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의성’하면 대부분 마늘을 떠올린다. 의성에 발을 들여놓은 후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단어가 ‘의성’이란 이름이다. ‘의로운 성’이라고 이름을 붙일 만큼 의로운 선비가 많았고, 반촌(班村) 마을이 많은 곳이 바로 의성이다. 또 이곳에는 오랜 역사를 지닌 국보급 문화재는 물론 공룡발자국화석지, 빙계계곡, 천년 세월을 품은 고찰과 고분군 등도 자리 잡고 있다.
이번 답사는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는 의성의 전통마을을 찾는다. 내비게이션으로 산운마을을 찾기 어려우면 의성빙계계곡을 입력하면 된다. 의성에서 빙계계곡을 가는 중간에 안내판이 있으므로 쉽게 찾을 수 있다.
●7000만 년 전 화산폭발이 만든 ‘금성산’과 ‘비봉산’
금성면 산운리에 자리한 산운마을은 일명 ‘대감마을’로 불리며, 400년 이상을 이어온 영천이씨의 집성촌 즉 씨족마을이다. ‘산운(山雲)’이라는 이름은 신라시대 때 ‘금성산 수정계곡 아래 구름이 감도는 것이 보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풍수학자들은 산운마을이 금성산(531m)과 비봉산(671m)을 병풍 삼아 위천이 감돌아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으로 설명한다. 또한 ‘선녀가 거울 앞에 앉아 머리를 빗는 절묘한 형국’의 절묘한 지세로 가히 풍수의 교과서라고도 말한다. 굳이 풍수를 따지지 않는 보통 사람에게도 산운마을은 명당이자 길지로 느껴진다.
경북 의성의 ‘산운마을‘은 금성산과 비봉산을 병풍 삼아 위천이 감돌아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입수의 지형이다. 이종호 제공
금성산은 태백산과 보현산 줄기의 마지막 기가 뭉쳐 이룬 산이며, 비봉산은 봉황이 날아가고 있는 형상이라 해서 비봉이라 이름 붙여졌다. 사실 두 산은 백두산보다 더 오래된 우리나라 최초의 화산산으로 지리학자들에게는 매우 잘 알려진 곳이다.
원래는 이 지역은 중생대 백악기(약 7000만 년 전) 화산폭발에 의해 화산 분화구가 내려앉은 ‘칼데라’였는데, 오랜 세월 풍화와 침식 작용을 거치며 화산의 밑둥치만 타원형으로 남은 지형이 됐다. 참고로 칼데라는 화산지역에서 볼 수 있는 대규모의 화구모양의 와지다. ‘화구’는 지름 1km이지만 칼데라는 이보다 큰 지름 3km 이상의 화구다. 칼데라의 어원은 포르투갈어의 칼데리아(calderia)에서 유래하는데 솥(kettle)이나 냄비(caldron)라는 뜻이다.
금성면 탑리나 가음면 이리 등에서 보면 높은 산이 뭔가를 둥글게 감싸면서 이어져 있는 듯한 모습이 어렴풋이 보인다. 이는 금성산과 인근 비봉산을 포함하는 타원형의 화산암을 둘러싸고 발달한 지름 8∼10km의 둥근 고리모양의 단층이다.
이 단층은 바깥쪽에서는 8∼20도 정도로 완만한 기울기를 보이다가 안쪽에서는 30∼60도의 급경사를 이루며 안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이는 단층 안쪽이 꺼져 내려앉았다는 증거로, 이런 단층의 경사는 탑리에서 사곡면 쪽으로 가는 길가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약 1억 년 전 공룡 발자국이 발견된 제오리(천연기념물 373호)의 퇴적암반이 70도 이상의 경사로 금성산 쪽으로 기울어진 것도 이 때문이다.
●금성산 정상의 평지는 천하제일의 명당
금성산은 또 다른 전설로도 잘 알려져 있다. 금성산 정상의 평지가 천하제일의 명당이라 이 산에 조상묘를 쓰면 당대의 만석꾼이 되지만, 주변 지역은 3년간 가뭄이 든다는 것이다. 1970년대만 해도 인근에 가뭄이 들면 주민들이 누군가 이 산에 묘를 쓰지 않았는지 확인했다고 한다.
산운마을이 얼마나 특별한지는 이태능(李泰能)이 ‘옥녀사(玉女辭)’에서 다음과 같이 읊은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내 고향은 옥경(玉鏡)이요. (중략)
금성산 상상봉에 거처한지 오랜 지라. 천마봉 옛 이름은 옥녀로 고쳐 짓고 이 땅에 처음 올 때 황학(黃鶴)타고 내렸기로 이 산 이름 금학이요 앞산에 퉁소 불 때 봉황이 춤추기로 그 이름 비봉이요. (중략)
이 아래 큰 동네는 만산채운 얽혔으니 상서로운 빛이 찬란키로 그 이름 산운이라.’
애정촌 아니, ‘대감촌’ 있다
한국인이 그 많던 전통마을이 사라졌음을 아쉬워하는 이유는 하나하나의 살림집들이 모여서 이뤄낸 교훈이 크기 때문이다.
각 가옥은 마을 전체 구조와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집으로 들어가는 길은 개인의 재산과 공동체적 편리성이 타협해서 나온 결과다. 더구나 마을에는 집만 있는 게 아니라 공공장소인 정자와 정자나무, 재실 등이 있어 공동체 의식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무엇보다도 마을은 지역 공동체의 물리적 현상이라는 데 중요성이 있다. 전통마을은 현대처럼 철저한 마스터플랜에 의해 계획된 게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시설을 짓더라도 함께 모여 결정했는데 설사 주민 간에 갈등이 있더라도 개인과 전체의 이익을 일체화하면서 공동마을을 형성했다.
산운마을 현황도. 예전 전통마을은 미리 계획해서 세우지 않았지만 서로 양보하고 도와가면서 마을을 꾸몄다. 이종호 제공
현대화의 물결은 이런 개념을 약화시켜 당초 모습을 모두 알아낼 수는 없다. 그래도 남아있는 한국 전통마을을 보면 남다른 감동을 얻을 수 있다. 특히 의성의 산운마을은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마자 남다름을 느낄 수 있다. 학록정사를 비롯해 곳곳에 400여 년이나 된 많은 회화나무가 반기기 때문이다.
산운마을에 회화나무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이곳에 과거 급제자가 많았고 벼슬아치들이 많이 살았다는 반증이다. 또 벼슬아치가 많았다는 것은 남다른 마을 조성이 가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산운마을을 명문으로 만든 三父子
산운마을의 역사는 조선조 명종, 선조 때 고관을 역임한 영천이씨 학동(鶴洞) 이광준(李光俊, 1531?1609)이 입거하면서 시작한다.
