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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역사문화 유적지 답사
일시:2013년 5월 25일 토요일
장소:서산 일대, 예산(남연군묘소)
주관:서초문인협회
* 마애삼존불
서초문인협회에서 상반기에 떠나는 서산 역사문화 유적지 답사다. 서초구청에서 오전 7시 30분에 모여 서초구청장과 직원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배웅을 받으며 버스에 올랐다. 충청남도는 내 고향이다. 내 고향은 서해안 서산 아래에 있는 대천이다. 그래서 오늘 가는 서산 기행이 더욱 정겹다. 원래는 태안까지 1박 2일의 일정이었는데 많은 인원이 머물 수 있는 숙박시설이 여의치 않아 하루 코스로 변경되었다. 서초문협의 문우들과 정담을 나누며, 아름다운 전원 풍경을 감상하며 행복한 문학 나들이다. 사무국에서 준비해온 떡과 과일 등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간다. 대부분 알고 잇지만 그래도 서로의 자기소개 시간을 가지며 정담어린 인사말을 들었다. 나는 창밖의 아까시아 꽃을 보니 학창시절 문학 동아리에서 아까시아 꽃이 필 무렵 문학의 밤 행사를 하던 추억이 떠올랐다는 말을 서두로 소개를 했다. 각자의 생각을 섞어 소개할 때마다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모두 흐뭇한 시간이었다. 버스는 힘차게 달려 어느새 서산에 들어섰다.
마애삼존불은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의 가야산 절벽에 새겨진 백제시대의 불상이다. 서산에 도착하여 산길을 따라 맨 처음 찾아간 유적이다. 국보 제84호로 높이 본존상 280㎝, 보살입상 170㎝, 반가상 166㎝다. 중앙의 본존상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보주를 든 보살입상이, 왼쪽에는 반가사유상이 있는 특이한 삼존형식이다. 아주 가파른 바위 절벽에 새겨져 있다. 본존상은 눈을 크게 뜨고 밝게 미소짓고 있다. 삼존상은 모두 보주형의 두광을 갖고 있는데 협시상의 경우는 내구에 단판 연화무늬 만이 장식되어 있는데 반해 본존의 경우는 외구에 화염무늬와 화불이 유려하게 조각되어 있다. 7세기초에 조성된 상으로 추정되며, 백제조각의 대표적인 예이다. 중국 교역로의 중심지였던 태안반도와 백제의 수도인 부여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중국과의 접촉이 빈번했던 지리적 요충지에 만들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옛날 중국으로 떠날 때 먼 길로 향하는 걸음이 조금은 두려웠을 것이다. 그때마다 이곳 마애삼존불 앞에서 부처님의 가호를 빌며 편안해진 마음으로 중국에 가지 않았을까 싶다. 아슬하게 위치한 바위에 부처가 부조로 새겨져 있고 부처의 머리 위로는 소나무 한 그루가 살고 있다. 너무 크면 마애삼존불에게 지장을 줄까봐 성장 억제 주사를 놓았단다. 저 소나무는 바위의 균열을 가늠하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어서 없앨 수는 없단다. 소나무가 있어 마애삼존불은 외롭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렇게 높은 바위 절벽에 부처를 새겼을까 했는데 알고보니 백성의 마음을 평안하게 다스리기 위한 우리 조상의 지혜가 서린 훌륭한 유적임을 알았다.
