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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기억의 저편
이 균 영
1
눈을 뜨자 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벽을 더듬거려 겨우 문 옆에 붙은 스위치를 찾아냈다.
희미한 백열등이 켜졌다. 그곳은 장식이 없는 작고 낯선 방이었다.
지독한 두통과 함께 응급 환자와 같은 목마름이 그를 덮쳤다. 잠자리의 머리맡엔 주전자가 있었다. 컵이 있었으나 그는 허겁지겁 꼭지에다 입을 붙이고 두통과 목마름을 다스렸다. 머리는 여전히 지끈거렸다. 여느 때와는 모든 것이 달랐다.
대개 그는 잠자리에서 깨어나면 눈을 감은 채 그대로 있었다. 오래 길들여진 그의 버릇 중의 하나였다. 그는 지난밤 잠자리에서 하던 생각의 끝을 이어내거나 어렴풋이 남아 있는 꿈을 되새기며 정해진 일조시간(日照時間)을 아끼는 꽃처럼 눈뜨기를 망설였었다. 그는 될 수 있는 한 오늘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누구를 만나고 누구에게 잊지 말고 전화를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따위의 일상을 생각하지 않았고 그저 될 수 있는 대로 아무런 생각도 없이 누워 있곤 했었다. 깨어서 아무런 생각 없이 눈을 감고 있는 동안의 어둠이란 완전한 평화라고 그는 생각하기로 했었다. 그래서 그는 아침 일이 바쁜 시각에도 깬 정신으로 눈을 감고 어김없이 이 어둠을 즐기는 것이었고, 그 때문에 가끔 출근 시간을 맞추지 못하기도 하고 약속을 어기게 되는 경우가 있었지만 이 버릇을 고쳐야겠다고 다짐을 둔 적이 없었다. 이 어둠의 평화가 권태롭게 느껴지기 시작하고 혹시 오늘은 늦잠을 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그 평화를 침범할 때쯤 그는 기지개를 켜듯이 위로 손을 뻗어 라디오를 틀고 드디어 몸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리고 이 버릇이란 그의 단조로운 생활 때문에 근래 몇 달 동안 거의 변함이 없었던 일이었다.
그러나 여느 때와는 모든 것이 달랐다.
당장은 아무런 기억도 해낼 수가 없었다. 심한 두통이 정신을 사납게 했고 속은 쓰리고 메스꺼웠다. 멍하게 천장을 쳐다보며 서 있던 그는 해야 할 일을 갑자기 생각해낸 사람처럼 허둥지둥 벽으로 다가가서 벽에 걸린 양복의 호주머니를 뒤졌다. 지갑을 꺼내고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5만 원권 자기앞수표가 여섯 장, 만 원권 지폐가 네 장, 5천 원권 지폐가 한 장, 한 달치 봉급은 고스란히 있었다. 돈 외엔 예닐곱 장의 명함, 진찰권, 병 역수첩, 주민등록증. 지갑은 그대로였다. 적조했던 옛 친구를 만난 것처럼 그는 주민등록증에 붙은 그의 사진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바짓가랑이에는 흙이 진창이 되어 있었고 엉덩이와 저고리 깃에는 토한 흔적 이 남아 있었다. 그제서야 그는 바지저고리가 옷걸이에 단정하게 꿰어져 벽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무엇인가 기억해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아무런 기억도 만날 수 없었다. 머리맡엔 시계가 벗겨져 있는데 들여다보니 죽지 않고 돌아가고 있었다.
5시 35분.
더 자세히 살피니 베개가 두 개였다. 두 개의 베개를 내려다보며 그는 다시 무엇인가 기억해내려고 애를 썼다. 두통은 계속되었다.
“아, 아.”
그는 갑자기 메마른 입술 사이로 탄성과도 같은 신음 소리를 터뜨렸다. 그는 천장을 올려다보았으나 초점이 흐려진 그의 시선이란 천장을 붙들지 못했다. 그것은 기억 의 실마리를 붙들어 내려는 시선이라고 하는 편이 옳았다.
시선을 거두고 방 안을 두리번거리다 그는 자고 나온 이불을 들췄다. 볕이 닿지 않은 곳에서 생기는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불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곰팡이 냄새에 얼굴을 찌푸리며 그는 처음으로 이곳이 어디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무섬증이 돋았다. 어쩌면 자신이 갇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방에는 창이 없었다. 음모처럼 어두운 지하실과 같았다. 깔고 누웠던 요까지 들춰보았다.
없다!
가방을 잃어버렸구나!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구는 이제야 완전한 현실 세계로 돌아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서둘러 옷을 입었다. 가방 때문에 더럽혀진 옷에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길고 어두운 복도였다. 복도 가운데 형광등이 하나 켜져 있었다. 희미한 불빛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그가 조금 전에 느꼈던 어둠과 단절에 대한 두려움을 해소시켜주었다.
걷기 시작하자 발밑에서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방문마다 녹색 플라스틱 번호판이 붙어 있었다.
복도가 끝나는 곳에서 그는 여닫이 식의 유리문을 만났는데 그것을 밀치니 마당이 나왔고 밝아오는 새벽 공기가 느껴졌다. 하늘은 흐려있었다.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고 섰다가 ‘내실’이라는 푯말이 붙은 방으로 다가가서 잔기침을 세 번 하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여보세요.”
처음엔 기척이 없더니 두 번을 더 불러서야 문이 열렸다.
“왜 그러 세유?”
웬 여자가 눈을 비비며 목을 빼는데 그녀의 푸석푸석한 얼굴과 헝클어진 머리 때문에 그녀의 나이는 40대와 50대 사이를 오락가락하게 했다. 하품을 하고 머리를 뒤로 쓸어 모으면서 방문을 나서더니,
“벌써 날이 샜네.”
그제서야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 나는 누구시라고.”
그녀는 그를 보고 단번에 아는 시늉을 했는데, 이제 40대 중반으로 확실하게 짐작이 가는 그 여자는 오래 알아왔던 사람에게처럼 말을 거는 것이었다.
“아유 선상님도 술을 그렇게 드시면 어뜨캐요.”
여자는 유연한 중부지방 사투리를 썼고 그 때문에 그녀는 장사하는 여자로서는 드물게 순진하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란디 왜유?”
그는 침을 삼켰다. '
“제 가방을 맡아두지 않았나 해서요.”
그는 다시 마른침을 삼키며, 여자의 두툼한 입술을 주시했다.
“아니요, 들어오실 때부텀 빈손인 것 같았지유 아마. 그 가방을 잃어버렸나유?”
“예.”
“돈이에요?”
긴장으로 잊고 있었던 두통과 갈증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는 마당가의 펌프로 다가가서 갈색 고무통에 남아 있는 물을 부어 넣고 펌프질을 했다.
맑은 물이 쏟아졌다.
이른 아침, 맑은 물이 통 속으로 쏟아져 나오며 내는 명랑한 소리가 그의 기분을 한결 밝게 만들었다. 그는 고무통이 넘치도록 펌프질을 해 댔다.
물은 따스했다. 마신 후 얼굴을 적셨다. 주인 여자는 화장실에서 나와 마당을 가로질렀다.
“그런데, 아주머니 여기가 어디쯤 됩니까?”
그는 물었다. 묻는다기보다 그것은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이문동이에유.”
그는 이문동에 있었다. 아니, 이문동이라고? 그는 놀랐다. 그의 표정을 눈치 챈 듯
“왜 취중에 엉뚱한 곳으로 오셨남보네유.”
정말로 엉뚱했다. 어떻게 해서 여기로 오게 된 것일까.
어제저녁.
헝겊에 물을 묻혀 옷을 닦아내며 그는 생각했다.
어제, 그가 퇴근 시간을 맞은 곳은 은행이었다. 빌어먹을, 젠장 × 할…… 퇴근 시간을 생각하면 잡스러운 욕설이 입 안에 가득히 쌓였다. 퇴근 시간이라고는 하지만 그는 제시간에 퇴근을 해본 적이 없었다. 회사보다 은행에 있는 시간이 많았으니까. 시간에 맞추어 퇴근을 한다기보다 그날그날에 배당된 업무를 마쳐야만 퇴근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는데 은행의 일이라는 게 그랬다.
중소 무역 회사의 수입부 말단 사원에게 은행 일이라는 게 으레 그랬다.
어제는 내고⁕ 서류 때문이었다. 결재된 서류가 그의 손에 넘어온 것은 일곱 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전생에 나에게 무슨 원수가 졌기로 이다지 못살게 구는 거요.”
서류를 넘겨주며 담당 은행 대리 신경식(申慶植)이 말했다. 신 대리의 지친 표정을 보며
“갑시다. 오늘은 내가 한잔 사겠소 ”
그가 말했었다.
주머니는 두둑했다. 월급봉투가 그대로였다. 술집을 찾아 걷는 동안 그와 신 대리는 피로를 풀려면 독한 소주가 좋다는 데 합의를 보았고, 그래서 처음 간 곳은 다동 뒷골목의 간판도 기억할 수 없는 술집이었다. 소금구이를 안주로 소주를 마시면서 그들은 저녁 대용으로 공기밥 한 그릇씩을 해치웠다.
소주 두 병을 마셨을 때에도 그들은 취기를 느끼지 않았으나 ‘소주 한 병씩’ 이라는 처음의 약속대로 그와 신 대리는 그 술집을 나왔다. 그때 그는 확실히 가방을 들고 있었다. 그것은 확실하다. 신 대리가 그를 보고, 옆구리에 가방을 끼고 다니는 사람은 꼭 세무 공무원 같은 기분이 들어요 하는 농담을 했고, 그는 그 말을 받아 아니 대학교 교수는 어때요 했으니까.
그런데 2차 3차라는 모든 술자리가 그렇게 시작되듯 그가 먼저 소주 마신 후의 입가심으로 맥주를 한잔씩 하자고 신 대리를 이끌었던 것이다.
다동 소줏집에서 종로를 향해 걷다 우연히 들른 맥줏집이었다.
입가심이라는 조건은 쉽게 무너졌다. 그뿐 아니다. 그들은 빈 병의 수도 헤아리지 않고 마셨다. 그 맥줏집을 나왔을 때의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으나 열 시에서 열 시 삼심 분 사이로 짐작이 갔다.
그는 신 대리가 약간 비틀거리는 것을 보았었다. 아, 그리고 그는 신 대리를 이끌고 제과점으로 갔다. 그는 케이크 한 상자를 사서 신 대리에게 주었다. 확실한 이유는 알 수 없는데 신 대리가 당신은 홀몸이어서 좋겠다. 나는 일찍 장가들어 일찍 고생길로 들어섰다. 애들이 셋이다. 오늘 저녁도 기다리다 아마 지금은 잠이 들었을 것이다. 들어가면 세 놈이 한 다리씩 잡고, 그는 웃었다. 신 대리는 웃지 않았다. 한 다리씩 잡고 매달리는데 그때마다 나는 아, 이것이 그래도 사람 사는 재미인 모양이다 하고 느껴져서 서글프다. 마누라는 하루도 빠짐없이 바가지를 긁는다. 아, 그것은 강물이 흐르듯이 멈추지 않는다―그런 신파조의 넋두리를 늘어놓았으므로 그는 불현듯 신 대리를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이 발동했음이 틀림없다.
제과점을 나와서도 정류장을 찾아 걸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취기가 모는 대로 걸었다. 신 대리가 삼 차를 고집한 것은 그때였다.
나는 공짜를 좋아하는 놈이 아니다. 오늘은 내내 당신만 돈을 쓰는데 나라고 은행에 코 내밀고 돈 냄새 맡은 지 십 년인데 술 한잔 못 사겠는가.
신 대리의 그러한 고집으로 세 번째로 들어간 술집에서 그들은 위스키 종류의 술 몇 잔씩을 더 섞었다.
그 술집을 나올 때에 잠깐 그를 부축했던 종업원의 나비넥타이, 신 대리가 지나가는 여자에게 느닷없이 팔을 벌렸으므로 일어났던 여자의 짧은 비명, 돌아서 달아나던 여자의 연두색 바바리코트, 한기를 느끼며 그가 오줌을 내질렀던 골목과 그곳을 희미하게 비추던 방범등, 그가 상체를 구부린 시멘트 벽 위에 붙어 있던 영화 포스터, 그 속의 여자 나체, 신 대리가 달리는 택시를 막아서자 갑자기 브레이크를 걸며 뛰어내리던 운전사, 고함, 호루라기 소리……
그것들은 머릿속에서 어지러운 무늬로 피었다가 지고, 그런가 하면 다시 피어났다.
그 후 그는 이 여관을 찾았다.
신 대리의 집이 이문동일까. 주인 여자는 이미 보이지 않는다. 내실의 뒤편에서 그릇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는 부엌에 있었다.
“물으실 말씀이 남았나유?”
“어제저녁 내가 몇 시쯤에 이곳에 들어왔지요?”
“통금 시간이 가까와서였지요. 한데 어제저녁 다친 데는 괜찮아요?”
다친 데라니?
“내가 어딜 다쳤습니까?”
“차암, 그것도 모르시니…… 피를 흘리셨지유, 그 택시 운전사와 다투다가 코를 다쳤나 봐요.”
택시 운전사? 그는 점점 당황했다.
“제가 택시를 타고 이곳으로 왔군요.”
“그랬지유.”
주인 여자는 술 취한 사내의 낭패를 고소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왜 싸웠을까요?”
“몰라요, 그건.”
“싸우는 걸 보셨나요?”
그는 물으며 백치처럼 웃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우스운 일이었다.
“밖이 떠들썩해서 나가보았지요. 어떻게 해서 다투게 되었는지는 잘 몰라도 손님이 한사코 택시 안에서 내리지 않으려고 억지를 부렸어유. 운전사는 통금 시간이 바쁘니 손님을 내리게 하려고 했구요. 정말 그렇게 생각이 나지 않으세요?”
그는 캄캄한 밖으로부터 새벽의 첫 빛줄기와 같은 실마리를 택시 운전사의 영상에다 걸었다. 그러나 어떠한 사람의 윤곽도 잡히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 내가 정말 운전사와 싸웠단 말이오?”
“그럴 처지가 못 되었어요. 취해서 걷지도 못하고 혀가 꼬부라져서 말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는 지경이었으니까. 술집 많은 동네에선 흔히 있는 일이라 방범대원이 오자, 나는 안으로 들어와 버렸는데 조금 있으니 바로 우리 집으로 들어오셨더군요.”
“방범대원이라구요?”
“네, 방범대원.”
“그 방범 대원이 내 가방을 맡아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군요.”
“글쎄, 그랬으면 오죽 다행이겠어유.”
정말이지 방범대원이 가방을 보관하고 있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는 여관을 나서려다 그를 앞서 문을 총총히 나서는 젊은 남녀 한 쌍을 보았다. 이른 아침에 여관을 나가 이제부터 그들은 무엇을 할까 하는 한가로운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몰라도 여자는 이른 아침부터 집에 들어갈 수가 없을 것이다. 그들은 식당에 가서 아침을 먹을 것이고 남자는 곧 직장으로 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참, 오늘은 일요일 이다.
아아, 일요일.