이광준은 명종 16년(1561)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 학유 등을 거쳐 선조 25년(1592) 강릉부사가 된 정통 관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직접 전투에 참가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워 통정대부(정3품 당상관)로 승진했고,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선조 36년(1603) 형조참의를 거쳐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이후에는 나이가 많아 고향으로 돌아와 은거하면서 ‘학동일고’를 남겼다.
이광준은 아들 둘을 남겼는데 형 경정(敬亭) 이민성(李民宬)은 선조 30년(1597), 아우 자암(紫巖) 이민환은 선조 33년(1600) 문과에 급제했다.
경정은 선조 35년(1602)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는 등 중앙정부에서 활약하다가 인목왕후 폐비사건 때 이를 반대하고 고향에 내려왔다. 인조반정 후 사헌부장령에 복직했는데 또 다시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가서 인조반정의 정당성을 잘 이해시킨 공로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전답과 노비를 하사받는 등 국가로부터 공을 인정받았다.
인조 7년(1629) 형조참의에 제수됐으나 병으로 사직한 후 곧바로 사망했다. 올곧은 성격으로 의리가 강하고 직언을 잘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시문과 글씨에 뛰어나 명나라의 학사들이 그를 이태백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남긴 시가 무려 1천여 수에 이르며 장대서원(藏待書院)에 제향되고 저서로 ‘경정집’, ‘조천록(朝天錄)’ 등이 있다.
아우 자암도 형 못지않다. 선조 36년(1603) 평안도 암행어사를 역임했고,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때 왕을 호종했다. 병자호란 이후 동래부사, 호조참의, 형조참판에 임명됐으며 인조 23년(1645) 경주부윤이 됐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충간(忠簡)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견주견문록’과 ‘자암집’을 남겼다.
●현대엔 애국지사 배출…유교문화권으로 개발 중
산운마을을 명문 마을로 만든 건 이들 삼부자뿐 아니다. 학동의 7대손 운곡 이희발(李羲發, 1768∼1849)은 마을의 세를 더욱 확장했다.
운곡은 정조 19년(1795) 문과에 급제한 뒤 규장각의 초계문신(抄啓文臣, 정조가 인재 양성을 위해 선발한 신하)이 됐다. 순조 때 대사간, 헌종 초기에 승지가 됐으며 헌종 13년(1847) 병조참판, 헌종 15년(1849) 형조판서로 승진할 정도로 관운이 좋은 사람이다. 나이가 많아 관직에서 물러나자 조선 정부는 그에서 희정(僖靖)이란 시호를 부여했다.
입향시조부터 계속 급제자가 배출된 산운마을은 유·학·절·효로 명문을 이루면서 경상도의 대표적인 양반가를 이뤄 어느 마을보다 자부심이 드높았다. 이런 전통이 계속돼 현대에도 이태직(李泰稙), 이태학(李泰學)을 비롯한 애국지사를 배출했다. 이 마을이 대감촌, 양반마을로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재 고택 40여 가구를 비롯해 80여 가구 200여 명이 살고 있는 산운마을은 한국전쟁 때 상당 부분 소실됐다. 그러나 현대화의 회오리바람에도 전통을 간직한 마을임이 인정돼 경북의 유교문화권 개발 사업으로 마을 전체 건축물을 개·보수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사대부 집안에 남근석이 수십 개?
산운마을에는 여타 전통마을처럼 지정문화재가 많지 않은 대신 남다른 향취가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입향시조인 학동 이광준을 위해 지은 학록정사(경상북도 유형문화재 242호)를 비롯해 소우당(素宇堂, 중요민속자료 237호), 운곡당(雲谷堂, 경북문화재자료 374호), 점우당(漸于堂, 경북문화재자료 375호) 등이 문화재로 지정돼 있으며 수백 년을 지켜 온 수십 채의 전통 고가옥들이 즐비하다.
●명문 三父子 기리는 정자, ‘학록정사’
영조 26년 산운마을 입향조인 이광준을 기리기 위해 세운 ‘학록정사‘의 모습. 건물 전면에 온돌방을 위한 아궁이가 있는 게 특징이다. 이종호 제공
마을 초입에 있는 학록정사는 영조 26년(1750) 입향조인 이광준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원래 정사는 정자와 같은 개념도 있는데 이곳 학록정사는 제사와 교육 기능도 갖고 있다. 팔작지붕에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중앙에 소위 큰마루(대청)이 있고 좌우에 2개의 방이 있는데 이는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이다.
건물 전면에 온돌방을 위한 아궁이가 있는 게 특징이며, 팔작지붕과 문틀 등은 당시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공간은 전학후묘(前學後廟) 형태인데, 이는 강학(講學) 구역이 앞쪽에, 신실(神室) 구역이 뒤쪽에 있는 배치법이다.
왼쪽은 학록정사와 광덕사가 함께 있는 모습. 앞의 건물이 학록정사다. 오른쪽은 광덕사의 모습. 광덕사는 학문을 드높인 이광준 부자의 불천위가 모셔져 있다. 이종호 제공
학록정사에서 뒤쪽 우측에 있는 광덕사를 바라보면 ‘이렇게 위풍당당한 사당이 있을 수 있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광덕사는 입향조인 학동 이광준과 아들인 경정 이민성, 자암 이민환의 불천위 3위를 모신 사당이다. 광덕사도 앞쪽에서 후학을 양성했으며 정면 우측에 관리사가 있다.
학록정사 입구에 있는 문을 소시문이라 부르는데 이 마을이 소시랑골로 들어가는 입구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소시랑골은 소씨가 시랑이란 벼슬을 한데서 유래됐다. 학록정사란 글은 표암(豹庵) 강세황(姜世晃)이 썼다.
●소우당, 경주 안압지 닮은 연못 있는 ‘원림’ 유명
산운마을에서 규모가 가장 큰 ‘소우당‘의 입구(왼쪽)와 사랑채(오른쪽)의 모습. 이종호 제공
학록정사에서 오늘쪽으로 논을 끼고 왼쪽으로 들어가면 산운마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집인 소우당이 나온다. 영천이씨의 종가이기도 한 이 가옥은 경북도 중요민속자료 237호다.. 1800년대에 이가발 선생이 세웠고, 대한제국시대인 1880년대에 학자이자 서예가,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던 이홍(李鴻) 선생이 개축했다.
이 가옥은 ‘ㄱ’자형 안채와 ‘ㄴ’자형 사랑채가 안마당을 감싸고 있어 ‘튼ㅁ’자형 평면 구조를 하고 있다. 남측 전면에 ‘ㅡ’자형 문간채가 있고 문간채의 서쪽에는 외측간, 안채의 북서쪽에 내측간이 있다. 안채와 사랑채 일곽 서쪽으로 별도의 담장을 둘러 공간을 형성하고 원림(園林)을 조성했다.
