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험은 이날 오전 7시10분 뉴질랜드 상공 부근에서 초속 8km로 돌고 있던 ‘기쿠 7호’를 ‘히코보시’와 ‘오리히메’의 두 로봇 위성으로 분리하면서 시작됐다. 약 2m의 거리를 유지한 채 태평양 상공에서 약 15분간 랑데부 비행한 후 ‘히코보시’가 고성능카메라에 의한 센서로 ‘오리히메’의 위치 및 자세를 측정하면서 재접근, 멕시코 앞바다 상공에서 도킹했다./조선
[1998년] 나이지리아의 재야지도자 모슈드 아비올라 옥중 사망
← 나이지리아의 자수성가형 재야지도자 모슈드 아비올라(1993년)
나이지리아 군사정부의 정치범 석방약속에 따라 곧 풀려날 것으로 기대됐던 재야지도자 모슈드 아비올라(60)가 1998년 7월 7일 민주화를 촉구하기 위해 방문중인 미국 대표단을 면담하는 도중에 돌연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이 군부 지도자들과의 협상을 통해 그의 석방 약속을 얻어냄으로써 부풀어 올랐던 이 나라 민주화에 대한 기대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었다.
아비올라는 나이지리아에서 민주화운동의 구심점이자 상징이었다. 빈농출신으로 백만장자의 사업가로 자수성가했다가 정치인으로 변신한 뒤 투옥됐으며 국제사회의 지원으로 석방을 앞두고 옥중에서 사망한 비운의 정치인이다. 빈농집안 출신인 아비올라는 스코틀랜드 글래스고대에서 경제학을 전공, 회계사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뒤 1971∼88년 미국 통신회사 ITT의 아프리카·중동 지점장을 지내면서 부를 축적, 수산업에서 출판업까지 거대한 기업군을 일으켰다.
1979년 정계에 진출, 서방에 노예제도 피해보상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쳐 전국적 인물로 부상했다. 1993년 대선에서 야당 사회민주당 후보로 출마 사실상 승리했으나 당시 군부실권자 이브라힘 바반기다에 의해 대선이 무효화됐다. 1994년 대통령임을 자임하며 군부에 정면도전 하다가 그 해 무혈쿠데타로 집권한 사니 아바차에 의해 국가반역죄로 투옥됐었다./조선
[1996년]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국내 첫 폐이식 수술
← 폐이식 수술 장면
국내 최초로 1996년 7월 7일 폐이식 수술이 성공했다.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은 이두연 교수의 집도로 이날 새벽3시부터 오후2시까지 진행된 수술에서 뇌사상태에 빠진 환자의 폐를 폐섬유증을 앓아오던 황규영씨에게 이식했다. 폐이식 수술은 1963년 미국에서 처음 시도된 뒤 이때까지 전세계에서 3천여건 정도가 이뤄졌으나 국내에서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폐이식 수술은 거부반응, 기관지 연결부 파열 등의 부작용 가능성이 높고 위험성이 높아 그동안 국내에서는 시도되지 못했었다. 이번 폐이식 수술은 지금까지 국내의료진이 시도한 심장 신장 간 췌장 각막 이식에 이어 마지막 과제로 남았던 6번째 장기이식 수술이었다./조선
[1988년] 노태우 대통령,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 발표(7ㆍ7선언)
← 7.7선언을 발표하고 있는 노태우 대통령
노태우 대통령은 1988년 7월 7일 1.남북한 동포간의 상호교류 및 해외동포들의 자유로운 남북왕래 2.이산가족 교신,상호방문 주선 3.남북한간 물자거래, 문호개방 4.우방국과의 북한무역 불반대 5.대결외교 지양, 국제무대 협력 6.북한은 미일, 한국은 중소와의 관계 개선 등 6개항을 골자로 한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을 발표했는데 이를 7ㆍ7선언이라 한다.
