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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3월 13일 금요일
[(자) 사순 제3주간 금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호세아 예언자는,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릴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큰 계명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저희 손으로 만든 것을 보고 다시는 “우리 하느님!”이라 말하지 않으렵니다.>
▥ 호세아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14,2-10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2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 너희는 죄악으로 비틀거리고 있다.
3 너희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주님께 돌아와 아뢰어라.
‘죄악은 모두 없애 주시고 좋은 것은 받아 주십시오.
이제 저희는 황소가 아니라 저희 입술을 바치렵니다.
4 아시리아는 저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저희가 다시는 군마를 타지 않으렵니다.
저희 손으로 만든 것을 보고 다시는 ′우리 하느님!′이라 말하지 않으렵니다.
고아를 가엾이 여기시는 분은 당신뿐이십니다.’
5 그들에게 품었던 나의 분노가 풀렸으니
이제 내가 반역만 꾀하는 그들의 마음을 고쳐 주고
기꺼이 그들을 사랑해 주리라.
6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리니
이스라엘은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레바논처럼 뿌리를 뻗으리라.
7 이스라엘의 싹들이 돋아나 그 아름다움은 올리브 나무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으리라.
8 그들은 다시 내 그늘에서 살고 다시 곡식 농사를 지으리라.
그들은 포도나무처럼 무성하고 레바논의 포도주처럼 명성을 떨치리라.
9 내가 응답해 주고 돌보아 주는데 에프라임이 우상들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나는 싱싱한 방백나무 같으니 너희는 나에게서 열매를 얻으리라.
10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리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니,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28ㄱㄷ-34
그때에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28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 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2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32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안동교구 제2대 교구장이셨던 박석희 이냐시오(2000년 선종) 주교님께서는 데카르트의 말,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를 “나는 사랑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로 새롭게 풀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인간 존재의 가치는 얼마나 깊이, 얼마나 넓게 사랑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해석이었습니다.
주교님 말씀에 따르면, 사랑하는 것은 살아 있음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 있음을 가장 분명히 드러낼 수 있는 길이 바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0),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12,31)라는 말씀은, 우리가 살아 있음을 보여 주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물론 특별하고 고귀한 방식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도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실천하는 데 중요한 방법은 하느님과 함께하는 일상, 이웃과 함께하는 일상입니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일상은 기도로 깨어 있는 것이며, 세상의 방식보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웃과 함께하는 일상은 그들의 아픔을 보고도 외면하지 않는 것이며, 겸손한 마음으로 누군가의 곁에 머물러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존재도 흔들릴 것입니다. 혹시 지금까지 사랑하지 못하였나요?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밤하늘에 늦게 뜨는 별도 어둠을 밝히는 데 부족함이 없듯, 사랑에도 늦은 때는 없습니다. 지금부터, 바로 지금부터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우리 존재도 함께 빛날 것입니다.(김재형 베드로 신부)
사랑이란 결국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을 버리는 일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예수님 말씀을 묵상하다가 저희 살레시안들의 아버지 돈보스코의 서약이 떠올랐습니다.
토리노 뒷골목을 전전하던 아이들, 부모로부터 사랑받지 못해 늘 마음 한켠이 허전했던 아이들을 극진히 사랑했던 돈보스코는 어느 날 아이들 앞에서 이렇게 장엄한 약속을 합니다.
“애들아, 너희는 내 삶의 전부요 내가 살아가는 이유란다. 나는 앞으로 너희들을 위해 공부하고, 너희들을 위해 일하며, 너희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단다.”
피 한방울 안섞인 돈보스코였지만, 친아버지보다 더 친아버지같은 돈보스코의 따뜻하고 자상한 마음에 아이들은 홀딱 반합니다. 돈보스코의 사심 없는 사랑에 아이들도 크게 화답합니다.
