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용운 韓龍雲 (1879∼1944) " '돌집’ 등진 북향집 그칠줄 모르고 탄 ‘님의 구국혼’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1인
-님의 침묵-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배기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만은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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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
시인·
독립운동가.
본명은 정옥(貞玉),
아명은 유천(裕天).
법명은 용운,
법호는 만해(萬海, 卍海).
홍성(洪城) 출생.
6세 때 서당에 들어가 한학을 배우고, 18세 때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하였으나 실패하자 피신하여 1896년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들어갔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05년 인제(麟蹄)의 백담사(百潭寺)에서 승려가 되었고 만화(萬化)에게 법을 받았다. 1908년 전국사찰대표 52명의 한사람으로 원흥사(元興寺)에서 원종종무원(成宗宗務院)을 설립하였다. 10년 한·일합병의 국치(國恥)를 참지 못하여 중국으로 망명, 독립군군관학교를 방문한 뒤 만주·시베리아 등지를 방랑하다가 13년 귀국하여 불교학원에서 교직생활을 하였다. 같은 해 범어사(梵魚寺)에 들어가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저술, 대승불교의 반야사상과 불교정신을 널리 펴는 데 힘썼다. 18년 월간 불교잡지 《유심(惟心)》을 간행하였고, 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명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내놓고 문학활동을 전개하였으며, 27년 신간회(新幹會)에 가입, 중앙집행위원으로 경성지회장을 지냈다. 31년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朝鮮佛敎靑年同盟)으로 개칭,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고, 월간 《불교(佛敎)》지를 인수하여 속간하였다. 35년 첫 장편소설 《흑풍(黑風)》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고, 37년 불교관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자로 검거되었다. 그 뒤 계속하여 불교의 혁신운동과 작품활동을 계속하였다. 시에 있어서 퇴폐적인 서정성을 배격하고 불교적인 <님>을 자연으로 형상화하였으며, 은유법으로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정신과 불교에 의한 중생제도를 노래하였다. 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지금의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주요 작품·저서로 《박명(薄命)》 《흑풍》, 시집 《님의 침묵》 및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 《불교대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