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파불교(部派佛敎, 영어: early Buddhist schools)는 고타마 붓다가 반열반에 든 후 제자들 사이에 견해의 차이가 생겨 불멸 후 100년 경에 보수적인 상좌부(上座部)와 진보적인 대중부(大衆部)로 분열되고, 이어서 이 두 부파(部派: 종파)로부터 여러 갈래의 분열이 일어나 불교가 여러 부파로 나뉘면서 전개되었던 시대의 불교이다.[1][2]
부파불교는 시기적으로는 원시불교(原始佛敎, pre-sectarian Buddhism) 이후의 시기를 뜻하는데, 대승불교가 서력 기원 전후에 발생한 후에도 부파불교의 부파들 중에는 대승불교의 종파들과 함께 시대적으로 나란히 활동했던 부파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세친(316~396)은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에서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로 전향하였다. 그가 설일체유부의 논사였을 때 저술하였던 《아비달마구사론》은 설일체유부의 교학의 강요서인데, 그는 부파불교의 경량부의 학설 등을 이용하여 비판적으로 설일체유부의 교학을 집대성하였다. 즉, 이 때까지도 부파불교의 부파들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으며, 또한 세친의 시대보다 200여년 후의 인물인 현장(玄奘: 602~664)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 따르면 그가 인도로 유학을 갔을 때도 여전히 정량부(正量部, 산스크리트어: Saṃmitīya) 등의 부파불교의 부파들이 상당한 세력으로 존재하고 있었다.[3]
고타마 붓다가 반열반에 든 후 그의 제자들은 스승의 인격에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의 노력에 의지하라는 자등명(自燈明: 자신을 등불로 삼으라)과 남겨진 가르침(법)에 의지하라는 법등명(法燈明: 법을 등불로 삼으라)의 유훈에 따라 고타마 붓다가 남긴 교법을 결집하여 경장과 율장을 편찬하였다. 이 뿐만 아니라, 제자들은 그 교법(특히, 사성제)을 깊이 연구 해석하여 여러 경전들에 나오는 불교의 이론과 실천 양면을 망라하여 이들을 체계화한 방대한 논서(Abhidharma-sastra, 아비달마샤스트라)들을 작성하였는데, 이러한 이유로 부파불교를 한편으로는 아비달마불교(阿毘達磨佛敎)라고도 한다.[4]
서력 기원 전후에 새로운 대승불교(大乘佛敎)가 일어나게 되자 대승불교도들은 그때까지의 부파불교를 소승불교(小乘佛敎)라고 폄하하여 칭하였다.[2]
불교 전통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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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불교 전통의 성립과 발전 (기원전 450년경부터 기원후 1300년경까지)v • d • e • h
450 BCE 250 BCE 100 CE 500 CE 700 CE 800 CE 1200 CE
인도
원시불교
부파불교 대승불교 밀교·금강승
스리랑카 ·
동남아시아
상좌부 불교
중앙아시아
그레코 불교
티베트 불교
비단길을 통한 불교 전파
동아시아 ·
한·중·일
천태종 · 정토종 · 일련종
밀교 · 진언종
450 BCE 250 BCE 100 CE 500 CE 700 CE 800 CE 1200 CE
범례: = 상좌부 불교 전통 = 대승불교 전통 = 밀교·금강승 전통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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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결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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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의 본문은 제1회 결집입니다.
고타마 붓다가 반열반에 든 후 다음 해에 마하가섭의 주재로 왕사성 밖의 칠엽굴(七葉窟)에서 제1회 결집이 열렸다. 아난(阿難)이 경(經)을 독송하고 우바리(優婆離)가 율(律)을 송출(誦出)하여, 원시불교의 기본 경전과 계율이 확립되었다. 아난이 독송한 경은 후대에 《아함경(阿含經)》이라고 불리게 되었다.[5]
대중부의 전승에 따르면, 제1회의 칠엽굴(七葉窟)에서의 결집에 참여하지 못한 여러 승려들은 부루나(富樓那)의 주재로 굴외결집(窟外結集)이라는 것을 열어 이의를 제기하였는데, 이와 같이 불교 교단의 밑바닥에서는 신구의 두 경향이 대립하였다.[6] 굴외결집에 의해 형성된 경전을 잡경(雜藏)이라 하였으며, 이 가운데는 대승 불교 경전의 전신(前身)이 된 《방광경(方廣經)》이 있었다.
제1회 결집 자체가 열린 적이 없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7][8]
제2회 결집과 근본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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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의 본문은 제2회 결집입니다.
