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의 막말이 연일 뉴스에 오르내립니다.
하지만 뉴스를 들여다보면 막말소동은 '지하철 막말 남녀'같이 우리같은 일반인,
터무니 없는 기사를 써서 기레기란 말을 듣는 언론인, 그리고 '빨갱이'란 동어반복의 목회자까지
이제 막말은 우리들 일상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일상이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막말소동이라해서 꼭 우리에게 불편한 모양만을 띄는 것도 아닙니다.
페이스 북에 전혀 악의없는 댓글조차도 글쓴이에게 자칫 막말이 되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막말소동을 들여다보면 그 단초가 말이든 글이든 전후 맥락을 빠뜨림으로 발생합니다.
인류 언어가 처음엔 단순한 '소통'을 목적으로 출발했지만 집단을 이루고 문자가 만들어지면서부터
소통을 너머 사회공동체를 위한 '축적'을 위한 기록의 기능이 추가됩니다.
처음에 학원을 운영하면서 도서관에서나 볼 수 있는 엄청 큰 미리암 웹스터 영어사전을 구비했지만
우습게도 초등수준의 특정 과학용어가 나오지 않아 허무했던 기억이 납니다.
컴퓨터 관련한 용어인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때 깨달은 것은 언어란 축적이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말대사전도 정기적으로 업데이트를 하지만 사실 욕을 듣게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새롭게 업데이트한다는 것이 그렇게 녹녹한 작업이 아닐 것이 뻔하기 때문에
결국 편집자들의 선택에서 이런 저런 모양으로 문제제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최근 개봉한 말모이란 영화를 뒤늦게 보신 소리꾼 한분은 매우 격앙된 톤으로
500년 조선왕조의 무능을 개탄했습니다. 세종대왕이후 사전을 만들지 않은 무능함,
그리고 500년을 이어 온 우리말에 대한 계급적 차별의식을 비판하는 것을 읽었습니다.
결국 언어란 해당 공동체가 축적해 온 것을 바탕으로 의미화하고
현시대의 맥락을 계속 새롭게 추가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변화가 더디고 사회가 단순했던 이전과 달리 지금은 숨고를 틈도 없이 변화는 빠르고
마치 고속촬영한 세포 변이처럼 사회는 새로운 변화와 확장을 쉼없이 반복합니다.
이런 공동체 속에 함께 어울려 살려면 우리는 이런 변화의 맥락을 놓쳐선 안될 것입니다.
막말의 해악은 이런 변화에 대한 맥락의 부재 내지는 맥락 파괴에 있다고 봅니다.
말을 하는 발화자는 자신의 맥락을 우선 확보한 후에 자신의 의사를 표현해야 할 것입니다
헌데 이것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나만의 맥락을 확보하려면 스스로 공부해야 하고
여기에 나만의 의사를 표현하려면 언어에 대한 표현력을 꾸준히 훈련해 가야 할 것입니다.
인류역사에 이렇게 자기개발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가 르네상스시대였습니다.
중세시대는 교회가 하는 말이 전부였던 시대였습니다.
현실 교회가 다시 이런 과거로 회귀하려는 경향을 띄고 있다는 사실은 슬픈 일입니다.
하지만 교회가 '-- 이렇다 카더라'가 유행했던 중세시대와 달리 르네상스 시대는
개인이 저마다 손에 책을 잡고 스스로 진리를 찾아 나서던 시대입니다.
르네상스 초상화의 인물은 책을 손에 들고 있거나 그 인물 앞 또는 옆에 책들이 있습니다.
르네상스는 사람이 사람답기 위한 미덕이 '의심'이었던 시대였고
그 의심이란 에너지로 거침없이 책을 찾아 스스로 읽어갔던 시대였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구텐베르크가 큰 성공을 거둘수 있었던 것도 이런 유럽의 엄청난 독서 수요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읽고 배우고 직접 배를 타고 떠나거나 마르코 폴로처럼 말을 타고 떠나
스스로 확인하면서 책으로 기록하고 그 다음 사람들이 또 가서 확인하고 업데이트하면서
유럽은 앞서 가던 아시아 대륙을 따라 잡았고 천천히 앞서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변화에 대응하여 스스로를 업데이트하지 않는 사회, 책을 멀리하고, 공부하지 않는 사회,
자신이 속한 당이나 공동체, 가족만을 위한 동어반복을 하는 공동체는 갈수록 막말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막말은 그 공동체가 앞으로 한 치도 나아가지 못하고 심한 정체현상에 빠져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