소우당의 안채와 사랑채의 모습. ㄱ자형 안채와 ㄴ자형 사랑채가 서로 감싸 튼ㅁ자형 평면구조를 한 걸 볼 수 있다. 이종호 제공
원림은 본채 옆에 있는 후원인데 소우당을 유명하게 만든 일등공신이기도 하다. 1600㎡ 규모에 별채와 함께 연못과 소나무, 상수리나무 등이 어울려 남다른 운치를 더한다. 연못 규모는 작지만 어느 지점에서 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는 경주 안압지와 같은 형태로 만들었다. 조선시대 전통 조경기법은 못을 네모나게 하고, 가운데 둥근 인공 섬을 만드는 천원지방사상(天圓地方思想)인데, 그와 다르다는 점에서 이채롭다.
영천이씨 종가인 ‘소우당‘을 유명하게 만든 후원, 원림의 모습이다. 이 연못은 안압지처럼 끝이 보이지 않게 만든 게 특징이다. 이종호 제공
●100년 넘은 측백나무와 ‘남근석’
소우당의 명성을 높이는 또 다른 것은 100년 넘은 측백나무다. 이 나무는 이홍 선생이 중국 명나라 황제 묘역에서 어린 나무 두 그루를 가져와 심은 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측백나무가 흔하지만 당시만 해도 매우 희귀했다. 중국에서 측백나무는 공자(孔子)묘를 비롯해 황제의 능에 심는 성수(聖樹)로 알려져 있을 정도다.
측백나무는 소나무와 함께 선비의 절개와 고고한 기상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나무라 옛사람들이 가지고 싶어했다. 이홍 선생도 이 점 때문에 해외여행을 갔을 때 이 나무를 가져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참고로 이 나무는 석회암지대에서 회양목과 같이 자라는 경우가 많으며 키는 약 20m, 둘레는 한두 아름에 이를 정도로 크게 자란다.
측백나무는 귀한 나무였던 만큼 일화도 많다. 한방에서는 이 나무의 씨를 ‘백자인(柏子仁)’이라 부르며, 정신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전한다. 그런데 백자인의 껍질이 부인병에 특효가 있는 것은 물론 ‘아이 못 낳는 여인은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등 잘못 알려졌다. 이 때문에 먼 거리에서 사는 아낙네들이 깊은 밤 몰래 담을 넘고 뛰어 들어와 측백나무 가지를 꺾어 가는 등 많은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소우당 한 편에 있는 남근석의 모습. 사대부 집안에 남근석이 있는 경우라 특이하다. 왼쪽은 이 집에 양기기 부족한 걸 보호하기 위해 세운 남근석이고, 오른쪽은 남쪽의 나쁜 기운을 막기 위한 돌비석이다. 이종호 제공
소우당은 사대부의 집안인데 ‘남근석’이 있다는 점에서도 남다르다. 이 집에는 음기가 강해 남자들이 장수하지 못한다고 여겨 정원 한쪽 옆에 남근석을 꽂아두고 음양의 조화를 바란 것이다. 남쪽에서 들어오는 나쁜 기운을 막으려고 여러 개의 돌비석을 병풍처럼 둘러놓기도 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를 모두 남근석으로 인식한다. 한마디로 집 안에 수십 개의 남근석이 있는 셈이다.
남근석이 있는 소우당의 아름다움과 명성은 학자들과 사진작가들의 집중적인 주목을 받아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마루’와 ‘온돌’이 한 곳에…
한옥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것은 온돌과 대청마루가 있다는 데 있다. 온돌과 대청이 어떻게 한 집에 있게 됐을까. 이는 한국 특유의 환경 때문에 나온 건축구조다.
우리나라는 국토가 좁은 데 비해 기후변화가 심한 편이다. 이렇게 기온의 연교차가 큰 기후는 해양보다 비열이 작은 대륙의 영향을 많이 받으므로 ‘대륙성 기후’라고 한다. 또 계절풍의 영향을 받아 우기인 여름에 건기인 겨울보다 강수량의 차이가 크며 지역에 따라 다섯 배에서 열 배가 되기도 한다.
한국의 여름은 덥고 비가 많이 내리며, 겨울은 몹시 춥고 건조하다. 소위 고온다습, 저온저습의 기후이다. 여름에는 불쾌지수가 있으며 겨울에는 살을 에는 듯이 춥다는 표현이 딱 맞다. 마루와 온돌은 이러한 기후를 절묘하게 조화시켜 보다 쾌적한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든 아이디어의 산물이다.
한옥은 한국의 기후를 잘 반영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고온다습한 여름을 잘 나기 위한 마루(왼쪽)와 저온저습한 겨울을 지혜롭게 보내기 위한 온돌이 그것이다. 오른쪽 그림은 온돌에 뜨거운 공기를 넣기 위한 아궁이의 모습. 이미지비트 제공
온돌은 방바닥으로 온기가 들어가도록 한 구조다. 개정판 옥스퍼드 사전에 ‘온돌(Ondol)’이라는 단어가 ‘김치(Kimchi)’와 함께 실려 있을 정도로 한국의 온돌을 국제적으로도 인정받고 있다. 이 사전은 온돌에 대해 ‘아궁이에서 방바닥 밑으로 난 통로를 통해 방을 데우는 난방’이라고 적었다.
반면 마루는 여름에는 덥고 습하므로 실내의 바닥을 지면에서 높게 만들어 온·습도를 시원하게 유지토록 한 것이다. 마루에 문이 있건 없건 마루 밑은 통풍이 잘 되도록 뚫려 있고 온돌과 천정 역시 없다. 통풍이 잘되는 마루 공간은 온돌방보다 자연과 적극적으로 연계된 개방공간이다.
●‘대청’은 두 얼굴의 공간
한옥은 한 지붕 아래 ‘온돌방’이라는 폐쇄적인 겨울공간과 ‘대청’이라는 개방적인 여름공간을 같이 만들어 계절에 따라 주생활 공간을 이동시키며 생활해 왔다.
안채의 안방과 건넌방, 사랑채의 사랑, 큰방 앞의 넓은 마루를 대청이라 칭하는데, 이는 오늘날 주택의 거실에 해당하는 공간이다. 대청은 전면 또는 사방이 트여 있어 반은 외부, 또 반은 내부라고 할 수 있는 묘한 공간이다.
마당에서 대청으로 오르기 위한 기단이 있고 그 위에 댓돌이 있다. 댓돌에 신을 벗고 올라서면 앞 툇마루를 거쳐 대청으로 들어간다. 대청의 크기는 2칸에서 8칸까지 다양하며, 종가 대청의 크기는 제사 때 참여하는 인원의 수에 비례한다.