돈보스코의 진정성 있는 사랑은 얼마 있지 않아 놀라운 결실을 가져옵니다. 거칠고 산만하던 아이들은 고분고분한 양들로 변화됩니다. 수많은 아이들이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는데, 돈보스코가 너무 좋아 수도자가 되고 사제가 되어, 오직 돈보스코 때문에 라틴 아메리카로, 중국으로 파견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그냥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한 적당한 사랑이 아닙니다. 진정성 있는 사랑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한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 그 결실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여러분들 지금까지 그런 사랑 한번 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사랑이 하느님을 향한 사랑도 좋고 사람을 향한 사랑도 괜찮습니다. 목숨 건 사랑, 지니고 있는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붓는 사랑, 그야말로 미친 사랑 한번 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주고받는 사랑에도 성찰과 고민이 필요합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사랑 아닌 사랑을 사랑이라고 고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관련해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 또 누군가로부터 사랑받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에 앞서 내가 먼저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내가 나를 잘 가꾸고 성장시켜 매력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보면 탄성이 나올 정도로 빛나고 가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변 사람들이 앞다투어 나를 존경하고 흠모하도록 나를 성장시킬 필요가 있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내 곁에 있고 싶어 하는 눈부신 존재, 빛나는 존재로 변화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사랑스런 존재, 매력적인 존재가 되라니, 어떤 분이 그러실 것입니다. “사랑스러운 사람, 매력적인 존재? 말은 쉬운데 그것은 내게 불가능한 일입니다. 백번 천 번 거울 쳐다봐도, ‘원판불변의 법칙’이라고 현실이 안 따라주는데 어떡합니까?”
여기서 사랑스러운 존재가 된다는 것은 성형 수술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피부미용을 받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내면을 갈고 닦으라는 것입니다. 영혼을 아름답게 장식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따뜻한 사람, 편안한 사람, 빛나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주변 상황이 내게 호의적이지 않더라도 불평불만하지 않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오늘이 아무리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적,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환하게 웃으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진정 사랑스러운 존재, 매력적인 사람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사랑이 좀 더 큰 사랑, 좀 더 사심 없는 공평한 사랑, 좀 더 폭넓은 사랑, 좀 더 주님 마음에 드는 사랑, 참사랑이 될 수 있도록 늘 고민하고 성찰해봐야겠습니다.
“사랑이란 보다 단순한 것입니다.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을 실망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과의 작은 약속을 지켜나가는 일입니다. 사랑이란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의 원치 않는 행동을 자제하는 일입니다. 사랑이란 상대방의 마음으로, 상대방의 마음 안에서, 상대방의 마음을 통해서 상대방의 이름으로 행하여 주는 일입니다. 사랑이란 결국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을 버리는 일입니다.”(최인호 베드로, 사랑의 기쁨)
주임 신부를 미워는 신자가 성당에서 행복할 수 있을까?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한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마르 12,28)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씀하시고, 이를 잘 알아들은 율법 학자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마르 12,34)라고 칭찬하십니다.
여러분, 하느님 나라는 죽어서만 가는 곳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곧 행복입니다. 그런데 왜 계명의 핵심, 즉 사랑의 순서를 알면 행복해질까요? 행복은 관계에서 오는데, 모든 관계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질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좌 신부를 할 때 주임 신부님보다 인기가 더 좋은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둘이 같이 떠날 때 전별금을 보니 주임 신부님의 반밖에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신자들은 아무리 보좌가 잘나도 주임 신부님이 아버지입니다. 그러니 보좌는 행복하려면 주임 신부님을 먼저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밖에서 주임 신부님을 흉보면, 신자들은 수긍할 수 있어도 결국 ‘하느님이 주임 신부님으로 삼아주신 분도 공경하지 못하는 보좌 신부’로밖에 여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도저도 안 되고 행복을 잃습니다.
본당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사목을 하면서 참 안타까운 분들을 봅니다. 신부님이나 수녀님을 습관적으로 험담하는 신자들입니다. "우리 주임 신부님은 이게 문제야, 수녀님은 저게 탈이야." 이렇게 동료 신자들끼리 모여 성직자를 안줏거리 삼아 씹어댑니다. 그러면 그 순간은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 같고 자기들끼리 똘똘 뭉친 것 같아 행복해 보이죠?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다른 신자들은 속으로 생각합니다. '저 사람은 하느님이 보내신 목자도 저렇게 깎아내리는데, 나중에 내 욕은 얼마나 할까?' 결국 그런 분은 공동체 안에서 누구에게도 진심 어린 사랑을 받지 못하는 외톨이가 됩니다.