* 보원사지
마애섬존불상을 보고 들른 곳이다. 서로 가까운 곳에 있다. 보원사지는 상왕산 보원마을에 있는 절터다. 버스에서 내렸을 때 황량한 들판에 발굴공사 중인 흔적이 많이 보였다. 당간지주 기둥 2개가 오롯하고 오층석탑이 고운 자태로 시선을 끈다. 징검다리를 건너서 절터 가까이로 갔다. 창건 연대는 확실치 않지만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 사이에 있던 절터로 보고 있다. 그러나 백제의 금동여래입상이 발견되어 백제 때의 절일 가능성도 있다. 오층석탑의 우아한 모습에 백제의 향기가 배어 있다. 법인국사보승탑비에 승려 1,000여 명이 머물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당시엔 매우 큰 절이었음을 짐작할수 있다. 보원사지 석조는 보물 제102호, 당간지주는 보물 제103호, 오층석탑은 보물 제104호,·법인국사보승탑은 보물 제105호 등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다. 보원사지는 마애삼존불을 비롯해 불교유적이 집중 분포하고 있어 불교사 연구에 중요한 유적이다. 오층석탑 뒷편으로 유적을 발굴 중이어서 가까이 가진 못했지만 발굴공사가 마무리되면 상당히 큰 면적의 소중한 불교 유적지가 될 것이다. 다시 징검다리를 건너와서 그 옛날 절에서 물을 담아놓고 식수로 사용하던 큰 석조물통을 보았다. 겨울에 동파로 금이 간 곳이 있어서 안타까웠지만 원형 그대로 보존이 잘 되어 있다. 서산의 귀중한 유적을 보고 배운 뜻 깊은 여행지다.
* 개심사
한국시인협회에서 몇 년 전에 다녀온 절이다. 개심사開心寺는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신창리에 있다. 산 깊은 곳에 있는 절이다. 개심사를 오르는 입구에는 '세심동'이라는 글귀가 있다. 마음을 씻으며 마음을 열면서 개심사로 오르라는 뜻이다. 이곳에서 개심사까지 오르는 길은 나무가 울창한 언덕진 산길이다. 전에 왔을 때는 흙길이었는데 오늘은 돌계단을 만들어 놓은 길이다. 산길 옆으로 계곡이 있다. 계속 오르막 길이어서 조금은 힘들지만 청정의 산공기를 마시며 상쾌한 걸음으로 올랐다. 절에 다다르자 제일 먼저 반기는 것은 연못이다. 마음을 씻으며 나무다리를 건너 갔다. 상왕산개심사象王山開心寺 건물이 우람하게 보인다. 절 입구의 동종을 보고 우측 옆으로 난 해탈문을 지나자 드디어 절 안에 이르렀다. 개심사 창건은 백제 시대인데, 지금의 개심사로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조선 시대다. 대웅전과 마주하여 안양루가 있다. 안양루에 걸린 ‘상왕산개심사象王山開心寺’라는 현판은 근대 명필 해강 김규진의 글씨다. 동종이 있는 건물의 기둥도, 요사채로 쓰이는 심검당 기둥도 자연 그대로 둥글게 휘어진 모습이다. 그래서 더욱 자연에 가까운 정감이 든다. 대웅보전은 맞배지붕 건물로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오는 과도기적 건축형태다. 명부전과 삼신당에도 가 보았다. 불교 신자가 아니어도 불심이 일어 저절로 숙연해지는 순간이다. 개심사에서 내려와 산채비빔밥으로 점심식사를 맛있게 했다. 산나물과 표고버섯 등을 사며 모두들 산향기를 한가득 품고 개심사를 떠나 왔다.
* 서산 한우목장
개심사를 오가는 길에 만나는 목장이다. 드넓은 초원의 목장 풍경은 어느 외국에서 보는 것 같은 목가적인 정경이다. 농협중앙회 한우개량 사업소에서 관리하는 서산 한우목장이다. 양쪽 길가에 펼쳐져 있어 차안에서 다 보인다. 서산시 운산면 원벌리와 용현리 일대의 1117ha, 약 338만 평 부지에 조성된 이 목장에는 약 6500 마리의 한우를 살고 있다. 벚꽃 명소로도 유명하다. 서산사람들은 삼화목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목장은 개방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 구제역이 발생했을 때부터 소를 보호하기 위해 개방을 하지 않고 있다. 삼화목장은 일반 목장이 아니라 한우개량 사업소에서 국내 한우의 품종 및 품질 향샹등을 위한 여러가지 연구가 진행되는 곳이라 더욱이 규제가 심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종우, 품종 개량을 위한 숫소도 여러마리 있다고. 한 마리의 가격이 1억이 넘는다. 덩치가 꽤나 큰 튼튼한 누렁소들이 언덕 위에서 줄을 지어 걷는다. 한우의 우람한 행렬이 비경이다. 목장의 산 아래로는 저수지가 있어 더욱 싱그럽다.