그는 갑자기 발걸음을 늦추었다. 일요일이라면 남자는 직장엘 가지 않아도 된다. 그들은 아침을 먹고 시장이나 백화점이나 연쇄 상가 같은 곳을 돌아다닐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영화 구경도 할 수 있고 교외선을 타고 한껏 기분을 낼 수도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그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일요일이 주는 한가롭고 여유 있는 기분 때문에 꼭 가방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방을 찾게 된다면 아무것도 달라질 게 없었다. 가방을 찾게 된다면 오늘은 전과 꼭 같은 일요일이며 내일은 전과 꼭 같은 월요일이 될 것이다.
여관집 아주머니가 가르쳐준 대로 길을 따라가니 파출소가 있었다. 파출소의 의자에 앉아 그는 기다렸다. 방범대원이 둘 들어와서 업무일지를 적었다. 그를 힐끗 쳐다보았으나 아는 체를 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더 기다렸다. 또 다른 두 명의 방범대원이 들어왔다.
“아, 당신.”
그중의 한 명이 단번에 아는 체를 했다. 그는 괜스레 어깨를 움츠렸다.
“어디서 술을 먹는데 그 모양이오, 조심하셔야지.”
방범대원은 밤을 새워 일한 사람답지 않게 의기양양했고 나이가 그보다 어려 보이는데도 공손한 언사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그런 걸 따질 기분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떻게 오셨어요.”
그 물음을 받자 그는 속으로 아, 틀렸구나 하고 생각했다. 방범대원이 가방을 보관하고 있다면 아, 가방 때문이오? 하고 물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가지고 있지는 않더라도 혹시 그 소재를 알고 있을 수는 있다. 사정 얘기를 해볼 수밖에 없었다.
“이거 미안하게 됐습니다. 어제저녁 가방을 잃어버렸는데 택시 운전사와 실랑이를 벌일 때 아저씨가 혹시 그 가방을 보지 못했을까 해서요.”
“돈이오?”
방범대원은 여관집 여자와 꼭 같은 물음을 던져왔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방범대원도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혹시 택시 안에다 두었다면 모르지만…… 이유야 어떻든 간에 당신이 코피를 흘렸기 때문에 내가 그 택시 번호를 적어두었어요. 필요하오?”
“예.”
그는 수첩을 꺼내 방범대원이 불러준 대로
‘서울 아 4513, 노란색 코로나*’라고 적어 넣었다.
“마흔 살 가까이 되어 보이는 운전산데 키가 작고 몸집이 좋은 데다 별나게 턱수염이 많았소.”
그는 또 수첩에다
‘40세가량, 작은 키에 뚱뚱한 몸집. 턱수염이 많음’ 이라고 적어 넣었다. 파출소를 나오니 술집이 줄을 잇대어 서 있었다. 문을 연 술집보다 아직 손님을 보지 않는 술집이 더 많았다.
이른 시각이었다. 신 대리에게 전화를 하기에도, 운전사를 찾기에도. 그는 문이 열린 한 해장국 집으로 들어갔다. 해장국이란 시래기 국물에다 소 피를 넣고 밥을 말아놓은 것인데 훌훌 국물을 마시니 속이 시원했다. 까끌까끌하던 입 안이 매끄러워졌다.
해장국 한 그릇을 해치우고 나서 그는 담배를 피우며 계산대 위에 있는 날짜 지난 신문을 집어다 읽었다. 속이 풀어지며 온몸이 나른해졌다. 아직도 이른 시간이긴 했지만 그는 신 대리에게 전화를 해보기로 했다. 먼저 은행에 전화를 한 다음 은행에서 일러준 대로 번호를 돌렸다.
전화를 받은 것은 계집아이였다.
“응, 우리 아빠요?”
목소리가 깜찍했다.
“누구야, 응?”
끼어드는 사내아이 목소리. 전화기를 놓는 소리, 함부로 문을 여닫는 소리, “아빠” 하고 부르며 서로 얽히는 두 아이의 목소리.
그는 신 대리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목소리로 아이들의 성격과 얼굴을 생각했다. 지금쯤 하얀 앞치마를 두르고 아침을 준비할 아이들의 어머니, 화단에 물을 주는 아빠…… 그러나 가방 생각이 그의 여유 있는 상상을 빼앗아갔다. 그는 초조하게 기다렸다.
“여보세요.”
잠기운이 붙어 있는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그는 침을 삼키며 되도록 급한 마음을 숨기려고 애썼다.
“접니다.”
“아, 나는 누구시라고. 그래 엊저녁 엔 어떻게 된 거요? 집에는 잘 들어갔어요?”
이제 신 대리와 함께 이문동으로 온 게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해졌다.
“아니, 여관 신셀졌어요.”
“그럴 줄 알았어요. 나도 어떻게 집엘 들어왔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아요.”
그토록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면 그의 가방까지 챙겨줄 여유란 도저히 없었을 것이다. 이제 이야기는 끝난 것이다. 그래도 혹시 하였다.
“혹시 내 가방 신 대리님에게 있는 거 아니오?”
“아니, 허 그래도 당신이 사 준 케이크 상자는 어김없이 가지고 왔드만.”
농담 삼아 그렇게 받더니 신 대리는 말을 뚝 끊고,
“가방이라니, 거기에 어제 넘겨준 '서류가 들어 있는 게 아니오?” 높고 빠른 어조로 물었다.
“그래요.”
“아이쿠.”
신 대리는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신 대리에게 직접 관계가 되는 일은 아니다. 일요일 아침에 남의 기분을 우울하게 만들 필요가 어디 있는가.
“찾아보면 나오겠죠. 뭐, 찾으면 알려드리지요…… 아침부터 죄송했습니다.”
그가 전화기를 놓으려고 하자, 신 대리가 다급하게 붙들었다.
“왜요?”
“나와 헤어질 때까지는 가방을 들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요? 고맙습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어디에서 가방을 찾을까, 잊고 있었던 두통이 그를 때렸다.
혼자서 책임을 지면 그만인 일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서류를 다시 만들려면 두 달은 걸릴 것이다. 내일이면 대출을 받을 수 있는 수천만 원의 돈이 두 달 후로 미루어지는 것이다. 회사는 타격을 받을 것이다.
어디에서 가방을 찾을 것인가. 그는 외로움을 느꼈다. 신 대리와 헤어질 때까지 가방을 들고 있었다면 택시 안에 두고 내린 것이 분명해진다. 우선 택시를 찾아야 한다. 길을 따라 걸으며 그는 수첩을 꺼내 택시 번호를 확인했다.
‘서울 아 4513, 노란색 코로나.’
‘40세가량, 작은 키에 뚱뚱한 몸집, 턱수염이 많음.’
운전사를 만나야 한다. 그토록 형편없이 취했었다면 요금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홧김에 담보로 잡아두자는 생각에서 그의 가방을 가져간 것일 수도 있다. 그건 그렇고 왜 운전사는 하필 이문동에다 그를 데려다 놓았을까. 통금 시간이 가까운데 자신은 왜 차에서 내리지 않겠다고 억지를 부렸을까. 운전사가 나를 때린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의문은 줄줄이 떠오르는데 하나도 해답을 줄 수가 없었다.
2
시청의 안내원은 친절하였다. 차량 사무소는 시청에서 별도로 분리되어 나간 지 오래였다.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귀찮은 기색 없이 안내원은 ‘차량사업등록소’의 위치며 전화번호, 그곳을 가는 데 필요한 버스 노선을 일일이 가르쳐주는 것이었다. 그는 시청을 나왔다. 시청 앞 광장에는 비둘기 떼들이 놀고 있었다. 평화는 무관심이다. 그는 택시를 탔다.
“그건 어렵죠. 새벽에 나오면 밤 열두 시가 돼야 들어가는 운전사를 어디서 대낮에 만난단 말입니까.”
운전사는 백미러로 그를 들여다보았다.
“그렇겠군요.”
대답이야 그렇게 했지만 그렇다고 앉아 있을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왜 그러세요.”
가재는 게 편이라고 무심결에 자세히 일러준 운전사는 은근히 후회가 되는 모양이었다.
“찾는 사람이 사고라도 저지르고 도망을 친 모양이죠?”
그렇다면 경찰에 신고를 하면 될 게 아닌가.
“어제저녁 가방을 그 차에 두고 내린 것 같아 그러는 겁니다.”
“아, 그래요.”
일단 마음을 놓는 듯하더니,
“돈이 들었나요?”
여관집 아주머니와 방범대원이 했던 똑같은 물음을 던져왔다.
“내게는 귀중하지만 딴 사람에겐 아무 쓸모없는 것이에요, 서류 가방이니까.”
“그럼 돌려줄 거예요. 엊저녁 일이라면 아침에 방송국 분실물센터 같은 곳에다 연락을 해보지 그랬어요.”
“벌써 다 해봤지요.”
길에선 먼지가 일었다. 도로포장 공사를 하고 있었다. 강남의 전경은 낯설 었다.
“저기 소방서 옆의 건물입니다.”
간판이 걸려 있었다. 건물 안은 한적했다. 창가에 우연히 앉아 있는 사내에게 다가가 용건을 설명하자 사내는 귀찮은 표정으로 피우던 담배를 끄며 캐비닛의 문을 열고 서류철 하나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서류는 차량의 번호 순서대로 철해져 있었으므로 4513번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운전사의 성명은 오영재(吳榮載). 그러나 명함판 사진으로는 뚱뚱한 것도 키가 작은 것도 알 수 없었다. 또한 사진 속의 얼굴에는 수염이 없었다. 어쨌거나 오영재란 사람은 그에게 생소한 얼굴이었다. 그는 수첩에 차량 등록표를 옮겨 적은 후 사내에게 양해를 얻고 전화를 빌렸다.
“네, 남광운숩니다.”
상냥한 여자 목소리였다. 쇠붙이 부딪치는 소리가 섞여 들렸다. 무엇을 어떻게 물을 것인가, 망설이며 그는 그대로 서 있었다.
“여보세요.”
여자의 목소리가 그를 재촉했다.
“물어볼 게 있습니다만…….”
“네, 좋습니다.”
“4513 코로나 택시가 그 회사 소속이죠?”
“그렇습니다만.”
“그 기사 분을 만났으면 해서요.”
“무슨 일이신데요.”
경계하는 눈치였다. 그는 또 그대로 서 있었다.
“여보세요…….”
도리가 없었다.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다.
“아가씨!”
그는 그렇게 불러놓고 실수를 한 것만 같았다. 아가씨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은 말입니다. 어젯밤 내가 회사의 서류 가방을 잃어버렸거든요, 혹시 그 택시 안에 두고 내린 게 아닌가 해서 그럽니다만…….”
“그런데 차 번호를 어떻게 외고 계셨지요?”
여자는 경계를 풀지 않았다.
“사정 이야길 하려면 아주 길어집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필요 없는 서류 가방이니까 그 기사 양반을 만나 보관하고 계신지 어쩐지만 확인하면 됩니다.”
그 말만으로는 미흡한 것 같았기 때문에 그는 덧붙였다.
“보관하고 계시다면 성의껏 사례를 하겠습니다. 어떻게 만날 수 없을까요?”
“밤 열두 시가 되면 이곳으로 들어오지요. 차고가 여기니까요.”
“거기가 어디죠?”
“이문동이에요.”
그는 여자로부터 약도를 익혔다. 전화벨 소리가 울리자 여자는 점점 빠르게 말하더니,
“됐지요?”
하고는 이쪽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세상에 이렇게 만나기 어려운 사람이 있담. 그는 ‘자동차사업등록소’를 나왔다.
바람이 불었다. 들판 곳곳에 건물이 들어서고 있었다. 가을이 지나면 저 들판은 모두 시멘트로 묻힐 것이다. 그는 서둘러 차를 탔다. 밤 12시까지, 운전사를 만나기까지 어젯밤에 간 술집들을 돌아볼 심산이었다. 신 대리와 헤어질 때까지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면 그것은 헛일이 될 것이지만 신 대리의 정신 상태는 신용할 만한 것이 못 되었다. 또한 헛일이 된다고 하더라도 이 순례(?)가 어떤 해결의 실마리를 붙들게 해줄지도 모른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일요일이 끝나가고 있는 것이다. 월요일은 틀림없이 다가온다. 그 전에 가방을 찾아야 한다. 그는 종로에서 차를 내렸다. 그는 어제저녁의 그를 만나러 갔다. 술값 한번 되게 치르는군. 그는 혼자 중얼거리며 그를 조소했다.
그들이 두 번째로 들렀던 맥줏집은 찾기 쉬웠다. 그때까진 맑은 정신이었으니까. 손님은 몇 되지 않았다. 낮이라서 그런지 술 대신 대부분 커피나 음료수를 마시고 있었다. 그는 어제저녁 신 대리와 그가 앉았던 자리를 찾아갔다.
분명히 여기였지, 그는 마음속으로 확인했다. 스피커에선 노래가 나왔다.
“뭘 드시겠어요?”
앳된 처녀가 물었다. 하루 종일 해장국 한 그릇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느꼈던 지독한 두통을 자연스럽게 잊어버렸듯이 아침과 점심을 먹지 않고도 배고픔은 없었다. 가방 생각만 있었다.
“밥이 있소?”
그는 오므라이스 한 접시를 비웠다. 지나다니는 종업원들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으나 알아볼 수 없었다. 그는 신 대리가 앉아 있던 자리에다 신 대리를 앉히고 신 대리가 하던 이야기와 그가 취하던 자세를 기억하려고 했다. 그때 가방은 어디에다 놓았던가? 그는 지나가는 여급을 불렀다.
“이 자리를 담당하는 아가씨를 만날 수 있겠소?”
“바로 전데요.”
“지금이 아니라 어제저녁에 말이오.”
“저녁도 마찬가지예요.”
“그럼 혹시 나를 기억하겠어요?”
여자는 고개를 비껴 그를 보았다.
“누구신데요?”
“어젯밤에 친구 한 명과 이 자리에서 맥주를 마셨어요.”
“글쎄요.”
그가 어제저녁 술시중을 들어준 이 여자를 기억하지 못하듯이 그 여자도 그를 기억하지 못했다. 여긴 아닐 것이다. 아직 완전히 취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혹시나 했다.
“혹시 어젯밤 이 자리에서 손님이 놓고 간 가방 하나 보관하고 있지 않아요?”
“아니요.”
여자는 지나쳤다. 그는 그곳을 나왔다. 어둠이 내리는 일요일 밤의 거리는 한산했다. 그는 약 십 분 동안 걸었다. 서너 집을 기웃거린 후 그는 ‘메시지’라는 간판이 걸린 곳으로 들어섰다. 열다섯 개의 붉은 카폣이 깔린 계단을 그는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그러면서 그는 어제저녁도 지금과 꼭 같이 이 계단을 걸어 내려갔을 자신을 발견해보려고 했다.
계단은 어두운 시간의 늪이었다. 그가 문을 밀치려고 했을 때 그것이 저절로 열렸기 때문에 하마터면 그는 넘어질 뻔하였다. 몸을 일으키며 그는 맨 먼저 침침한 불빛 속에서 흰 꽃 위에 얹힌 듯한 까만 나비넥타이를 보았다. 음침한 벽 구석구석에서 까만 나비들이 나래를 치는 것만 같았다.
젊은 쌍들이 네댓, 구석을 점령하고 있었다. 그는 불빛이 밝은 곳으로 가 앉았다.
대바구니의 갓을 쓴 전등이 붉은 벽돌 칸막이 위에 붙은, 두 손바닥을 겹쳐놓은 것만 한 크기의 판화를 비췄다. 판화 속엔 옷을 벗은 겨울나무 네 그루, 새 두 마리. 그는 뜨거운 커피를 마셨다.
