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신
시어머니는 아무것도 모르는 저에게
무서울 만치 근엄했고, 완고했고
그리고
고집이 센 분이셨습니다.
귀머거리 3년,
봉사 3년,
벙어리 3년이란
매서운 시집살이의 형벌은
저에겐
평생 지울 수 없는 멍울로 변했습니다.
세상 떠나시기 직전까지도
며느리의 증오는
조금도 풀어주시지 않고 가셨습니다.
“참을 수가 없도록 이 가슴이 아파도
여자이기 때문에 말 한마디 못하고
헤일 수 없는 설음 혼자 지닌 채
고달픈 인생길을 허덕이면서
아 아… 참아야 한다기에
눈물로 보냅니다. 여자의 일생…”
이미자 씨의
노래가사 ‘여자의 일생’은
저에겐
눈물뽑는 며느리 인생사였습니다.
어언 세월이 흘러
저의 집에도 새 며느리가 들어왔습니다.
얼굴이 예쁘고 몸이 가냘픈
젖 냄새가 폴폴 풍기는 아이였습니다.
그 아이를 보자
언뜻
그 옛날 시어머니 앞에서 벌벌 떨던
제 어린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며늘아가야! 어서 와라.
혹시
시어머니인 내가
무서운 도깨비로 보이는 건 아니지?
좋은 시대에 태어난
네 모습이 부럽기만 하구나.
그래,
이제 우리 사이엔 그 지긋지긋한
‘고부갈등’이란 말은
아예 들어붙지 못하게 노력하자.
그런 고리탑탑한 말 들으면
나부터 질색이거든.
그리고
‘내 딸같이…’,
‘친정엄마같이…’
입에 바른 이런 말도 하지말자.
그냥
상식대로만 행동하고 말하는 거야.
오케이?
예쁠 것 같구나!
네가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그리고
세 달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며느리와 아들이 집에 찾아온 것은
첫 달에 두 번,
나머지 달에 두 번,
합해서 네 번인가, 다섯 번인 가였습니다.
안부전화도
한 달에 한번 정도해서
도합 서너 번 왔었습니다.
옛날 같았으면
꿈도 못 꾸었을 일이였겠지요.
사람 마음이 간사한 건지 아니면,
정말 수시로 색깔이 변하는
카멜레온을 닮아서 그런건지
제가 며느리의 행실 때문에
조금은 서운한 생각이 들었지만
시대가 그러니 뭐 어쩝니까?
그래도
아이들만 저희들끼리 재밌게,
행복하게 지내면 상관없다고
저 스스로
마음을 달래듯 자꾸 쓰다듬습니다.
여우같은 생각들이
불쑥불숙 튀어 나오지만
그럴 때마다 ‘뿅’망치로 때려
고개를 쳐들지 못하게 할겁니다.
며느리야
언젠가 철이 들겠지요.
그동안에
시어미인 저부터
마음을 활짝 열어놓을 생각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간혹
제 마음의 문이 조금씩 닫힐 때마다
저 자신부터 나무라겠습니다.
제가 잘한 짓인지 모르겠습니다.
<서울의 ‘K’시어머니가 보내온 사연을
추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