주변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어느 본당이나 '트러블 메이커'가 있습니다. 대개 성직자와의 관계가 뒤틀린 분들입니다. 반대로, 신부님께는 지극정성인데 형제 신자들에게는 안하무인인 분들도 있습니다. 이 또한 심각한 문제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자녀들이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시는데, 아버지는 사랑한다면서 그 자식들은 구박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진짜 사랑이라 하겠습니까?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곳에는 질서가 없고, 질서가 없는 곳에는 평화가 깃들 수 없습니다. 성당에서 신부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연습을 하는 것은 단순히 그 신부님이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그분이 하느님의 대리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경외심'의 훈련입니다. 이 훈련이 된 사람은 사회에 나가서도 상사를 존경할 줄 알고, 부하 직원을 아낄 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위와 옆에서부터 사랑받기에 행복해집니다.
성녀 가타리나 시에나는 주님으로부터 놀라운 계시를 받았습니다. 당시 교회가 부패하고 성직자들이 타락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설령 지옥의 악마라 할지라도, 너희는 그들을 존경해야 한다. 그것은 그들 개인의 인품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내 아들의 피를 다스리는 권한을 받았기 때문이며, 나에 대한 공경 때문이다." (『대화』 중에서)
성녀는 이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교황님과 주교님들을 '지상에 계신 그리스도'라 부르며 사랑했습니다. 그 결과 성녀는 교회 역사를 바꾸는 위대한 일꾼이 되었고, 영혼의 지복을 누렸습니다.
역사 속의 위대한 인물들도 이 원리를 알았습니다. 영국의 위대한 수상 윈스턴 처칠은 정적들과는 치열하게 싸웠지만, 국왕 앞에서는 언제나 가장 겸손한 신하의 예를 다했습니다. 그는 국가의 정점(Vertical)에 대한 예우가 무너지면 나라의 근간(Horizontal)이 흔들린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행복해지고 싶다면 십자가의 두 기둥을 기억하십시오. 수직의 기둥이 먼저 세워져야 수평의 기둥을 얹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이 세우신 권위를 인정하십시오. 성당에서 신부님과 수녀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연습을 하십시오. 그것이 곧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연습입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제에 대한 공경이 사라진 곳에서는 신앙의 기쁨도 사라진다."
'뿌리 깊은 나무'는 가뭄이 와도 마르지 않습니다. 여기서 뿌리는 하느님과 윗사람을 향한 수직적 사랑입니다. 그 뿌리가 튼튼해야만 가지와 잎이라는 형제적 사랑이 무성하게 자라나 맛있는 열매인 행복을 맺을 수 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고대 근동의 신화는 성서의 이야기와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창조, 홍수, 바벨탑, 낙원의 이야기는 성서의 이야기와 유사합니다. 고대 근동의 신화는 수메르어, 아카드어, 바빌로니아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성서의 언어인 히브리어보다 700년가량 먼저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학자들은 성서의 이야기는 고대 근동의 신화를 모방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구성은 비슷하지만, 그 결과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같은 마트에서 재료를 사지만 제가 사서 요리하는 것과 유명한 주방장이 요리하는 것은 맛과 품격이 다릅니다. 창조, 홍수, 바벨탑, 낙원이라는 재료가 있지만 고대 수메르의 언어로 기록된 길가메시의 신화는 신과 인간의 관계를 엄격한 계급으로 구분합니다. 신들이 인간을 창조한 것은 신들의 일을 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홍수를 내린 것도 인간이 늘어나서 시끄러워져서 홍수를 내린 것이라고 합니다. 홍수를 내렸지만, 신들을 위해서 제사를 드릴 사람이 필요해서 ‘우트나피쉬팀’만 살려 주었다고 합니다. 우트나피쉬탐은 신들의 노예처럼 제사만 지내는 역할이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재료이지만 성서의 이야기는 다르게 전개됩니다. 하느님은 자신들의 일을 맡기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하셨고, 세상을 다스리도록 권한을 주셨습니다. 홍수는 세상이 타락하고 악해서 하느님께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의로운 노아와 가족 그리고 식물과 동물을 배에 태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무지개로 새로운 계약을 맺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심판하고 벌하는 분이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에게 자비를 베푸는 분입니다. 함무라비 법전은 모세의 십계명보다 훨씬 먼저 있었습니다. 