“괜찮으세요?”
그는 갑자기 숨을 쉴 수가 없었으므로 조금 여유를 두었다. 고개를 돌렸다. 그 소리는 등 뒤에서 넘어왔던 것이다. 나비넥타이가 다가와 있었다. 사내답지 않게 목이 길고 얼굴이 갸름했기 때문에 나비넥타이는 나비 리본으로 고쳐 부르는 편이 나을 성싶었다.
“나 말이오?”
“네.”
“나를 알아보겠소?”
“네, 어젯밤……”
나비 리본은 웃었다. 가뭄 끝에 묻어오는 첫 빗줄기를 맞은 풀잎처럼 그는 생기를 회복했다. 오랜 가뭄과 같았던 하루 동안의 갈증과 두통에서 깨어나려는 듯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이리 좀 앉을까?”
앞자리에 앉히고 담배를 권했다.
“아직 못합니다.”
나비 리본은 수줍은 듯 사양했다. 그는 확증을 잡은 수사관처럼 당당하게
“어젯밤 내가 여기 가방을 두고 갔는데.”
물었다.
“아니요.”
대답은 간단했다.
“가방을 잃어버리셨나 보지요?”
표정을 바꾸지 않은 얼굴로 되물었다. 대답할 기운마저 없었으므로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취하셨었어요, 돈이 들었나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자세히 얘기를 해보겠어? 어젯밤 말이야.”
“들어오실 때부터 두 분은 취해 있었어요. 자리에 앉아서는 의외로 조용했지요. 그래 주문하시는 대로 다 드렸지요. 위스키를 마셨어요:”
“내가 나간 게 몇 시쯤 되었을까?”
“열한 시가 막 넘는 때였죠. 제가 입구까지 부축해드렸어요.”
“참 고맙군. 그러면 그때 내가 가방을 들고 있었는지 어땠는지 기억할 수 있겠군.”
나비 리본은 생각을 굴려보는 듯했다. 그는 그 짧은 시간을 오래오래 기다렸다. 산다는 건 어차피 기다리는 것이니까. 그는 엽차로 입술을 축였다.
“옆구리에 끼는 손가방이죠?”
“맞아요, 까만색.”
“들고 계셨어요.”
그는 ‘메시지’를 나왔다. 이제 당장은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다. 밤 열두 시가 될 때까지 4513번, 턱수염 많은 코로나 택시 운전사를 만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사는 건 어차피 기다리는 것이니까. 미래에 만난 행운과 눈물과 갈등, 사랑과 죽음. ‘메시지’를 나올 때까지 들고 있었다면 희망을 걸 수 있는 것은 택시뿐이었다.
택시 안이 틀림없다! 그는 그를 위로했다. 그러나 지금 당장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야 할까. 그는 지난 일요일 저녁과 그 전 일요일 저녁을 그가 무엇을 하고 지냈던가 하는 의문을 떠올렸다. 알 수가 없었다. 방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았을까, 사람을 만나고 있었을까, 책을 읽고 있었을까……
그는 되는대로 길을 따라 걸었다. 극장 앞을 지나는데 표를 끊으려는 사람들의 행렬이 뱀처럼 길었다.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포옹하고 있는 두 남녀의 옆얼굴, 그 뒤에서 격투를 벌이고 있는 두 사내, 수평선 너머로 아스라이 사라지는 배, 부두에 선 여자. 그는 다시 걸었다. 양복점과 서점, 시계점, 빵집, 중국집, 다방, 가구점, 병원을 지나쳤다.
남광운수회사의 사무실은 차고의 한편에 슬레이트를 엮어놓은 가건물이었다. 의자가 여섯, 철제 책상 두 개, 규모에 어울리지 않게 전화기는 두 대였다. 낮에 전화를 받던 젊은 목소리의 여자 주인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무료하게 앉아 담배를 피웠다.
“어쩌시다 우리하고 같은 배를 탔습니다.”
의자에 둘러앉아 화투짝을 돌리던 사내 중의 하나가 그에게 말을 붙였다. 차가 들어온 후 정비를 하기 위해 기다리는 정비공과 비번인 운전사들인 듯했다.
“심심파적* 시간 기다리는 거예요. 끼어보시겠어요?”
또 한 사내가 말했다. 그는 사양했다. 무료하긴 했지만 내키지는 않았다.
“씨팔 끗발 안 서네.”
누군가 패를 던졌다. 심심파적이라더니 판이 큰 눈치였다. 열두 시가 되려면 아직 멀었다. 오늘도 여관 신세를 지는 수밖에 없었다. 가방만 찾을 수 있다면 그런 것쯤은 문제될 것이 없었다. 정비공들은 말없이 열중해 있었다. 화투짝을 때리는 소리와 차량들의 굉음 소리를 제외하면 사방은 꽃처럼 고요했다. 그는 완전한 무관심 속에 있었다. 석유난로가 실내 공기를 포근하게 했다. 그는 졸았다.
키 작은 꽂들이 만발한 뜰에서 사내아이와 계집아이가 꽃을 누비며 기어 다녔다. 하얀 몸뚱아리를 드러내고 엉금엉금 기는 게 새끼 짐승들 같았다. 정말 짐승처럼 아이들은 서로의 몸을 혀로 핥았다. 향내를 빠는 듯 그들은 꽃 무더기에 코를 박았다. 벌들은 아이들을 피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웃었다. 그들의 하얀 젖니에서 햇빛이 부서졌다. 사내아이가 부드러운 풀 위에다 몸을 굴렸다. 뜰의 경사진 아래쪽으로 굴러 내리던 사내아이가 찢어질 듯한 비명 소리를 냈다. 계집아이가 따라 울었다. “엄마.” “엄마.” 아이들이 어머니를 부르는 소리가 메아리를 일구었다. 날카로운 가시나무에 사내아이의 팔이 감겨 있었다. “얘야, 얘들아.” 멀리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있니 얘들아.” 멀리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아, 가시에 감긴 사내아이의 팔에서 피가 솟아오르더니 곧 몸뚱이로 번져 나갔다. 피 피다! 활짝 웃고 있던 꽃들이 일제히 일어서며 함성을 질렀다. 함성은 하늘을 떠멜 듯 했다. 잠자리 같은 비행기가 떴다. “얘들아.” “얘들아.” 여자의 목소리가 한껏 절박하게 울렸다. 함성을 지르던 꽃들이 일제히 엎드렸다. 그 순간 꽝 하는 폭음이 여자의 목소리를 끊어놓았다.
얘들아 서로 손을 잡아라, 손을 놓아서는 안 된다.
여자의 목소리는 마지막으로 외치고 있었다.
손을 잡자, 엄마가 그랬다. 저 폭음의 뒤에서, 손을 잡으라고.
사내아이가 계집아이의 손을 잡았다. 귀청이 아릴 듯한 총소리가 계속되었다. 계집아이가 손을 놓았다. 그들의 몸이 떨어진 사이로 수많은 피란민들이 지나갔다.
손을 잡아, 손을.
그러나 그럴수록 그들의 몸은 멀어지고 있었다. 폭음과 총소리가 울리자 수없는 사람들이 쓰러졌다. 짧고 절망적인 신음 소리가 땅을 덮었다.
“왜 그러시오.”
그는 눈을 떴다.
“헛소리를 질렀어요.”
“꿈을 꿨나 봅니다.”
꿈속에서 보았던 선명한 장면들이 다시 보였다.
“전화 받으시오.”
가시나무, 피, 피란민, 털 안 난 짐승 새끼 같던 계집아이와 사내아이.
“전화 받으라니까요.”
그는 얼떨결에 넘겨주는 전화기를 받아 들었다.
“여보세요.”,
그를 부르고 있었으나 그는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당신이 기다리던 사람이오, 씨팔.”
전화기를 넘겨준 사내가 꽥 소리를 질렀는데 마지막 말은 화투판을 향해서 던지는 것인 듯했다.
“그 친구, 사고를 저질러 회사에 신고를 한 것이니까 꼬치꼬치 캐물어 성질 돋구지 마시오.”
정비공들의 어투로 보아 심심파적으로 한다던 화투판은 긴장되어 있음이 분명했다. 그건 그렇다 치고 그는 행운이었다. 열두 시까지 기다리려면 한 시간 반이 남아 있었다.
“4513 기사 분이십니까?”
“예.”
엄청난 사고를 저질러놓고 처분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목소리는 겁에 질려 있었다.
“여쭤볼 게 있어 여기서 들어오실 때까지 기다리던 사람입니다.”
“무슨 일이신데요?”
잘못된 추측이었다. 거리낄 것 없는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어젯밤 통금이 가까와서 이문동까지 태워다 준 사람을 기억하시겠어요?”
대답이 없다. 차량의 소음이 들려왔다. 타이어가 터진 가벼운 사고 때문에 길가에 차를 세워두고 약방에라도 들어가서 전화를 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 취한 양반을 모셔 내려드리려다 실수한 걸 가지고 문제 삼을 게 있어요?”
코피를 흘리게 했다더니 그 일이 맘에 켕기는 모양이었다. 수염이 많고 키 작은 뚱뚱한 사람이라면 선량한 성격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게 아닙니다. 실은 그 차 안에다 회사 서류 가방을 두고 내렸거든요. 옆구리에 끼는 검은색 손가방…….”
“잘못 아셨겠죠. 손님을 어제 마지막 모셨는데 가방은 없었어요.”
없었어요. 사내의 마지막 목소리가 그의 머리를 흔들었다. 돈도 아닌데 주워놓고 주지 않을 리는 없다.
“그래요?”
체념 섞인 말투로 그래 놓고 수화기를 놓으려다가
“그런데…….”
더 말할 게 있다는 뜻을 전했다. 저쪽도 끊으려고 했던 듯 당황한 기색으로 받았다.
“왜요?”
“왜 이문동으로 데려갔지요?”
“네?”
“왜 엉뚱한 이문동으로 갔느냐구요?”
“데려가다니, 어허 정말 이분이, 이문동으로 가자고 하니까 이문동으로 간 게 아니오.”
“나는 전혀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말할 리가 없거든요. 나는 이문동과 전혀 관계가 없어요. 지금의 집도 그곳과는 엉뚱하게 떨어진 곳이고요.”
“시간이 없으니 끊겠어요. 그렇게 취해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떻게 아시겠어요. 정 궁금하면 그 여자에게 물으면 될 것 아니에요.”
“뭐라구요, 여자?”
“그래요, 여자.”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무슨 말이라니, 엊저녁 손님과 함께 내 차를 탔던 여자 말입니다. 그분은 취하지 않았으니까 다 알 것 아니겠어요?”
“내가 여자와 동행이었나요?”
“농담은 그만하세요, 시간이 없으니까.”
운전기사는 그의 귀에다 바싹 대고 코웃음을 쳤다. 이제 확실해진 것은 4513 기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것이 공중전화가 아니라는 것과, 그가 절대로 가방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 또한 운전기사는 엄청난 사고를 저지르지 않았으며 혹시 그런 사고를 냈다고 하더라도 본래의 성품이 퍽 낙천적인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아저씨, 실례가 많습니다만 자세히 이야기를 좀 해주시겠어요? 그 가방을 못 찾으면 회사 하나가 거덜이 난단 말입니다.”
그는 과장해서 말했다.
“빈 차로 차고가 있는 이문동으로 향하다 종로 2가와 3가 사이 어디 쯤에서 손님을 태웠어요. 아마 통금 15분이나 20분 전쯤 된 시각이었을 거예요.”
“그때 내가 가방을 든 걸 보셨던가요?”
“눈여겨 보지 않았어요.”
“여자는 아마 합승 손님이었겠지요.”
“아니요, 손님은 그 여자 가슴에 기대어 자고 있었어요. 이문동이 가까와 어디다 세워드릴까요 하니까 여자 분이 손님을 깨웠어요. 손님이 정신을 돌리는 듯하더니 택시에서 내리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어요. 뭐라고 중얼거리면서 내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때는 이미 혀가 꼬부라져 알아들을 수가 없었죠. 생각해보세요. 통금 시간은 다 됐는데 취한 사람이 무조건 차에서 내리지 않겠다고 하니, 억지로 끌어내릴 수밖에요. 그러다 다친 거예요. 고의는 아니었습니다만 미안합니다.”
그는 대답하지 않고 전화기를 놓았다. 문을 나서는데 아무도 그를 주의하지 않았다.
바람이 찼다. 구는 바바리코트의 깃을 세웠다. 오늘 가방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은 거의 확실해졌다. 빌어먹을, 책임을 지자. 실수를 한 것뿐이다. 어떠한 책임이라도 불평하지 않겠다. 실수에 산목숨을 설마 어떻게 할 것인가, 죄스러운 일이긴 하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근성을 살려내자, 이미 사라져버린 내 독한 근성, 근성.
그는 속으로 그렇게 외치며 그를 선동했다. 어깨를 흔들고 고개를 아래위로 번갈아 꺾으며 길을 걸었다. 그러나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무슨 여자였을까? 어느 틈에 만난 여자일까.
신 대리와 ‘메시지’를 나온 것은 열한 시가 막 지난 시각이라고 했다. 4513 운전기사는 통금 십오 분 전쯤 그를 태웠다고 말했다. 사십여 분의 시간이 공백을 만들었다. 그 시간 동안에 여자를 만났다.
웬 여자였을까. 그 여자가 가방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그는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다. 숨이 찼으나 쉬지 않았다. 그가 이제 막 나온 차고에서 어제저녁 잠을 잔 여관은 같은 이문동이 아닌가. 멀지 않았다. 그는 여관으로 들어섰다. 주인 여자가 놀란 눈을 했다.
“웬일로 오늘 밤에도 오셨어유?”
한가로운 기분이 아니었으므로 그는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치른 다음 곧장 물었다.
“어젯밤에 내가 이곳엘 누구와 함께 왔었나요?”
여자는 웃기부터 했다. 짐작했던 대로였다.
“못 본 사람이면 깜박 속겠네요. 세상 남자들은 하나같이 다…….”
“그럼 아침엔 왜 제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어요?”
“쑥스럽게 그걸 왜 묻겠어요. 그걸 모를 사람이 있다고 생각이나 했어야죠. 숙박비도 여자분이 내던 걸유.”
그제서야 그는 그의 잠자리 옆에 놓여 있던 베개와 옷걸이에 단정하게 꿰어져 있었던 바지저고리, 단정하게 벗겨져 있던 머리맡의 시계를 생각했다.
“그 여자가 새벽에 나가는 걸 아주머니가 보셨나요?”
“웬걸요.”
“어떻게 생겼던가요, 기억나는 게 없으세요?”
“똑똑히 보았어야죠. 으레 그런 여자려니 했지요. 그런데 아저씨가 잃어버렸다는 가방을 그 여자가 가지고 갔나요?”
“아니에요.”
고개를 젓고 나서
“숙박비를 그 여자가 냈다면 숙박계도 그녀가 썼지요?”
“아마 그랬을 거예요.”
여자가 숙박계를 가져와 어젯밤 숙박자 명단이 적힌 곳을 펴주었다.
“그란디 누가 누군지 모르실 거 예유.”
그녀의 말대로였다. 숙박계에는 투숙한 호실별로 적게 되어 있지 않았다. 들어온 순서 대로였다.
“내가 마지막 손님이 아니었나요?”
“이 앞에 술집 들이 많아서 열두 시가 넘어서도 손님들이 많답니다.”