* 서문 밖 순교성지
서문 밖 순교성지는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해미읍성 성벽 바로 곁에 있다. 그 당시 충청남도 관아가 있던 해미읍성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하고, 또한 서문 밖으로 끌어내면서 성물을 팽개쳐 밟고 지나가라 강요했는데 신자들이 거절하며 성경과 묵주를 그냥 들고 나가자 이곳에서 죽였다. 그때는 자리개돌이 이곳에 있어서 큰 돌 위에 내리쳐 처형했다. 현재는 자리개돌을 연못에 생매장하던 순교성지 여숫골에 옮겨 놓았다. 곁에는 서산고등학교가 있어서 더욱 큰 가르침을 깨닫게 한다. 역사의 아픈 마디 하나 시린 가슴으로 담아간다.
* 해미읍성
해미읍성은 사적 제116호로,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성곽이다. 고창읍성, 낙안읍성과 함께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읍성이다. 그 중에서 해미읍성은 서해안을 지켰던 성곽으로 가장 잘 남아 있다. 몇십 년 전까지 성안에 행정 관청과 학교를 비롯한 민가 160여 채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성 밖으로 옮겨졌다. 대표적인 표본으로 삼기 위하여 성안의 민가와 학교 등을 철거하고 성벽의 보수 등 연차적인 보수공사를 실시한 것이다. 높이 5m, 둘레 약 1.8㎞다. 남문인 진남문과 동문, 서문이 있고, 성내에 동헌, 어사, 교련청, 작청, 사령청 등의 건물이 있다. 원래는 1414년 조선 태종 14년 왜구를 막기 위해 성을 쌓기 시작했다. 덕산에서 충청 병마절도사가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성이 필요하게 되자, 성종 원년에 이 성을 착공하여 1491년 성종 22년에 성벽이 완성되었다. 1651년 효종 2년 청주로 옮겨질 때까지 군사의 중심지였다. 동, 남, 서, 세 방향에 문루가 있으며 처음에는 두 개의 옹성과 동헌, 객사 두 동, 총안, 수상각 등이 있는 매우 큰 규모였으나 현재는 동헌과 객사만 복원해 놓았다. 성벽 주위에 탱자나무를 심어 적병을 막는데 이용했다고 전해지지만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다.
해미읍성은 1886년 병인양요 이후 천주교 박해 때 관아가 있던 곳이다. 그로인해 이곳에서 1천여 명의 천주교 신도들이 잡혀와 고문당하고 처형당했다. 천주교인들은 해미영으로 끌려와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지금도 서 있는 호야나무에 묶여 고문을 당하고 목을 매단 채 죽기도 하였는데 그때 김대건 신부도 이곳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고문당했던 회화나무(충청도 이름으로는 호야나무)에는 지금도 그 흔적으로 철사줄이 박혀 있다. 서문 밖에는 태형으로 죽인 자리개돌이 있어 천주교도들의 순례지가 되고 있다. 매년 서산 해미읍성 병영체험 축제가 열리는데 관아체험, 옥사체험, 군영체험 등 독특한 체험거리로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온다. 임진왜란 때의 영웅 이순신 장군이 병사영의 군관으로 해미읍성에 열 달 정도 근무를 했고, 숙종 때는 온양에 있던 충청도 좌영을 이곳으로 옮겼으며, 다산 정약용이 열흘에 걸쳐 유배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가야산의 맑고 고요한 모습이 해미읍성을 둘러싸고 있다. 해미읍성이라는 돌비를 보며 진남문으로 들어갔다. 진남문은 해미읍성의 정문이자 남문이다. 그날의 복장으로 두 명이 입구를 지킨다. 잔디광장에는 고전음악 연주로 해미읍성을 찾아온 이들의 발걸음을 이끈다. 넓고 둥근 읍성이 참으로 아름답다. 호야나무가 우뚝 서서 죄 없이 죽어간 천주교인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 관아의 감옥과 형틀이 그날을 증언하듯 생생한 모습으로 재현되고 있다. 몇년 전 한국시인협회에서 이 지역 탐방할 때는 해미읍성 성벽만 보고 지났는데 오늘은 성안에까지 들어와 자세히 볼 수 있어서 아주 뜻깊은 역사 유적지 답사다.
