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돈사터는
이미 오래전에 발굴이 이루어져
전각과 당우터 등 절터가 정돈되어 있다.
발굴은 이루어졌지만
부도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생뚱맞은 모습으로 서 있고
부도비도 제자리가 아니라서 발굴을 하지 않은 옛 모습이
더 좋았을 것 같은 아쉬움이 남는 절터이다.
지금 발굴한다면 이런 모습이었을까?
당간 지주는 왜 공장에 방치된 채 있을까?
요사이 발굴이 이루어지는 절터들을 미루어 보면 이런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거돈사터 금당터와 삼층석탑
터 중앙에는
통일신라시대 만들어진
보물 제750호 삼층석탑이 주위와 조화를 이루며
잘 다듬어진 금당터 앞에 우아하게 자리하고 있다.
탑 전면에는 연꽃이 새겨진 아담한 배례석이 놓여 있는데
연꽃 조각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리 크지 않은 탑인데도
높게 보이는 것은 두 단의 탑 기단아래
또 다른 넓은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탑을 세웠기 때문이다.
이는 금당도 마찬가지 인데, 기단석을 높이 조성하고 건물을 올렸다.
보통의 절이 산에 있어
뒤에 자리 잡은 금당은 자연스럽게 높게 마련인데,
여기는 먼저 절터 자체를 넓게 조성하고 절을 짓는 과정에서
금당을 다른 건물보다 높게 조성하느라고 그랬을 것으로 추정된다.
거돈사터 금당지 중앙에는
원래 모습은 가늠 할 수 없는 부서진 통돌을 포개 놓은
화강석 불대좌가 주인도 없이 덩그러니 자리잡고 있는데,
커다란 불상과 조화를 이루며 화려했을 옛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눈이 내린 겨울이면
삼층석탑과 함께 거돈사터 특유의 애잔한 모습을 연출한다.
보물 제750호 삼층석탑
터 오른쪽에는
산중턱에서 옮겨다 놓은 보물 제78호 원공국사부도비가 외로이 서 있다.
원공국사 지종은
입멸 후에 현종으로부터 국사로 추증되었으며,
부도비는 부도와 함께 현종16년(1025) 건립되었는데
이 부도비가 왜 터 뒤편 서쪽 기슭에서 여기로 옮겨졌는지는 알 수 없다.
보물 제78호 원공국사부도비
이 부도비와 짝을 이루는
원공국사승묘탑(圓空國師勝妙塔)이라 불리는 부도(보물제190호)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와다(和田)가 서울의 자기 집으로 옮겨갔던 것을 회수해
1948년에 경복궁으로 옮겼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뜨락에 외롭게 서 있다.
반출하려던 것을 회수하였으면 제자리에 다시 세워야하지 않았을까
지금 서 있는 자리가 왠지 허전하고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다.
박물관 뜨락에 있으면 단지 박물관을 꾸미는 조각품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문화재를
장식품이 아닌 살아있는 역사로 보고
제자리로 돌려 놓으려는 노력이 필요 할 것 같다.
문화재는 있던 자리에서 더욱 의미있고 빛나지 않을까?
보물 제190호 원공국사승묘탑
개천너머 폐교된 정산초등학교 교정에는 짝 잃은 당간지주가 하나 누워 있다.
(2007년에 가 보니 학교가 공장으로 변해 있었다. 안타깝게도 문이 잠겨 있어 들어가 볼 수 없었다.)
가는 길 - 부론면에서 401번 지방도를 타고 내려가다
두 갈래 길에서 왼쪽 산 쪽으로 꺾어 고개 넘어 4 km 정도 가서
왼쪽 정산초등학교터 쪽으로 가면 거돈사터가 나온다.
첫댓글 좋은 자료 잘 보았습니다. 우리나라 문화재는 그대로 두는 것이 가장 잘 보존하는 법이란 말도 있습디다.
여기에 서면 넓고 평온해서 마음이 환해~집니다 처음그대로 보존이됐다면 얼마나 좋을가요...
가볼 곳이 정말 많군요. 소개 감사합니다.
그렇지요?작은나라임에도 못가본곳이 새록새록 많답니다 잘지내시죠?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