그는 여관을 나왔다. 온몸의 기운이 말끔히 가신 듯했다. 무슨 여자였을까? 일단은 술집 여자라고 생각되었다. 혹은 길거리에서 만난 여자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여자라면 무엇 때문에 돈 한 푼 받지않고 그에게 그토록 친절할 수 있을 것인가. 귀찮은 술 취한 사내의 투정은 고사하고라도 택시비와 숙박비를 내고 자신의 선행을 숨기듯 사라져버린 술집 여자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우연히 그의 젊은 육체를 산 여자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상대가 이미 온전한 사내구실을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었을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녀는 누구일까. 그와의 동행을 계획하고 그를 미행하다 가방을 빼돌린 여자가 아닐까. 그러나 그녀는 무엇 때문에 가방의 서류가 필요했을까. 그때 그는 말로만 들었던 미인계란 말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이번의 수출 계약만 하더라도 그의 회사를 포함해서 세 회사에서 경쟁이 붙었던 일이었다. A·B의 두 회사는 그의 회사와 수출 취급 품목이 거의 동일했기 때문에 늘 경쟁하는 입장에 있었고, 번번이 그의 회사에 참패를 당하곤 했다. 앙심을 품은 그 회사에서 수출 계약을 담보로 한 은행 대출에 방해를 놓을 계획으로 그에게 여자를 붙여놓는 일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회사에서 이 대출을 받지 못한다고 해서 이미 성립시켜놓은 수출 계획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임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결국 이 일은 말단 사원인 자신에게만 피해가 돌아오는 일이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는 그런 허술하고 무용한 미인계란 있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이제 그는 그 여자를 일단 술집 여자로 생각하기로 하였다. 열한 시에 ‘메시지’를 나와 택시를 타기까지의 비어 있는 시간에 그들은 기억할 수 없는 또 한 술집을 순례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 그는 공중전화 박스로 뛰듯이 걸어갔다. 초가을의 저녁 날씨는 그의 기분에 따라 한기를 거두었다. 그는 다이얼을 돌렸다.
“아, 어떻게 됐어요?”
신 대리는 걱정하고 있었던 듯했다.
“틀렸어요. 하루 종일 헤맸는데…….”
“……”
“남은 한 군데가 있긴 해요.”
“벌써 열한 시가 가까운데……?”
“어젯밤 열한 시경 우리는 메시지라는 술집을 나왔어요. 세 번째 들른 술집 인데 그곳에서 위스키를 했어요. 기억하시겠습니까?”
“메시지라는 이름은 몰라요. 분명히 거기서 독한 술 한두 병쯤은 더 비웠을 거예요.”
“그다음 우리는 어떻게 했습니까?”
“……”
“신 형은 바로 차를 탔었나요?”
“아닙니다. 우리는 한참 걸었던 듯해요. 담 곁에 오줌을 싸고 길 가는 여자들을 희릉하고…….”
신 대리의 부인은 자고 있는 것일까, 곁에 없을까.
“그리고요?”
“글쎄 잘 모르겠어요. 하여튼 택시로 집 앞에 닿은 게 열두 시가 다된 시각이었다니까 종로 근방에서 차를 탄 것은 열한 시 사십 분쯤이 됩니다. 종로에서 집까지는 야간엔 이십 분이 걸리니까. 그런데 그게 가방을 찾는 데 무슨 도움이 됩니까?”
“네, 기억해보세요. 메시지를 나와 우리가 또 들른 곳을.”
“메시지에서 나와…… 글쎄…… 아. 참 당신 어젯밤 그 여자 어떻게 했어요?”
“여자요?”
그는 바짝 긴장하였다.
“그래요.”
“무슨 여자였죠?”
“글쎄, 아 그러고 보니 우린 분명 술집 한 군데를 더 들렀군요. 아마 거기서 그 여잘 만났을 거예요.”
“그 술집, 그 술집만 기억해보세요, 그러면 됩니다. 어디였죠?”
삼 분이 지났습니다. 통화는 간단히 하세요. 밤도 깊었습니다. 그는 다시 동전을 넣고 다이얼을 돌렸다.
“메시지에서 극장 쪽으로 빠지는 골목 어딘가가 분명해요. 확실치는 않은데 상당히 고급 술집이었어. 가수들이 노래를 부르고 여급들이 곁에 앉아 시중을 들었고, 그리고 우린 또 맥주를 마셨던 것 같아요. 탁자 위에서 병이 아래로 구르며 깨지는 소리가 났는데 기억에 남아 있군요. 그것밖에 생각나는 게 없어요.”
그것만으로 하고많은 술집에서 하나를 찾아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좀 더 생각해보세요. 아무거나 좋습니다.”
“으음…… 계단을 내려가는데 그 양편에 화분이 놓여 있었던 것 같아요. 내가 코를 박고 향내를 맡은 것 같고…… 마누라 있는 사람이 꽃은 왜…… 뭐 그런 식으로 당신이 내게 농담을 했던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 밤도 늦었는데.”
그가 전화기를 내려놓으려고 하자
“늦은 것 생각 말고 이후에도 필요하면 전화 주세요. 다른 걸 더 기억해낼지 모르니까. 너무 걱정은 마세요. 서류 뭉치뿐이니까 어쩜 내일쯤 회사나 은행으로 돌아올 거예요.”
신 대리는 그를 위로했다.
열 시 오십 분. 어제저녁 ‘메시지’를 나온 시각과 거의 같다. 그는 택시를 잡기 위하여 허둥댔다. 마침 빈 차가 멎었다. 방향을 알리고 등받이에 몸을 뉘었다. 타임머신. 그것은 어젯밤을 향하여 달렸다. 그는 어젯밤의 그를 만나러 갔다.
그는 자신이 알지 못했던 여러 개의 자신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하나의 존재도 하나의 명제도, 하나의 결론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그는 겨우 가방 때문에 많은 그의 존재 중 하나를 만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택시를 내리자 기다리고 있던 손님들이 우우 몰려들며 행선지를 외쳐댔다. 그는 우선 ‘메시지’가 있는 골목으로 갔다. 가는 도중 그는 술이 엉망으로 취한 사내를 하나 만났다. 그는 일부러 발걸음을 늦추고 사내를 살폈다. 어젯밤의 그의 모습을 보았다. 취객은 전신주에 머리를 기대고 쉴 새 없이 중얼거렸다. 귀를 기울이니 지독한 욕설이었다. 누구를 향하여 욕설을 퍼붓는 것인가. 어젯밤 그는 무슨 말을 지껄였을까.
메시지에서 극장 쪽을 향한 골목이라고 했다. 골목은 넓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길 양편에 늘어선 술집들을 살펴나가기 시작했다. 입구가 계단으로 된 곳은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한 집이 계단이었으나 다만 화분이 놓여 있지 않았다. 화분이야 치울 수도 있다. 혹시나 하고 기웃거리는데 등 뒤로부터 살며시 그의 옷소매를 끄는 손이 있었다. 그는 돌아섰다. 푸른 촛불처럼 짙은 화장의 눈초리가 타고 있었다. 그는 어리석은 줄 알면서도 물었다.
“나를 아는 거요?”
여자가 대답 대신 웃었다.
“놀다 가세요. 술도 있고 여자도 있어요. 춤추고 마시고 놀아요 우리.”
여자는 취해 있었다. 그는 촛불을 불어 껐다. 그는 일곱 번째의 술집을 기웃거렸다. 안에서 시끄러운 음악이 들려 나왔다. 웃음소리, 박수소리, 휘파람 소리.
여덟 번째 술집도 허사였다. 화분이 놓인 내림길 계단의 술집을 발견한다 하더라도 그 술집이 가방을 찾을 수 있는 확실한 기억이나 증거가 될 수는 없었다. 그 술집을 찾아간다 하여도 그 여자가 먼저 알아보기 전에는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일단은 찾아볼 수밖에 없다. 사실 지금 그를 이끌어주고 있는 것은 여자였다. 여자, 어떠한 여자일까. 이상한 여자였다. 무슨 까닭이 있는 것일까.
열세 번째의 술집을 기웃거리다 그는 짧은 비명을 터뜨렸다. 내림식 계단과 Z자 식으로 그 계단에 놓여 있는 화분一그것은 신 대리의 희미한 기억이 밝혀주었던 어젯밤의 술집이 틀림없었다. 그는 행여나 하고 간판을 올려다보았는데 ‘밀밭’ 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으나 기억에 없었다.
화분의 꽃은 국화였다. 꽃은 싱싱했고 향기도 진했다. 신 대리는 어디쯤에서 허리를 굽혀 향내를 맡았을까. 그때 그의 등 뒤에서 농담을 했다는 자신은 어디쯤에 서 있었을까, 온전한 몸으로 서 있을 수 없었다면 한 손으로 벽을 짚고 있었을 것이다. 벽을 짚지 않은 다른 손, 그 손에는 가방이 쥐어져 있었을까.
안은 한산했다. 의외로 넓었다. 고급스러운 술집이었다. 이미 의자를 탁자 위에 거꾸로 올려놓고 청소를 하는 술집이 있었는데 이곳에는 아직도 손님들이 있었다. 그는 출입구 쪽의 빈 의자를 골라 앉았다. 혼자 앉아 있는 사람은 없었다.
“형사예요?”
가슴이 깊게 팬 검은색 옷의 여자가 그의 옆에 앉았다.
“왜요?”
“취하지도 않고 늦은 시각에 혼자 나타나셨으니 말이에요. 무얼 알아보려고 오셨죠?”
“……”
“기분 나쁜 일이 있나요?”
“술이나 가져와요.”
“어머 무뚝뚝하시긴.”
여급이 술자리 시중을 드는 술집, 내리막식 계단, 계단가의 화분…… 틀림없었다. 그러나 어떻게 그 여자를 찾는담.
“그러지 말고 우리 인사나 해요. 저는 미스 조라고 해요.”
한구석에서 교성인지 비명인지 모를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렸으나 아무도 거기에 주의하지 않았다. 갑자기 피아노 소리가 뚝 그쳤다. 그러자 그는 피아노 소리를 의식하였다. 홀은 원형으로 되어 있고 그 가운데 하얀색의 커다란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그는 피아노의 뚜껑을 닫고 있는 여자의 등을 바라다보았다. 머리가 목덜미를 덮고 있었다. 여자는 악보첩을 옆구리에 끼고 피아노에서 돌아섰다. 그녀는 절름발이였다. 그는 꽉 잠기는 가슴 때문에 단숨에 컵을 비웠다.
시간이 가기를 기다렸다. 손님들이 하나 둘 사라졌다. 열한 시 이십분. 어젯밤이라면 그가 이 술집을 나갈 시각이었다.
“미안하지만 말이오.”
그는 옆의 여자에게 말했다.
“어머 천사 같은 남자네, 그런 말 들어본 지가 너무 오랜만이어서 감격했어요. 왜요?”
“어젯밤 이곳에서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취했어요. 친구와 둘이서.”
“그래서요?”
“날 도와준 여자가 있대요, 날 좀 도와주시오, 감사하다는 뜻을 전하고 싶어서 그러니까.”
“탈 쓴 천사인 줄 알았는데 정말 천사같이 고운 분이셔. 허지만 말이에요, 포기하세요.”
“왜?”
“우리는 보답 같은 거 바라지 않아요. 누군지 모르지만 그러고 싶으니까 그랬을 뿐이었을 거예요.”
“아무렇게나 생각해도 좋아요, 만나게만 해주시오.”
“좋아요.”
도움을 받는다는 건 별것이 아니었다. 여급들도 옷을 갈아입고 하나 둘 사라지고 있었다. 미스 조라는 여자는 고참이었다. 나가는 여자마다
“언니 나 가요.”
“지금껏 앉아 있으니 좋은 수 있나 보네 언니.”
“내일 봐요 언니.”
모두 언니라고 불렀다. 무심코 인사말을 던지고 나가려고 하면 미스 조는 불러 세우고 잠깐 이야기를 걸었다. 잠깐 그를 살펴보게 하는 기회를 만드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대뜸
“이 분 몰라?”
했다.
“누구신데?”
“우리 애인.”
“열다섯 번째야.”
여자들은 웃으며 사라졌다. 그는 초조하게 기다렸다. 많은 여자가 나갔으나 그를 알아보는 여자는 없었다. 이 근방에는 이와 비슷한 술집이 많을지도 모른다. 또한 신 대리의 희미한 기억을 얼마나 신용할 수 있을 것인가. 시간마저 절박했다. 통금 시간이 문제가 아니었다. 삼십여 분이 지나면 일요일이 끝난다. 엄청난 사실이 현실로 다가설 월요일. 그는 자주 잔을 비웠다. 조금도 술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왜 아는 분이야?”
그가 내려놓는 잔이 탁자와 부딪치며 끊어지듯 명쾌한 소리를 냈다.
“응.”
그는 미스 조의 시선을 좇아 등 뒤로 시선을 돌렸는데 웬 여자가 웃음 띤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앉아라 얘!”
미스 조가 의자를 권하고 난 다음
“이 얘예요? 미스 민인데.”
그에게 물었다. 그는 백치처럼 웃기만 했다.
“몰라요 난 아무것도.”
“어제저녁 이분을 도와드렸니, 네가?”
미스 민이라는 여자가 의자에 앉았다.
“응, 맞아.”
“어떻게 무얼 도와드렸는데 그래? 혹시 불능을 회생시킨 것 아냐?”
미스 조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럼 저는 이만 사라지겠어요.”
미스 조는 안쪽으로 갔다. 그는 여자와 단둘이 남았다. 그는 여자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건너다보았다. 이 여자란 말인가, 어젯밤 그와 나란히 잠잔 여자가. 그의 술시중을 들었고 택시비와 숙박비를 대신 물었고, 걸레처럼 구겨진 그를 곱게 잠재운 여자가. 그리고 그녀는 한 푼의 대가도 바라지 않고 가버렸다. 미인계도 뭣도 아니었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그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맑음에, 산기슭의 긴 풀숲을 헤치면 나타나는 도랑물처럼 숨어서 맑은 여자에.
“기억하시겠어요 저를?”
그는 고개를 저었다.
“너무 취하셨던데요 어젠.”
취하지 않았다면 서류 가방을 잃어버렸을 리도 없었을 것이다. 가방 생각이 다시금 그를 긴장시켰다. 그는 여자의 기분이 어떻게 되든지 가방을 물어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저 ……가방 말입니다.”
“가방이 요?”
눈을 크게 뜨며 여자가 피식 웃었다. 어떤 의미의 웃음일까. 그는 더욱 긴장했다.
“엉똥하시군요, 무슨 가방인데요?”
긴장하여 한 줄기로 모아져 있던 신경이 두 갈래로, 열두 갈래로, 말(馬) 꼬리 수보다 많게 갈라지며 마침내 아늑한 인식이 그를 찾아들었다.
이제 분명해졌다. 가방은 찾을 수 없다. 이제 어떠한 책임이라도 지겠다는 오기밖에 기댈 게 없었다.
“옆구리에 끼는 검은색 손가방인데 미스 민이 나를 만났을 때 내가 가지고 있는 걸 보았는지요?”
그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제 가봐도 되겠어요?”
여자가 선뜻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그녀에게 가방을 물어보러왔다는 사실에 적지 않게 기분이 상한 것처럼 보였다. 가방에 대한 것은 끝이 났다. 그러나 물어야 할 일들은 남아 있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물어야 할지 알 수 없었으므로 그는 당황하여 따라 일어섰다. 그때 였다.