* 해미 순교성지 여숫골
해미읍성에서 나와 가까운 곳에 있는 순교성지 여숫골로 갔다. 충남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에 있는 천주교 성지다. 문에 들어서자 우람한 천주교 성당이 반겨준다. 그 곁을 지나 돌아가자 천주교인들을 죽인 자리개 돌이 있다. 돌 위에서 그대로 던져 돌에 떨어뜨려 죽인 현장이다. 아직도 핏자국이 붉게 있고 소름 돋는 큰 돌짝이다. 고을을 다스리던 사람들의 유적비도 있다. 비석 바로 아래 해태상이 놓인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소문이 좋지 않은 고을원님이 온다고 할 때 미리 덕을 베풀도록 좋은 내용으로 그의 비석을 세워주거나, 행적이 나쁜 원님의 비석이란다. 치적 비석에 대한 새로운 역사 지식을 알았다. 여숫골이라는 안내 글귀 앞에 연못이 있다. 이곳에 천주교인들을 던져 죽였다니 기가 막힌 현장이다. 그 당시의 처참했던 광경으로 몇 개의 동상이 연못 속에서 증언하고 있다. 1866년 조선 고종 3년 병인박해 이후 1882년 고종 19년 사이에 진행된 천주교 박해 때 충청도 각 고을에서 붙잡혀온 천주교 신자 1000여 명이 생매장 당한 곳이다. 당시 천주교 신자들을 해미읍성 서문 밖의 돌다리에서 자리개질 등으로 처형했는데 숫자가 너무 많자 해미천에 큰 구덩이를 파고 모두 생매장했다. 해미천 옆에 생매장 당한 이름 없는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높이 16m의 해미순교탑이 건립되었다. 당시 죽음을 앞둔 천주교 신자들이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기도했는데 마을 주민들이 이 소리를 여수머리로 잘못 알아들어 여숫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연못을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천주교인들을 묶어서 끌고 왔던 돌들이 십자가 앞에 돌의자로 앉아 있다. 우리는 돌의자에 앉아 잠시나마 그날을 체험했다. 다 관람하고 나을 때 해미순교탑이 마지막 배웅을 한다.
죄없이 죽어간 천주교인들의 넋이 고인 높은 탑이다. 우리나라의 슬픈 역사를 보는 가슴 아픈 천주교인 순교 성지다.
