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명상
부처님의 삶을
따르는 이들이 불자佛子
글 무상법현(無相法顯) 스님
서울 열린선원 선원장
평택 보국사 주지
일본 나가노 아즈미노시 금강사 주지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처럼>, <그래도,가끔> 지은이
뜨거운 햇빛, 지리한 장맛비 속에서도 좋은 생각으로 살아가십시다. 늘 좋은 일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욕심의 세상(欲界)에 태어난 중생에게 그리 많은 복이 주어지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는 욕심의 세상은 물론이고 물질(色界)과 정신의 세상(無色界)마저도 벗어나기를 희망합니다. 벗어난 그 곳에 도착하기를 희망하고 나아갑니다. 어두운 밤길을 걷는 이는 불빛(燈明)을 의지해서 걸어갑니다. 파도치는 물길을 헤치는 이는 배(船)를 타고 건너갑니다.
우리 불자들은 ‘왜 불교를 믿느냐? 왜 사찰에 다니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대개 ‘그냥..편해서..강
요하지 않아서..’라는 말로 얼버무리기 일쑤입니다.
강요하지 않고 편해서 그냥 믿고 다닌다는 말도 불교의 한 특성을 담은 표현이기에 그르다고는 할 수 없으나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조금 분명한 견해를 가지고 스스로를 다지고 이웃에게도 설명해주었으면 바램을 가져봅니다. 법문 주제를 ‘부처님의 삶을 따르는 이들이 불자(佛子)’로 정한 까닭입니다.
아시다시피 다이아몬드, 금, 은, 진주...등의 보배는 빛이 나며 귀한 것이며 그것이 오래 가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냥 돌보다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이며,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것이며, 비싸게 돈을 주고도 사고 싶은 것이며 많은 돈을 주어야만 넘기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보배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온 세간을 두루 빛내시는 존재가 있으니 그들을 세 보배 즉 삼보(三寶)라고 부르며 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부처님과 가르침과 스님들을 3보라고 부릅니다.
어둔 밤길을 갈 때 무엇을 의지해야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달할 것인가? 풍랑으로 험한 바닷길을 갈 때도 무엇을 의지해야 살아서 목적지인 섬(洲) 또는 뭍(洲)에 도착할 것인가? 바로 등불(燈明)과 배(船,舟)를 의지해야 합니다. 생사의 밤길을 밝히는 등불과 고통의 사바세계를 건너는 배가 바로 우리가 반드시 의지해야할 길잡이 삼보(三寶)인 것입니다.
삼보 가운데서도 으뜸인 불보(佛寶) 즉 부처님에 대해서 부처님 가르침을 담은 경전의 말씀을 통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같이 그 분 세존께서는 모든 번뇌 떠나신 아라한[응공:應供] 완전히 깨달은 분[정등각:正等覺] 명지와 실천을 구족한 분[명행족:明行足] 피안으로 잘 가신 분[선서:善逝] 세간을 잘 알고 계신 분[세간해:世間解] 사람을 잘 길들이는 가장 높은 분[무상사조어장부:無上士調御丈夫] 신(하늘사람)과 인간의 스승[천인사:天人師] 깨달으신 분[불:佛] 세상에서 존귀하신 분(세존:世尊)이십니다.“ 많이 읽고 들으셨겠지만 이 말씀은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엮은 『상윳따니까야』의 1권에 실린「깃발경(다작가숫따)」에 담겨있는 말씀입니다.
『상윳따니까야』는 부처님 당시의 구어(口語)인 빠알리어로 된 경전묶음 가운데 주제별로 묶은 가르침 또는 가르침의 제목과 내용이 서로 상응하는 것들의 묶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깃발경(다작가숫따)」은 당시 민간이나 종교계에서 믿음직한 언덕과도 같아서 기댈만한 것을 깃발(旗幟槍劍)이라고 하였는데 부처님은 깃발을 믿고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으니 부처님을 의지하라고 가르치시는 경전입니다. 어느 누구의 깃발이라고 하더라도 약간의 의지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궁극적인 의지처가 되지는 못하니 궁극적인 의지처로서 안심과 안식을 얻을 곳은 오직 부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바로 앞에서 말씀하신 부처님은 아홉가지 덕(世尊九德:Bhagava 9 guna) 또는 열 가지의 덕(如來十號)을 가지셨기 때문이라고 이 경전에서 말씀하십니다. 물론, 이 경전 말고도 여러 곳에서 정형구처럼 아홉 가지 덕이 나옵니다.