“야!”
거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건장한 체구의, 사십 가까이 보이는 사내가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싫으면 싫단 말을 해야지, 밖에서 사람을 기다리게 해놓고 그사이 다른 놈과 붙었어? 이게 형편없이 구는군, 갈 거야 안 갈 거야.”
“네, 지금 나가는 길이에요.”
그녀는 사내를 따라갔다. 그도 엉거주춤 그녀를 따라 걸었다. 물어야할 것이 있었다.
“왜 물을 것이 남았어요?”
택시를 잡으려고 이리저리 뛰는 사내의 뒤에 서 있던 여자가 의외라는 듯이 그를 보았다.
“네.”
“그럼 빨리 말하세요. 저 자식 성질이 좋지 않나 봐요.”
그녀는 택시를 잡으려고 이리저리 뛰는 사내를 가리켰다.
“……”
“어서요.”
그녀는 짜증 섞인 목소리를 냈다. 망설일 수가 없었다.
“어제저녁 우리가 어떻게 이문동으로 갔지요.”
“택시로요.”
“아가씨가 이문동으로 가자고 했나 어쨌나 그걸 묻는 건데요.”
“그건 아저씨가 말했죠. 이문동으로 가자고 한 것은 아저씨였어요.”
택시 운전사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럼 왜 내가 이문동에서 내리지 않으려고 했는지 그 까닭은 알고 계세요?”
“어디론가 다른 데로 데려다 달라고 했던 것 같아요. 혀가 꼬부라져 잘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말이에요.” :
“어디로? 어디로 말이에요.”
“……”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나요?”
“글쎄요.”
“기억 해보세요. 그걸 알아야 해요.”
“야아! 뭘 해.”
다시 사내가 소리를 질렀다. 택시를 잡아두고 그녀를 찾던 중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선뜻 사내에게로 가지 않았다. 자식, 개자식, 여자는 중얼거리듯 욕을 했다.
“얼핏 듣기에 ‘박쥐’라고 하는 것도 같았고 ‘망치’ ‘방갈로’ ‘치과’.……뭐 그 비슷한 소리를 중얼거렸던 것 같아요. 뭐라고 하는지 알아보려고 나나 운전사 아저씨가 귀를 모두었으니까요.”
거센 힘이 그의 어깨를 나꿔챘다.
“야 이 자식아, 너 죽고 싶니?”
사십 대 사내가 그를 향해 부르쥔 주먹을 쳐들어 보이고 있었다.
“아니에요, 오해 마세요.”
그녀는 사내에게 끌려 구겨지듯 택시 안으로 던져졌다. 그는 갑자기 그녀를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더 알아볼 게 있으면 언제나 저기로 오시면 돼요.”
차가 그의 옆으로 지날 때 여자가 창밖으로 재빠르게 말했다: 그러곤 그녀는 사내의 품에 쓰러지듯 안겼다.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은 오산이었다. 차는 가버렸다. 그는 그제야 자신이 그녀는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을 문득 잊고 있었던 사실을 알았다. 그는 서둘러 택시를 잡기 시작했다.
5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나서 판을 골라 전축을 틀었다. 유행성 악성 인플루엔자와 같은 기세로 배고픔이 찾아들었다. 냉장고에는 먹을 것이 가득했다. 그는 사과와 토마토를 닥치는 대로 먹었다. 과일은 배부르지 않았다. 우유와 빵을 먹었다. 먹는다기보다 빈속에다 그것들을 채워 넣는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소파에 앉아 그는 노래를 들었다. 오래전의 노래였다. 흘러간 노래는 과거를 담고 있다. 그는 수첩을 꺼내 거기에 적힌 주소를 살펴보았다. 주소는 흔하지 않았고 전화번호가 대부분이었다. 누가 이문동에 살고 있을까, 왜 이문동으로 가자고 했을까, 수첩에 적힌 전화번호만으로는 아무런 단서가 잡히지 않았다.
안종현(安鍾鉉).
고등학교 2학년 때, 짝이었다. 같은 독서회의 회원이기도 했다. 집이 이문동 이었다.
시험 때면 안종현의 집에 가서 함께 밤을 새우며 공부를 한 일이 서너 번 있었다. 생일날 초대받아 간 적도 있었다. 외국어대학의 정문에서 길을 건너 흔히 학생들을 상대로 술과 라면을 팔던 술집과 식당을 겸한 집들이 어깨를 비비듯 서 있는 골목을 지나면 강원도 춘친으로도 가고 충청도를 거쳐 부산으로도 가던 복선의 철로가 나타났고 철길을 막 건너는 곳에 약국 하나가 있었다(초대받아 간 친구 중의 하나가 갑자기 복통을 일으켰기 때문에 그가 달려가 그 약방에서 한 번 약을 산 일이 있다. 그 친구의 이름은 이윤식(李允植)이었다). 약국으로부터 복개* 공사가 되지 않은 개천을 따라 내려가다 왼쪽 골목으로 꺾어지는 곳에 안종현의 집이 있었다.
안종현은 그림을 잘 그렸지. 안종현의 얼굴이 다정하게 되살아났다. 미술대학을 가고 싶어 했는데 부모들의 바람에 따라 공대로 갔다. 건축을 하는데 아직 창창한 나이에 사무실을 내고, 하여튼 아는 사람은 알아주는 친구가 되었다. 대학에서 서로 갈라져서 동창회 모임 같은 곳에서나 얼굴을 대할 뿐 따로 만나 술 한 잔을 함께 마신 적이 없었다. 원주민이 없는 도시이고―원주민이라고 하니까 좀 우스운 생각이 들고 낭만적인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거기에다 극히 싫증을 잘 내는 게 요사이 사람들의 속성같이 느껴지는 그에게 안종현의 집 이 지금도 그곳에 있다고 생각되진 않았다. 지금도 찾아갈 수는 있을 것 같지만 어제저녁 취중에 그가 모르는 또 다른 그가 찾아가려고 했던 이문동은 안종현의 집과는 연관이 있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이문동에 있는 외국어 대학.
고등학교의 동창생들을 만나러 자주 갔었다. 그 학교에 친한 친구들로는 김용진·박성재·임희수·조신묵…… 등이 있었다. 그러나 그 친구들은 아무도 이문동에 살고 있지 않았으며 도무지 사람 관계란 게 따지고 보면 다 그렇고 그렇듯이 그도 그 친구들과 별다른 친분이라도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저 시간이 나고 심심할 때면 그 학교가 아닌 다른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을 찾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을 찾아갔던 것이다. 그들과 어울려 학교 앞의 술집에 갔고 다방과 당구장에도 갔다. 그러나 그것뿐이다.
군대 시절, 그가 소속된 중대의 내무반장도 생각났다. 최영택(崔榮澤) 병장이 그였다. 그가 첫 휴가를 받고 부대를 나오던 날 그는 최 병장의 부름을 받았다. 최 병장은 그에게 주소를 적은 종이쪽지 한 장을 내밀었다. 고참병들의 흔한 심부름이었다.
“내 애인이다. 찾아가 봐라.”
그 말뿐이었다. 고참병들은 입이 무거웠다. 그 대신 한 번 입을 열면 졸병들은 벌벌 떨어야 했다. 다만 찾아가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알수 없었으므로 그는 망설였다.
“무슨 말이 있을 거야, 듣고 와서 내게 전해주면 돼.”
서울에 닿자 그는 이문동으로 여자를 찾아갔다. 통과 반이 적혀 있지 않은 주소였으므로 찾기가 쉽지 않았다. 거의 한나절이 걸려 찾은 집의 철제 녹색 대문에서 최 병장의 애인이 나왔다. 키가 작고 나이 든 처녀 같지 않게 머리를 두 갈래로 땋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들어오시 게 할 방이 없어요.”
여자는 친구 하나와 자취를 하고 있었다. 집에서 입는 옷 그대로 그녀는 슬리퍼를 끌고 앞장서 다방으로 그를 데리고 갔다. 여자의 이야기는 길지 않았다.
“결혼하게 되었다고 그렇게 전해주세요.”
담담한 그 말과 함께 조금 서글프고 허망한 기분을 내비치던 그녀의 표정이 아직도 그의 기억 속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그렇게 전하겠다고 말하고 다른 말은 없느냐고 물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다방을 나오려고 했을 때, 그녀는 서둘러 마땅히 그래야 할 것처럼 찻값을 계산하였다.
버스를 타고 맨 뒷자리에 앉게 되어 문득 뒤를 돌아다보았는데 그녀는 박힌 듯이 한자리에 서서 버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버스를 쳐다보고 있었지만 사실은 그녀가 떠나보낸 그녀의 말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고 그때서야 그는 그녀의 짧은 말 속에는 여러 의미들이 숨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가 있었다. 그가 귀대하고 며칠이 되지 않아 최 병장은 탈영했다. 제대 삼 개월을 남겨두고 탈영이라니 모두들 미친놈이라고 했지만 그는 최 병장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을 느꼈었다.
그 외에 그저 인사나 나누고 지내는 회사의 동료 중에 집이 이문동인 사람이 있긴 하나 되새겨볼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전축의 음반이 소리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판을 갈아 끼우고 나서 수첩을 덮었다. 더 이상 기억나는 게 없었다. 그는 소파에 파묻혀 담배를 피우며 노래를 들었다. 오래전의 노래였다. 흘러간 노래는 과거를 담고 있다. 기억나는 게 없지만 그의 과거는 이문동을 담고 있다.
미스 민이라는 여자의 마지막 말이 생각났다. ‘박쥐’ ‘방갈로’ ‘망치’ ‘치과’ ……그는 생각했다. 이문동과 박쥐,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고아원의 뒷산을 넘으면 폐광(廢鑛)이 있었다. 문둥이들이 아이들을 잡아가면 폐광 속에서 간을 꺼내고 진달래꽃 잎사귀 아래에다 피를 감춘다고 했다. 아무도 가까이 가려는 아이들이 없었다. 박쥐 때문에 그와 용기 있는 몇몇 아이들은 자주 폐광을 찾아갔다. 문둥이에 관한 말은 소문뿐이었다. 굴속을 향하여 소리를 지르면 굴에선 바람 소리가 새 나왔다. 그것은 굴의 천장이나 벽에 매달려 있던 박쥐들이 일제히 날아오르며 내는 소리였다. 그는 앞장서서 굴로 진격하였다. 용기 있는 아이들은 그를 따랐다. 막대기를 마구 휘두르며 굴 가운데서 불을 피웠다. 혹시 몸에 날아와 엉기는 박쥐가 있기도 하였지만 겁낼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막대기에 맞아 떨어진 박쥐를 주워서 돌아왔다. 한약방에 가면 그것은 돈이 되었다. 그 때문에 그는 자주 폐광을 찾아갔다. 그는 그만큼 굴속의 여러 갈래길이나 박쥐의 생리를 잘 아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였다. 박쥐가 사는 폐광은 그에게 정다운 곳, 그의 용기를 팔 수 있는 곳이었다.
이문동과 방갈로.
상상력 이 필요한 문제였다. 그는 신중히 생각하였지만 이 두 말은 끝까지 아무런 관련도 맺을 수가 없었다.
이문동과 망치.
그것도 마찬가지였다.
이문동과 치과. 이문동에 있는 치과.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랫배 깊숙이에서 뻗어 오르는 차가운 긴장이 그를 묶었다. 그는 잠시 후 경직된 몸을 풀기 위하여 가만가만 걸었다. 사방은 너무나 조용하였다. 이십팔점박이무당벌레처럼 걸어가 그는 냉장고에서 술병을, 선반에서 유리잔을 껴내 들었다. 그는 이제 성큼성큼 걸어 소파로 돌아왔다. 잠시 동안 그를 극도로 긴장시켰던 것이 무엇인지 그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다만 이문동과 치과를 이문동에 있는 치과로 바꾸어보았고 그러자 알 수 없는 날카로운 예감과도 같은 것이 수십 년 그의 기억 속의 시간을 꿰뚫으며 그에게 날아와 박혔던 것이다. 그것은 또렷이 무엇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었지만 무의식적으로 그를 소파에서 일으켰던 것이며 진한 술을 마셔야 터질 것처럼 모든 신체의 기공(氣空)을 압박했던 것이다.
확실히 그의 과거는 이문동을 담고 있다. 너무나 오래전에 잊어버렸던 일이었기 때문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뿐이었다.
‘박쥐’ ‘방갈로’ ‘망치’ ‘치과’ 라는 말 중에서 가장 첫 음절이 ‘ㅂ’과 ‘ㅁ’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렇다면 ‘ㅂ’과 ‘ㅁ’ 중에서는 ‘ㅂ’을 취해야 마땅하였다. 취한 사람은 흔히 ‘ㅂ’을 ‘ㅁ’으로 발음하지만 ‘ㅁ’을 ‘ㅂ’으로 발음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일단 ‘ㅂ’을 택하고 나면 ‘ ㅏ ’가 남으니 ‘ㅂ + ㅏ’ = ‘바’가 된다. 그다음 ‘박쥐’에서 ‘ㄱ’을 벌려오면 ‘박’이 된다. ‘치과’는 앞머리를 삼켜버리고 그냥 발음한 가장 정확한 소리였다. 그러니 그가 어젯밤 찾고 있었던 곳은 ‘박치과’ 였다.
이문동의 ‘박치과’, 그곳에는 혜수가 있다. 그렇다! 그는 어젯밤 박 치과로 혜수를 찾아간 것이다. 그는 이제 그 사실을 확신하였다.
이십수 년이 넘은 그가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던 일을 어젯밤 그는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이미 기억하기도 어려운 일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생채기엔 새살이 돋고 이제 흉터도 남지 않았던 평온한 외모와 단조로운 일상의 내부가, 아 술기운에 곪은 균들을 노출하고 말았다. 그는 자신이 알지 못하였던 여러 개의 자신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하나의 존재도, 하나의 결론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그는 겨우 가방 때문에 많은 그의 존재 중 하나를 만나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유리잔에서 위스키를 진하게 섞어 마셨다. 세 잔을 거푸 마셨다. 사위*가 고요한 밤에 혼자 마시는 독한 술. 그것은 복받치는 설움을 혹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욕망을, 사랑을 잔잔하게 만나게 해줄 수 있다고 그는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 고아원에서 혜수와 함께 지낸 것은 어림잡아 2년 정도의 기간이었다. 혜수는 그의 여동생이었다. 혜수는 그의 누나였는지도 그렇지 않으면 쌍둥이일 수도 있었다. 얼굴은 기억되지 않지만 이름은 혜수였다.
박혜수라는 이름이 원래 혜수가 가지고 있던 이름인지 고아원의 누군가가 붙여준 이름인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그때가 몇 살이었을까, 그것도 역시 알 수 없는 일이다. 그가 그의 나이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것과 꼭 같은 이유로 혜수도 그때 몇 살이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혜수와 그가 고아원에 맡겨진 것은 세 살이나 네 살 때로 생각되었다. 많은 아이들을 취급하는 고아원 사람들의 눈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6·25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확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낡은 필름에서 끊어져 나온 듯한 희미한 기억 몇 편이 그가 겪은 전쟁의 전부였다. 엄마는一실상 그는 그녀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얼굴도 모습도 모른다. 이름도 어디에 사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녀는 700만 피란민 중의 한 여자였다―그의 손을 잡고 한 계집아이를 들쳐 업고 걸었다. 그를 업고 계집아이를 걸리기도 했다.
