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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달팽이가 사는 법 / 오봉옥
나도 한때는 눈물 많은 짐승이었다. 이슬 한 방울도 누군
가의 눈물인 것 같아 쉬이 핥지 못 했다. 하지만 난 햇살이
떠오르면 숨어야만 하는 존재로 태어났다. 어둠 속에 갇혀
홀로 세상을 그려야 하고, 때론 고개를 파묻고 깊숙이 울어
야만 한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 그런 천형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인가. 등에 진 집이 너무도 무겁다. 음지에서, 뒤편
에서 몰래몰래 움직이다보면 괜시리 서럽다는 생각이 들고,
괜시리 또 세상에 복수하고 싶어진다. 난 지금 폐허를 만들
고 싶어 당신들의 풋풋한 살을 야금야금 베어 먹는다.
1962년 광주 출생
전주대 국문과 수학
1985년 창작과 비평사 16인 신작시집 <그대가 밟고 가는 모든 길위에>에
시 <울타리 안에서>등을 발표하여 등단.
시집『붉은 산 검은 피 1, 2』, 『나같은 것도 사랑을 한다』 등이 있고,
동화 『서울에 온 어린왕자 1, 2』, 수필집 『난 월급받는 시인을 꿈꾼다』,
평론집 『서정주 다시 읽기』, 『시와 시조의 공과 색』, 『시로 쓰는 이중나선』 등 다수
달팽이가 지나간 길은 축축하다 / 박성우
1
내가 움직일 때마다 분비물을 흘리는 것은, 배춧잎에 붙어 있는 솜털이
내겐 덤불이기 때문이다
2
사내가 집을 나선다 저 사내는 볕을 두려워하는 달팽이다 다행히 오늘
은 햇살이 비춰지지 않는다 아니 이젠 비춰진다고 해도 무관할 것이다
사내에겐 꽃상추밭 같은 공원이 생겼으니까, 실직한 저 사내의 딱딱한
집 속에는 물렁물렁한 아내가 산다 건들기만 하면 젖무덤이 금세 봉긋해
지는 그녀는 하루종일 통조림용 마늘을 깐다 그런 이유로 사내의 눈이
매웠을까 사내가 눈을 훔치며 지나간 골목이 축축하다
1971년 전북 정읍 출생
원광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동대학원 박사과정 재학 중.
200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200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
현 전주전통문화중심도시추진단 홍보팀장
전주대학교 평생교육원 출강
2002년 시집 『거미 』『가뜬한 잠 』
달팽이 / 도종환
새순이 푸른 이파리까지 가기 위해
하루에 몇 리를 가는지 보라
사과나무 꽃봉오리가 사과꽃으로
몸 바꾸기 위해 하루에
얼만큼씩 몸을 움직이는지 보라
속도가 속도의 논리로만 달려가는 세상에
꽃의 속도로 걸어가는 이 있다.
온몸의 혀로 대지를 천천히 핥으며
촉수를 뻗어 꽉 찬 허공 만지며
햇빛과 구름 모두 몸에 안고 가는 이
우리도 그처럼 카르마의 집 한채 지고
아침마다 문을 나선다.
등짐 때문에 하루가 휘청거리기도 하지만
짐에 기대 잠시 쉬기도 하고
이 짐 아니었으면 얼마나 허전할까 생각하면서
우리도 겨우 여기까지 오지 않았는가
아름다움도 기쁨도 벗어 버릴 수 없는
등짐의 무게 그 깊은 속에 있다는 걸
온 몸으로 보여주며
오늘도 달팽이는 평온한 속도로
제 생을 옮긴다.
1954 충북 청주 출생
충북대 대학원 국어교육과 졸업
1984 동인지 [분단시대]를 통해 작품활동 시작
시집 <접시꽃 당신>, <접시꽃 당신2>,<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등
달팽이 / 김사인
귓속이 늘 궁금했다
그 속에는 달팽이가 하나씩 산다고 들었다
바깥 기척에 허기진 그가 저 쓸쓸한 길을 냈을 것이다
길 끝에 입을 대고
근근이 당도하는 소리 몇 낱으로 목을 축일 것이다
달팽이가 아니라
실은 도적굴로 붙들려 간 옛적의 누이라고도 하고
골방에서 평생을 난 앞 못 보던 외조부라고도 하지만
슬프고 옹색하게 생긴 저 구멍 너머에서는
누구건 다 달팽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달팽이는
천 년쯤을 기약하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고 한다
귀가 죽고
귓속을 궁금해 할 그 누구조차 사라진 뒤에도
길이 무너지고 모든 소리와 갈증이 그친 뒤에도
한 없이 느린 배밀이로
달팽이는 오래오래 간다는 것이다
망해버린 왕국의 표장標章처럼
네 개의 뿔을 고독하게 치켜들고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더듬더듬
그토록 먼 길을
1955년 충북 보은에서 태어나 서울대 국문학과와 고려대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1982년 동인지 『시와 경제』의 창간동인으로 참여하며 시쓰기를 시작했고,
시집으로 『밤에 쓰는 편지』『가만히 좋아하는』등이 있다.
