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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알, 정신과 기계의 싸움
씨알은 스스로 하는 생명의 자발성과 주체성을 나타낸다. 생명과 정신은 스스로 하는 주체인 ‘나’를 지닌 것이다. ‘나’는 존재와 활동의 이유와 까닭을 자기 안에 지닌다. ‘내’가 나의 까닭이다. 이 ‘나’를 영혼이라고도 한다. 물질이나 기계는 존재와 활동의 동인이 밖에 있다. 밖의 힘으로만 존재하고 움직인다. 자동차는 밖에서 힘이 주어지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자연과학을 포함해서 흔히 과학은 외적인 원인과 결과를 따지는 학문이다.
생명진화와 인류역사의 목적은 생명과 정신의 속 힘이 물질과 기계의 겉 힘을 부리는데 있다. 생명과 정신이 물질과 기계의 주인 노릇을 하는 것이 인간의 사명이고 목적이다. 돈이나 권력, 본능적 욕망과 탐욕, 물질과 기계가 주인 노릇을 하는가, 생명과 정신이 주인노릇을 하는가에 따라 인간의 미래는 결정된다. 돈과 폭력, 물질과 기계가 아무리 거대하고 풍요롭다고 해도 생명의 속 힘이 고갈되고 영혼이 물질의 힘에 굴복하고 종살이를 하게 되면 불의와 폭력, 파멸과 죽음의 지옥이 있을 뿐이다. 생명과 정신의 주체인 영혼이 물질과 기계의 문명을 움직이고 이끌 수 있다면 상생과 공존, 정의와 평화의 천국이 다가올 것이다.
일찍이 장자는 이런 진리를 깨닫고 있었다.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다. 어느 노인이 넓은 밭에 물을 주고 있었다. 깊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려서 큰 통에 담아서 무거운 물통을 지고 메마른 밭에 물을 주었다. 날은 덥고 땅은 말라서 노인이 하는 일이 너무 힘들고 성과도 없는 것 같았다. 지나가던 사람이 그것을 보고 말했다. “영감님, 내가 아는 방법을 쓰면 힘들이지 않고도 한 나절이면 이 밭에 물을 다 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 보시겠습니까?” 노인이 “그게 어떻게 하는 거요?”하고 물었다. “도르레를 달고 밖에서 도르레 줄에 바퀴를 달아 돌리면 우물의 물이 뿜어나오듯 밭으로 쏟아져 나올 것입니다.” 노인이 가만히 그 말을 듣더니 말했다. “결국 기계를 이용하자는 것인데 기계를 써서 기계에 의지하면 속의 하얀 마음이 없어집니다. 사람에게 하얀 마음이 없어지면 못쓰게 됩니다. 나는 그런 짓은 하지 않겠습니다.”
장자에 나오는 노인처럼 과학기술과 기계를 외면하고 살 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노인의 걱정은 옳다. 기계의 힘, 물질의 겉 힘에 매이지 않는 영혼인 ‘나’를 잃으면 인류문명은 속에서부터 무너지고 만다.
마리화나와 마음의 평화
1970년대 중반에 젊은이 몇 사람과 함께 함석헌 선생님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당시 미국에서 히피운동이 활발했고 마리화나가 유행했다. 어떤 미국사람이 함석헌 선생님께 말했다. 마리화나는 몸에 그다지 해롭지도 않고 중독증세도 약하지만 손쉽게 ‘마음의 평화’를 안겨 준다는 것이다. 구도자들이 수십 년 동안 명상 수행을 통해 도달한 ‘마음의 평화’를 마리화나로 쉽게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함 선생님은 인생의 목적이 물질과 기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주인노릇을 하자는 것인데 약물에 의존하는 것은 기계에 의존하는 것이고 기계의 종살이를 하게 되는 것 아니냐고 했다. 그러면서 사람이 참으로 스스로 하는 것이 무엇인가 물었다. 밥 먹고 숨 쉬는 것도 몸의 기관들이 본능적으로 하는 것이고 지식과 정보, 감정과 의식도 밖에서 들어오거나 자극을 받아 생긴 것이다. 이런 것들은 순수하게 내가 하는 내 것이라고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는 참으로 지금 내가 하는 것은 ‘생각하는 것’뿐이라고 했다. 지금 생각하는 것만은 남이 대신할 수 없고 내가 스스로 하는 것이고 또 스스로 해야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생각함으로써 나는 내가 될 수 있고 내가 나로 됨으로써 길이 살 수 있다.