사람들의 행렬과 아우성, 잠자리 같은 비행기, 연기와 불길, 총소리, 추위, 아이들의 울음소리, 배고픔…… 이런 것이 기억의 전부였다. 그 기억은 그가 겪은 기억인지 혹은 책이나 영화로 본 십 만이나 되는 전쟁고아들의 실상이 그의 것으로 변한 기억인지는 그 스스로도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엄마는 죽었다고 그는 단정했다. 손을 잡고 가던 엄마가 사람들 사이에서 편하게 누워버려 젖가슴을 찾던 그의 손에 묻어나던 선명한 피. 무엇인가 애타게 부르짖던 엄마의 마지막 목소리.
엄마가 마지막 하려고 했던 말은 손을 놓지 말라는 소리였다고 그는 믿었다. 그 계집아이, 그의 여동생인지 누나인지, 쌍등이인지 알지 못하는 그 계집아이가 혜수였다. 엄마는 혜수와 그가 손을 잡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는 믿었다.
이 넓은 세상에 혼자 남으면 외로워서 못 산다. 손을 잡아라, 죽어도 헤어져서는 안 된다. 둘이서 손을 잡고 살아라.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그는 어머니의 마지막 말을 생각하였다. 어머니가 그렇게 말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며 어머니는 처음부터 그의 기억에 없는 존재인지도 모르지만 어머니의 마지막 말은 그에게 지울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커서는 자기암시(?)라는 말을 생각하기도 하였다. 모든 걸 따져 생각한다면 혜수가 그와 형제라는 사실조차 우스운 것이었다. 처음 고아원의 생활에 대해서 그가 기억하는 것은 피란길의 기억과 같은 것이었다. 다만 혜수에 대한 기억은 언제나 밝고 정확했다. 혜수는 그를 오빠라고 불렀다. 그리고 고아원 안에서는 혜수와 그가 형제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늘 배가 고픈 철부지였을 때에도 그의 몫을 혼자 먹지 못했다. 혜수는 예뻤다. 고아원의 아이들이 모두 혜수는 예쁘다고 했다. 우리 동생이니까 하고 그는 뽐냈다. 혜수가 예쁘기 때문에 그가 겪어야 했던 고통은 컸다.
아이들이 뜰에서 공기놀이를 하고 있었다. 고무줄도 하고 술래잡기도 했다. 먼지를 뽀얗게 일으키며 지프차 한 대가 고아원의 문을 들어섰다. 흔히 있는 일이다. 그는 눈여겨보지 않았다. 아이들이 지프차를 둘러쌌다. 키가 큰 군인들이 내렸다. 코가 높고 눈이 파랬다. 원장 아버지와 악수를 하고 웃고 떠들며 원장실로 들어갔다. 미국 군인만 오면 아이들은 행복했다. 그들이 오면 새 옷을 배급받기도 했고 비스킷, 껌, 초콜릿, 드롭스…… 따위를 맛보곤 하였다. 그런데 그날따라 원장 아버지는 아이들을 모두 뜰에 모이게 했다. 그런 후 남자아이들과 여자아이들을 양편으로 갈라서게 했다.
미군 한 사람이 여자아이들을 하나하나 가려내어 웃으며 무슨 말인가 나누었다. 아이들을 안아보기도 하고 볼에 입을 맞추기도 하였다. 아이들은 미군을 따라가는 걸 바라고 있었다. 따라가기만 하면 레이션⁕박스에 든 초콜릿쯤은 문제가 아니라고 믿었다. 좋은 옷과 좋은 집도 생기고 지프차만 타고 다닌다고 했다. 희한한 장난감도 생긴다고 했다. 이미 따라간 아이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 미군이 혜수를 안아보더니 뭐라고 지껄였다. 옆의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원장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군은 혜수의 얼굴에 입을 맞추더니 그녀를 안고 뚜벅뚜벅 지프차 쪽으로 걸어갔다.
차가 움직이려고 했을 때 갑작스러운 비명 소리가 울렸다. 한 아이가 지프차 바퀴에 몸을 깔고 있었다. 미군들은 놀라 지프차에서 내려왔다. 한 아이가 바퀴 속에서 기어 나왔다. 바로 그였다.
“왜? 왜?”
서투른 말로 미군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는 울었다.
“내 동생이야. 데려가지 마. 내 동생이야.”
지프차에서 혜수가 뛰어내렸다. 그리고 그를 부둥켜안았다. 다섯 살 때쯤이 아니었을까? 미군들은 빈 차로 돌아갔다.
그런데도 혜수는 결국 가버리고 말았다. 그가 말릴 틈도 없었다. 한 아이라도 짐을 더는 것이 고아원으로서는 좋았다. 지나가던 사람이 한 아이를 원했다고 하면 아무런 절차 없이 그는 아이를 데리고 갈 수 있었다.
“어디로 갔어요. 내 동생.”
혜수가 없어진 후 며칠 동안 그는 처음으로 배고픔을 느끼지 않았다.
“나는 모른다.”
“가르쳐 줘.”
“이놈의 자식 이 버릇없이. 나가 놀아……”
원장 아버지는 화를 잘 냈다.
“우리 혜수 어디다 줘버렸어요 네?”
어른이 된 지금도 어려운 일에 부딪히면 발휘할 수 있다고 그가 믿고 있는 고아의 근성. 때리고 밥을 굶겨도 그는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우리 동생 내놔!”
그는 징징거렸다. 날마다 쉬지 않고. 원장 아버지는 달래는 수밖에 없다고 체념한 듯했다.
“걔가 왜 네 동생이니.”
“우리 동생이니까 우리 동생이지.”
원장 아버진 어이가 없는 듯이 웃었다.
“그건 네가 잘 모르고 있는 거야, 걔는 너와 아무 상관도 없는 애야.”
“거짓말 말아, 엄마가 죽으면서 손을 놓지 말라고 했어. 손을 꼭 잡으라고 했어요. 우리는 손을 꼭 잡고 여기로 왔대요.”
“그때가 언제인지 너는 아니? 네가 겨우 젖이 떨어져 걸음마를 할 때란 말이야. 네가 어떻게 네 엄마 말을 기억하고 있단 말이냐. 네가 혜수와 손을 잡고 있었다고 해도 아이들이란 아무와도 손을 잘 잡는다.”
“거짓말이야.”
원장 아버지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었다. 그는 차차 알았다. 어쩜 원장 아버지도 혜수가 어디로 갔는지 모를 것이라는 것과 혹시 알더라도 그에게 가르쳐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는 열 살이 넘어서자 할머니를 졸랐다. 할머니는 고아원의 살림살이를 도맡아 하는 참 좋은 분이었다. 모두에게 친할머니와 같았다. 고아원이 생길 때부터 일하셨다고 했다. 할머니는 특히 그를 귀여워하였다.
“나는 군인들의 막사에 모여 있는 아이들 중에서 열 명을 배당받았지. 닥치는 대로 여덟 아이를 골랐지. 남은 아이들은 또 다른 곳으로 가게 마련이니까 말이다. 나머지 두 명을 고르려고 잠깐 고개를 드는데 문득 한구석에서 눈을 말똥거리며 나를 쳐다보는 귀여운 아이가 있었다. 그게 너였지. 그래서 나는 많은 아이들 중에서도 너를 늘 눈여겨보고 있단다. 그런데 말이다. 네가 일어서서 나에게로 올 때 너는 웬 여자아이의 손을 꼭 붙들고 있는 게 아니겠니. 그래서 나는 붙든 네 손을 떼어놓으려고 했다. 여자아이들은 사내아이들보다 귀찮으니까. 그런데 그때 네가 한사코 손을 놓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혜수도 데려오게 되었단다.”
혜수는 그의 여동생인 것이 틀림없었다. 엄마가 죽은 후 어떻게 군인들의 보호를 받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때부터 그와 혜수는 손을 놓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그렇게 믿었다.
“엄마가 죽으면서 손을 놓지 말라고 했거든요.”
“그렇지만 너희들이 형제지간이면 참 이상한 일이구나.”
“뭐가요?”
“누가 먼저 태어났나 구별이 서지 않거든.”
“제가 오빠예요, 혜수도 그렇게 부르지 않아요.”
“아니다, 아이들을 많이 다루다 보면 알게 되는데 그런 것 같지가 않았어.”
“그럼 혜수가 내 누나란 말인가요 할머니.”
“그것도 이상하단다.”
“그럼 우린 쌍동인가 보지요 뭐.”
“아니 너희들은 그저 남남일 수도 있다.”
“아니에요.”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것만은 용납할 수 없었다.
“제가 혜수를 찾으려는 게 걱정 돼서 그러시지요?”
“아니다, 너도 생각해보아라. 그 많은 애들이 우글거리는데 그 사이에서 손을 잡고 있었다고 누가 형제지간이라 말할 수 있겠니?”
“거짓말 마세요.”
“아니다, 내가 이 늙은 나이로 어린 네게 거짓말은 안 한다. 아무리 어려도 형제라는 건 어디가 닮아도 닮는 법인데 너희들은 그렇지가 않았다.”
“매일 전쟁 통에 정신이 없었다고 하시면서 언제 그렇게 자세히 보셨어요?”
“그래도 어른들은 다 볼 수가 있단다.”
“누가 뭐래도 혜수는 내 동생이에요. 아니라고 하는 놈이 있으면 죽여버리겠어요. 할머니 마음은 제가 다 알아요. 그러나 할머니, 저는 커서 어른이 되고 돈도 많이 벌면 혜수를 찾을 거예요. 그래서 같이 살래요. 혜수는 제 동생이니까요.”
“괜히 그래가지고 커서까지 사서 고생한다. 하기야 이 넓은 세상에 형제같이 좋은 게 또 있겠냐만 어떻게 찾는단 말이냐?”
“할머니.”
“왜?”
“혜수가 간 곳을 할머닌 정말 몰라요?”
“그래 난 모른단다.”
“원장 아버지께 물어보세요.”
“원장님도 나와 꼭 같을 거다. 수백 명의 아이들이 들어왔다 나갔다.”
“그래도 물어보세요. 제가 동생을 돌려달라고 오랫동안 원장 아버질 괴롭혔으니 기억하고 계실 거예요.”
“그래, 원장님이 알고 계시면 내가 일러주마.”
그와 할머니 사이에 그런 말이 오고 간 며칠 후 할머니는 그 약속을 지켰다.
“역시 원장님도 잘 모르신다만 그저 그 당시에 서울 이문동에서 박 치과라는 병원을 하는 사람이 예쁜 여자아이를 하나 데려갔다고 하시더구나, 그러나 믿진 말아라.”
“서울 이문동 박치과.”
그는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전쟁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은 때였으니까 지금도 그곳에 그대로 있을 리가 없다. 믿진 말아라, 원장님도 이제 나이가 많으셔. 나이가 들면 어제 일도 쉬 잊는 법이란다.”
“고마와요 할머니, 전 꼭 찾을 거예요.”
“그래라. 그랬으면 오죽 좋겠니 .”
그는 여덟 살 때도 열 살, 열두 살 때도 그 다짐에 변함이 없었다. 이문동의 박치과, 행여 잊을까 봐 꿈속에서도 되새겼다. 그가 작은 가슴에 새긴 이문동의 박치과는 그의 표적이었다. 삶의 표적. 눈물과 굶주림의 표적. 사랑의 표적.
국민학교 4학년에 다니던 열두 살 때의(사실 열두 살이라는 나이는 고아원에서 임의로 붙인 것이었지만) 겨울 어느 날 그는 선택되었다. 원장 아버지의 방으로 들어서자 낯선 여자가 그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는 단번에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
새엄마는 지극하였다. 엄마라고 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았다. 할머니라고 부르는 것이 맞을 것 같았다. 그와 함께 살기 시작한 때에 쉰다섯이었는데 예순아흡이 되던 해에 죽었다.
그는 모든 면에서 그녀가 바라는 대로였다. 공부를 썩 잘한 것은 아니었지만 흔히 어정쩡하게 말하듯이 남의 축에 빠지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가 바라는 것이면 무엇이라도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그와 둘이 사는 데는 충분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편안한 생활과 어머니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그는 모든 것을 잊어갔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그 혼자만이 가져야 하는 삶의 표적, 눈물과 굶주림의 표적, 사랑의 표적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고 필요하지도 않았다. 잊어버려야 한다고 마음을 다진 것은 결코 아니면서도 혜수는 이미 전과 다른 혜수였으며 아스라한 기억, 버리고 싶은 꿈속에서나 만날 수 있는 혜수였다. 얼굴을 기억할 수 없었고 또 어린아이의 얼굴은 변하는 것이었다. 혜수를 데려간 사람들은 그녀의 성씨와 이름까지 바꿔버렸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무슨 방법으로 혜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며, 혹시 만난다고 하더라도 무슨 방법으로 그녀가 혜수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인가. 또 혜수의 입으로 고아원의 일을 기억해내고 그를 알아본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형제라는 사실은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 것인가. 혹시 의학적인 조사 대상이 되면 밝혀질 수 있겠지만 그러한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잊어버려라, 이제 이 엄마가 있지 않냐. 네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나 하게 해주마. 모두 잊어버리고 엄마와 살자.”
문득 혜수 이야기를 꺼냈을 때 어머니가 말했다. 잊어버리려 힘쓰지도 않고 그는 잊어버렸다. 그러나 정작 비극을 잊어버려야 할 사람은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몽유병 환자였다. 과거 속에서 살았다. 그녀에게 유일한 현실은 그였다. 그녀가 고아원에서 그를 데려온 것은 과거의 환각에 현실을 가져온 것과 다름이 없었다. 어머니를 따라 국립묘지에 가보았다. 어머니는 거기에만 가면 하루를 그곳에서 보냈다. 하루 종일 묘비를 어루만졌다. 그는 혼자서 이곳저곳 구경을 다녔다. 그는 다음과 같은 묘비명을 보았다.
‘보고 싶은 내 아들 불러도 대답이 없구나 비 오는 날이나 바람 부는 밤이면 갈 곳 없어 이리저리 헤매지나 않느냐 죽어도 에미 가슴엔 살아 있구나’
그는 또 이런 묘비명도 보았다.
‘사람이 한 번 죽는데 너는 큰 죽음을 하였다. 우리는 널 따라 떳떳하게 살다 만나리 ― 아버지 어머니 형들과 누나ㅡ’
그는 다시 이런 묘비명을 보았다.
‘아빠 안녕 안녕’
그는 묘비명 앞에서 우는 사람들을 보았다. 무엇인가 묘비를 향해 말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꽃을 꽂는 사람들을 보았다. 술을 붓는 사람들을 보았다. 어머니는 울지도 말하지도 않았다. 그녀의 슬픔은 그녀의 육비(肉碑)*에 새겨진 것 이었다.
그는 그 모든 것을 감동 없는 무성영화를 보듯 보았다. 다만 하루 종일 앉아 있던 어머니가 일어서는 해 질 무렵, 그곳을 나오며 돌아보는 묘지의 정확한 질서가 그를 슬프게 하였다. 어머니가 세 아들이 있던 전쟁 전의 과거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에게는 그러한 과거는 없었다.