●온돌서 꼭 필요한 부엌은 방바닥보다 낮아
온돌을 설치하면 부엌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불을 지펴서 음식을 조리하는 부엌은 안방과 바로 인접했다. 일부 큰 집에는 부엌을 ‘반빗간’이라 해 별채로 독립시키기도 했다.
대개 아궁이는 안방과 면한 벽 쪽에 설치해 음식물을 조리하면서 동시에 방을 데운다. 부엌은 주택 규모에 따라 안방과 건넌방에 각각 위치하는데 안방과 접한 부엌이 주된 조리 공간이며, 건넌방 쪽은 물을 데우는 등 보조공간으로 이용됐다.
부엌 바닥은 일반적으로 방바닥보다 75~90cm 정도 낮게 했는데, 이는 아궁이에서 땐 불길을 방고래로 빨아들이도록 되어 있는 ‘온돌구조’ 때문이다.
그런데 일부 한옥에서는 두 가지 특징이 함께 보이는 경우가 있다. 중부지역에서 온돌과 대청이 합해진 집이 보이는데, 북방에서 온돌이 내려오고 남방에서 대청이 올라가 대타협 한 것이다. 한국의 기후 특성을 절묘하게 조합시킨 것으로 이는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건축 방식이다.
화산과 함께하는 오래된 저택
산운마을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돌담길의 모습. 이종호 제공
아름다운 담을 따라 안길에 들어가면 1900년에 건설된 ‘점우당(漸于堂, 경북문화재자료 375호)’이 나온다.
점우당 안채는 사랑채와 연결된 전형적인 ‘ㄷ’자형의 평면을 이루고, 맞은편에 ‘ㅡ’자형 헛간채가 있어 ‘튼ㅁ’자형의 평면배치로 남동쪽으로는 대문채가 자리하고 있다. 평면구성이나 목구조 기법에서 특별하지는 않지만 운곡당, 소우당과 함께 당대의 건축을 알 수 있는 예로 의미가 있다.
1900년대 건축 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점우당의 모습. 위의 사진은 대문에서 본 점우당이고, 오른쪽 아래 사진이 안채의 모습이다. 왼쪽 아래는 솟을대문의 모습이다. 이종호 제공
●날개 편 것 같은 고택
점우당과 담이 맞붙어 있는 ‘운곡당(雲谷堂, 경북문화재자료 374호)’은 산운마을 고가옥의 대표 중 하나다.
이 가옥은 학동 선생의 7대손인 운곡 이희발(1768?1850)이 1803년 영월부사 시절 지었고, 1940년대에 안채 일부를 다시 건설했다. 운곡은 한성 좌우윤, 영월부사를 거쳐 형조판서를 마지막으로 82세에 생을 마감한 전통 관료다. 사랑채에 걸린 운곡당의 현판은 운곡 선생의 4대손인 이홍 선생이 18세 때 쓴 친필이다.
이 집은 북쪽 금성산을 뒤에 두고 남동쪽을 향하는데 안채에 사랑방, 고방 등이 한 동으로 연결돼 있다. 평면구성은 ‘ㅁ’자형 인데 앞채의 좌우에 전면으로 나와 있어 날개집 유형에 속한다.
안채의 뒤쪽 좌편으로 사당이 있다. 성리학적 규범이 지배적이었던 조선시대에 사당을 주 건물의 좌측에 둔 것은 특이한 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성리학적 규범이 변형돼 사당의 위치를 바꾸는 것도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정통 유학자가 보면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일이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사당을 폐기하지 않고 집안에 둔 것이 갸륵하다.
점우당과 담이 붙어 있는 운곡당의 모습. 운곡당 안채는 길이 3m, 높이 2m 정도의 담장이 둘러쳐쳐 안채의 사생활을 보호했다. 이종호 제공
산운마을 전통가옥은 대부분 ‘튼ㄷ’자 형과 ‘튼ㅁ’자 형의 구조다. 하지만 운곡당은 내외담 또는 차면담이라고도 불리는 길이 3m, 높이 2m 정도의 담장이 안채 입구에 둘러져 조금 달라 보인다.
이 담장은 사랑채를 찾아오는 손님이 대문에 들어올 때 안채의 아녀자를 못 보게 하려고 만들었다. 반면 안채 마루는 높게 만들어 사랑채에 오는 손님이 누구인지 볼 수 있다. 대갓집을 건축할 때부터 이런 철저한 계획을 갖고 진행했다는 것을 보면 과거 양반들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고루한 생각만 했던 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한반도 탄생의 비밀을 간직한 산
우리나라 최초의 화산산인 금성산과 비봉산은 한반도 탄생의 비밀을 간직한 산이다. 세월의 풍화가 빚어낸 기묘함에 감탄해 많은 등산객이 이 산에 오르는 걸 도전한다. 그러나 경사가 심해 산행이 만만치 않으므로 금성산 코스는 3시간, 비봉산 연계코스는 5시간 정도를 각오해야 한다.
등산로 입구 즉, 산운마을 입구에는 ‘용문정(龍門亭)’이 등산객을 마중한다. 이곳은 형조판서를 지낸 이희발이 낙향해 전원생활을 즐기며 학문을 논하던 정자로 경치가 빼어나기로 유명하다.
산운마을 초입에는 생태관과 자연학습원 겸비해 의성군이 조성한 ‘산운생태공원’도 있다. 생태공원은 2001년 산운초등학교를 매입한 부지 위에 지은 전시실, 마을자료관, 영상실, 강의실 등을 갖춘 생태관과 연못, 초가정자, 징검다리 분수, 초화류 등을 식재한 생태연못과 잔디광장 등을 포함하는 1만 5000㎡ 면적에 조성돼 있다.
산운생태공원의 모습. 2001년 산운초등학교를 매입한 부지 위에 여러 시설을 갖췄다. 이종호 제공
의성은 마늘뿐 아니라 볼거리가 많은 곳이다. 부족국가시대 ‘조문국(召文國)’의 유적지에서 나온 130여 기의 고분군도 그 중 하나다. 조문국은 사로국(신라) 벌휴 이사금 2년(185)에 합병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고대국가다.
이와 더불어 탑리5층 석탑(국보 77호), 문익점 면작 기념비, 제오리 공룡발자국화석지(천연기념물 373호), 금성산과 비봉산이 만나는 절경 계곡에 의상조사가 창건한 유서 깊은 고찰 수정사, 학이 깃들었다는 서봉대, 가음지(낚시터) 등이 산운마을 반경 2~3km 내에 있는 보고 즐기고 공부할 거리다.
군립공원 빙계계곡의 얼음굴은 산운마을에서 가음면 소재지를 지나 몇 km를 지나 빙계계곡 표지판이 나오며 이를 따라 우회전하면 된다.