공동체 파괴와 폭력의 일상화
도시산업문명이 발달하면서 공동체는 급속히 해체되기 시작했다. 농촌의 마을공동체가 해체되고 지금 농촌에는 그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것 아닐까? 삼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제도는 거의 다 무너져가고 결혼하지 않고 사는 젊은 남녀들이 급속히 늘고 있다. 1인 1가구 세대가 수도권에서 25% 가까이 되고 머지 않아 절반에 이를 것이라 한다. 홀로 사는 노인들이 너무 많고 홀로 사는 젊은이들도 급속히 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친족살해가 거의 날마다 언론에 보도되고 있다.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부모가 자식을 죽이며,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죽이고, 시누이가 올케를 죽이는 일이 일상처럼 일어나고 있다. 우수한 대학교의 학생들과 교수들이 연이어 자살하기도 했다. 놀라운 것은 초등학교에서도 폭력과 학대가 난무하고 있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5학년 학생들이 다른 친구들을 학대하고 괴롭히는 일이 일반화하고 있다. 2011년 4월에 초등학교 5~6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17.6%가 따돌림을 경험했다고 한다. 피해학생은 정신적으로 말할 수 없는 상처를 입고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하고 학교를 다닐 수 없을 만큼 큰 고통을 겪는데 가해학생은 장난으로 재미로 했을 뿐이라며 잘못했다는 생각조차 없었다. 누구나 하는 짓을 자기만 억울하게 걸려들었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초중고생을 상대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학교 폭력을 목격했을 때 2007년에는 모른 척한다는 응답이 35%, 말리거나 대응한다는 응답이 57.2%였는데, 2010년에는 모른 척한다는 응답이 62%, 말리거나 대응한다는 응답이 31%에 불과했다. 학교에서 학생들의 공동체적 관심이 급격히 약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문가들은 초등학교 학생들에게도 약육강식의 사회적 논리가 만연되었다고 분석했다. 초등학교 새싹 교실은 이미 ‘약육강식’ 정글이 되었다고 한국일보는 탄식하고 있다. 나보다 약하니까 때릴 수 있고, 나보다 못 났으니까 심부름 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어린 학생들이 약육강식의 논리에 젖어 폭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사회의 폭력적인 가치와 행태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른 바 사회 지도자라는 이들이 무한경쟁을 내세우고, 서슴없이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알고 초등학생들도 따라 하는 것이다. 어느 재벌 총수는 자식을 때린 사람을 잡아다가 폭력배들과 함께 폭력을 휘둘렀다. 어느 재벌가 자식은 노동자를 야구방망이로 실컷 때리고 맷값을 주었다. 그러니 어린 학생들이 약한 학생들을 학대하고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이미 한국인들의 마음 속에서 특히 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공동체 의식은 사라진지 오래다. 약한 사람들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마음은 사라지고 돈과 권력을 휘두르는 천박하고 난폭한 정신이 지배한다.