즉, 지금까지의 북한과의 체제우위적 대립관계를 탈피, 선의의 동반자관계로 발전시키며 또 다른 체제로 인정, 남북한이 상호교류를 통해 사회 경제 문화 부문에서 공동체로 통합해 나가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적 공동체로 발전시켜 궁극적으로 통일을 실현한다는 통일방향을 제시한 것이다./조선
[1950년] UN안보리, UN군 최고사령부 설치안 가결
1950년 6월 27일 안전보장이사회는 찬성 7, 반대 1, 기권 2, 결석 1로 유엔 회원국들이 동 지역에서의 군사적 공격을 격퇴시키고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필요한 원조를 대한민국에 제공할 것을 권고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6월 27일의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와 회원국이 제공하려는 원조형식에 관하여 보고해 줄 것을 요구한 6월 29일의 유엔 사무총장 서한에 대한 회원국들의 반응은 신속하였고, 압도적인 지지를 표시하였다. 각종 원조제공을 더욱 효과적으로 이용하며, 대한민국 방위작전을 통일화하기 위하여 안전보장이사회는 7월 7일에 7:0, 기권 3, 결석 1로써 군대와 기타 원조를 제공하는 국가들이 미국이 지휘하는 ‘통합사령부’에 집결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1946년]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3열사 국민장 엄수 후 효창공원 묘역에 안장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그동안 반역의 집으로 감시를 받아오던 윤의사의 집은 의사댁으로 일컬어지기 시작한다.
8월 16일, 덕산에서 조인원 외 3백명이 회의를 열고 윤봉길 의사 유해봉환위원회를 발촉한다.(위원장 조인원, 총무 정인영)
1946년 5월 초, 제일동포 서상한·박 열·이강운 등이 윤의사 유해를 찾게 된다. 사흘동안 이곳 저곳을 팠으나 발견하지 못했는데 윤의사 사형 당시 일본국군묘지 관리인 부인이던 노파(80여세)가 일러주는 쓰레기 하치장을 파서 가매장된 윤의사의 관, 십자가 형틀과 기타 유품을 순국 14년만에 찾아낸다.
5월 중순, 윤의사를 비롯한 이봉창·백정기 등 3열사의 유해가 부산에 도착한다. 부산 동래국민학교에 빈소가 마련되었다
5월21일, 부산 대신동 고설운동장에서 3열사 추도실이 엄수된다. 정부에서 마련한 임시 특급열차 관으로 서울에 도착한 유해는 태고사(현 조계사)에 봉안되고 장례 준비위원회가 구성된다.
7월7일, 10여만의 추도인파가 참석한 가운데 서울운동장에서 윤봉길·이봉창·백정기 등 3열사의 유해가 처음 국민장으로 엄수, 효창공원 묘역에 안장된다. blog.empas.com /Google
[1945년] 조선국민의용대 결성
연합군이 1945년 4월 4일 오키나와[沖縄]상륙해오자 일제는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우겠다는 본토결전(本土決戰)을 내세웠는데, 이에 의한 동원체제가 '국민의용병역법'에 기초한 국민의용대의 편성이었다. 조선국민의용대는 1945년 6월 16일에 발표된 '조선국민의용대조직요강'에 의해 성격과 편제 등이 결정되었는데, "전국의 현 단계에 대처하여 국민의 결속을 강고히 하여, 왕성한 황국 호지(護持)의 기백하 전력의 비약적 증강을 기하는 동시에 정세가 긴박할 경우에 적 격멸에 총궐기하는 태세를 확립"할 것을 내세웠다. 조선국민의용대는 지도조직·지역조직·직역(職域)조직·특기대(特技隊)로써 편제되었는데, 지도조직은 조선총사령부 및 도(道)사령부의 지도위원회로 구성되었다. 지역조직은 각 부·읍·면을 구역으로 했으며, 정(町)·부락·애국반을 단위조직으로 삼았다. 또한 관공서·회사·사업장 등에는 직역 국민의용대를 조직했고, 학교는 학도대로써 국민의용대의 임무를 담당했다. 대원은 연령의 제한이 없었으나 대체로 만 12~65세의 남자와 만 12~45세의 여자로써 편성했으며, 소년대·청년대·장년대·예비대의 남자대와, 소녀대·여자청년대·여자장년대의 여자대를 두었다. 1945년 7월 7일 국민의용대 조선총사령부가 조직되면서, 조선국민의용대는 13도를 비롯해 소읍·부락과 산촌 단위에까지 그 조직결성이 강행되었다. 조선국민의용대는 조선인을 총알받이로 내모는 일제의 말기적 동원체제였다.
[1937년] 노구교(蘆溝橋)사건 발발
← 노구교 동쪽 기슭에 위치한 ‘노구효월(蘆溝曉月)’비석 앞에 선 일본군.
중일전쟁 당시 루거우차오를 수비하는 중국군 병사 →
1937년 7월 7일 밤 10시반, 베이징 루거우차오(蘆溝橋) 부근에 주둔 중인 일본군 1개 중대를 향해 10여발의 총성이 울렸다. 루거우차오는 베이징 서남쪽 8km 지점에 위치한 융딩장(永定江)에 놓인 다리로, 일찍이 마르코 폴로가 동방견문록에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라고 격찬했던 곳이다.