‘경북 의성’하면 대부분 마늘을 떠올린다. 의성에 발을 들여놓은 후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단어가 ‘의성’이란 이름이다. ‘의로운 성’이라고 이름을 붙일 만큼 의로운 선비가 많았고, 반촌(班村) 마을이 많은 곳이 바로 의성이다. 또 이곳에는 오랜 역사를 지닌 국보급 문화재는 물론 공룡발자국화석지, 빙계계곡, 천년 세월을 품은 고찰과 고분군 등도 자리 잡고 있다.
이번 답사는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는 의성의 전통마을을 찾는다. 내비게이션으로 산운마을을 찾기 어려우면 의성빙계계곡을 입력하면 된다. 의성에서 빙계계곡을 가는 중간에 안내판이 있으므로 쉽게 찾을 수 있다.
●7000만 년 전 화산폭발이 만든 ‘금성산’과 ‘비봉산’
금성면 산운리에 자리한 산운마을은 일명 ‘대감마을’로 불리며, 400년 이상을 이어온 영천이씨의 집성촌 즉 씨족마을이다. ‘산운(山雲)’이라는 이름은 신라시대 때 ‘금성산 수정계곡 아래 구름이 감도는 것이 보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풍수학자들은 산운마을이 금성산(531m)과 비봉산(671m)을 병풍 삼아 위천이 감돌아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으로 설명한다. 또한 ‘선녀가 거울 앞에 앉아 머리를 빗는 절묘한 형국’의 절묘한 지세로 가히 풍수의 교과서라고도 말한다. 굳이 풍수를 따지지 않는 보통 사람에게도 산운마을은 명당이자 길지로 느껴진다.
경북 의성의 ‘산운마을‘은 금성산과 비봉산을 병풍 삼아 위천이 감돌아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입수의 지형이다. 이종호 제공
금성산은 태백산과 보현산 줄기의 마지막 기가 뭉쳐 이룬 산이며, 비봉산은 봉황이 날아가고 있는 형상이라 해서 비봉이라 이름 붙여졌다. 사실 두 산은 백두산보다 더 오래된 우리나라 최초의 화산산으로 지리학자들에게는 매우 잘 알려진 곳이다.
원래는 이 지역은 중생대 백악기(약 7000만 년 전) 화산폭발에 의해 화산 분화구가 내려앉은 ‘칼데라’였는데, 오랜 세월 풍화와 침식 작용을 거치며 화산의 밑둥치만 타원형으로 남은 지형이 됐다. 참고로 칼데라는 화산지역에서 볼 수 있는 대규모의 화구모양의 와지다. ‘화구’는 지름 1km이지만 칼데라는 이보다 큰 지름 3km 이상의 화구다. 칼데라의 어원은 포르투갈어의 칼데리아(calderia)에서 유래하는데 솥(kettle)이나 냄비(caldron)라는 뜻이다.
금성면 탑리나 가음면 이리 등에서 보면 높은 산이 뭔가를 둥글게 감싸면서 이어져 있는 듯한 모습이 어렴풋이 보인다. 이는 금성산과 인근 비봉산을 포함하는 타원형의 화산암을 둘러싸고 발달한 지름 8∼10km의 둥근 고리모양의 단층이다.
이 단층은 바깥쪽에서는 8∼20도 정도로 완만한 기울기를 보이다가 안쪽에서는 30∼60도의 급경사를 이루며 안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이는 단층 안쪽이 꺼져 내려앉았다는 증거로, 이런 단층의 경사는 탑리에서 사곡면 쪽으로 가는 길가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약 1억 년 전 공룡 발자국이 발견된 제오리(천연기념물 373호)의 퇴적암반이 70도 이상의 경사로 금성산 쪽으로 기울어진 것도 이 때문이다.
●금성산 정상의 평지는 천하제일의 명당
금성산은 또 다른 전설로도 잘 알려져 있다. 금성산 정상의 평지가 천하제일의 명당이라 이 산에 조상묘를 쓰면 당대의 만석꾼이 되지만, 주변 지역은 3년간 가뭄이 든다는 것이다. 1970년대만 해도 인근에 가뭄이 들면 주민들이 누군가 이 산에 묘를 쓰지 않았는지 확인했다고 한다.
산운마을이 얼마나 특별한지는 이태능(李泰能)이 ‘옥녀사(玉女辭)’에서 다음과 같이 읊은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내 고향은 옥경(玉鏡)이요. (중략)
금성산 상상봉에 거처한지 오랜 지라. 천마봉 옛 이름은 옥녀로 고쳐 짓고 이 땅에 처음 올 때 황학(黃鶴)타고 내렸기로 이 산 이름 금학이요 앞산에 퉁소 불 때 봉황이 춤추기로 그 이름 비봉이요. (중략)
이 아래 큰 동네는 만산채운 얽혔으니 상서로운 빛이 찬란키로 그 이름 산운이라.’
애정촌 아니, ‘대감촌’ 있다
한국인이 그 많던 전통마을이 사라졌음을 아쉬워하는 이유는 하나하나의 살림집들이 모여서 이뤄낸 교훈이 크기 때문이다.
각 가옥은 마을 전체 구조와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집으로 들어가는 길은 개인의 재산과 공동체적 편리성이 타협해서 나온 결과다. 더구나 마을에는 집만 있는 게 아니라 공공장소인 정자와 정자나무, 재실 등이 있어 공동체 의식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무엇보다도 마을은 지역 공동체의 물리적 현상이라는 데 중요성이 있다. 전통마을은 현대처럼 철저한 마스터플랜에 의해 계획된 게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시설을 짓더라도 함께 모여 결정했는데 설사 주민 간에 갈등이 있더라도 개인과 전체의 이익을 일체화하면서 공동마을을 형성했다.
산운마을 현황도. 예전 전통마을은 미리 계획해서 세우지 않았지만 서로 양보하고 도와가면서 마을을 꾸몄다. 이종호 제공
현대화의 물결은 이런 개념을 약화시켜 당초 모습을 모두 알아낼 수는 없다. 그래도 남아있는 한국 전통마을을 보면 남다른 감동을 얻을 수 있다. 특히 의성의 산운마을은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마자 남다름을 느낄 수 있다. 학록정사를 비롯해 곳곳에 400여 년이나 된 많은 회화나무가 반기기 때문이다.
산운마을에 회화나무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이곳에 과거 급제자가 많았고 벼슬아치들이 많이 살았다는 반증이다. 또 벼슬아치가 많았다는 것은 남다른 마을 조성이 가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산운마을을 명문으로 만든 三父子
산운마을의 역사는 조선조 명종, 선조 때 고관을 역임한 영천이씨 학동(鶴洞) 이광준(李光俊, 1531?1609)이 입거하면서 시작한다.