* 정순왕후 생가
조선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1745∼1805)가 출생한 곳으로 왕비가 되기 전까지 살았던 곳이다. 아주 영특하여서 몇 가지 질문에 훌륭한 답변을 하여 간택되었던 여인이다. 충남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에 있다. 조선 효종때의 주택으로 충청남도 기념물 제68호다. 조선 효종 때 승지, 충청감사, 예조참의 등을 지낸 학주 김홍욱이 효종과 친분이 있었는데 그가 노부를 모시고 있음을 알고 아버지인 김적에게 하사한 가옥이다. 이 가옥은 영조 21년(1745)에 여기에서 태어나 영조 35년에 왕비가 된 김홍욱의 4대손인 김한구의 맏딸 정순왕후의 생가다. 정순왕후는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 서씨가 죽자 영조 35년(1759) 왕비에 책봉되었다. 이 집은 조선 효종 때 승지와 예조참의 등을 지낸 학주 김홍욱이 효종과 친분이 있었는데, 그가 노부를 모시고 있음을 알고 아버지인 김적에게 왕이 내린 집으로 효종 시절인 1649∼1659년 사이에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유계산의 낮은 야산 아래에 동향집이다. 건물은 ㅁ자형으로 된 안채는 중앙에 3칸통칸의 넓은 대청을 두고 그 우측으로는 1칸의 고방과 2칸의 안방, 그리고 1칸씩의 제실과 건넌방,부엌,광 등이 있는데 그 옆으로 행랑채 사이에 안채를 통행하는 중문이 나 있다. 가옥의 후원과 안채를 둘러싼 담장은 자연석으로 쌓았으며 대문은 평문이다. 또한 가옥의 남측으로는 1칸씩의 광과 부엌, 그리고 2칸의 온돌방과 1칸의 고방이 배치되었다. 구조는 깍은 장대석 기단 위에 덤벙주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웠는데, 대청 앞의 기둥은 높이가 3.66m나 되어 고주택에서는 보기 드문 높은 기둥을 세웠다. 정순왕후의 생가로 기념성이 클 뿐만 아니라 효종이 하사한 가옥으로 품격을 갖추고 있는 가옥이다. 특히 지붕구조가 간결하면서도 또 뒤에서부터 앞쪽으로 높이를 3단 낮춰 처리한 점이 특이하다.
안내문을 읽어보니 정순왕후는 경주 김씨다. 나도 경주 김씨다. 그래서 더욱 정감이 서리는 집이다. 현재 이곳에서 거주하고 있는 후손인 전 서산시장이 나와서 집의 문을 열어주어서 설명과 함께 자세히 볼 수 있었다. 16대의 후손들이 대대로 내려오며 지킨 500여 년 고택이다. 정원에는 아름답고 독특한 꽃들이 고택을 더욱 빛내고 있다. 생가 곁에는 김용환 애국지사의 묘비가 있다. 중국 항주에 있던 것을 후손들이 비싼 항공요금을 내고 이곳으로 옮겼단다. 중국에서 세워졌다는 묘비에는 태극기도 새겨져 있다. 경주 김씨 나의 조상 자랑스런 애국지사도 만나고 휼륭한 여인의 생가도 거닐어 보고 참으로 뜻깊은 탐방이다.
* 남연군 묘
남연군 묘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아버지 이구의 묘소다.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기리에 있으며, 충남도 기념물 제80호다. 인근에는 추사 김정희의 고택이 있다. 남연군 묘는 해발 600여m의가야산 석문봉에 있다. 이 봉우리 좌우로는 옥양봉과 가야봉으로 청룡과 백호의 봉우리들이 옥좌의 병풍이다. 솟은 봉우리에서 좌우의 굴곡 기세가 길게 이어져 내려온다. 남연군 묘로 가는 입구에는 저수지가 있다. 풍수지리학적으로 완벽한 위치의 묘소다.
