼 쪽 무릎 수술을 했고.
92년 12월, 3회 째 유럽 최우수 선수상을 수상한 그 다음 날 반 바스텐은 왼 쪽 발목에 철심을 넣는 수술을 받았다. 그 때문에 당시 반 바스텐과 계약 관계에 있는 이태리 유명 스포츠 브랜드인 diadora에서 반 바스텐에게 발목까지 올라오는 특수 축구화를 디자인 해주기까지 했다.(필자는 발목까지 올라오는 축구화를 그 때 처음 봤다.)
그의 양쪽 발목은 이미 만신창이 상태였다.
반 바스텐의 은퇴를 결정 짓게 만든 부상은 93년 5월 유럽 챔피언스컵 결승전인 對마르세유戰이었다. 그 날 마르세유 수비수들은 반 바스텐을 거칠게 마크했는데 결국 반 바스텐은 오른 쪽 발목을 또 다시 다치면서 후반 종반 교체되어 나왔다. 이 시합이 반 바스텐의 현역 최후의 시합이었다.
이 부상으로 인해 반 바스텐은 벨기에까지 가서 발목 수술을 받는 등 눈물겨운 투병 생활을 하며 재기를 노렸다. 반 바스텐은 94년 미국 월드컵 참가를 열망했다. 그러나 끝내 부상에서 회복하질 못한 채
95년 8월 27일 은퇴를 결정했다. 그 때 그의 나이 32세였다.
안타까운 것은 반 바스텐의 부상 부위가 발목인데 사실 축구 선수가 발목 부상으로 축구화를 벗는 케이스는 의외로 많질 않다고 한다. 오히려 발목 보다는 무릎 부상으로 인해 축구를 그만 두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한다. 그렇기때문에 더 안타깝다는 것이다. 반 바스텐의 조기 은퇴는 세계 축구사에 있어서
하나의 큰 비극이라고 볼 수 있다.
(네덜란드 대표팀 감독으로써 2006년 독일 월드컵에 참가)
마르코 반 바스텐(Marco Van Basten)
국적: 네덜란드
나이: 1964년생
포지션: 센타포워드
신장: 188cm
소속팀: UW유트레흐트(70/80)-에린베이크 유트레흐트(80/81)-
암스텔담 아약스(81/87)-AC밀란(87/95)
네덜란드 대표팀 데뷔: 1983년
A매치 기록: 58시합/24골(네덜란드 역대 2위)
월드컵 출전: 90년 대회
주요 타이틀 및 개인 타이틀
82,84,85년 네덜란드 리그 우승(아약스)
84-87시즌 4년 연속 득점왕(아약스)
EURO88 우승
87-88시즌 SERIE-A 우승(AC밀란)
88-89시즌 유럽 챔피언스컵 우승(AC밀란)
89년 도요타컵 우승(AC밀란)
89-90시즌 유럽 챔피언스컵 우승(AC밀란)
90年 도요타컵 우승(AC밀란)
91-92시즌 SERIE-A 우승(AC밀란)
92-93시즌 SERIE-A 우승(AC밀란)
93-94시즌 SERIE-A 우승(AC밀란)
89-90시즌 SERIE-A 득점왕(AC밀란)
91-92시즌 SERIE-A 득점왕(AC밀란)
88年 유럽 연간 최우수 선수상 수상(프랑스 풋볼지)
88年 세계 연간 최우수 선수상 수상(월드사커지)
89年 유럽 연간 최우수 선수상 수상(프랑스 풋볼지)
92年 유럽 연간 최우수 선수상 수상(프랑스 풋볼지))
92年 세계 연간 최우수 선수상 수상(FIFA 선정)
92年 세계 연간 최우수 선수상 수상(월드사커지)
(베르캄프 은퇴 경기에서 반 바스텐과 베르캄프)
★그를 말하는 사람들★
"반 바스텐 감독은 정말로 다른 축구를 구사했다. 그는 축구에 대한 완벽한 마인드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지도력까지 보유했다.
반 바스텐 감독은 경기 운영과 어시스트를 창출하는 방식을 나에게 가르치고 있다"
-반 니스텔루이-
"“반 바스텐처럼만 될 수 있다면 정말 어떤 것도 부럽지 않았습니다. 반 바스텐. 그는 제가 축구를 하게 된 이유죠."
-티에리 앙리-
-베르기의 은퇴경기에서 나온 반 바스텐의 플레이-
첫댓글 교과서 반바스텐
반바스텐?ㅋㅋㅋ
ㅋㅋㅋㅋ레전드이십니다
이분 존경하는 공격수 엄청 많음...네덜란드 선수라면 거의 100%
네덜란드뿐만 아니라 유럽의 스트라이커들 대부분이 이분 존경하던데......
베르캄프 은퇴경기서 보니까 완전 현역같던데요..
222222222소름이..
지성이형 은퇴할때두 ..ㅎㅎ 저렇게되면;;
아 진짜 놀랐음
그떈 붐붐차!!
ㅋㅋ 회춘
ㄷㄷㄷ 지금 선수 복귀해도 걱정없겠다
은퇴경기때 저랬는데 레전드란 말이 어울리네요
앙리 남은 기간 계속 뛰어난 활약 보여서 아스날 챔스 우승시키면 반바스텐에 비슷해질수도.
역시 반바스텐ㅋㅋ
은퇴경기때 보고 진짜 깜짝 놀랐다 ㅋㅋ 같이 나온 크루이프옹은 ㅎㅎ
크루이프옹은 나이가 50이 넘으셨으니. 힘들죠.. 그런데 반바스텐 41살에 저기량이 -_-;; 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
경기를본적이있어야 지 이건뭐..ㅋ자선경기는 잘하던데
반니말 안타깝다..TT
몸 보니깐 아직도 관리를 잘해서 그런가 탄탄하시던데
크루이프도 존경한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14번
아..쩔어....역시..교과서다
힐패스 뭐냐..ㅡ,.ㅡ;; 멋있다 ;;
힐패스...분명 안볼때 스피드 올려서 뛰어들어가는데 어떻게 안거지 ㅡㅡ;; 대단하시네
잘보면 힐끔 봅니다.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