이날의 총격이 일본군의 자작극인지 중국의 항일세력에 의한 것인지는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당시의 일본군 중대장은 이를 중국측의 소행으로 생각하고 상부에 보고했다. 인원을 점검해보니 신병 1명까지 행방불명이었다. 신병은 곧 돌아왔으나 귀대 사실이 상부에 늦게 보고되는 바람에 상황이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발전했다. 일본군이 중국군을 향해 공격을 개시한 것이다. 다행히 전면전은 아닌 터라 현지의 양군(兩軍)은 사태 확산을 막기 위해 정전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이 사건을 ‘중국측의 계획적 무력항일’로 단정하고 파병을 발표하자 중국의 국민당 정부도 대일항전을 내걸고 이에 맞섰다. 일본은 3개 사단을 파병한 데 이어 28일에는 베이징과 톈진에 대한 총 공격을 감행했다. 8년간에 걸친 중·일전쟁은 이렇게 시작됐다. /조선
[1930년] ‘명탐정 셜록 홈스’의 작가 코넌 도일 사망
← 영국의 추리 소설가 코넌 도일.
영국의 추리 소설가 코넌 도일이 1930년 7월 7일 사망했다. 에든버러에서 태어나 그곳의 에든버러대학을 나온 도일은 개업의로 일하면서 틈틈이 소설을 썼다.
도일이 소설속의 주인공으로 탄생시킨 셜록 홈즈는 도일보다 더 유명해 사립 탐정의 대명사로 전세계에 알려졌다. 1887년 발표된 ‘주홍색의 연구’에 처음 등장한 홈즈는 단편소설이 ‘스트래드’지에 연재되자 사람들의 호평을 받았다. 홈즈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은 몇 번이나 중단되었으나 독자들의 성화로 연재가 계속되어 장편소설 4편, 단편 소설 57편으로까지 이어졌다.
의사를 겸하면서 소설을 쓴 도일은 보어전쟁때 군의관으로 출전, 공을 세워 Sir 칭호를 받기도 했다. 그는 추리소설을 보급하는데 한 몫을 했을 뿐만 아니라 역사소설 ‘마이카 클라크’ 과학소설 ‘잃어버린 세계’ 등도 썼다. /조선
[1907년] 시인 신석정(辛夕汀) 출생
← 신석정
1907. 7. 7 전북 부안 ~ 1974. 7. 6.
1930년대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했고, 주로 전원적인 시를 썼다. 특히 한용운의 영향을 받아 경어체를 많이 사용했다. 본명은 석정(錫正), 아호는 석정(夕汀 : 釋靜·石汀), 필명은 소적(蘇笛)·서촌(曙村).
생애와 활동
부안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서 한문을 공부했다. 1930년 서울로 올라와 중앙불교전문강원에서 박한영의 가르침을 받아 1년 동안 불전(佛典)을 배웠으며, 이때 회람지 〈원선 圓線〉을 편집했다. 6·25전쟁 뒤 태백신문사 고문을 지냈고, 1954년 전주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1955년 전북대학교에서 시론을 가르쳤다. 1961년 김제고등학교 교사, 1963년부터 정년퇴직할 때까지 전주상업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1967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전라북도 지부장을 역임했다.