남연군은 1822년 순조 22년에 죽었다. 흥선대원군이 남연군의 묘를 이곳에 이장한 것에 대하여 전해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헌종 1849년에 안성 청룡산에 있는 부친 남연군의 묘소에 성묘 가는데, 길가에 한 스님이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흥선이 가까이 가서 보니 남다른 스님 같아서 데리고 점사에 가 밥을 함께 먹고, 얘기를 해 보니 풍수지리에 밝았다. 이에 흥선이 부친 묘를 이장해야 하겠다고 말하니, 이튿날 스님은 같이 가서 남연군 묘소를 보고 좋지 않다고 말하고, 한 곳에 왕이 날 자리가 있다면서 덕산 가야동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절 법당 뒤의 지점을 지시하고는, 이장할 날짜를 정하고 약속했다. 약속한 날 흥선이 관을 운반해 가니, 스님은 절 법당에 불을 질러 태우고, 타지 않는 구리 부처만 쇠망치로 부숴 골짜기에 묻었다. 그리고 지정한 자리에 묘를 썼다. 이때 가야동에 오래 살고 있던 윤식이 와서 ‘왕기(王氣)’가 있다는 이 산에 묘를 쓸 수 있느냐고 항의하니, 스님은 남연군 역시 왕자왕손이니 상관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이렇게 해 1852년에 고종이 태어났고, 1863년에 왕위에 오르니, 흥선이 대원군이 되었다. 이후로 그 스님과 매우 가까워졌으며, 1865년 그 묘를 다시 크게 만들고 각종 석물을 해 세웠다. 그리고 근처에 새로 보덕사를 지어 사치스럽게 시설을 꾸몄다. 이렇게 되니 오래 살았던 윤식은 세력에 밀려 그 곳을 떠났다. 이 스님의 이름이 정만인이라고 하며, 왜승과 양승이라는 말이 있다. 이때 흥선이 그 스님에게 소원을 말하라 했는데, 스님은 해인사에 있는 팔만대장경을 인판해 출간하게 해달라고 했다. 곧 흥선이 명령을 내려 팔만대장경을 인판하는데, 경판을 모두 쌓아놓았던 판각에서 끌어내 먹을 묻혀 인쇄하게 되니, 결국 경판 쌓았던 건물이 비게 되었다. 이때 스님은 가운데 건물이 비었을 때 그 안에 들어가서, 땅바닥을 파고 애초에 그 속에 묻어 두었던 보물인 ‘해인(海印)’을 꺼내 홈쳐 달아났다. 이 스님이 본래 해인사의 보물인 ‘해인’을 홈치려고 했는데, 경판들이 가득 쌓여 있어 바닥을 팔수가 없어서, 흥선을 대원군이 되게 해 경판 인쇄를 핑계로 다 들어내게 하고, 들어가 땅 속의 ‘해인’을 홈치려고 계획을 세운 것이다. 이 ‘해인’은 그것을 가지면 신통조화의 재능을 부릴 수 있는 보배인데, 해인사에 언제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고, 경판은 신라 지장왕 때 바다를 건너 들어왔다고 한다. 전설에는 ‘해인’이 묻혀 있었을 때에는 판각 건물에 새가 배설물로 더럽히는 일도 없었고, 거미가 줄을 치지도 않았으나, ‘해인’을 훔쳐간 후로는 그렇지 않았다고 했다. 가야산은 호중(湖中) 명산인데 흥선이 천장(遷葬)할 때와 고종이 탄생할 때, 그리고 고종이 등극할 때 울음소리가 났다고 한다. 1868년의 사건 전에도 울었다고 하는데, 이 해 4월 서양 도적들이 배를 타고 구만포로 들어와 이 무덤을 도굴해 갔다. 도굴 당한 후 다시 무덤을 만들 때 관이 어디로 가고 없었는데, 일하는 사람들이 그냥 봉분을 만들어 아무 일 없는 것으로 보고했다. 이렇게 도굴 사고가 있는 것은 혹시 앞서 구리 부처를 부숴 버린 일에 의한 재화가 아닌지 알 수 없다. 우리나라 근대사에 한 획을 그은 오페르트 도굴사건의 현장이기도 하다. 독일인 상인이었던 오페르트는 1866년 두 차례의 통상교섭에 실패하자 당시 실권자였던 대원군을 압박하기 위하여 1868년에 도굴을 감행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신과 부장품들을 협박용으로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다행히 도굴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더욱 강화된 계기가 됐다.
남연군 묘 아래에는 상여가 있다.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광천리 남은들마을에 보존되어 내려오고 있는 상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