이광준은 명종 16년(1561)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 학유 등을 거쳐 선조 25년(1592) 강릉부사가 된 정통 관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직접 전투에 참가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워 통정대부(정3품 당상관)로 승진했고,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선조 36년(1603) 형조참의를 거쳐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이후에는 나이가 많아 고향으로 돌아와 은거하면서 ‘학동일고’를 남겼다.
이광준은 아들 둘을 남겼는데 형 경정(敬亭) 이민성(李民宬)은 선조 30년(1597), 아우 자암(紫巖) 이민환은 선조 33년(1600) 문과에 급제했다.
경정은 선조 35년(1602)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는 등 중앙정부에서 활약하다가 인목왕후 폐비사건 때 이를 반대하고 고향에 내려왔다. 인조반정 후 사헌부장령에 복직했는데 또 다시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가서 인조반정의 정당성을 잘 이해시킨 공로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전답과 노비를 하사받는 등 국가로부터 공을 인정받았다.
인조 7년(1629) 형조참의에 제수됐으나 병으로 사직한 후 곧바로 사망했다. 올곧은 성격으로 의리가 강하고 직언을 잘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시문과 글씨에 뛰어나 명나라의 학사들이 그를 이태백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남긴 시가 무려 1천여 수에 이르며 장대서원(藏待書院)에 제향되고 저서로 ‘경정집’, ‘조천록(朝天錄)’ 등이 있다.
아우 자암도 형 못지않다. 선조 36년(1603) 평안도 암행어사를 역임했고,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때 왕을 호종했다. 병자호란 이후 동래부사, 호조참의, 형조참판에 임명됐으며 인조 23년(1645) 경주부윤이 됐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충간(忠簡)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견주견문록’과 ‘자암집’을 남겼다.
●현대엔 애국지사 배출…유교문화권으로 개발 중
산운마을을 명문 마을로 만든 건 이들 삼부자뿐 아니다. 학동의 7대손 운곡 이희발(李羲發, 1768∼1849)은 마을의 세를 더욱 확장했다.
운곡은 정조 19년(1795) 문과에 급제한 뒤 규장각의 초계문신(抄啓文臣, 정조가 인재 양성을 위해 선발한 신하)이 됐다. 순조 때 대사간, 헌종 초기에 승지가 됐으며 헌종 13년(1847) 병조참판, 헌종 15년(1849) 형조판서로 승진할 정도로 관운이 좋은 사람이다. 나이가 많아 관직에서 물러나자 조선 정부는 그에서 희정(僖靖)이란 시호를 부여했다.
입향시조부터 계속 급제자가 배출된 산운마을은 유·학·절·효로 명문을 이루면서 경상도의 대표적인 양반가를 이뤄 어느 마을보다 자부심이 드높았다. 이런 전통이 계속돼 현대에도 이태직(李泰稙), 이태학(李泰學)을 비롯한 애국지사를 배출했다. 이 마을이 대감촌, 양반마을로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재 고택 40여 가구를 비롯해 80여 가구 200여 명이 살고 있는 산운마을은 한국전쟁 때 상당 부분 소실됐다. 그러나 현대화의 회오리바람에도 전통을 간직한 마을임이 인정돼 경북의 유교문화권 개발 사업으로 마을 전체 건축물을 개·보수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사대부 집안에 남근석이 수십 개?
산운마을에는 여타 전통마을처럼 지정문화재가 많지 않은 대신 남다른 향취가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입향시조인 학동 이광준을 위해 지은 학록정사(경상북도 유형문화재 242호)를 비롯해 소우당(素宇堂, 중요민속자료 237호), 운곡당(雲谷堂, 경북문화재자료 374호), 점우당(漸于堂, 경북문화재자료 375호) 등이 문화재로 지정돼 있으며 수백 년을 지켜 온 수십 채의 전통 고가옥들이 즐비하다.
●명문 三父子 기리는 정자, ‘학록정사’
영조 26년 산운마을 입향조인 이광준을 기리기 위해 세운 ‘학록정사‘의 모습. 건물 전면에 온돌방을 위한 아궁이가 있는 게 특징이다. 이종호 제공
마을 초입에 있는 학록정사는 영조 26년(1750) 입향조인 이광준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원래 정사는 정자와 같은 개념도 있는데 이곳 학록정사는 제사와 교육 기능도 갖고 있다. 팔작지붕에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중앙에 소위 큰마루(대청)이 있고 좌우에 2개의 방이 있는데 이는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이다.
건물 전면에 온돌방을 위한 아궁이가 있는 게 특징이며, 팔작지붕과 문틀 등은 당시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공간은 전학후묘(前學後廟) 형태인데, 이는 강학(講學) 구역이 앞쪽에, 신실(神室) 구역이 뒤쪽에 있는 배치법이다.
왼쪽은 학록정사와 광덕사가 함께 있는 모습. 앞의 건물이 학록정사다. 오른쪽은 광덕사의 모습. 광덕사는 학문을 드높인 이광준 부자의 불천위가 모셔져 있다. 이종호 제공
학록정사에서 뒤쪽 우측에 있는 광덕사를 바라보면 ‘이렇게 위풍당당한 사당이 있을 수 있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광덕사는 입향조인 학동 이광준과 아들인 경정 이민성, 자암 이민환의 불천위 3위를 모신 사당이다. 광덕사도 앞쪽에서 후학을 양성했으며 정면 우측에 관리사가 있다.
학록정사 입구에 있는 문을 소시문이라 부르는데 이 마을이 소시랑골로 들어가는 입구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소시랑골은 소씨가 시랑이란 벼슬을 한데서 유래됐다. 학록정사란 글은 표암(豹庵) 강세황(姜世晃)이 썼다.
●소우당, 경주 안압지 닮은 연못 있는 ‘원림’ 유명
산운마을에서 규모가 가장 큰 ‘소우당‘의 입구(왼쪽)와 사랑채(오른쪽)의 모습. 이종호 제공
학록정사에서 오늘쪽으로 논을 끼고 왼쪽으로 들어가면 산운마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집인 소우당이 나온다. 영천이씨의 종가이기도 한 이 가옥은 경북도 중요민속자료 237호다.. 1800년대에 이가발 선생이 세웠고, 대한제국시대인 1880년대에 학자이자 서예가,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던 이홍(李鴻) 선생이 개축했다.
이 가옥은 ‘ㄱ’자형 안채와 ‘ㄴ’자형 사랑채가 안마당을 감싸고 있어 ‘튼ㅁ’자형 평면 구조를 하고 있다. 남측 전면에 ‘ㅡ’자형 문간채가 있고 문간채의 서쪽에는 외측간, 안채의 북서쪽에 내측간이 있다. 안채와 사랑채 일곽 서쪽으로 별도의 담장을 둘러 공간을 형성하고 원림(園林)을 조성했다.