제6회 신동엽창작기금(1987)과 제50회 현대문학상(2005)을 수상
빈 달팽이집 / 이기홍
저기 바람 머물던 흔적 남아있다
가을 길 걷다 마주친 외딴집
문짝은 마당에 나뒹굴고
지붕 끝이 추켜 들린 빈집
마당 귀퉁이 우물은 말라있다
한여름 회오리 바람이 머물다 간 자국이다
소용돌이를 몸 속에 품고 있는 바람
가다가 깃들이면 어디나 집인데
저 한뼘 들풀 위에 머물기 위해
집 한 채 이고 가야했던 바람
집은 늘 짐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바람은 낡고 조그만 집 박차고 나가
마침내 진정한 한 바람이 되었을 것이다
바람을 가두던 집 한채가 지문처럼 남아있다
문득, 소슬바람 한 줄기 다가와
내 머리에 쓸쓸한 지문 남기며 지나간다
2005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수료
2007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덮어준다는 것 / 복효근
달팽이 두 마리가 붙어 있다
빈집에서 길게 몸을 빼내어
한 놈이 한 놈을 덮으려 하고 있다
덮어주려 하고 있다
일생이 노숙이었으므로
온몸이 맨살 혹은 속살이었으므로
상처였으므로 부끄럼이었으므로
덮어준다는 것,
사람으로 말하면 무슨 체위로 말해질
저 흘레의 자세가 아름다운 것은
덮어준다는 그 동작 때문이겠다
맨살로 벽을 더듬는 움막 속의 나날
다시 돌아서면
벽뿐인 생애를 또 기어서 가야 하는 길이므로
내가 너를 네가 나를 덮어줄 수 있는
지금 여기가
지옥이더라도 신혼방이겠다
내 쪽의 이불을 끌어다가 자꾸
네 쪽의 드러난 어깨를 덮으려는 것 같은
저 몸짓
저 육두문자를
사람의 언어로 다 번역할 수는 없겠다
신혼서약을 하듯 유서를 쓰듯
최선을 다하여
아침 한나절을 몇백 년이 흘러가고 있다
1962년 전북 남원출생
1991년 계간 『시와시학』으로 등단
1995년 편운문학상 신인상
2000년 시와시학상 젊은 시인상 수상
시집으로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 『버마재비 사랑』
『새에 대한 반성문』『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마늘촛불』등
도장골 시편 / 김신용
- 민달팽이
냇가의 돌 위를
민달팽이가 기어간다
등에 짊어진 집도 없는 저것
타액 같은, 미끌미끌한 분비물로 전신을 감싸고
알몸으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햇살의 새끼손가락만 닿아도 말라 바스라질 것 같은
부드럽고 연한 피부 무방비로 열어놓고
산책이라도 즐기고 있는 것인지
냇가의 돌침대 위에서 오수(午睡)라도 즐기고 싶은 것인지
걸으면서도 잠든 것 같은 보폭으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꼭 술통 속을 빠져나온 디오게네스처럼
물과 구름의 운행(運行) 따라 걷는 운수납행처럼 등에 짊어진 집,
세상에 던져주고
입어도 벗은 것 같은 납의(衲衣) 하나로 떠도는
그 우주율의 발걸음으로 느리게 느리게 걸어간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아내가 냇물에 씻고 있는 배추 잎사귀 하나 덮어주자
민달팽이는 잠시 멈칫거리다가, 귀찮은 듯 얼른 나뭇잎 덮개를
빠져나가 버린다
치워라, 그늘!
1941년 전남 장흥 출생
1960년 용아문학상 수상
2001년에 월간《 현대시》를 통하여 작품활동을 재개
2009년 현대시작품상 수상
시집 『 나무들이 강을 건너갔다』『눈덮인 하늘에서 넘어지다 』『새떼를 베끼다 』
손톱 속에 민달팽이 / 정용화
차 문에 손가락을 찧었다
순간, 오른손 검지 손톱에
천둥이 치고 번개가 일었다
반달로 떠있던 낮달이 사라지고
시커먼 먹구름이 몰려왔다
손끝이 욱신거리는 내내 비가 내렸다
비가 그칠 즈음 손톱이 빠져버렸다
단단함 속에는 늘 여리고
부드러운 것이 감춰져있는 것일까
손톱이 빠져나간 자리에
맨살의 보드라운 민달팽이 한 마리
세상 밖으로 기어 나왔다
풀잎도 나뭇잎도 아닌 손가락 끝에서
처음으로 햇살의 눈부심과
바람의 시린 맛을 견뎌야 한다
때로는 물에 빠지기도 하고
거친 모서리에 자주 걸리면서
달팽이 한 마리 온 힘으로 조금씩
단단함을 등 쪽으로 밀어 올린다
다시 둥글고 딱딱한 집 한 채 짓는 동안
낮달이 손톱 위로 내려온다
1961년 충북 충주 출생.
중앙대 예술대학원 전문가과정 수료. 동국대 대학원 문창과 석사과정 재학 중.