사람은 홀로 살지 못하고 더불어 사는 존재다. 손톱, 발톱이 퇴화한 것은 서로 손잡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다른 짐승들에 비해 눈이 맑은 것은 서로 교감하고 속을 드러내며 살자는 것이다. 생각하고 말하는 존재가 된 것은 대화하고 소통하며 살라는 것이다. 공동체 정신과 의식은 사라지고 공동체를 파괴하고 짓밟는 주장과 행동이 난무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과 사명을 거스르는 것이다. 반공동체적 경향과 행태는 결국 어리석은 자기파괴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 민주당 정부가 지금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처음에 ‘탈미입아’(脫美入亞: 미국을 벗어나서 아시아로 들어감)와 우애와 화해의 공동체적 가치를 내세운 것은 참으로 잘 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일본 민주당 정부의 이런 입장 표명은 후쿠자와 유키치가 탈아입구(脫亞入口:아시아를 벗어나서 유럽으로 들어감)를 구호로 내세워 근대화를 추구한지 150년만에 일본국가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꾼 놀라운 선언이었다. 21세기는 아시아 태평양 시대라고 한다. 중국과 한국과 일본 세 나라만 놓고 보더라도 인구, 경제력, 종교문화 전통의 깊이와 풍부함을 생각할 때 동아시아가 지닌 위상과 지위는 중요하다. 일본의 최고위 정치인이 동아시아 3국 사이에서 공동체적 가치를 회복할 것을 선언한 것은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다. 현재 일본 민주당 정부가 어려움을 겪고는 있지만 그들이 선언한 방향과 원칙은 앞으로 100년 이상 국가의 원칙과 방향을 바르게 제시한 것으로 여겨진다.
초중고등학교의 어린 학생들에게 생명과 공동체 가치를 담은 씨알사상과 정신을 가르칠 때가 오지 않았는가? 더 늦지 않게 영혼의 깊이를 드러내고 나를 찾는 씨알사상, 공동체적 가치와 지혜를 담은 씨알정신을 학생들에게 한번이라도 진실하게 가르친다면 폭력에 중독된 어린 영혼들을 치유할 수 있을 것이다.
복지국가의 필요와 한계
오늘 정치인들의 화두는 복지국가다. 갑자기 복지국가에 대한 관심과 논의가 뜨겁다. 한국의 경제가 성장했다고 하나 서구 선진국의 복지 수준에 비하면 한국의 복지수준은 후진국에 가깝다. 오랜 세월 노동자 농민의 일방적 희생을 바탕으로 수출 주도의 경제성장 정책을 강압적으로 추진해오는 동안 사회정의나 복지는 정치인들에게 진지한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민주정부가 들어선 다음에도 심각한 경제 위기를 두 차례나 겪으면서 ‘경제 살리기’에 모든 관심과 힘을 집중했을 뿐 사회정의와 복지 문제에 힘을 쏟지는 못했다. 말로는 정의니 복지니 하는 말을 했지만 한국경제사회의 근본성격과 방향을 놓고 정치인들과 국민들 사이에서 본격적으로 논의해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실제로는 지난 10년 동안 기득권의 과보호가 이루어져서 국가사회가 위기를 맞고 있다는 진단도 나온다. 뒤늦게라도 여당과 야당의 정치인들이 복지국가에 대한 논의를 하려고 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씨알사상과 정신의 관점에서 복지국가에 대한 생각을 다듬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먼저 씨알들이 주인이 되는 나라가 되려면 먹고 입고 자고 하는 의식주(衣食住) 문제는 기본적으로 국가가 책임지고 보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싼 옷, 비싼 음식, 크고 사치스런 집을 누구나 누릴 수는 없다. 그러나 먹고 입고 자는 것은 인간의 기본생활에 속하고 이것이 마련되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하게 된다. 먹을 음식이 없고 입을 옷이 없고 잠자고 머무를 집이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나라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사치스럽고 화려한 옷과 비싼 음식을 누리고 터무니없이 비싼 집에서 사는데 어떤 사람들은 생명을 유지할 밥이 없고 입을 옷이 없고 살 집이 없다면 어떻게 같은 나라의 국민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적어도 우리나라, 내 나라라고 하려면 먹고 입고 잠잘 터전은 마련되어야 한다. 의식주 문제는 투기의 대상은 물론 경쟁의 대상이 되어서도 안 된다.