소우당의 안채와 사랑채의 모습. ㄱ자형 안채와 ㄴ자형 사랑채가 서로 감싸 튼ㅁ자형 평면구조를 한 걸 볼 수 있다. 이종호 제공
원림은 본채 옆에 있는 후원인데 소우당을 유명하게 만든 일등공신이기도 하다. 1600㎡ 규모에 별채와 함께 연못과 소나무, 상수리나무 등이 어울려 남다른 운치를 더한다. 연못 규모는 작지만 어느 지점에서 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는 경주 안압지와 같은 형태로 만들었다. 조선시대 전통 조경기법은 못을 네모나게 하고, 가운데 둥근 인공 섬을 만드는 천원지방사상(天圓地方思想)인데, 그와 다르다는 점에서 이채롭다.
영천이씨 종가인 ‘소우당‘을 유명하게 만든 후원, 원림의 모습이다. 이 연못은 안압지처럼 끝이 보이지 않게 만든 게 특징이다. 이종호 제공
●100년 넘은 측백나무와 ‘남근석’
소우당의 명성을 높이는 또 다른 것은 100년 넘은 측백나무다. 이 나무는 이홍 선생이 중국 명나라 황제 묘역에서 어린 나무 두 그루를 가져와 심은 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측백나무가 흔하지만 당시만 해도 매우 희귀했다. 중국에서 측백나무는 공자(孔子)묘를 비롯해 황제의 능에 심는 성수(聖樹)로 알려져 있을 정도다.
측백나무는 소나무와 함께 선비의 절개와 고고한 기상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나무라 옛사람들이 가지고 싶어했다. 이홍 선생도 이 점 때문에 해외여행을 갔을 때 이 나무를 가져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참고로 이 나무는 석회암지대에서 회양목과 같이 자라는 경우가 많으며 키는 약 20m, 둘레는 한두 아름에 이를 정도로 크게 자란다.
측백나무는 귀한 나무였던 만큼 일화도 많다. 한방에서는 이 나무의 씨를 ‘백자인(柏子仁)’이라 부르며, 정신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전한다. 그런데 백자인의 껍질이 부인병에 특효가 있는 것은 물론 ‘아이 못 낳는 여인은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등 잘못 알려졌다. 이 때문에 먼 거리에서 사는 아낙네들이 깊은 밤 몰래 담을 넘고 뛰어 들어와 측백나무 가지를 꺾어 가는 등 많은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소우당 한 편에 있는 남근석의 모습. 사대부 집안에 남근석이 있는 경우라 특이하다. 왼쪽은 이 집에 양기기 부족한 걸 보호하기 위해 세운 남근석이고, 오른쪽은 남쪽의 나쁜 기운을 막기 위한 돌비석이다. 이종호 제공
소우당은 사대부의 집안인데 ‘남근석’이 있다는 점에서도 남다르다. 이 집에는 음기가 강해 남자들이 장수하지 못한다고 여겨 정원 한쪽 옆에 남근석을 꽂아두고 음양의 조화를 바란 것이다. 남쪽에서 들어오는 나쁜 기운을 막으려고 여러 개의 돌비석을 병풍처럼 둘러놓기도 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를 모두 남근석으로 인식한다. 한마디로 집 안에 수십 개의 남근석이 있는 셈이다.
남근석이 있는 소우당의 아름다움과 명성은 학자들과 사진작가들의 집중적인 주목을 받아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마루’와 ‘온돌’이 한 곳에…
한옥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것은 온돌과 대청마루가 있다는 데 있다. 온돌과 대청이 어떻게 한 집에 있게 됐을까. 이는 한국 특유의 환경 때문에 나온 건축구조다.
우리나라는 국토가 좁은 데 비해 기후변화가 심한 편이다. 이렇게 기온의 연교차가 큰 기후는 해양보다 비열이 작은 대륙의 영향을 많이 받으므로 ‘대륙성 기후’라고 한다. 또 계절풍의 영향을 받아 우기인 여름에 건기인 겨울보다 강수량의 차이가 크며 지역에 따라 다섯 배에서 열 배가 되기도 한다.
한국의 여름은 덥고 비가 많이 내리며, 겨울은 몹시 춥고 건조하다. 소위 고온다습, 저온저습의 기후이다. 여름에는 불쾌지수가 있으며 겨울에는 살을 에는 듯이 춥다는 표현이 딱 맞다. 마루와 온돌은 이러한 기후를 절묘하게 조화시켜 보다 쾌적한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든 아이디어의 산물이다.
한옥은 한국의 기후를 잘 반영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고온다습한 여름을 잘 나기 위한 마루(왼쪽)와 저온저습한 겨울을 지혜롭게 보내기 위한 온돌이 그것이다. 오른쪽 그림은 온돌에 뜨거운 공기를 넣기 위한 아궁이의 모습. 이미지비트 제공
온돌은 방바닥으로 온기가 들어가도록 한 구조다. 개정판 옥스퍼드 사전에 ‘온돌(Ondol)’이라는 단어가 ‘김치(Kimchi)’와 함께 실려 있을 정도로 한국의 온돌을 국제적으로도 인정받고 있다. 이 사전은 온돌에 대해 ‘아궁이에서 방바닥 밑으로 난 통로를 통해 방을 데우는 난방’이라고 적었다.
반면 마루는 여름에는 덥고 습하므로 실내의 바닥을 지면에서 높게 만들어 온·습도를 시원하게 유지토록 한 것이다. 마루에 문이 있건 없건 마루 밑은 통풍이 잘 되도록 뚫려 있고 온돌과 천정 역시 없다. 통풍이 잘되는 마루 공간은 온돌방보다 자연과 적극적으로 연계된 개방공간이다.
●‘대청’은 두 얼굴의 공간
한옥은 한 지붕 아래 ‘온돌방’이라는 폐쇄적인 겨울공간과 ‘대청’이라는 개방적인 여름공간을 같이 만들어 계절에 따라 주생활 공간을 이동시키며 생활해 왔다.
안채의 안방과 건넌방, 사랑채의 사랑, 큰방 앞의 넓은 마루를 대청이라 칭하는데, 이는 오늘날 주택의 거실에 해당하는 공간이다. 대청은 전면 또는 사방이 트여 있어 반은 외부, 또 반은 내부라고 할 수 있는 묘한 공간이다.
마당에서 대청으로 오르기 위한 기단이 있고 그 위에 댓돌이 있다. 댓돌에 신을 벗고 올라서면 앞 툇마루를 거쳐 대청으로 들어간다. 대청의 크기는 2칸에서 8칸까지 다양하며, 종가 대청의 크기는 제사 때 참여하는 인원의 수에 비례한다.
