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보다 위의 권세를 함부로 비판하고 조롱하면 마치 자기가 그 사람보다도 더 지혜롭고 훌륭한 것같이 착각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내가 대통령이라면 … ” “내가 목사라면 …” “나는 우리 부모같이 살지는 않겠다.”라고 말하지만 결코 대통령이 되지도 못할 것이고 목사나 부모가 되어 보아야 선배들의 고통을 알고 자기의 잘못을 깨닫게 된다.
수많은 큰 기적 속에 모세가 인도하는 광야 40년 동안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도 모세를 원망하고 불신으로 살았다니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내 삶을 돌아보니 그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인 것이다. 알면서도 사건에 부딪치면 또 그렇게 내 생각이 나오고 원망 불평하게 된다. 매를 맞고서야 감사하고 돌이키는 무지한 내가 아닌가.
그러면 왜 순종하지 않는가?
첫째 목이 곧고 완악하기 때문이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고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라고 내 생각이 죽지 않고 말씀보다 앞서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건에 부딪치면 먼저 조용히 말씀을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다.
둘째로 약하고 무능하기 때문이다. 윗사람의 명령이 너무 무거워서 내가 감당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내 신앙이 너무 약하면 주일 성수와 십일조를 드릴 수가 없으니 믿음을 키우고 능력을 받아야 한다.
셋째로 윗사람이 부당한 명령을 내릴 때에는 결코 순종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올바른 명령일 때에도 극성스럽게 반대할 수도 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드실 때에 대신들 중에 극성스럽게 반대한 사람들도 있었다.
박정히 대통령이 경부 고속도로를 건설할 때에 김대중 선생은 거리에 누워 나를 밟고 가라고 하였다. 사람은 혹 잘못된 명령을 내릴 수도 있다. 그래서 어떻게 반대하고 찬성할 것인가 지혜가 필요하다.
사람들은 권세와 물질 앞에서, 살기 위해 순종할 수밖에 없다. 금메달의 운동선수들이 죽을 만큼의 지옥훈련을 견디는 것은 명예와 물질의 복 때문이 아닌가.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순종을 원하실까? 진리에 대한 순종을 원하신다. 헌금을 많이 드리고 교회 일도 열심히 할지라도 진리에 대한, 말씀을 사모하는 뜨거운 열정이 없다면 주님을 기쁘게 하지 못하고 이단이나 마귀의 유혹에 빠질 수가 있다. 주님 발 앞에 앉아 말씀듣기를 사모하는 마리아를 주님은 너무 기뻐하셨다.
목사의 마음을 가장 기쁘게 하는 성도는 모든 예배에 열심히 참석해서 말씀을 사모하고 경청하는 성도가 틀림없다. 그런데 자녀가 교인이 순종하지 않는다면 부모가, 목사가 먼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내가 위의 권세에게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하고 깊이 회개하여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