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대표적인 별미로 ‘조방낙지’를 꼽는 이들이 많다. 상당수 부산사람은 매콤한 것이 당길 때면 조방낙지가 떠오른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부산의 젊은이들 가운데에도 조방낙지의 ‘조방’이 어디에서 나온 말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다.
‘조방’은 일제가 목화의 재배와 매매, 면사방직, 판매를 목적으로 100년 전인 1917년 부산 범일동 일대에 세운 ‘조선방직주식회사’를 말한다. 대지 8만평 위에 세운 이 공장은 일본자본이 부산에 세운 가장 큰 공장이자 국내 최대기업으로 식민지 노동약탈의 상징이었다. 일본인들은 한국에서 생산한 면화를 싼값에 사들이고 싼 노동력을 이용해 옷감을 만들어 비싼 값에 되팔아 많은 이윤을 남겼다.
조선방직은 1920년대에 직공수가 3200명이나 됐고 열악한 노동환경 때문에 노동쟁의가 자주 일어났다. 1922~23년 1년 동안 6차례의 대규모 파업 투쟁이 벌어졌다. 12시간이 넘는 혹독한 노동시간과 낮은 임금 때문이었다. 1930년 1월에는 임금 30전을 80전으로 인상할 것, 하루 8시간 노동제 실시, 작업 중 부상자 치료비 부담 등을 요구하며 3000여 명이 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이 파업은 1930년대 일제타도와 반제운동으로 발전했고, 다른 공장에도 영향을 줘 영도의 조선소를 비롯해 각 정미공장, 고무공장 등의 노동쟁의에 영향을 끼쳤다. 일제 때 조방 앞 낙지볶음 집에서 노동자들은 낙지볶음과 함께 술 한잔으로 하루의 피로를 풀었고 이 것이 훗날 조방낙지의 시작이 됐다.
광복 후에도 조선방직은 한국 최대 면방직회사였지만 한국전쟁이후 사주의 잦은 교체와 경쟁업체의 급속한 생산력 신장에 따라 경쟁력을 잃고 1969년 부산시가 인수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부산시민회관, 아파트, 자유시장, 평화시장, 호텔, 예식장 등이 들어섰고 1980년대까지는 시외버스터미널도 위치해 조방은 부산의 유통·교통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시외터미널과 신발·섬유업체들이 이전하고 폐업하면서 상권도 가라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