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무용이 탄생한 지도 한 세기가 넘었고, 포스트모더니즘이 등장해 퍼포먼스니 해프닝이니 하는 뉴에이지 붐이 불었던 시기도 거의 반세기 전의 일이 되었다. 이제 뭔가 새로운 사조, 새로운 장르의 춤을 보기 원하는 우리 앞에 이 시대의 최첨단 아방가르드 작가임을 선포한 안무가가 있다. 벨기에 태생의 빔 반데키부스가 그 주인공이다.
벨기에는 모리스 베자르가 20세기 발레단을 창단했던 시절 이미 무용의 메카로 자리 잡았고 얀 파브르, 안느 테레사 드 키에스메케르 등의 굵직한 안무가들에 의해 현대무용을 대표하는 나라로 손꼽히고 있다. 딱히 안무가라고 정의하기가 무색할 정도로 연출가·연극배우· 사진 작가 등 다양한 예술 활동을 벌이고 있는 빔 반데키부스(1963년생)가 합세하면서 전 세계의 신세대 무용수들이 오디션을 보기 위해 벨기에로 대거 모여들었다고 하니 가히 벨기에뿐 아니라 세계의 현대무용의 흐름과 새로운 사조를 전망하면서 그의 이름을 제일 먼저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에우리디케 신화를 모티브로 천국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 ‘Blush’(2002년 초연)를 가지고 올가을 첫 내한 공연(9월 26일∼28일 LG아트센터)을 갖게 된 빔 반데키부스. 토털 아트로 풀이되는 혁신적인 그의 작품세계에 대해 인터뷰를 통해 직접 들어 보았다.
동물을 모티브로 표현하는 내면의 세계
“1987년 발표한 처녀작 ‘What The Body Does Not Remember’를 비롯해 두 번째 작품 ‘Les Porteuses De Mauvaises Nouvelles(나쁜 소식을 가져오는 여자들)’을 발표했을 때만 해도 저는 현대연극의 실험무대를 시도했던 거예요. 그런데 이 두 작품이 모두 무용·음악· 퍼포먼스 분야에서 뉴욕 베시 어워드(Bessie Award)를 수상하면서 제 이름 앞에는 놀랍게도 ‘안무가’라는 수식어가 붙었죠. 평론가들이 ‘새로운 무용의 등장’이니 ‘무용의 혁명’이니 하는 평을 했기 때문이에요. 저는 연극 작품을 만들었는데 무용이라니 놀라웠죠.”
영화와 사진을 공부한 반데키부스는 무용교육을 전혀 받은 적이 없다. 그러나 안무가 얀 파브르와 2년간의 작업 후, 1985년 곧바로 다양한 장르의 젊은 아티스트 12명과 함께 울티마 베즈(스페인어로 ‘마지막 순간’이라는 뜻)를 창단했다. 추상적인 움직임을 거부하고 연극적 형태의 직접적인 언어로 표현되는 움직임을 연구하는 독창적인 단체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내면세계를 중시하는 훈련을 거치면서 인간관계와 그 속에서 배출되는 감정을 움직임으로 표현하기에 이르렀고, 탈장르를 형상화하는 작품은 그 틀을 갖추기 시작했다.
“저는 무엇이 아름다운 것이고, 무엇이 추한 것인지를 연구했어요. 남들 앞에서 과연 무엇을 숨기고, 무엇을 보여 주고 싶은 건지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죠. 저의 작품은 이렇게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예술가로서 갖게 된 첫 번째 철학이라고 할까요?”
반데키부스는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자신의 어린 시절의 추억에서 그 모티브를 찾은 것처럼 수의사였던 아버지 주변에서 접했던 동물과의 추억을 작품에 그대로 반영했다.
“12세 때 일입니다. 한밤중에 아버지는 돼지가 새끼 낳는 것을 보라고 잠든 저를 깨웠어요. 충격 그 자체였어요. 농장에서 가까이 친하게 지낸 동물들을 늘 작품 속에 등장시킨답니다.”
비디오 댄스로 제작되기도 했던 ‘In Spite Of Wishing And Wanting’(1999년 작)에서는 남성 무용수들만 출연하는데 셔츠를 입에 물고 광적인 제스춰로 모두 말(馬)의 움직임을 표현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대부분의 작품 속에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동물로부터 받은 영감을 삽입시키는데 그의 작품 속에 유독 동물적인 움직임이 많고 동물의 이미지 투사 장면이 많은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관객과의 대화를 통해 얻은 창작의 자유
반데키부스의 초기 작품들은 상을 받는 것은 물론 세계적인 평론가들의 대단한 호평을 받았지만 그는 평론가의 의견에 대해서는 완전히 초월한 듯했다. 단지 관객의 반응이 유일한 관심사였으며, 관객에게 어떻게 하면 직접적으로 다가갈 수 있을까 하는 연구만을 계속했다. 그의 성을 ‘반데키부스’라고 부르든 ‘반데케이부스’라고 부르든 상관없다는(플랑드르어로는 ‘반데케이부스’가 정확한 발음이다) 일상적인 똘레랑스에서부터 시작해, 좋아하든 싫어하든 관객의 반응이라면 모두 지극한 관심을 갖는 그는 결국 관객과의 대화를 통해 창작의 자유를 터득했다. 영상, 음악, 연극, 무용 모두를 균등하게 혼합하며 거대한 폭발물로 빚어낸 토틀 아트의 경이로운 탄생이었다.