세상에서 또는 다른 종교에서는 두려움과 무서움이 닥쳐올 때 깃발을 의지하라고 말하는데 그래서야 안정이 찾아오겠느냐는 것입니다. 그저 덩치 큰 장수의 깃발 뒤에 숨어서 일시적인 안정을 얻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훌륭하신 부처님(世尊)의 덕을 칭송하고 암송함으로써 두려움과 털끝이 서는 듯한 무서움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존의 9덕이라고 하며 대승불교에서는 여래 10호라고 합니다. 한국불교에서 돌아가신 분들을 천도하는 시식(施食) 등 여러 법회에서 염송(念誦)하는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첫 번째는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번뇌를 떠나 공양할만한 분 즉 아라한이시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바르고 평등하고 완전하게 깨달으신 분 즉 정변지라는 것입니다. 이는 ‘삼마삼붓다’라고 발음합니다.
셋째는 나의 과거 전생과 남의 미래 그리고 그것들을 모르게 하고 중생의 삶을 살게 하는 번뇌(漏)가 다하는 세 가지의 밝음(宿命明,天眼明,漏盡明의 3明)을 얻고 이를 실천함이 갖춰진 분입니다.
넷째는 번뇌를 지닌 이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땅 사바세계에서 수행을 잘하여 평화와 인식이 있는 깨달음의 저 땅으로 잘 가신 분입니다.
다섯째는 과거 현재 미래의 3세(三世)와 욕심세상(欲界),물질세상(色界),정신세상(無色界)의 3계(三界)의 합성어인 세계(世界)와 그 세계에 살고 있는 중생들의 삶을 잘 이해하는 분입니다.
여섯째는 아주 힘이 약하고 어리석은 이부터 힘이 세고 똑똑한 장부에 이르기까지 누구라도 인도
하고 통제하지 못하는 이가 없는 분입니다.
일곱째는 하늘의 신(神)과 인간의 스승이 되는 분입니다.
여덟째는 깨달으신 분입니다.
아홉째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분입니다.
이렇게 부처님은 확고한 덕성을 가진 훌륭한 분이기 때문에 그 분의 이름을 부르고 기대면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안심하고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말로 하면 무섭고 힘이 들거나 두려운 생각이 나면 괜히 힘들어하거나 부적이나 바람직하지 않은 신앙을 들먹이면서 헛수고를 하지말고 “여래 응공 정변지 명행족 선서 세간해 무상사 조어장부 천인사 불세존”하고 여러 번 외칩니다.
아니면 빠알리어를 번역한 말로 “그 분 세존께서는 모든 번뇌 떠나신 아라한[응공:應供] 완전히 깨달은 분[정등각:正等覺] 명지와 실천을 구족한 분[명행족:明行足] 피안으로 잘 가신 분[선서:善逝] 세간을 잘 알고 계신 분[세간해:世間解] 사람을 잘 길들이는 가장 높은 분[무상사조어장부:無上士調御丈夫] 신(하늘사람)과 인간의 스승[천인사:天人師] 깨달으신 분[불:佛] 세상에서 존귀하신 분(세존:世尊)이십니다.”라고 외웁니다.
아니면 빠알리어 그 발음 그대로 “이띠 삐 소 바가와 아라항 삼마삼붓도 윗자짜라나삼빠노 수가또 로까위두 아눗따로 뿌리사담마사러띠 삿타 데바마 눗사남 붓도 바가와 띠”하고 여러번 암송합니다. 그러면 두려움이 사라지고 편안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나를 믿으면 된다’고. ‘나를 따르면 된다’고. 그러나 그것은 효과가 없거나 부족하거나 정확하게 입증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덕을 칭송하면 분명한 효과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래는 (번뇌를 없앤) 아라한이시며, (올바르게 깨달으신)삼마삼붓다이시고, 탐욕에서 떠나고 분노에서 떠나고 어리석음에서 떠나서 두려움이 없고 전율이 없고 불안이 없고 비겁함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십니다.
부처님 당신이 (번뇌를 없앤)아라한이시며, (올바르게 깨달으신)삼마삼붓다이시고, 탐욕에서 떠나고 분노에서 떠나고 어리석음에서 떠나서 두려움이 없고 전율이 없고 불안이 없고 비겁함이 없기 때문에 두려울 때 여래의 덕을 소리 내어 칭송하고 염송하면 두려움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나나 우리 가족이 또는 이웃이나 벗님네가 두려움에 떨 때 우리는 우리가 따르는 부처님의 덕성이 오롯이 배어있는 부처님의 열 가지 별명 또는 부처님의 아홉 가지 덕성을 끊임없이 염송하면 스스로가 그 덕성에 감화를 입어 두려움에서 벗어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쓸데없는 힘의 상징인 깃발이나 바람직하지 않은 가르침을 지닌 종교 등을 의지해서 마음을 헛되이 쓰고 시간을 버리면서 결국은 몸과 마음을 어렵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따름으로써 우리 스스로가 그 덕성을 배우고 익히며 마음의 불안감이나 두려움이 없이 당당하게 삶을 살 수 있으며 이웃에게도 부처님의 따스한 덕을 나누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처님의 삶을 따르는 것입니다. 성불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