함무라비 법전의 ‘틀’은 ‘동태복수법’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십계명과 율법의 ‘틀’은 ‘자비와 용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노예와 과부를 함부로 대하지 말아라. 너희도 한때는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지 않았느냐?” 구약성서에서 사람은 하느님의 노예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창조 사업을 함께하는 동반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 내가 자비로우니,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2026년 세계의 종교 인구를 보면 기독교, 이슬람, 힌두교, 불교 신자가 55억 명 정도 됩니다. 기타 종교 인구가 13억 명 정도 됩니다. 무신론과 불가지론으로 종교가 없는 사람은 12억 명 정도 됩니다. 종교를 가진 사람은 86% 정도 되고, 종교가 없는 사람은 14% 정도 됩니다. 과학이 발전하였고, 진화론이 생명의 신비를 푸는 열쇠라고 생각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은 종교, 신화, 신에 의지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축구와 야구는 게임의 규칙이 다릅니다. 축구게임에 야구의 규칙을 적용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야구 게임에 축구의 규칙을 적용하지 않습니다. 축구와 야구는 게임의 규칙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축구는 축구인의 시각에서 봐야 합니다. 야구 역시 야구인의 관점에서 봐야 합니다. 과학과 종교는 축구와 야구만큼이나 차이가 있습니다. 과학의 방법론과 종교의 방법론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축구와 야구가 조화롭게 공존하듯이, 과학과 종교 역시 조화롭게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윤리가 없는 과학은 사람과 자연을 파괴하는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근대의 역사를 통해서 보았습니다. 지금도 인류가 만든 무기는 모든 인류를 죽일 수 있을 만큼 파괴력이 있습니다. 이성이 없는 종교는 광신과 광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종교는 합리적인 이성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벌어진 잘못이 있었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던 잘못에 대해서 인류와 역사 앞에 용서를 구하였습니다. 과학은 앞으로도 분석과 관찰을 통해서 새로운 규칙과 법칙을 찾거나 만들어 낼 것입니다. 이 또한 인류의 발전을 위해서 유용한 학문입니다. 종교는 과학으로 채워지지 않는 인간의 번뇌와 고통을 위로하고, 인간의 품격을 한 차원 높이는 길을 갈 것입니다. 이 또한 인류가 쌓아온 삶의 지혜입니다. 과학으로 멋진 도시를 만들 수 있습니다. 종교는 멋진 도시에 사랑의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우주에 있는 모든 것들을 구성하는 원자들을 연구하였습니다. 이 원자들은 모여서 분자가 되고, 분자들은 또 모여서 우리 주변의 모든 것들이 됩니다. 어떤 것들은 생명체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변화하고, 우리 눈에는 사라지는 것 같지만 우리의 몸을 구성했던 모든 분자, 원자들은 없어지지 않고, 또 다른 형태를 이루게 된다고 합니다. 현재까지 밝혀진 100여 개의 원자들이 모여서 형태를 이루고, 생명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가능하게 하는 분을 우리는 하느님이라고 합니다. 불교는 살아 있는 생명체는 그 행위에 따라서 또 다른 생명체로 태어난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윤회’라고 합니다. 교회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는 삶을 이야기합니다. ‘온 마음과 온 정성과 온 열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유한한 몸은 변화하고, 생명의 불꽃은 꺼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준다고 믿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고 있습니다.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립니다.”
오늘 의 성인
성녀 크리스티나(Saint Christina)
신분 : 동정 순교자
활동지역 : 페르시아(Persia)
활동연도 : +연대미상
성녀 크리스티나는 페르시아의 처녀로 채찍에 맞아 순교하였다.
성녀 에우프라시아 (Euphrasia)
활동년도 : 382-412년
신분 : 동정녀
지역 :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같은 이름 : 에우쁘라시아, 에우프라씨아, 유프라시아
콘스탄티노블 출신인 그녀가 일곱 살 때, 그녀의 홀어머니가 중부 에집트의 타베니시에 살도록 하였다.
소녀 때 그녀의 소망은 동정생활을 하는 공동체에서 지내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성취되어 그녀는 수녀생활을 할 수 있었다.
어머니가 사망하자 그녀는 남은 유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세속과 인연을 끊어버렸다.
그러나 자신이 사는 공동체의 내부 일이 너무나 힘이 들어서 뛰쳐 나오려는 유혹에 수 없이 직면할 때마다, 그녀는 일주일 내내 음식을 입에 대지 않는 등의 온갖 고행을 통하여 이를 극복하였다.
그녀는 이런 노력으로 보여주는 인내심으로 인하여 동료들로부터 위대한 성녀로높은 존경을 받으며 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