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세기 시기 프랑크 왕국의 국왕은 어떤 존재였을까.
6세기는 프랑크 왕국에 격동의 시기였다. 왕국은 루아르강과 라인강 유역을 벗어나 아키텐, 부르군트, 프로방스, 알레마니아, 프리지아 등 드넓은 권역을 정복하는 데 성공하면서 서로마 제국 붕괴 후 혼란스러웠던 서유럽 대륙의 패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기에 6세기 프랑크 왕국에서 국왕을 설명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6세기 초의 프랑크 왕국과 말엽의 왕국은 너무나 달라졌기 때문이다.
6세기 초 이제 막 서고트 왕국을 피레네 산맥 너머로 물리친 프랑크 왕국에 국왕은 군주라기보다는 차라리 전사장에 가까웠다. 프랑크인은 여전히 소수일 뿐더러 천천히 정착해가고 있었다. 아키텐 같이 새로 정복한 곳에서 프랑크인의 영향력이 전무했다. 드넓은 정복지를 실질적으로 소유해온 갈로-로만 출신의 수많은 유력자들은 새로운 지배자에 대한 분석과 이해가 필요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유력자와 국왕의 관계는 순식간에 정립되었지만 클로비스 1세를 기준으로 1~2세대 국왕들은 전사장의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 했다.
하지만 6세기 말엽에 이르면서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6세기 말엽에 이르면 왕국은 팽창의 한계점에 이르기 시작했다. 왕국은 부르군트와 프로방스 그리고 알레마니아 영역 일부를 정복하는 것 외에는 직접적인 통치 반경을 늘리지 않기 시작했다. 이는 아무리 프랑크 왕국이 느슨한 국가 형태를 유지한들 너무 넓은 영역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왕국 내에서는 점차 메로빙거 왕실을 중심으로 국가의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왕실은 왕국 내 수많은 세력을 규합하는 중심축이 되었다. 이는 전사장의 역할이 줄어들기 시작한 시점에 태어난 3세대 국왕들, 클로비스 1세의 손자 대에서 이런 모습에서 잘 나타났다.
또한 왕궁은 수많은 유력자와 전사들이 모여 국왕에게 호의를 사거나 협상을 하거나 심지어 국왕을 타도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기 위해 모이는 장소로 발전했다. 물론 수도가 따로 존재하지는 않았다. 왜냐면 국왕은 너무나도 넓은 영토를 관리해야 했다. 그런데 영토를 다스리는 방법은 유력자의 도움을 받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그들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관리해야 했다. 여기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순방을 통해 그들의 관계를 직접 유지하는 것이었다. 대신 곳곳에 왕령지나 관료의 빌라나 토지를 두어 세금을 걷으면서 집회지의 공간으로 사용했다.
그렇다면 왕권은 어디서 나왔을까. 6세기 초엽 국왕의 권력은 강력한 군사력에서 나왔다. 물론 이 군사력은 상비군이나 국민군이 아닌 프랑크인 유력자나 토호의 도움으로 이뤄진 전사 연합체와 같은 군사력에서 바탕을 둔 것이었다. 이 군대는 승리와 약탈을 통해 얻는 전리품과 토지를 원했고 국왕은 그 바람을 이뤄주면서 자신의 왕국을 팽창시켰다. 조금 더 세세하게 따지자면 클로비스 1세는 그의 카리스마와 능력 그리고 프랑크인 전사대로 성공했다면, 클로비스 1세의 아들 대에 이르면 그보다 더 많은 다양한 유력자의 도움을 받아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6세기 말엽에 이르면 그 권력의 기반이 살짝 변화하게 된다. 군사력이나 유력자의 도움으로 이뤄진 힘인 것은 사실이지만 더는 국왕이 전사장의 리더쉽을 보여 전쟁에서 승리할 것 같다는 모습을 보일 필요가 없었다. 국왕은 이미 왕국 꼭대기에 머물며 수많은 유력자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원하는 토호를 관리로 임명하고 그들의 욕망을 이뤄주고 불화를 해결하는 일을 하는 일을 처리해줄 수 있다는 모습에서 권력을 얻었다. 비록 모든 권력 기반이 유력자의 도움에서 나왔기에 유력자를 잘 달래지 않고서는 성공할 수 없었지만, 과거처럼 전사의 모습은 사라지고 조율자와 정치인의 모습으로 변모했다. 물론 여전히 전사장이라는 이미지는 상징적으로 남아있던 것은 사실이다. 개인에 따라서는 전투를 이끌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더는 전투를 직접 필요 없어진 것은 정말 큰 변화였다.
이런 변화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먼저 프랑크 왕국이 성장하면서 국왕이 얻을 수 있는 권력의 원천이 변화했기 때문이다. 본래라면 전사대의 리더처럼 행동하면 전사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지만, 이제는 수많은 유력자를 조율할 줄 알아야만 권력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교회의 선전에 있었다. 당시 교회는 민간 행정의 근간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민간 행정 전반에 뿌리내리고 있었다. 교회는 민간 엘리트 집단이 모이는 총본산이었기에 지방을 대변하는 기관 중 하나였다. 그러면서 '상대적'으로 비폭력적이고 이상적인 사회를 바랬고 중앙 정부에 협력하는 대가로 수많은 헌납을 받아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 교회가 이런 성격을 가진 덕분에 왕실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는데 이 교회는 국왕을 매우 이상적인 존재로 그려내기를 원했고 그렇게 선전했다. 물론 국왕들은 절대 그런 이상적인 존재로 살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래도 선전은 선전이었기에 점차 이상적인 모습으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기 시작했는데 그 이상적인 모습은 전사가 아니라 조율자의 모습이었다.
*유의해야할 점은 조율자의 모습으로 자리잡은 것이지 무력과 폭력의 중요성이 낮아진 건 절대 아니었다. 여전히 원정을 통한 전리품 획득은 중요했고 왕국 내에서도 무력시위를 통하여 일처리를 하는 경우가 잦았다. 오히려 왕국은 2~3세대 국왕을 맞이하면서 더욱 격한 내전을 벌였고 급기야 형제와 사촌이 서로를 죽이는 가족상잔의 비극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런 점은 유의토록 하자.
프랑크 왕국의 국왕은 정말 흥미로운 존재라 볼 수 있다. 가장 강력한 권력을 쥔 존재지만 그 권력 중 대부분이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만약 유력자들이 국왕을 저버리면 국왕의 권력은 파도를 맞는 모래성처럼 무너질 수 있었다. 하지만 국왕은 얽히고설킨 정치 체계 속에서 가장 높고도 강력한 권위를 지닌 존재였다. 유력자들의 지지만으로 권력을 유지하면서도 그 권력을 교묘하게 사용하여 유력자를 겁박하여 원하는 바를 이뤄낼 수 있었다. 이런 권위에서 개인의 욕망을 이뤄낼 수 있다 여긴 유력자들은 국왕 곁에 옹기종기 모여 원하는 바를 얻어내려 했다. 이 관계를 멀리서 보면 불안정한 왕권으로 보일 수 있다. 실제로도 그렇다 할 수 있다. 하지만 평면적인 이해보다는 내부에서 어떤 메커니즘으로 왕국이 굴러가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다.
---
첫댓글 믿고 보는 헤센님의 역사글!
요즘 뒤늦게 총균쇠를 읽고 있는데 어쩐지 그 내용과 겹치는 부분이 있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