문학세계
1924년 〈조선일보〉에 '소적'이라는 필명으로 시 〈기우는 해〉를 발표한 뒤, 〈선물〉(시문학, 1931.3)·〈나의 꿈을 엿보시겠습니까〉(문예월간, 1932.1)·〈봄의 유혹〉(동방평론, 1932.7~8) 등 초기에는 목가적인 전원에 귀의하여 생(生)의 경건한 기쁨과 순수함을 노래했다. 그뒤 잡지 〈시원〉·〈조광〉 등에 시를 계속 발표하여 시인으로서의 위치를 다졌다. 1939년 첫 시집 〈촛불〉을 펴냈고, 1947년 2번째 시집 〈슬픈 목가〉를 펴냈다. 시집 〈슬픈 목가〉는 1935~43년에 쓴 시 33편으로 꾸며졌다. 6·25전쟁 이후 현실 사회에 대한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그밖에 시집으로 〈빙하 氷河〉(1956)·〈산의 서곡〉(1967)·〈대바람 소리〉(1970) 등을 펴냈는데, 이중 〈산의 서곡〉은 이전의 시풍과 달리 현실과의 갈등을 노래한 시들로 꾸며졌다. 저서로 〈중국시집〉(1954)·〈매창시집〉(1958)과, 이병기(李秉岐)와 함께 펴낸 〈명시조감상〉(1958) 등이 있다. 1958년 전라북도문화상, 1968년 한국문학상을 받았다./브리태니커
[1901년] ‘알프스 소녀 하이디’의 작가 슈피리(Johanna Spyri) 사망
← Johanna Spyri
1827. 6. 12 Hirzel, Switzerland ~ 1901. 7. 7. Zürich, Switzerland
취리히 근교 힐첼 출생. 의사의 딸로, 14세 때 취리히로 가서 프랑스어와 피아노를 배웠다. 1852년 변호사 B.슈피리와 결혼하였는데, 남편은 시청에 근무하였고, 그녀는 고아원, 불량소년 수용소, 여학교 교육, 상담역으로 있었다. 1870년경에 《헤르고란트의 소녀 이야기》를 썼다. 1884년 남편과 외아들을 잃은 후로는 독서와 여행과 저작에 전념하였다. 저서는 모두 ‘아이들과 아이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로, 건강한 생활로 가득차 있고 종교적인 깊이도 있다. 그녀의 작품 중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 Heidi》(1880∼1881)가 가장 유명하며, 세계 아동문학의 고전이 되어 있다.
[1887년] 러시아 태생의 화가·판화제작자·디자이너 샤갈(Marc Chagall) 출생
← 샤갈(1956)
1887년 7월 7일 태어남 / 1985년 3월 28일 죽음
샤갈은 내면의 시적 호소력을 이용하여 상징적이고 미학적인 형식 요소들과 개인적 경험에서 나온 이미지를 결합한 작품들을 그린 화가·판화제작자이며 디자이너이다. 러시아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학교에서 공부하고 1910년 파리로 갔다. 그곳에서 표현주의 화가인 수틴과 색채추상화가인 로베르 들로네, 입체파 화가인 페르낭 레제, 앙드레 로트 등과 아방가르드 시인인 블레즈 상드라르, 막스 자코브, 기욤 아폴리네르 등을 만났다. 또한 파리의 미술관과 화랑에서 본 인상파와 후기인상파 및 야수파 화가들의 그림에서 영향을 받았다. 샤갈은 파리에서 해마다 열리는 '독립미술가전람회'와 '가을 살롱전'에 출품했고, 1914년에는 베를린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열어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러시아로 돌아갔다가 1922년 다시 파리로 왔고,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유대인에 대한 탄압을 피해 1941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샤갈은 그의 작품에 러시아의 민담이나 슬라브 민족의 환상, 유대인의 속담과 전설, 러시아의 전원 풍경, 어린 시절의 꿈과 같은 갖가지 추억을 화려한 색과 특유의 능란한 붓질로 묘사했다. 그 결과 그의 걸작들은 현대의 작품들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시각적 은유의 수준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는다.
[1860년]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지휘자 말러(Gustav Mahler, 1860~1911) 태어남
보헤미아의 칼리슈트 출생. 부모는 유대인 상인이었으며, 어린시절부터 음악적 재능을 발휘하였다. 10세 때 피아노 리사이틀을 처음으로 열었고, 15세 때 빈음악원에 입학하여 3년 후 졸업할 때까지 브루크너 ·월프 등과 교제하여, 그들의 영향도 받았다. 1877년부터 3년간 빈대학 철학과에서 역사와 음악사를 공부하고, 그 사이에 초기 작품인 《피아노 5중주》 《피아노와 바이올린소나타》, 오페라 《슈바벤의 에른스트공》 등을 발표하였으나, 그 후 파기되어 현존하지 않는다.