어머니가 죽기까지 그들은 참 사이좋은 모자였다. 그가 어머니를 반대한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그가 대학생이었을 때 어머니는 그녀가 항상 꺼내 보는 사진첩을 그의 앞에 펼쳐 보였다. 그가 이미 알고 있는 사진들이었다. 그녀는 사진첩 속의 한 장을 가리켰다. 큰형 (죽은 세 사람을 그는 형이라고 하였다)의 사진이었다. 무슨 모임에서 찍은 것인 듯 여러 명의 남녀가 계단에 모여 서 있었다. 이 여자 말이다, 하고 어머니는 큰형의 옆에 선 여자를 가리켰다. 누렇게 변한 사진 속의 여자는 동그란 점의 무늬 있는 저고리에 까만 치마, 단발이었다. 네 큰형이 좋아했었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어머니는 말했다. 지금은 일찍 남편을 사별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사는데 고생 이지, 게다 근래에는 병까지 겹쳤다. 문밖출입을 자주 하지 않는 어머니가 언제 누구를 통해서 그런 연락을 받았는지 놀라웠다. 그래 내가 도와주고 싶다. 그는 어머니에게 찬성했다. 형이 살아 있었다면 그 여자와 결혼했나요?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좋아했다. 어머니는 아마도 그녀의 병 치료를 도맡아 주는 것 같았다. 그 이상을 그는 알지 못했다.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일이 있고 얼마 후 어머니가, 몸이 나았으니 그 여자가 애들 데리고 먹고살게 해주고 싶구나 했다. 어떻게요 어머니? 자그만 집을 한 간 사서 구멍가게를 볼 수 있게 해주었으면 한다. 그는 잠시 생각하고 난 후 어머니에게 반대하였다. 어머니 그러실 필요가 없어요, 그건 옛날 일이에요. 그 여자는 다 잊어버린 일일지도 몰라요. 세월이 흘렀어요 어머니…… 그러나 어머니는 그렇지 않았다. 내가 그러고 싶다. 네가 허락해주었으면 좋겠다. 그때서야 그는 어머니 뜻에 따라 해도 좋다고 말했는데 그때 어머니는 매우 기뻐하였다.
어머니가 죽자 어머니의 먼 친척들이 유산 문제를 넘보았다. 법대로라면 모든 것은 그의 것이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마음을 쓰지 않았다.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는 돈이면 그만이었다. 어머니와 함께 쓰던 가구들만은 그대로 가져왔으며 사진첩을 비롯한 유품들도 모셔왔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자 곧 취직을 하였으므로 풍족하였다. 그러나 풍족한 것만으로 누릴 수 있는 삶이란 거기서 끝나버렸다.
그는 두 번째로 고아가 되었다.
어머니의 임종을 하는 자리에서 어머니는 그에게 가늘게 웃어 보였다. 그것은 그가 전에 보지 못하였던 만족한 웃음이었다. 그 웃음은 말하고 있었다. 나는 네 형들 곁으로 간다. 나는 오늘을 기다렸다. 어머니는 그의 손을 찾아 잡고는 마지막 힘으로 그의 손을 쥐었다. 그 손은 말하고 있었다. 너를 혼자 두고 가서 미안하구나. 어머니가 죽기 전에 바쁘지 않은 그의 결혼을 급하게 서두른 것은 어머니의 예감이었을 것이다. 맞선을 보고 그가 여자를 거절하자 어머니는 적이 실망하는 눈치였다. 어머니의 마지막 손은 말하고 있다.
얘야, 손을 잡아라, 손을 잡아라.
혼자는 안 된다. 손을 잡아라, 내 손은 이것이 마지막이다. 얘야!
두 번째로 버려진 그를 구원한 것은 회사원의 규칙성, 일과가 끝난 후에 마시는 소주 서너 잔, 돌아서면 피부에 찰과상도 내지 못하는 여자들…… 그따위뿐이었다. 그때 그는 당연히 혜수를 생각해야 했다. 지독한 외로움을 잊기 위하여 그는 취하여 밤 열두 시에 들어오곤 하였다. 아파트는 그가 얼굴을 대할 수 없는 파출부 아줌마에 의해 항상 잘 치워져 있었다. 그러나 혜수는 이미 그의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완전한 망각이었다.
그가 결혼 문제에 부딪혀 다시 한 번 이 세상에 혼자라는 것을 절감하였을 때에도 그는 혜수를 생각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죽고 나서 그에게 다가온 가장 큰 문제는 결혼이었다. 지금에야 혼자의 생활에 완전히 익숙하였지만 서른이 갓 넘었을 때에 그도 남들처럼 결혼을 서둘렀다. 여기저기에서 중매가 많았다. 그는 따뜻한 가정을 원하였다. 귀여운 아이들을 욕심껏 갖고 싶었다. 가족계획의 정부 시책이란 그에게만은 예외가 되어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런데 직장 동료의 소개를 받고 그가 마음을 기울이기 시작하여 어느 정도 확신을 갖게 되었던 여자가 그가 부모 형제가 없다늠 사실을 꺼려했다. 그는 여자에게 그의 과거를 솔직하게 털어 보였던 것이다. 형제가 많고 부모를 모시게 된다고 해서 꺼린다는데 그에게는 정 반대였다.
두 번째 여자에겐 만나자마자 먼저 그의 과거를 이야기하였다. 후에 일이 잘못되면 마음을 다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또는 그의 결벽증이기도 했다. 두 번째 여자는 그 사실을 퍽 의아하게 생각하고 그런 환경 때문에 편견이 많은 사람인 것 같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소개한 친구로부터 전해들은 말이었다. 공교롭게도 두 여자가 그렇게 나오자 그는 지독한 오기에 사로잡혔다.
좋다, 결혼, 하지 않아도 좋다.
그는 근성을 살려 냈다.
전축의 판이 또 헛돌고 있다. 그는 일어서서 전축을 껐다. 어머니가 옛노래를 듣던 전축이었다. 텔레비전을 틀었으나 끝난 지 오래였다. 그는 실내등의 모든 스위치를 올렸다. 그런 다음 소파에 몸을 묻고 또 술을 마셨다. 정신이 얼얼했다. 실내등을 다 켜놓으니 기분도 따라 밝아지는 듯했다.
혜수야!
그는 나지막한 소리로 불렀다. 아무런 마음의 동요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극히 담담했다. 그는 혜수의 옛 모습을 기억해보려고 했다. 헛된 일이었다.
4
그가 깨어난 곳은 어제저녁의 소파였다. 실내등은 모두 켜진 그대로였으나 창으로 스며든 햇빛으로 제구실을 잃고 있었다. 그는 무거운 눈꺼풀을 비볐다.
탁자 위엔 비어버린 술병, 유리잔이 탁자 아래에서 깨어져 있었다. 분명히 끈 것으로 기억되는 전축판이 헛돌고 있었다. 적어도 네댓 시간은 공전한 셈이다. 실내등의 스위치를 내리고 전축을 끄고 창의 커튼을 젖히자 찬란한 빛이 쏟아졌다
월요일의 아침이었다.
그는 창가에서 멍한 기분으로 밖을 바라보았다. 어저께처럼 걱정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전장의 군인들이 운명론자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서둘러야 할 시간이었으나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런 일은 지금껏 별로 없었다. 특별히 진급을 빨리 하고 싶다든지 백 퍼센트 수당을 받고 싶다든지 하는 욕심은 아예 없었다. 그것은 직장 생활이 시작된 이래 현실의 생활에 그 자신의 모든 것을 저당 잡히고 싶어 하는 어쩜 그것은 외로운 싸움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는 서서히 옷을 갈아입고 출근 준비를 했다. 회사에 자초지종을 알리는 것은 그의 의무라고 생각되었다. 회사에선 따로 조치를 취할 것이다. 광고를 낸다든지 방송국의 분실물센터 같은 곳에 연락을 하고 큰 보상금을 내세울지 모른다. 만약 못 찾게 된다면 어떻게 할까 하는 것은 생각지 않기로 하였다. 근심과 고통. 고독 따위는 나누어 가진다고 해서 가벼워지지 않는다. 그에게 닥치는 일은 완전히 그 자신만의 몫이었다.
그는 아파트를 나와서 회사로 향했다. 그는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았으며 한산한 버스에 타자, 오히려 기분이 느긋해지는 것이었다. 버스를 내려 회사의 정문을 향하여 그는 걸어갔다. 맑은 가을 날씨였다. 바람이 넥타이를 흔들었다. 그는 수위와 인사를 나누었다.
“오늘은 웬일로 늦으셨습니다. 참 아까 손님이 찾아오신 것 같았습니다.”
그는 갑자기 이상한 예감이 찾아들었기 때문에 마침 담배를 꺼내어 늘 친절한 수위에게 권하고 그도 피우려던 생각을 포기하고 활기 있게 안으로 결어 들어갔다. 그는 사무실의 문을 열기 전에 화장실로 들어갔다. 용무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무실의 문을 대하자 서류를 분실한 사실이 엄청난 사건이라는 생각이 다시 일어났으므로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는 화장실의 거울 속에 비친 그를 위로했다.
괜찮다. 어쩔 수 없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엎질러진 물이다.
그는 거울 속의 그를 향하여 웃어 보였다. 그러나 거울 속의 그는 웃는 대신 얼굴을 찌푸렸다. 그때 또 다른 얼굴이 그의 얼굴에 겹쳐왔다.
“나예요.”
그의 어깨를 치며 그 얼굴은 웃었다.
신 대리였다.
“웬일이에요?”
그가 홱 돌아서자 신 대리는 등 뒤로 돌리고 있던 손을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아아.”
그것은 잃어버렸던 서류 가방이었다. 가방을 확인하자 그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으므로 아무 말도 못하고 가방을 내려다보며 그대로 서 있었다.
“틀림없어요. 서류는 다 확인해봤으니까. 다 그대로 있어요.”
회사 건물 안의 휴게실에 앉아서야 그는 잠긴 목이 터지는 듯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어제 오후 어떤 사람이 은행으로 가져왔더래요, 주웠다고. 연락처가 있으니까 나중에 적당히 보답하면 될 거예요. 건 그렇고 어때요? 이제야말로 우리가 술을 한판 마셔야 하지 않겠소?”
“그래요, 내가 근사하게 한잔 사겠어요.”
신 대리를 따라 웃는데 이유를 알 수 없게 눈물이 솟았다. 어떻게 생각했던지 신 대리가
“감격할 만도 해요.”
농담을 걸었다.
사무실로 돌아와 그는 과장에게 늦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사람이 가끔 늦어야 기계가 아니지, 괜찮아요. 서류 관계로 걱정을 했을 뿐이지 .”
오히려 그를 안심시킨 후
“그것이오?”
들고 있는 가방을 가리켰다.
“예.”
“토요일 날 늦게 끝났을 텐데 수고했어요.”
이제 사연도 많은 이 서류는 담당 계원에게 넘기면 그만이다. 그는 책상 위에다 서류를 꺼내놓고 그것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담배를 피웠다.
이 서류 따위가 도대체 나에게 무엇이란 말인가? 나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 것인가?
그는 이제야 조금 화가 치밀었으므로 마음속으로 그를 향해 그러한 질문들을 던졌다. 그것은 사실 그와는 별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상관이 없다는 건 이상하지만 근본적인 그와 그의 문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서류 가방은 그의 모든 것을 구속했던 것이다.
가방을 찾았으면 모든 것이 전과 다름없이 돌아와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하루 종일 그는 일이 손에 잡히지가 않았다. 문득 떠올린 하나의 의문이 집요하게 그를 붙들었기 때문이었다. 하루 종일 그는 일을 손에 잡지 못했다. 퇴근 시간이 멀었는데도 그는 몸이 불편하다는 핑계를 대었다. 과장은 쉽게 허락하여주었다.
사무실을 나오자 그는 자신이 무엇을 위하여 일찍 사무실을 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무엇인가 할 일이 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그는 망설였다. 목적 없이 걷다 그는 그가 자란 고아원을 가볼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지금까지는 해본 일이 없었던 생각이었으므로 그런 생각을 해 냈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천안에서 차를 내려 물으면 지금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고아원은 변했을 것이며, 지금은 없어져 버렸는지도 모른다. 원장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할머니의 얼굴, 그가 친하게 지내던 아이들의 얼굴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이름은 모두 잊었다. 그가 3년 동안 다닌 국민학교도 생각났다. 2학년 때 담임이었던 여선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희미한 모습이었으며 역시 이름은 잊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극히 담담하게 그것들을 생각하는 자신의 마음이었다. 고아원을 중심으로 한 모든 정경과 인물들이 무성 영화의 필름을 보듯 하였다. 그는 그 고아원을 찾아가려는 생각을 단념하였다. 빈 택시가 마치 그를 기다리듯 서 있었으므로 그는 아무 생각 없이 택시를 탔다.
“어디로 모실까요?”
운전사가 물었다. 집으로 가기에는 너무나 이른 시각이었다. 찾아볼 친구들도 있었지만 모두 직장 일에 열중해 있을 때였다.
“이문동으로 갑시다.”
그는 어젯밤 정신없이 취하여 그가 말했던 말을 되풀이하였다.
“여기에서 가기에는 곤란한데요. 한참 돌아서 가야 합니다.”
그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대답했다. 이문동이 가까워졌을 때 운전사가 어디서 내릴 것인가를 물었다. 그는 적당한 곳이 생각나지 않았으므로 아무 곳에나 내려달라고 말했다. 그는 어디로 가볼까 망설였다. 그는 물어서 동사무소를 찾아갔다. 그는 한 직원을 붙들고
“1955년경에 이문동에 있었던 치과인데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는지 확인할 수 없을까요?”
하고 물었다. 그의 물음은 직원들 사이에 호기심을 일으켰다
“그땐 이곳이 모두 산이었을 텐데 치과가 있었을까요?”
“있을 법도 하지. 그때에도 대학이 있었을 테니까.”
“그대로 있더라도 주인은 바뀌었겠지요. 병원 이름이 바뀌었든지.”
그들이 바쁜 중에서도 이문동에 있는 모든 치과의 명부를 열람해본 것은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런 치과는 없었다. 그는 그들에게 감사했다. 아직도 해가 기울려면 시간이었었다. 그는 아무렇게나 발걸음을 내맡겼다. 복덕방이 있었다. 그곳에 있던 칠십 가까이 보이는 노인이 그때 자신은 서울에 살지도 않았노라고 말했다. 그는 다른 복덕방에도 가보았다. 한 노인이 서울은 하루가 달라지지 않느냐고, 자기는 서울에서 낳아 평생을 서울에서 살았지만 지금의 서울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한 치과에 들어갔다. 의사는 젊었다. 젊은 의사의 얼굴을 대하자 그는 묻지도 않고 그곳을 나왔다. 그가 확인한 것은 흘러간 시간과 엄청난 변화, 그리고 망각이었다.
가을이 깊어가면 밤이 빨리 찾아든다.
어둠이 깃든 초가을 저녁, 술집에서 풍겨 나오는 고기 굽는 냄새가 골목을 메우고 있었다. 취한 목소리는 아직 들리지 않는다. 술좌석은 이 시각쯤 자리가 잡히기 시작하는 것이리라. 그는 기분이 아늑했다. 그는 계속해서 걸었다. 미스 민이라고 했던가? 그는 어젯밤의 술집 ‘밀밭’이 가까워오자 그녀를 생각했다. 그는 걸으며 이틀 동안에 일어났던 일을 돌이켜보았다.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온 것 같았다. 미스 민이라는 여자를 생각했을 때는 먼저 고마운 생각이 들었고, 가방을 찾는 것과 함께 그녀에 대한 모든 것도 해결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그녀가 그에게 보여주었던 행동은 알 수 없었다.
