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촉촉하게 내리니 이렇게 좋습니다
아직까지는 온도가 높아서 조금 끈적거리기는 하지만 추석이 얼마남지 않았으니 이 습한 여름도 곧 지나가겠죠
예전에 특별하게 생겨서 사 놓고 영어쓰기에 맞지 않다는 것을 알고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만년필을 꺼냈습니다
그 당시에는 가로가 두꺼운 획이 나오는 것은 영어 알파벳과는 그리 어울리지 않다고 그래서 저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었거든요
판본체를 쓰다보니 이 닙이 한문과 한글에 적당하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꺼내봤습니다
산지 1년도 넘었고 처음 넣었던 잉크 그대로였는데 다행히 말라붙지는 않았던지라 연습장에 몇자 써 보고 모시종이를 꺼냈습니다
텍스쳐가 모시와 같이 날줄과 씨줄로 이루어져 있고 그것만큼 요철이 심한 종이여서 부드러운 붓이나 연필로는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데
닙으론 몇번이나 실패했던 종이었거든요
이번엔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오래된 벽돌 사이에서 피어나는 작은 꽃들과 어울리는 분위기의 글씨를 그릴 수가 없어서 그린지 오랜 시간이 지난 종이입니다
세로로 쓸 것이라 글자의 폭은 7mm
행간 폭은 8mm로 해서
점을 주루룩 찍고
T자로 선을 그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제 오래된 친구 같은 책
[뜻밖의 인문학] 이규복
을 꺼냈죠
캘리그라피를 예쁘다고 무작정 시작해서 헤매고 있을 때 이 책을 보면서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통필사 한 번 하고 그 후로도 종종 꺼내어 쓰고 있던 책이었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오래되고 익숙한 것도 좋습니다
그리고 베놈 스타일의 잉크소분병 거치대
작은 3D 펜으로 긴 시간 걸려 만든 것인데
이 녀석 꽤 쓸모가 있습니다 ㅎㅎ
이것의 등장이유는 만년필에 들어있는 잉크 색이 모시종이와 어울리지 않아서 찍어 쓰려고 합니다
만년필에 들어있던 잉크는 아주 밝은 주황이었는데
파란잉크를 찍어 쓰다보니 색이 갈색에 가까워지더군요
아... 분명 만년필을 다른 잉크에 찍어서 쓰는 것에 거부감이 있는 분들이 있으실텐데....
제가 워낙 딥펜을 많이 사용하면서 잉크를 섞어 썼던지라 만년필도 그냥 막 찍어 씁니다
색이 오묘하게 섞이면서 나오는 그 풍부함을 너무 좋아하거든요
한 페이지를 쓰면서 모시종이의 요철 때문에 이 만년필로도 쓰는 것은 많이 힘들었어요
이 종이보다 부드러운 것을 사용했어야 하는구나
한탄하면서 페이지를 채웠습니다
특히 한자 쓸 때는 아주 많이 힘들더라구요
획이 아주많이 복잡한데 그것을 폭과 너비가 일치하는 정사각형 안에 넣어야 겠다고 목표를 잡으니 읽기 힘든 상태의 뭉뚱거려진 ㅎㅎㅎㅎ
그래도 이렇게 한번 써 본 것에 의의를 둡니다
다음에 좀 더 잘 쓰면 되지요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에 체크하면서 다음 번을 기약합니다
하여튼 장도닙으로 판본체를 써보는 경험은 아주 흥미로웠습니다
각도에 따라 가로와 세로획의 두께 비율이 달라지는 것도 재미있었구요
재미있는 것을 많이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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