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한 종
한 달이 지났는데 아직도 가황(歌皇) 나훈아의 말이 귓가에 맴돈다. “국민을 위해 목숨 건 왕이나 대통령을 본 적이 없다. 나라를 지킨 건 우리 국민이었다.” 코로나로 지친 국민에게 힘을 북돋워 주려고 정치인을 에둘러 비판한 걸까. 왕이나 대통령은 몰라도, 국민을 위해 목숨 건 지도자는 많았다. 하지만 요즘 일부 정치인 하는 짓이 실망스러워 그의 말을 노랫말과 함께 곱씹곤 한다.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힘들다고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코로나 때문만이 아닐 게다. 경제는 어둡고 정치는 갑갑하다. 이를 풀어줄 국민의 공복(公僕) 같은 정치지도자는 어디 없을까. 정치지도자가 국민을 보살펴야 하는데, 국민들이 지도자를 걱정해야 할 것 같다.
누구나 지도자가 될 수 있고, 어느 면에서는 누군가의 지도자이기도 하다. 가정에서 부모로, 교회에서 봉사자로, 일터에서 자신의 일을 이끄는 사람으로 지도자 역할을 한다. 능력은 제쳐놓고, 인성 면에서 지도자는 어떤 자세를 지녀야 할까. 몇몇 정치지도자들의 행태는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을 만하다. 두드러진 문제점을 꼽아본다.
첫째,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 모든 일에는 어느 정도 장점과 단점이 같이 있기 마련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고집을 추진력으로 아는 걸까. 자기 생각만 말하니 소통이 될 리 없다. 불통이 심해지면 국민들은 무관심해지거나 포기한다. 상대를 인정해야만 자신도 인정받을 수 있다.
둘째, 잘못을 저지르고도 사과하지 않는다. 잘못을 인정하면 잘못이 커질까 봐 전략적으로 우기는 걸까. 용기가 없는 걸까. 민망한 상황을 애써 외면하거나 아예 숨어 버린다. 국민들에게 용서할 기회를 드려야 하지 않을까. 사과할 줄 모르는 지도자는 회개할 줄 모르는 불쌍한 인간이다.
셋째, 남 탓한다. 그르친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전임자나 다른 이에게 덮어씌운다. 국민들의 따가운 눈길을 남에게 돌려 자신의 허물을 감춘다. 프레이밍(Framing)을 다른 쪽에 맞추는 속임수다. 재주를 부려 비난을 모면할지는 몰라도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가슴 치며 통회해야 한다. “제 탓이오. 제 탓이오. 제 큰 탓이로소이다.”
넷째, 뻔한 거짓말을 당당히 한다. 그것도 반복적으로 한다. 거짓말한다고 따지면 눈을 부라리며 목소리를 높인다. 우기다 보면 결국 믿게 된다고 믿는 걸까. 거짓말 증거가 드러나면 말장난으로 넘긴다. 국민을 얕잡아보지 않고서는 그럴 수가 없다. 거짓말은 믿음을 무너트린다. 믿음을 주는 지도자라야 국민이 따른다.
마지막으로, 자기편만 바라본다. 지도자는 무릇 모두의 지도자여야 한다. 특정 집단의 두목이 아니다. 정치인 팬덤(Fandom) 현상이 심해졌다. 무조건 따르는 무리에 기대어 힘을 뽐내지만, 그릇이 작음을 보여줄 뿐이다. 지지하는 분들에게 영합하지 말고, 올바르게 이끌어 드려야 도리 아닌가. “나를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분들도 사랑해주십시오”
이런 허물들은 국민을 높이 받들고 섬기면 드러날 리 없다. 국민을 우습게 알고 목을 뻣뻣하게 세우다가 저지르는 잘못이다. “권위는 겸손에서 나온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이다. 예수님은 목숨을 바쳐 인간을 섬긴 겸손한 지도자다. 국민이 바라는 지도자는 ‘겸손한 종’이 아닐까. 글을 써 놓고 보니 나 자신도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