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 좋은 호남 땅을 지나 토지의 무대,하동에 이르다(광양 - 하동 23km)
4월 26일, 아침에 일어나니 햇빛이눈부시다. 교포들에게 이런 때를 나타내는 시가 있다고 일러주며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라고 읊은 서정주의 시 '푸르른 날'의 첫 구절을 들려주었다. 대나무 숲에서는 소소한 바람이 일고 산야의 나무들이 반짝반짝 빛난다.
아침 8시, 광양 시청 앞 광장에서 몸을 풀고 높은 언덕길을 따라 광영동 쪽으로 걸어가니 광양과 여수를 있는 이순신대교가 남해바다를 가르고 눈 아래로 광양제철이 위용을 드러낸다. 고개마루에 이르니 가야터널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고 고개넘어 아파트 숲도 가야아파트다. 옛 가야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인지.
광영동에서 옥곡면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가니 식당 겸 휴게소가 보인다. 자동으로 멈춰서 휴식하면서 노정원 씨가 나들이길에 사온 경주빵을 두 개씩 받아들며 기쁜 표정들이다. 모두들 주는 이에게 감사함을 표한다. 작은 것도 상황에 따라 이처럼 큰 효용을 지닌다.
이어서 남해고속도로를 넘어 옥곡면 소재지를 지난다. 길가에 '옥구슬이 흐르는 고을'에서 유래했다고 설명하는 표지를 보며 '아 , 그런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곳이구나'하고 일깬다. 어느 고을이나 그나름의 역사와 유래가 있기 마련이다. 면소재지를 지나 작은 고개를 넘으니 진상면에 들어서고 고개아래로 내려가니 면소재지에 이른다. 우리 일행의 전속승합차가 어느 음식점 앞에 서 있기에 휴식장소인가 여겼더니 점심을 먹을 음식점이다. 아직 11시도 안되었는데.
예정보다 일찍 도착하여 아직 준비가 덜 된듯, 혼자서 일하는 주인아주머니가 열심히 상을 차리는데 30분이 더 걸린다. 박효자 씨는 매실반찬이 맛 있다며 상에 남은 것을 모아 비닐봉지에 담는 등 전체적으로 반찬들이 깔끔하다. 오늘은 광양에서 하동까지 23km의 구간이어서 한결 느긋하다. 식당에서 한 시간 넘게 쉬었다가 12시에 오후 걷기에 나섰다.
진상면 소재지의 평지를 지나니 꽤 긴 오르막길이 나타난다. 한참을 따라 올라가니 매화마을로 유명한 백학마을로 가는 길목에 백학동이라 쓴 큰 돌판이 서 있고 그 오른쪽으로 계속 올라가니 탄치재의 고개마루에 이른다.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니 철길과 도로가 아스라이 보이고 반대쪽으로는 멀리 지리산줄기가 보이고 가까이 섬진강을 낀 하동읍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내리막길을 따라 3km쯤 걸어가니 오후 2시 정각에 전라남도와 경상남도의 경계를 이루는 섬진교에 이른다. 안내하는 경찰이 오후2시부터 지진대비비상훈련이라며 경보가 풀릴 때까지 다리 앞 가게에서 쉬었다 가라고 일러준다. 덕분에 20여분 쉬며 참외를 들었다. 일본인들이 참외를 먹을 기회가 많지 않다고 하여 일부러 준비하였다는 김지훈스탶의 설명이다. 간식으로 먹으려던 오이는 검게 그을은 얼굴 맛사지용으로 용도가 바뀌었다.
비상훈련이 끝나고 호남에서 영남으로 넘어가는 것을 새기며 기념촬영을 하였다. 지난 9일에 전라북도 군산에 들어와 5일간 전라북도를, 14일에 전라남도에 이르러 12일간 광주, 목포, 순천을 거쳐 17일만에 영남 땅에 들어선 것이다. 하동에서 부산까지 앞으로 8일 동안 경상남도의 남부지방을 걸어가게 된다.
섬진교를 건너 하동군청에 이르니 오후 2시 40분, 그늘진 곳에서 몸을 풀고 상쾌한 봄길을 가볍게 걸어온 오늘의 걷기를 끝냈다.최근에 새로 옮겼다는 군청과 보건소, 의희 등이 들어선 부지가 꽤 넓다. 청사 입구에는 제17회 하동 야생차문화축제를 알리는 포스터가 여러 개 걸려 있다. 지리산자락을 끼고 있는 하동의 쌍계사 주변에는 야생녹차단지가 꽤 넓게 자리잡고 있다. 읍내의 여러 곳에는 섬진강 재첩국을 간판으로 단 음식점들이 즐비하고. 우리가 묵는 숙소로 오는 길목에는 '소설토지 하동읍내시장'이라는 표지가 크게 달려 있다.
재일동포 강정춘 씨에게 하동이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무대인 것을 설명해주니 영화를 보았다며 줄거리를 잘 알고 있다. 조영남의 노래 '화개장터'의 무대가 섬진강을 끼고 올라가는 길목에 있다니 직접 보지 못함을 아쉬워하고. 그러고 보니오늘 지나온 광양시 다압면 매화마을은 매화꽃이 특별하고 쌍계사 벚꽃길도 유명한데 지금은 모두 꽃이 지고 잎이 무성할 때로구나.
군청에 도착하였을 때 선상규회장의 선배이자 동료인 손상길 선생이 마중을 나왔다. 하동이 고향이라는 손 선생은 서울에서 고향땅을 지나는 걷기회원들을 성원하기 위해 일부러 내려왔다고 한다. 저녁을 들기위하여 식당에 이르니 손상길 선생이 먼저 와 있다. 손 선생이 저녁을 대접한다. 메뉴는 막걸리와 맥주, 소주를 곁들인 재첩정식이다. 엔도 야스오 일본대표는 서울에서 일부러 내려와 정성어린 대접을 해주어 '진짜 감사합니다,'라며 크게 감동하는 뜻을 표한다. 손 선생은 막걸리를 좋아하는 여성들을 위하여 뒤풀이에 마시라고 여러 병을 선물한다. 여성들은 숙소에 돌아와 따로 모인다.어제에 이어 연일 파티를 여는 분위기다. 걷기와 함께 놀기도 즐기는 아름다운 밤이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