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정리하던 중 낡은 오래된 사진 한 장이 눈에 띈다
이 사진을 보니 문득 70여 년 전 6.25 당시 피란을 못 간 우리 가족은 서울에 머물러 있다가 아버지는 경찰에 잠시 몸담으셨는데 어느 친한 친구인 빨갱이의 고발로 원수의 공산당 놈들 한테 끌려 가셨기에 1.4 후퇴 시는 제일 먼저 피난민 대열에 끼여 얼어붙은 서빙고의 한강 위를 걸어서 12살인 나는 가방 하나를 달랑 메고 어머니는 이불 보따리를 지신체 6살 , 8살두동생를 앞 세우고 돈도 한 푼 없이 안성에 산다는 친척 집을 향해 길도 모른 체 피난민 대열에 밀려 기약 없이 하루에 10리도 좋고 마냥 가다가 어느 농가 들려 사정 이야기를 하고 무료로 민박에 밥까지 공짜로 얻어먹으며 안성을 향해 정처 없이 피난 길을 가고 있었다
엄동설한에 눈 덮인 인적이 드문 산길(경기도안상군 삼죽면 가치레미)을 우리식구만 넘어 가느 라니 숲 속에서 느닷없이 흰 누비 솜 옷에 누빈 솜모자를 쓴 군인 대여섯이 총를 겨눈 체 "정지"라고 웨치며 나오더니 신분을 확인하려고 한다
순간 당시 중공군은 누비 옷을 입었다고들었기에 꼼작 없이 죽는 줄 알았는 데 이것저것 묻는데 보니 한국 말을 하니 북한 괴뢰군인 줄 알았다
당시 나는 솜바지 저고리에 코트 대신 검은 경찰복 상의를 입고 있었기에 꼼작 없이 죽는 줄 알았다
그런데 한참 있다 보니 중국말이나 이북말씨가 아니기에 우리는 경찰인 아버지가 북으로 끌려가는 바람에 살려고 피난가는 길이라고 이야기해도 잘 믿지 않는 것 같기에 내 가 입은 경찰복 상의며 메고 있던 가방 속에 철도경찰학교 졸업식사진을 꺼 내보이고 졸업장까지 보여주었더니 어떤 민가로 우리를 끌고 가서 조사를 더 하더니 피난 간 동네 어느 농가를 우리 거처로 주고 자기들 밥을 해주라고 해서 그 부대가 북진할 때까지 그 곳에 머물러있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이천 부근이 켄서스 방어라인인 것 같았다)
그곳에 머물면서 어느 날 동네 아이들과 나무를 하러 동네 야산갔다가 생전 처음 나란히 엎드린체 누워있는 여러 구의 시체를 보았는 데 군인들이 사살 후 눈으로 덮어 놓았섰는데
봄이 되어 눈이 녹으니 드러 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더욱 놀란 것 은 그들도 우리처럼 그 고개를 넘다 신원확인이 안 되어서 적의 오열로 판단되어 죽음을 당했는데 총살이 아니라 총검으로 사살되었다고 한다
후에 안 일이지만 1.4 후퇴 당시 중공군이 피난민으로 가장 전선을 통과후 후방에서 교란작전을 했다고 한다
당시 군인들이 하는 얘기를 들으니 총검으로 사람을 찌르면 처음에는 총검이 잘 안 들어가는데 두 번째는 잘 들어간다고하는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 데 난 총검술 훈련을 할 때마다 그 생각이 났다
만약 그때 이 사진한장이 없었더라면 우리도 총검술 표적이 되어 저세상으로 가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에게 쉴 곳을 마련 해 준 부대는 6사단 2 연대 2대대 8중대 수색소대였는데 그 중에 청량리 휘경동 위생병원에 부근에 살다가 입대한 조 일병인가 하는 분은 전쟁이 끝나면 만나자고 주소와 아름을 적은 성경책까지 주었는데 애지중지 늘 간직하고 있었는데 그만 분실하고 말었다
그 분은 서울 탈환 전에는 경춘선 마치터널 부근에서 괴뢰군 군용수송열차 폭격유도등 게리라 활동도 했다고 하던데
6사단 2 연대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그 군인이 생각 난다
전투 중 전사하지 않고 살아 있다면 90이 넘었을 텐테
전쟁 중 압록강 초산에 제일 먼저 도착 압록강물을 이승만 대통령 한데 수통에 떠다가
바친 부대가 6사단 2 연대였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 군인이 생각난다 우리를 사지에 구한 오래된 사진을 보고 옛 생각이 나서 몇자 적어본다
우리 가족의 생면을 구해준 아버자의 철도경찰학교 졸업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