2001년 <시문학> 2006년 <대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흔들리는 것은 바람보다 약하다><바깥에 갇히다>
달팽이집이 있는 골목 / 고영
내 귓속에는 막다른 골목이 있고,
사람 사는 세상에서 밀려난 작은 소리들이
따각따각 걸어들어와
어둡고 찬 바닥에 몸을 누이는 슬픈 골목이 있고,
얼어터진 배추를 녹이기 위해
제 한 몸 기꺼이 태우는
새벽 농수산물시장의 장작불 소리가 있고,
리어카 바퀴를 붙들고 늘어지는
첫눈의 신음소리가 있고,
좌판대 널빤지 위에서
푸른 수의를 껴입은 고등어가 토해놓은
비릿한 파도소리가 있고,
갈라진 손가락 끝에
잔멸치 떼를 키우는 어머니의
짜디짠 한숨소리가 있고,
내 귓속 막다른 골목에는
소리들을 보호해주는 작고 아름다운
달팽이집이 있고,
아주 가끔
따뜻한 기도소리가 들어와 묵기도 하는
작지만 큰 세상이 있고,
1966년 경기도 안양 출생
2003년 『현대시』 등단
2004년 문예진흥기금 수혜
시집 <산복도로에 쪽배가 떴다> 등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달팽이 생각 / 김산옥
창동역이었다 입을 꽉 다문 사람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지만 그들의 시선은
술렁이고 있었다 세 명의 남자들이 바닥에서
무거운 자루를 들어올리는 줄 알았다
스무 살도 안 돼 보이는 소녀가 축 늘어져
남자들 손에 의해 들어올려질 때
커다란 떡볶이 단추가 달린 외투가 벌어져
소녀의 새하얀 배가 드러났다
한가운데 오목하게 오므라든 배꼽이
큐빅장식이 박힌 피어싱을
꽉 물고 있었다
소녀는 형광등 불빛 아래 눕혀졌다
외투를 당겨 얼굴을 가린 소녀
가래 끓는 소리가 끊어지지 않았다
마음대로 조절되지 않는 팔이
허공에 내둘러져
벌어진 외투를 모으려 하였다
흰 벙어리장갑 낀 손이
어깨 밑에 깔린 배낭을 더듬거렸다
여러 개의 역을 지나면서
숫자가 늘어나는 새로운 사람들은
의자 하나를 다 차지하고 누운
소녀를 훑어보며
빈자리를 찾아갔다
혜화역에 내릴 때까지 나는
소녀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소녀는
집요하게 달라붙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길게 늘어져 꼼짝하지 않았다
나뭇가지를 지나는 달팽이에겐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 모든 길이
외나무다리로 변한다는 생각을 했다
1971년 강원도 인제 출생
국군간호사관학교 졸업육군대위로 전역
2005년 [시와반시] 신인상
민달팽이 / 정기복
찌들고
거칠어진 허접쓰레기를
아침 햇살에나 씻겨볼 요량으로
어스름 새벽을 밟고 토함산 오른다
턱 밑까지 닿은 거친 숨을 쓸어내고 오른
산마루 정상엔
봄 갈대 사나운 갈퀴처럼 휘날리고
창파 시린 물도
쌀눈처럼 어여쁘다가,
두 살 난 아가 입술처럼 붉다가는
역정 난 황소눈깔보다 무서운 해도
내보이지 않은 채
바다로 향한 골짜기를 타고 오른
산발한 해무(海霧)만이
순간에 스러지는 소멸의 춤을 춘다
어지럼 빈속 한끼 공양을
떡갈나무에 맺힌 찬 기운으로 마치고 내려온
석굴암 앞마당 안개비 젖은 첫길을
본존불 지켜보는 줄도 모르고
집도 절도 걸칠 것 없는
민달팽이 하나 그 보드라운 흙살 밀고 끌고
지구 반 바퀴나 돌고 있었다
1994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어떤 청혼』 동시집『생각하는 로댕』
달팽이 2 / 류인서
-let me in
계단이 담쟁이처럼 외벽을 감아 오르는 집
피맛을 풍기는 녹슨 철근계단 아래 막다른 그 방이 있다
더 잘 보이는 꿈을 위해 안경을 쓰고 잠드는 어린 어둠이 있다
그때 네 꿈속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눈 덮인 관목숲에서 환영처럼 걸어나온 너는 살아도 살아도 열두 살,
양파처럼 가득 어제의 껍질이기만한 오늘이 있다
우리가 기다리는 기차는 세상에서 가장 먼 곳으로 우리를 데려다줄 기차
창문에는 머리 위로 둥글게 마음을 그려보이던 네 긴팔과
어느새 기다림의 일부가 돼버린 나무그림자가 있다
아주 멀리 간다는 그 기차를 타고
햇빛을 태양의 속눈썹이라 부르는 낯선 마을을 지난다
웅크려 가방 안에 숨은 네가 툭 가방을 치며 고통 지친 소리로 물어온다
손 시리고 발 시린 겨울이야, 그만 들어가도 되니 인생아?
대구 출생
2001년『시와 시학』등단
부산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수학
시집<그는 늘 왼쪽에 앉는다><여우>
첫댓글 달팽이에관한 시
감상잘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