고타마 붓다의 입멸 후 약 100년이 지나게 되자 계율에 대해 새로운 견해를 주장하는 비구들이 있어 논쟁이 일어났다.[9] 스리랑카의 편년체 역사서이자 남방불교의 자료인 《도사(島史 · Dipavamsa)》와 《대사(大史 · Mahavamsa》에 따르면, 동부 비구 승단에 속한 와지족의 비구가 계율에 대한 새로운 열 가지 안("십사 · 十事")을 승인해 줄 것과 이에 따라 계율을 수정할 것을 주장하였다.[10]
이에 인도 서부 마유라(摩偷羅)국의 비구였던 야사(耶舍)는 인도 동부와 서부의 700명의 장로(長老: 상좌 · 上座라고도 함)를 초청하여 바이샬리(Vaisali · 비사리 · 毗舍離)에서 제2회 결집을 열어 주로 율장(律藏)을 편집하고 교단의 통제에 힘을 기울였다.[11]
제2회 결집은 칠백결집 또는 비사리 결집이라고도 한다. 제2회 결집에서 동부 비구 승단이 주장하는, 계율에 대한 열 가지 새로운 견해("십사 · 十事")가 잘못된 것이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것을 십사비법(十事非法)이라 부른다. 제2회 결집 당시에는 분열이 발생하지 않았으나, 남방불교에 대한 자료인《도사(島史 · Dipavamsa)》 등에 따르면, 그 후에 제2회 결집의 결정에 불복한 진보적인 동부 승단의 비구들이 1만명의 다수인을 모아 독자적인 결집을 열어 계율을 수정하였다. 이를 대결집(大結集)이라 부르는데 이들은 보수적인 상좌부(上座部)로부터 이탈하여 대중부(大衆部)를 형성하였다.[11]
이와 같이 불교 교단은 계율에 대한 의견 차이에서 보수적인 상좌부(上座部, 산스크리트어: स्थविरवाद Sthaviravāda 스타비라바다, 팔리어: Theravāda 테라바다)와 진보적인 대중부(大衆部, 산스크리트어: महासांघिक Mahāsāṃghika 마하상기카)의 둘로 분열되었다. 이를 근본 분열(根本分裂) 또는 근본이부 분열(根本二部分裂)이라 하며 상좌부와 대중부를 근본이부(根本二部)라 한다.[6] 근본 분열을 계기로 인도 불교는 부파불교의 시대로 들어가게 되었다.[10]
한편, 근본 분열의 발생 계기에 대해서, 북방불교의 자료에서는 위에 기술된 남방불교의 내용과는 달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현대의 학자들은 남방불교의 자료가 사실인 것으로 보고 있다.[10]
《이부종륜론(異部宗輪論)》을 포함한 북방불교의 자료들에 따르면, 불멸(佛滅) 후 100년경 아소카왕의 치세 때, 마하데바(Mahadeva · 대천 · 大天)라는 진보파 비구가 교의에 관한 다섯 가지의 새로운 안을 주장하며 그것을 승인해 줄 것을 교단에 요구하였는데, 이 다섯 가지 안을 대천오사(大天五事)라 한다. 대천오사에 찬성하는 진보파의 대중부(大衆部)와 이에 반대하는 보수파의 상좌부(上座部)로 양분되었다.[9][10]
부파의 성립과 지말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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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이부의 분열이 가져온 분열의 기운은 교리상의 견해, 지도자간의 대립, 지리적 조건 등으로 인하여 더욱 심화되어 붓다의 입멸 후 약 200년 뒤에는 대중부 계통으로부터, 그리고 그 뒤에 이어서 상좌부 계통으로부터 교단의 파생적인 분열이 촉진되었다.[12] 이에 따라 서력 기원을 전후하는 시기에는 총 18-20개 정도의 부파가 형성되었다.[13]
《이부종륜론(異部宗輪論)》 등의 북방불교의 자료에 따르면, 근본분열 후 약 200년 동안에 걸쳐 상좌부와 대중부 모두에서 부파적 분열이 거듭되어 총 18부로 나뉘었는데 이것을 지말분열(枝末分裂)이라 한다.[6] 근본분열에 의한 근본이부와 지말분열에 의한 18부를 합하여 총 20부의 부파를 소승20부(小乘二十部)라 한다.[6] 그 후 기원 전후에 새로운 대승불교(大乘佛敎)가 일어나게 되자 대승불교도들은 그때까지의 부파불교를 소승불교(小乘佛敎)라고 폄하하여 칭하였다.[2]
부파불교의 부파들
부파불교의 성격
각주
참고 문헌
같이 보기
InternetArchiveBot님이 12개월 전에 마지막으로 편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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