왜 그녀는 30분가량 술시중을 들어준 형편없이 취한 손님인 자기와 동행하고 동침할 마음을 갖게 되었을까, 의문이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팁을 주지도 않았고(그는 팁에 대한 의문이 일어났을 때 신 대리에게 전화를 해보았는데 신 대리도 가졌던 돈을 계산해보니 팁을 주지 않았든지 혹시 주었다 해도 택싯값 정도였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또 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이편에서 그녀에게 동행을 요구했을 리도 없었다. 평범한 경우라면 그가 요구하였다 하더라도 그녀가 들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그녀는 그의 술주정을 다정한 아내나 누이처럼 보살펴주었고, 그가 가진 것에 아무 욕심도 부리지 않았으며, 자기의 선행(?)을 알리지도 않고 정숙한 여자가 잠깐 바람을 피우듯 그렇게 날이 밝기도 전에 사라져버린 것이다. 각박한 세상을 몸뚱이 하나로 살아가는 여자라면 그럴 수 없었다. 그가 한 번 겪은 일이 아니었다.
어제저녁 그가 찾아갔을 때 직업적으로 대하던 태도는 무얼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그에게 정이나 미련이 남아 있지 않다는 표시이기도 했다. 만약 술자리에서 단번에 그가 좋아졌기 때문에一그럴 수가 없다고 생각하지만―동행하였고, 그의 취기 때문에 정분을 나누어보려던 그녀의 소망이 무참히 되었다면 그녀는 분명히 아직도 그에게 미련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며, 어제저녁 그가 찾아간 것은 좋은 기회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이것이 하루 종일 그를 붙든 의문이었고 그는 그 의문의 실마리를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일부러 걷는 것은 아직 이른 시간을 메우기 위한 것이었는데 걷다 보니 의외로 기분이 좋았다.
‘밀밭’ 가까이 갔을 때도 술집이 흥청대기에는 이른 시각이었으므로 그는 가까운 음식점에 들어가 저녁을 먹기로 하였다. 파출부 아주머니가 바뀔 때마다 그는 그녀들에게 그의 식성과 남다른 버릇을 주의시키곤 하였다. 짠 음식과 매운 음식…… 뭐 그러한 것들을 싸잡아 식성이라고 했지만 그가 원하는 음식이란 정성이 담긴 것을 의미했다. 그는 정성이 담긴 따뜻하고 기름기 흐르듯 깨끗한 식사를 하고 싶었다.
아침은 빵과 우유로 때우고 점심은 직장에서 먹었으므로 기껏 파출부 아주머니가 담당하는 것은 저녁뿐인데 그녀는 해만 지면 돌아갔으므로 저녁은 언제나 식어빠져 맛이 없었다. 그것도 일주일에 세 번만 왔으므로 저녁도 밖에서 먹는 경우가 많았다.
별로 내키지는 않았으나 내온 밥 한 그릇을 다 먹었다. 음식점을 나와 다방엘 들렀다. 커피를 마시고 나서 담배를 피우며 그는 벽에 걸린 텔레비전을 보았다. 연속극인 듯했다. 그는 평소 스포츠 중계와 명화극장을 제외하면 보는 것이 없었다. 짐작건대 결혼한 아들 삼 형제의 부인들이 시부모와 시누이들까지 많은 집에서 함께 시집살이를 하며 벌이는 사건들이 그 내용인 듯했다. 한 여자가 불평하였다.
“형제들끼리 한집에서 오손도손 모여 사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이냐고 말하는 거 그거 입술에 발린 소리야. 나는 시집오고 3년을 참아왔어. 그렇다고 뭐 아버님, 어머님, 삼촌, 고모 들이 특별히 나에게 섭섭하게 해서 하는 소리는 아니야. 그렇지만 이제 더 참을 수가 없어. 나가 살지 않으면 나는 갈라설 각오까지 되어 있다고 엊저녁 아빠에게 협박을 했어.”
다른 여자.
“저는 외동딸로 자라서인지 처음엔 모여 살면 참 재미있겠다, 그저 생각이 거기에밖엔 미치지 못했어요. 하루 이틀 지나 보니 형님 말씀도 이해가 가네요.”
멀고 아득한 이야기. 그는 다방을 나왔다. ‘밀밭’은 손님들이 가득했다. 어둑한 실내의 사이사이로 수족관의 열대어처럼 여자들이 흘러 다녔다. 일부러 엊저녁의 자리를 찾아 앉았다.
“또 오셨군요.”
미스 조라고 했던가? 여자가 다가와 옆자리에 앉았다.
“날 보러 오셨어요?”
“아니.”
“그럼 혼자 술 마시러?”
“그래요.”
“어머 능청스럽긴. 이런 집에 혼자 오는 손님은 뻔할 뻔 자예요, 다 알아본다고요.”
“어떤데?”
“나 보러 오셨다고 말씀해줘요.”
“아니.”
“미스 민?”
“그래.”
“반한 거예요?”
“그래.”
“내가 질투하면 어쩌려고?”
“둘 다 사랑하지.”
“욕심도…… 어제저녁 같이 나간 것 같더니 사건은 만들었어요?”
“아니.”
“그래 안달이 나서 찾아오셨구먼, 내가 미스 민과 자리 바꿔드릴게요.”
“고맙소.”
밴드가 나와 연주를 했다. 그는 시끄러운 음악 속에 앉아 미스 민을 기다렸다. 술이 왔고 그가 첫 잔을 비울 무렵 그녀가 왔다. 그녀는 처음 약간 웃어 보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별다른 표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무심히 앉아 술을 마셨고 그녀는 어포를 찢어놓기도 하고 술이 비면 더 가져오게 하면서 담배를 피우며 그가 두세 잔을 마실 때 한 잔쯤으로 상대를 하며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무료함을 벗어나기 위한 것인 듯 말을 꺼냈다.
“그날 밤 말이에요.”
음악은 시끄러웠고 비례해서 손님들의 지껄이는 소리도 높아갔다. 그는 그녀의 옆얼굴을 보았다.
“……?”
이야기가 끊길까 조바심 하며 그는 기다렸다.
“꼭 고집 센 아이 같았어요.”
“주정을 부렸어요, 내가?”
“그래요, 저녁 내내 내 품에서. 그런데 운전사와 다투다 코피를 흘린 건 기억해요?”
이미 들은 이야기이므로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땐 내가 울었어요.”
“왜?”
그녀가 짐짓 다정스럽게 느껴졌으므로 그는 일부러 경어를 쓰지 않았다.
“피를 흘리며 내 무릎에 엎드려 있는 게 가여웠어요.”
그는 웃었다. 억센 사내들 사이에서 사는 여자가 그만한 일에 울었다면 우스운 일이거나 까닭이 있을 것이었다.
“어제저녁엔 무슨 가방 이야길 하셨는데…….”
“그날 밤 잃어버렸는데 오늘 찾았어요.”
“다행이에요. 유심히 본 것은 아니지만 저하고 같이 택시를 탔을 때는 가지고 계시지 않았어요.”
뜯어보니 여자는 나이져 보였다. 목엔 주름살이 졌고 웃을 때도 눈가에 주름살이 많았다. 서른 살 가까이 되었을까. 눈이 깊고 콧날과 입 모양새도 오밀조밀 규모가 있었다. 키는 크지 않으나 결코 작은 키는 아니었으며 어깨에서 팔로 흐른 선이 유연했다. 목덜미에 살짝 얹힌 짧은 머리가 나이 든 얼굴을 가려주는 구실을 하였다. 원래는 곱게 생긴 여자라고 생각되었다. 다만 그녀는 사내들의 시달림을 받고 있어 얼마 가지 않으면 남아 있는 모습을 잃어버릴 것 같았다. 어젯밤에 그녀를 데리고 가던 건장하고 거친 사내가 떠올랐다.
“무얼 그렇게 보세요?”
여자는 몸을 사리며 말했다. 그는 계속해서 마시며 막연히 취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말이오 미스 민.”
그는 일부러 몸을 기우뚱거리며 말했다. 취기는 아직 멀었다.
“미스 민이 뭐예요.”
“그럼 뭐랄까.”
“그냥…… 음 참 올해 몇이세요?”
그는 당황했다. 누구나 그에게 나이를 물어보면 기분이 상했다. 언짢은 기분으로 훌쩍 잔을 비웠다.
그때 그녀가 갑자기 입을 딱 벌리더니 손을 들어 그녀의 벌어진 입을감추었다. 무엇인가 그녀를 크게 놀라게 했음이 분명 했다. 그는 못 본 체 술을 마시며 그녀가 회복되기를 기다렸다. 그녀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미안해요.”
그녀는 느닷없이 그렇게 말했으므로 그는 당황했다.
“무얼?”
“그날 저녁과 꼭 같은 실수를 했어요…… 사실 꼭 나이를 알고 싶다기보다 그건 그저 우리 같은 여자들에겐 버릇이에요.”
말을 마치고 그녀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제 저녁의 일이라면 기억할 수 없었다. 그 기억을 되찾기 위해서 이곳에 온 것이 아닌가.
“괜찮아요. 나는 기억하지도 못하는 일이니까. 그제 저녁에도 똑같은 말을 물었다구요?”
“네.”
“그게 어때서 그렇게 놀라는 거예요?”
“제가 그때 나이를 묻자 아저씨는…….”
“아저씨가 뭐요 젊은 청년에게.”
“그럼 뭐라고 해야 맞겠어요?”
“그냥 아무렇게나…… 음 미스 민은 올해 몇이에요?”
그녀는 갑자기 낄낄거리고 웃기 시작했다.
“왜?”
“그제 저녁 일을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때도 내가 그런 말을 물었소?”
“그래요.”
“……”
“내가 나이를 묻자 아저씨눈 갑자기 입을 다물고 말이 없었어요. 그전까지는 굉장했어요. 소리를 지르고 노래를 부르고.”
“……”
“처음엔 우리들은 그 영문을 몰랐어요.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아저씨가 갑자기 병째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죠. 내가 말렸어요. 친구분은 버려두라고 웃기만 했는데 그분도 그때는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
“맥주 두 병을 병째로 비우더니 갑자기 탁자에 엎드려 울기 시작했어요.”
그는 어렴풋이 그가 취한 행동의 까닭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로 눈물까지 흘렸다니 이상했다. 남의 일처럼 무감각하게 들리지 않았던가. 그는 담배를 피웠다. 밴드에 맞춰 여자 가수가 노래를 불렀다. 요즘 히트하고 있는 노래였다. 노래보다 흔들어대는 몸의 율동이 선정적이었다. 노래가 끝나자 칸막이 테이블의 이곳저곳에서 박수가 터져나왔다.
“처음엔 왜 그러느냐고 달래기도 했는데 나중엔 버려두었죠. 오래 울었어요. 한참 만에 울음을 그치고 허리를 펴며 소리를 질렀어요. 뭐라 한 줄 아세요?”
“……”
“나는 내 나이를 몰라! 이것이 아저씨가 외친 소리였어요. 어찌나 큰소리를 내었던지 옆자리의 사람들이 고개를 빼고 넘겨다볼 지경이었죠.”
그녀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첫 모금을 진하게 빨았다.
“이제 취기가 막바지까지 온 것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아저씨가 이야기를 시작했어요. 횡설수설, 무슨 얘긴지 잘 알아들을 수 없었죠. 두 분은 너무나 취해 있었어요. 나와 같이 앉아 있던 아이는 자리를 떴어요. 있으나마나 알아볼 수도 없는 상태였으니까요. 그러나 나는 끝까지 아저씨의 이야길 들었어요. 끝까지 들었다기보다 나는 도저히 자리를 뜰 수 없었던 거예요. 왠지 아세요?”
그녀는 거칠게 담배를 비벼 끄며 장난기 섞인 웃음을 지었다.
“글쎄 .”
“나도 내 나이를 모르거든요.”
“??……?”
“나도 고아거든요.”
그녀는 웃고 있었으나 그는 웃지 않았다.
“아저씨는 횡설수설이었지만 나만은 다 알아들을 수가 있었어요. 누구더라? 여동생 이야길 하셨는데, 아 박혜수.”
그는 놀랐다. 혜수는 가방을 잃어버린 후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비로소 생각해내지 않았던가. 20년이 넘는 동안 한 번도 생각해본 일이 없던 혜수를 내가 이야기했단 말인가. 그는 어지럼증이 났다.
“고아원 생활도 얘기하셨지요, 우유 가루로 찐 빵, 강냉이 가루, 레이션 박츠의 드롭스와 초콜렛, 비스켓, 흰 테가 있는 검정 고무신, 헐렁거리던 군인 작업복, 소금물에 적셔서 먹던 주먹밥, 혹한, 버들개지와 칡뿌리를 씹던 허기·…… 난 다 안다구요.”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전쟁이?”
“피난길에서 버려졌어요. 몇 살 때인지 알 수 없지만 아우성 소리와 앞뒤에서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았어요, 지금도 보여요.”
“전쟁이 우릴 망쳤어.”
“망쳐진 건 나 같은 년이지요. 고아원을 뛰쳐나온 뒤 20년이 가까워, 이 짓을 한 지가.”
“아이는 있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열일곱 살 때 아이를 지우려 산부인과에 갔었다. 아이를 낳고 싶었다. 낳아서 기르고 싶었다. 피를 나누고 싶었다. 사생아라도 좋았다. 그러나 그녀는 아이를 지웠다.
“그제 밤에는 내가 당신 아이가 됐군요.”
“아마 집에는 못 들어갈 것 같고 벌써 밤이면 추운데 길가에라도 쓰러져 자면 어쩌나 걱정이 됐어요. 내가 놀랐지요. 아직 내게 이런 순정이 있나 하고…… 그저께의 밤은 참 좋았어요. 아저씨가 방구석에 쓰러져 버리자 나는 이불을 깔아 잠자리를 하고 당신의 옷을 벗겼어요. 처음엔 양말을, 양복 저고리와 바지를, 넥타이를 풀어내고 와이셔츠를 벗기고 얇은 면내의까지. 그런 다음 대야에 물을 받아 와 수건으로 당신의 얼굴과 몸을 닦아드렸어요. 얼굴엔 피가 엉겨 있었어요. 손도 흙투성이였어요. 나는 물을 갈아내며 당신 몸 구석구석을 닦아냈어요. 꼭 개구장이 큰아이를 다루는 것 같았어요.”
그는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그녀의 손은 뜨거웠으나 이미 여자의 손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가슴에 어깨를 기댔다. 그는 가슴 밑바닥에서 눈물과도 같이 짜고 따뜻한 물기가 서서히 차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어깨로 팔을 둘러 그녀의 몸을 끌어당겼다. 두 손을 그의 가슴에 대고 그녀는 얼굴을 그의 품에 묻었다. 그는 알 수 없게 가슴이 뛰었다. 그녀는 손바닥으로 그의 가슴을 쓸며 오래오래 그러고 있었다.
『문학사상』 134호(1983. 12); 『밀리 있는 빛』 (정음사 1986)
이균영(李均永)
1951년 전라남도 광양에서 태어나 한양대 사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동덕여대 교수를 역임했다. 197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바람과 도시」 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상문학상 수상작 「어두운 기억의 저편」은 분단의 아픔을 전후 세대인 평범한 한 회사원의 무의식과 연결 지어 그려낸 그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소설집 『바람과 도시』 『멀리 있는 빛』, 장편소설 『노자와 장자의 나라』 등이 있다. 1996년 11월 작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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