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여주지역 답사를 마치고/안성환/241012
사단법인 울산문화아카데미에서 이번에는 경기여주지역으로 답사를 다녀왔다. 울산을 기준으로 하여 총 이동 거리 680km에 17시간이 필요했다. 이동 거리를 빼면 총 5시간(1만3천보)을 강행군하는 전투 답사이다. 평소 걷기 운동을 하지 않으면 힐링이 아니라 노동에 가까운 답사길이다. 그래도 지치지 않는 것은 재미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답사 코스는 고달사지와 세종대왕 영릉 그리고 신륵사와 목아 박물관이다. 이번에도 채무기 교수님의 해박한 해설 보따리를 여기에 풀어본다..
첫 번째 코스 고달사지
울산에서 이른 아침 5시에 기상하여 당시 불교의 나라 고려, 천년의 사찰 고달사지로 향했다. 사방이 연꽃처럼 수려한 산세에 둘러싸인 아득한 대지 위에 지금은 절터만 남아있다. 1만2천여 평의 대지 위에 그때의 사찰 모습을 연상하면 가히 대단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곳은 고려시대를 대표할 만한 절이었음을 주변 흔적들이 짐작하게 하고 있었다. 특히 금당(金堂:절의 본당을 이르는 말, 대웅전)을 중심으로 야단법석(野壇法席:야외에서 크게 베푸는 설법의 자리)을 했을 것이다. 그 시절 그들은 어떤 설법을 전했을까 생각하면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다. 이제 찬란했든 옛 모습은 빛을 잃은지 오래지만, 여전히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절터 가운데 석좌대좌의 보존상태는 그의 완벽하고 그의 아름다움마저 넋을 잃게 만든다. 고달사지가 고려의 대표선수임을 증명하는 것은 또 한 가지 더 있었다. 고달사지에 공이 큰 찬유스님이 입적하니 당시 광종임금은 대신들과 의논하여 석공을 내려보내 찬유스님을 공덕을 기록한 최고의 비석을 만들었다고 하다. 그 비석이 아직도 현존하고 있으며, 귀부(龜趺:거북 모양으로 만든 비석의 받침 돌)와 이수(螭首: 비석 머리위에 뿔 없는 용의 모양을 아로새긴 현상. 이무기)조각이 환상적이고 놀랍다. 현재 비석은 귀부와 이수만 진품이고 가운데 비석은 여주 박물관에 보관 중이며, 고달사지에 있는 비석은 복제품이다. 조금 옆에 승탑이 있는데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승탑이다. 1만2천여 평의 허허벌판 고달사지를 걸으며 당시의 사찰을 그려본다. 위용과 장엄함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분명 천년의 가치를 지닌 곳이었다.
두 번째 코스 영릉
이곳은 조선 4대 세종과 그 비 소헌황후의 능인 영릉(英陵)과 제17대 효종과 그의 비 인선왕후 능인 영릉(寧陵)이 있는 곳이다. 두 개의 왕릉은 약 700m 거리를 두고 있는데 이번에는 시간이 없어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능인 영릉만 다녀왔다. 우리는 영릉 입구에있는 훈민정음 해례본을 든 세종의 동상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당시 세종의 업적들을 동상을 중심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보고 있노라면 많은 생각이 뇌를 스쳐간다. 21살에 임금되어 32년이란 재임기간 동안 수많은 업적을 남겼으니 참 대단한 성군이었다. 하지만 장남문종의 단명과 장손단종의 비운을 보면 신은 없어 보였다. 조선시대의 장남들은 모두 불행한 삶을 살았다고 보여진다. 아버지가 성군인데 그 이유는 무었일까? 생각하건데…….
세 번째 코스 신륵사.
신륵사는 산중이 아닌 강가에 있다. 일반적인 사찰은 산중에 있는데 그 이유가 매우 궁금했는데 채무기교수님께서 해박한 설명을 해 주셨다. 예전부터 강물이 범람하여 지세가 약한 곳에 사찰이나 탑을 세워 강물의 기를 꺾어 범람을 막는다는 뜻으로 산천비보상(山川裨補思想:산천의 기운이 험한 곳을 보충하기 위해 사찰을 창건하거나 탑을 설치)의 뜻으로 사찰을 세웠다는 설도 있다고 한다. 이곳에는 일반 사찰에서 보기 드문 신륵사 다층 전탑(塼塔:흙벽돌로 쌓은 탑)이 있는데 석탑보다 전탑이 제작공정도 많고 비용도 더 많이 들어가는데 이렇게 만든 이유는 들판이 넓고 강을 끼고 있는 지역은 화강암이 기하므로 흙을 불에 구어 벽돌을 만들어 탑을 만든다고 한다. 신륵사에서 보이는 남한강은 예전에 지금의 고속도로와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런 탑들은 이곳을 지나는 뱃사공들의 등대 역할도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육로를 잘 만들어 놨기에 그런 역할은 못 하지만 대신에 고려와 조선의 보물을 한눈에 쉽게 볼 좋은 기회가 온 것이다. 해가 짧아 서둘러 목아 박물관으로 향했다.
마지막 코스 목아 박물관
입구에서부터 불교 문화를 보존 계승하기 위해 세워진 박물관임의 느낌이 확 들어 온다. 목아박물관 정원 서편에 수십미터의 석조물이 있고 우측 법당에는 5백여 개의 목조극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목조미술의 법당이다. 이곳은 우리나라 전통 나뭇조각과 불교미술계승 등 목표로 1989년에 개관한 전문 사립박물관이라고 한다. ‘목아’란 말은 초대 박물관장의 ‘목아 박찬수’ 관장의 아호를 딴것이라고 했다. ‘목아’란 뜻은 죽은 나무에 생명을 불어넣어 싹을 틔운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 나뭇조각의 정수를 보려면 3층으로 가면 볼 수 있다. 무형문화재 박찬수 장인의 대표작 150여 점을 감상할 수 있다. 특히 이날 목아 박물관 박우택 관장님께서 직접 마중을 나오셨고 도슨트 대신 직접 작품 한 점 한 점에 대한 철학적 의미가 담긴 내용을 쉽게 설명을 해 주셨다. 해박한 설명에 재치와 시대에 맞은 해학으로 몸과 시선의 방향성을 잃고 말았다. 깊이 새겼고, 참 많이 웃었고, 정말 오래 기억 될 것같다. 특히 ‘홀로지옥’ 기획전은 명부시왕과 윤회, 지옥, 극락 등 복잡하고 깊은 불교의 사후 세계관을 시각화하여 전시한 곳은 참으로 놀라웠다. 꼭 다시 한 번 찾아야지
여주지역 답사를 마치고 필자의 생각으로 마무리한다..
1만2천여 평의 고달사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허허벌판에 남들이 이야기하는 돌덩어리 몇 조각뿐이었다. 그런데 필자는 그곳에서 애절한 마음이 앞섰다. ‘고달사지’는 천년의 한을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필자는 그 한을 알아듣지 못해 미안한 마음으로 마음을 달래었다. 사실 한민족의 긍지와 자부심을 세우는 데는 역사만큼 중요한 것이 없고 또 민족의 정체성과 민족의 혼을 말살 시키는 데는 역사를 왜곡하는 그것만큼 쉬운 것이 없다. 그러므로 역사는 그만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반쪽이 가려져 있는 우리의 역사 찾기는 지금부터 네가 아닌 나부터 시작인 것 같다.
2024년 10월 12일 경기도 여주지역 답사를 마치고 안 만촌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