●온돌서 꼭 필요한 부엌은 방바닥보다 낮아
온돌을 설치하면 부엌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불을 지펴서 음식을 조리하는 부엌은 안방과 바로 인접했다. 일부 큰 집에는 부엌을 ‘반빗간’이라 해 별채로 독립시키기도 했다.
대개 아궁이는 안방과 면한 벽 쪽에 설치해 음식물을 조리하면서 동시에 방을 데운다. 부엌은 주택 규모에 따라 안방과 건넌방에 각각 위치하는데 안방과 접한 부엌이 주된 조리 공간이며, 건넌방 쪽은 물을 데우는 등 보조공간으로 이용됐다.
부엌 바닥은 일반적으로 방바닥보다 75~90cm 정도 낮게 했는데, 이는 아궁이에서 땐 불길을 방고래로 빨아들이도록 되어 있는 ‘온돌구조’ 때문이다.
그런데 일부 한옥에서는 두 가지 특징이 함께 보이는 경우가 있다. 중부지역에서 온돌과 대청이 합해진 집이 보이는데, 북방에서 온돌이 내려오고 남방에서 대청이 올라가 대타협 한 것이다. 한국의 기후 특성을 절묘하게 조합시킨 것으로 이는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건축 방식이다.
화산과 함께하는 오래된 저택
산운마을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돌담길의 모습. 이종호 제공
아름다운 담을 따라 안길에 들어가면 1900년에 건설된 ‘점우당(漸于堂, 경북문화재자료 375호)’이 나온다.
점우당 안채는 사랑채와 연결된 전형적인 ‘ㄷ’자형의 평면을 이루고, 맞은편에 ‘ㅡ’자형 헛간채가 있어 ‘튼ㅁ’자형의 평면배치로 남동쪽으로는 대문채가 자리하고 있다. 평면구성이나 목구조 기법에서 특별하지는 않지만 운곡당, 소우당과 함께 당대의 건축을 알 수 있는 예로 의미가 있다.
1900년대 건축 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점우당의 모습. 위의 사진은 대문에서 본 점우당이고, 오른쪽 아래 사진이 안채의 모습이다. 왼쪽 아래는 솟을대문의 모습이다. 이종호 제공
●날개 편 것 같은 고택
점우당과 담이 맞붙어 있는 ‘운곡당(雲谷堂, 경북문화재자료 374호)’은 산운마을 고가옥의 대표 중 하나다.
이 가옥은 학동 선생의 7대손인 운곡 이희발(1768?1850)이 1803년 영월부사 시절 지었고, 1940년대에 안채 일부를 다시 건설했다. 운곡은 한성 좌우윤, 영월부사를 거쳐 형조판서를 마지막으로 82세에 생을 마감한 전통 관료다. 사랑채에 걸린 운곡당의 현판은 운곡 선생의 4대손인 이홍 선생이 18세 때 쓴 친필이다.
이 집은 북쪽 금성산을 뒤에 두고 남동쪽을 향하는데 안채에 사랑방, 고방 등이 한 동으로 연결돼 있다. 평면구성은 ‘ㅁ’자형 인데 앞채의 좌우에 전면으로 나와 있어 날개집 유형에 속한다.
안채의 뒤쪽 좌편으로 사당이 있다. 성리학적 규범이 지배적이었던 조선시대에 사당을 주 건물의 좌측에 둔 것은 특이한 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성리학적 규범이 변형돼 사당의 위치를 바꾸는 것도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정통 유학자가 보면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일이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사당을 폐기하지 않고 집안에 둔 것이 갸륵하다.
점우당과 담이 붙어 있는 운곡당의 모습. 운곡당 안채는 길이 3m, 높이 2m 정도의 담장이 둘러쳐쳐 안채의 사생활을 보호했다. 이종호 제공
산운마을 전통가옥은 대부분 ‘튼ㄷ’자 형과 ‘튼ㅁ’자 형의 구조다. 하지만 운곡당은 내외담 또는 차면담이라고도 불리는 길이 3m, 높이 2m 정도의 담장이 안채 입구에 둘러져 조금 달라 보인다.
이 담장은 사랑채를 찾아오는 손님이 대문에 들어올 때 안채의 아녀자를 못 보게 하려고 만들었다. 반면 안채 마루는 높게 만들어 사랑채에 오는 손님이 누구인지 볼 수 있다. 대갓집을 건축할 때부터 이런 철저한 계획을 갖고 진행했다는 것을 보면 과거 양반들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고루한 생각만 했던 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한반도 탄생의 비밀을 간직한 산
우리나라 최초의 화산산인 금성산과 비봉산은 한반도 탄생의 비밀을 간직한 산이다. 세월의 풍화가 빚어낸 기묘함에 감탄해 많은 등산객이 이 산에 오르는 걸 도전한다. 그러나 경사가 심해 산행이 만만치 않으므로 금성산 코스는 3시간, 비봉산 연계코스는 5시간 정도를 각오해야 한다.
등산로 입구 즉, 산운마을 입구에는 ‘용문정(龍門亭)’이 등산객을 마중한다. 이곳은 형조판서를 지낸 이희발이 낙향해 전원생활을 즐기며 학문을 논하던 정자로 경치가 빼어나기로 유명하다.
산운마을 초입에는 생태관과 자연학습원 겸비해 의성군이 조성한 ‘산운생태공원’도 있다. 생태공원은 2001년 산운초등학교를 매입한 부지 위에 지은 전시실, 마을자료관, 영상실, 강의실 등을 갖춘 생태관과 연못, 초가정자, 징검다리 분수, 초화류 등을 식재한 생태연못과 잔디광장 등을 포함하는 1만 5000㎡ 면적에 조성돼 있다.
산운생태공원의 모습. 2001년 산운초등학교를 매입한 부지 위에 여러 시설을 갖췄다. 이종호 제공
의성은 마늘뿐 아니라 볼거리가 많은 곳이다. 부족국가시대 ‘조문국(召文國)’의 유적지에서 나온 130여 기의 고분군도 그 중 하나다. 조문국은 사로국(신라) 벌휴 이사금 2년(185)에 합병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고대국가다.
이와 더불어 탑리5층 석탑(국보 77호), 문익점 면작 기념비, 제오리 공룡발자국화석지(천연기념물 373호), 금성산과 비봉산이 만나는 절경 계곡에 의상조사가 창건한 유서 깊은 고찰 수정사, 학이 깃들었다는 서봉대, 가음지(낚시터) 등이 산운마을 반경 2~3km 내에 있는 보고 즐기고 공부할 거리다.
군립공원 빙계계곡의 얼음굴은 산운마을에서 가음면 소재지를 지나 몇 km를 지나 빙계계곡 표지판이 나오며 이를 따라 우회전하면 된다.
첫댓글 좋은글 감사합니다 잘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