그리고 국민으로서 함께 살 수 있는 기본 소양과 능력과 품격을 배우고 익힐 기본 교육은 누구에게나 제공되어야 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자질과 품격을 닦는 교육은 국민생활의 기본권에 속한다. 그러므로 기본 교육도 국민에게 조건 없이 제공되어야 한다. 또한 국민의 기본생활과 관련된 상수도와 하수도, 도시가스, 전기, 토지공사, 전화, 지하철과 철도와 같은 사업은 민영화해서는 안 된다. 국민의 기본생활을 사적인 영리활동에 맡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지제도와 체계를 아무리 발전시켜도 복지국가는 그 자체로는 분명한 한계를 가진다. 완전한 복지국가체제와 제도를 마련해도 그것만으로는 인간생명과 정신의 자발성과 공동체적 헌신성을 고양시킬 수 없다. 오히려 복지국가가 발달해서 인간이 국기기관과 제도에 더 의존하게 되면, 인간의 생명력과 정신력은 약화되고 영적 깊이를 잃게 된다. 국가기관과 체제와 제도는 그 자체가 생명력과 영적 힘을 지니고 있지 않다. 국가기관과 제도는 물질적 토대와 조직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물질과 기계의 성격을 가진 것이다. 그러므로 복지제도와 체제는 인간의 주체적 생명력과 공동체적 정신을 마비시키고 타락시킬 가능성이 높다.
국가의 복지체제와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고 의미 있게 시행되려면 자발적 주체성과 공동체적 헌신성을 추구하는 씨알들의 자치 생활 공동체가 발달해야 한다. 씨알들의 자치 공동체는 민의 자발성과 공동체적 헌신성을 토대로 세워지고 발전하는 것이다. 씨알 자치 공동체가 든든하게 설 때만 복지국가도 제 구실을 할 수 있다. 민의 자발성과 헌신성이 없는 복지국가는 민을 짐승처럼 사육할 뿐 민은 국가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 민이 국가의 주인이 될 때만 복지국가는 민을 위한 복지국가로 될 수 있다. 민이 국가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정치와 경제와 사회와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공동체적 자치의 영역을 넓혀가야 한다.
씨알의 자치적 공동체도 상생협력만 아니라 서로 경쟁을 허용하고 촉진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 사는데 경쟁이 없을 수 없기 때문에 다양한 분야와 일들에서 경쟁을 할 수 있고 경쟁을 촉진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무한 경쟁’이라는 말은 현실적으로는 성립될 수 없다. 물질적인 상대세계는 유한하기 때문에 무한이라는 말을 쓸 수 없고 써서도 안 된다. 경쟁을 한다고 해도 경쟁은 유한경쟁, 제한된 경쟁일 뿐이다. 생명진화와 인류 역사를 돌이켜 보면 경쟁보다는 상생협력을 통해서 진화와 진보를 이루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세계일류기업들도 제한적인 경쟁을 하면서 상생협력을 통해 발전해 가고 있다. 또한 어떤 기업도 소비자를 섬기고 받드는 자세를 갖지 않고는 성공할 수 없게 되었다.
21세기는 개인과 전체를 함께 강조하고 개인의 자발성과 공동체적 헌신성을 함께 추구하고, 상호협력과 경쟁을 함께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나의 이익을 위해 너를 희생시켜서도 안 되고 ‘나’는 없고 너와 전체만 말해서도 안 된다. 나와 너와 그의 ‘나’가 다 함께 사는 길을 찾아야 한다. 너와 그의 ‘나’를 살리는 길이 나의 ‘나’를 살리는 길임을 깨닫는 지혜와 실천적 용기가 필요하다.
첫댓글 씨알을 살리는 복지! 씨알정신이 죽으면 허망한 껍데기 복지!
씨알의 기본은 이륜 , 나의 이륜 , 이웃의 이륜
성수동에서 이제훈 씨알님이 나와 그의 나를 살리는 일에 목숨을 걸었더이다. 어제 몇 사람이 같이 만나 식사와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참 진지한 시간이었습니다. 형인 아우하며 서로 따스한 마음으로 위로와 격려도 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