이러한 노력은 ‘Tous les grands se prot gent(어른들은 서로 지킨다)’(1995년 작)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무용 테크닉을 사용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고, 연극배우보다 무용수들을 많이 작품에 기용해 대사보다는 몸으로 말하는 형식이 두드러진 무용 작품으로의 전환기를 맞았다. 훌륭한 테크닉을 가진 무용수들이 춤을 추지 않고 자연스런 움직임만으로 놀라운 에너지를 발산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의 이런 변신은 ‘충격의 미학’ ‘사회상을 반영한 난폭의 극치’로 정의 내려졌고, 두려움을 초월한 무용수들의 과격한 몸짓은 격투와 잔인함으로 대변되었다.
표현의 한계가 없는 ‘솔직함의 미학’
“내 작품에는 실제 무대 위에서 칼로 자신의 신체를 베는 배우가 등장할 때도 있어요. 관객들은 경악을 금치 못해 눈을 가리기도 하고 야유를 보내기도 하죠. 하지만 배우는 야유 속에서 다시 자신의 몸을 더 깊게 베지요. 한 배우의 즉흥에서 출발했던 이런 장면은 결코 퍼포먼스는 아니었어요. 그렇다고 관객의 감정을 움직이기 위해 이용된 충격 요법도 아니었답니다. 단지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감정적인 반응’일 뿐이죠. ‘충격의 미학’이 아니라 ‘솔직함의 미학’이라고 할까요?”
그는 자신의 작품이 폭력적 사회상을 반영했다는 평도 극구 부정한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위선적이며, 개인주의와 소극적 표현에 익숙하기 때문에 자신의 작품과는 오히려 정반대가 아니냐는 반문을 늘어놓는다. 격투로 해석되는 장면들은 무용수들이 직접적인 신체 접촉을 시도한 것에 불과하며, 사도-마조히즘에 가까운 성적 자극은 전혀 의도하지 않은 감상자의 오해라고 일축한다. 몇 년 전 파리 시립극장 공연 중 지나치게 폭력적인 장면을 견디지 못해 극장을 나온 적이 있다는 필자의 조심스런 고백에도 오히려 그런 반응을 보여 주는 관객들을 이해한다는 의외의 답을 한다.
“전 관객들과 대화가 하고 싶어요. 그런 반응을 보였다는 건 제 작품을 보면서 뭔가 감정적인 변화가 있었다는 것 아니에요? 텔레비전을 보듯 무심히 앉아 있는 관객을 보면 오히려 참을 수가 없어요. 감정이 복받쳐 그 자리에서 울거나 정말 참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리를 떠나는 솔직한 반응을 대하면 저의 메시지를 전달받았다는 느낌에 만족합니다.”
반데키부스가 추구하는 관객의 간접적 참여는 바로 인터렉티브 아트의 또 다른 시도가 아닌가 싶다. ‘Blush’의 경우에도 한 무용수가 객석으로 내려가 관객에게 말을 걸고 머리카락을 얻어 무대로 돌아오는 장면이 있다. DNA를 얻어 공존의 무대를 만들겠다는 의지가 숨어있음을 관객들이 감지하기는 쉽지 않다. 또한 관객에게 동물 먹이를 뿌리는 장면에서는 불쾌감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별개의 이미지들을 연결하는 최근의 현대무용 동향과는 달리 하나의 플롯을 내재하고 그 위에 이미지들을 쌓아 가는 반데키부스의 안무 방식을 알고 감상한다면 좀 더 쉽게 작품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테아트르 당세의 결정판 ‘Blush’
에우리디케와 오르페우스의 사랑과 죽음을 노래하는 ‘Blush’는 극단적 대비로 숨 가쁘게 진행된다. 연극과 무용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오가지만 독일 피나 바우쉬의 ‘탄츠 테아터’와는 구분되는 ‘테아트르 당세(춤으로 말하는 연극)’의 결정판이라고 볼 수 있다. 반데키부스를 포함한 9명의 혼성 무용수들은 솔로, 듀엣, 트리오, 군무 등의 형태로 동시 다발적인 템포로 무대를 종횡무진 날아다니고, 폭발하는 에너지의 움직임은 경악하고, 사라지고, 다시 전환하는 식을 반복하며 관객을 빠른 호흡으로 몰아 간다. 앞부분에 등장하는 에우리디케로 분한 배우를 제외하고는 특정의 역할 없이 대사를 읊으며 뒤엉키고, 풀어지며, 감기고, 밀어붙이기를 반복한다. 야수들이 펼치는 듯한 곡예, 전기톱을 든 여자의 섬뜩함은 강한 긴장감을 주고, 지옥의 황폐함을 연상하게 하지만 안무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천국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말한다. 데이빗 에드워즈의 록음악은 폐쇄적 우울함을 반영하고, 대사와 영상은 잠시 숨 돌릴 틈을 만들어 준다. 반데키부스가 브뤼헤의 돌고래 수족관에서 직접 촬영한 영상을 담은 스크린은 갈라져 있고, 그 사이로 무용수들은 뛰어들기도 하고, 오버랩되며 사라지기도 한다.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숲 장면은 환각의 세계를 연출한다.
지칠 줄 모르는 창작 의욕으로 신작마다 세계를 놀라게 하는 반데키부스의 울티마 베즈는 1993년부터 로열 플레미쉬 시어터(Royal Flemish Theater)의 상주 단체로 있지만 매 신작마다 단원이 바뀌고 있다. ‘Blush’의 경우 벨기에에서 450명, 페르라라에서 150명, 포르투에서 100명(총 700명)이 오디션에 참석해서 그중 7명을 뽑았다. 작품을 소화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만들어 갈 아티스트를 발굴해 내는 일이 안무 작업 중 가장 어려운 관문이라고 한다.
“우리는 죽음이 언젠가 찾아올 것이라는 두려움 속에서 살고 있어요. 누군가를 사랑하면서도 그다음에 찾아올 아픔을 두려워해서 사랑 자체를 포기하기도 하지요. 저의 메시지는 단 한 가지입니다. 모든 두려움을 초월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