1880년부터 지휘활동을 시작하였으며, 1883년에는 바이로이트에서 바그너의 《파르시팔 Parsifal》에 접하여 크게 영향을 받았다. 1888년 부다페스트 왕립오페라극장의 지휘자, 1891∼1897년 함부르크 시립오페라극장의 지휘자를 거치는 동안, 작곡가로서의 명성도 얻었다. 1897년 빈 궁정오페라극장의 지휘자로 임명되어, 1908년까지 재직하였고, 그 후 뉴욕에서 살았으나 1911년 심장병으로 지휘활동이 불가능해지자 빈으로 옮겨 거기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미완성인 제10번을 포함하여 모두 10개의 교향곡을 썼으나 본질적으로는 가곡 작곡가의 면이 강했고, 교향곡은 모두 가곡 작곡과 지휘활동의 체험에서 얻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교향곡 9곡 이외에도, 중국시를 독일어로 번역한 가사로 된 관현악곡 《대지의 노래 Das Lied von der Erde》(1908), 자작의 가사로 된 두 가곡 《한탄의 노래 Kindertoten lieder》(1880) 《젊은 나그네의 노래 Lieder eines fahrenden Gesellen》(1884) 등이 있다. 피아노반주를 좋아하지 않고 관현악반주로 된 가곡을 써서, 후세에 가곡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의 음악세계는 때로는 절망감이나 염세관(厭世觀)을 강하게 나타내기도 하고, 때로는 괴기한 해학이나 초연한 탐미(耽美)를 보이기도 하였으며, 만년에는 종교적이라고도 할 만한 고독한 만족감을 표시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그 어느 것이나 대편성의 관현악을 사용하고 있으며, 맑은 색채를 풍긴다. 그는 근대음악 발전의 과도기에 속한 인물로 낭만파적인 교향곡의 마지막 작곡가라고도 할 수 있다.
[1752년] 프랑스의 자동방직기 발명가 자카르(Jacquard, Joseph-Marie) 출생
← Joseph Marie Jacquard
1752. 7. 7 ~ 1834. 8. 7
프랑스의 발명가. 1801년 발표한 '자카르직기'는 한 조(組)의 카드에 많은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사용하여, 아주 복잡한 무늬를 자동적으로 쉽게 직조할 수 있어 견직물 공업에 혁신적인 변혁을 가져왔다.
리옹 출생. 제본(製本)·활자주조소의 도제(徒弟)로 일하다가, 정교한 무늬를 짜내는 문직기(紋織機) 개량에 뜻을 두게 되었다. 1801년 발표한 '자카르직기'는 한 조(組)의 카드에 많은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사용하여, 아주 복잡한 무늬를 자동적으로 쉽게 직조할 수 있어 견직물 공업에 혁신적인 변혁을 가져왔다. 1806년 그의 발명은 칙령(勅令)으로 국가에서 매수하였으며, 그 대가로 연금 지급 이외에도 국가로부터 많은 우대를 받았다. 한국에서는 그가 발명한 기계를 대구지방을 위시하여 여러 직물공장에서 현재도 많이 사용하고 있다.
그밖에
2005년 영국 런던에서 지하철 버스 연쇄 폭탄테러 발생
2003년 국내 사스(SARS) 비상 방역 114일 만에 종료
2003년 이세돌(20) 후지쓰배 세계바둑 2연패, 최연소-최단기간 9단 달성
1998년 박세리, 98US여자오픈골프대회 우승
1994년 천연기념물 324호 ‘붉은색 큰 소쩍새’ 발견
1983년 대우 35만톤급 제2독 준공
1982년 신한은행 업무개시
1981년 태양전지 비행기 ‘솔라 챌린저’호 도버해협 횡단비행 성공
1981년 전두환대통령 아세아방문에서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과 정상회담
1980년 영국, 세계최초로 국제전송우편제 실시
1979년 미국-중국, 무역협정 조인
1978년 솔로몬군도, 영국으로부터 독립
1960년 대구매일신문, 매일신문으로 개칭
1952년 제1차 개헌(발췌개헌)에 의한 개정헌법 공포
1950년 미국, 최초의 칼라TV 방송
1950년 주한유엔군 창설. 한국군, 유엔군에 편입
1950년 영국군함대 한국참전
1947년 중국 공산당, 민주연합정부수립과 토지개혁 실시 선언(7.7선언)
1944년 독일의 사진작가 잘로몬 사망
1944년 장준하 선생, 일본군 부대 탈출
1944년 미국군, 사이판섬 점령
1939년 독일, 유태인의 지위에 관한 시민법을 공포
1938년 팔레스타인에서 아랍-유태인 충돌
1933년 소록도 나병촌 완공
1928년 치외법권 등 불평등조약 폐기를 선언
1926년 장개석, 중화민국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취임
1923년 홍명희,윤덕병. 신한사상연구회 조직
1898년 황국협회 조직
1896년 영국서 국제협동조합연맹(ICA) 창립
1884년 한국-러시아 수호통상조약 조인
1861년 성(性)이 특정 염색체에 의해 결정됨을 최초로 발견한 미국의 생물학자 스티븐스 출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