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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 있는 신앙 만들기4-성령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
요4:23-24, 2001.1.28, 박홍섭 목사
언젠가 급하게 사야 할 물건이 있어서 오전에 백화점을 찾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때까지 백화점이 오전 10시 30분이 되어야 문을 여는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가서 보니 아직 개점을 안 한 거예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아직 백화점이 오픈하지도 않았는데 꽤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문을 열기만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시계를 보니까 30분 이상이나 시간이 남아 있는데도 거기 모인 사람들은 추운 날씨에도 줄을 서서 오픈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유인즉 그 날이 그 백화점의 바겐세일 첫날이며 일찍 오는 사람에겐 기념품도 준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바겐세일 첫날 싼 값에 좋은 물건 사려는 목적과 또 백화점 측이 내 건 기념품이란 것을 받기 위해서 그 추운 날씨에도 일찍 나와 오픈하기만 기다린 것입니다. 순간 저에게 물밀 듯이 밀려오는 소망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 교인들이 예배드리러 올 때에 이런 현상이 벌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30분전에 나와서 기도로 예배를 준비하는 사람이 교회를 가득 채우고....예배드리는 시간을 기다리다 못해 사모하는 사람들이 줄을 서고...
그 날 이후로 저의 이런 바램과 소망은 예배 시간 10분전에 나와서 기도로 준비하는 사람들보다 오히려 매 주일 10분 이상 늦게 오는 예배자들이 훨씬 많은 현실을 보면서 무참하게 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날 아침 저의 그 소망이 얼마안가 여러분들에 의해 이루어 질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오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배야말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영적인 상태와 그 공동체의 영성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바로미터라는 사실입니다. 한 교회는 자신의 영적 수준을 능가하는 예배를 드릴 수 없으며 그 교회의 예배에 참여하는 신자들은 자신들이 드리는 예배 이상의 삶을 사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개인과 공동체의 신앙 수준은 그들이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가장 정확히 드러나며 그들이 드리는 예배의 질이야 말로 그들의 삶의 수준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부러 저에게 목사님 지금 저의 신앙상태가 이러합니다....혹은 지금 저의 삶의 모습이 이러합니다 라고 상세하게 말하지 않아도 예배드리는 여러분의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의 영적인 상태와 그 분의 삶의 질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배드리는 그의 모습을 통하여 그의 신앙과 그의 삶이 투영되기 때문입니다.
불과 2-30년 전만 해도 목회자들은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일 날 두시간 예배드리고 가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다 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그러나 요즘은 어떻게 말합니까? 성도여러분, 일주일에 한 시간 예배드리는 것이 전부가 되면 안됩니다. 과거에 비하면 이 시대의 교인들은 공적인 예배에 드리는 시간은 현저하게 짧아졌습니다. 어떤 분이 우리 인생을 70년으로 놓고 재미있는 계산을 한 것을 보았습니다. 인생을 70년으로 볼 때 20년은 직장에서 일하면서 보내고, 20년은 잠자면서 보내고, 6년은 먹고 마시면서 보내고, 7년은 쉬면서 즐기면서 보내고, 3년은 남 기다리다가 보내고, 또 1년은 전화통 붙들고 보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데 보내는 시간을 얼마로 계산한지 아십니까? 1년 반 정도로 잡았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아무리 공적 예배를 많이 드린다해도 평생 자신이 남 기다리는 시간에 절반도 안 되는 시간만 공적 예배드리는 시간으로 드려진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매주 주일 낮 예배, 오후예배, 수요예배를 다 드렸을 때의 경우입니다. 그러니까 주일 낮 예배만 드리는 분은 70평생 6개월만 예배드리는 시간에 투자한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도 요즘 교인들이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목사님 예배드리는 시간이 너무 많아요...천국은 밤이나 낮이나 예배하는 곳이라는데 여기서 평생 1년 반정도 예배드리는 것도 힘들어하고 주일 낮 예배, 1시간 20분 정도의 예배도 국경일 기념행사에 강제로 동원되어 그 시간을 억지로 견뎌내고 끝날 때는 해방감에 가득 찬 모습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처럼 예배를 견디고만 있다면 장차 그 사람이 천국가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주께 와 엎드려 경배드립니다.
주 계신 곳에 기쁨 가득 누구와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네
예배드림이 기쁨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드렸던 이 찬양대로 성령이 역사 하는 정상적인 예배는 그러합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예배입니다.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예배입니다. 온 우주의 왕이실 뿐더러 나를 지으시고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몸을 버려 나를 구원하셨던 주님과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죽이기까지 하시면서 나를 사랑하셨던 하나님과의 만남의 시간이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예배하지 않는 사람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시간이 백화점 세일만큼이나 가치가 없으며, 그의 삶에 미치는 예배의 영향력이 거의 실종된 사람들에게 예배 시간은 기쁨과 감동이 아니라 고문의 시간입니다. 특히 설교시간은 그 고문의 절정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예배는 말 그대로 예배 견디기입니다. 졸엄과 무관심, 냉담함과 아무 기대감이 없는 마음, 딴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마음, 이런 모든 것들은 예배드리는 모습이 아니라 예배를 견디는 모습입니다. 견디는 형태도 다양합니다. 그냥 멀거머니 강단을 응시하는 딴 생각파, 주보에 밑줄을 긋고 교정까지 하면서 읽는 주보읽기파, 예배시간 내내 조는 수면파, 옆 사람과 쪽지로 대화하는 쪽지파, 예배 후에 있는 회의 준비하는 회의파, 예배시간 내내 성경읽기로 시간 때우는 실속파, 심지어 소곤소곤 말하기도 하는 소근파, 이 모든 모습은 예배의 기쁨과 감동을 잃어버린 불쌍한 영혼들의 예배 견디는 모습들입니다.
저는 오늘 이 시간 우리 모두가 본문을 통하여 이 모든 예배의 타성들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이 어떤 자들을 찾고 있는지 말씀하시는 그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들이 바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자를 찾고 있습니까? 예배하는 자입니다. 그것도 그냥 예배하는 자가 아니라 이렇게 예배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예배하는 자가 어떤 자들입니까?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돈 많은 자를 찾고 있지 않습니다. 지식 많은 자를 찾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적으로 유능하고 실력있고 재치있고 힘있는 자를 찾지 않습니다. 가난한 마음으로 나아와 하나님을 갈망하면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시냇물을 찾기에 목마른 사슴과 같이 예배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길 사모하고 그리워하는 성도들을 찾고 계십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을 마치 영혼의 큰 재앙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예배를 갈망하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왜 찾으십니까?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하나님의 생수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공급해주기 위해서입니다. 놀라운 믿음과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을 이길 힘과 감동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지금 종교적으로 많은 예배가 행해지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거짓 그리스도인이 있는 것처럼 헛된 예배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이 없는 가운데 우리자신의 종교적인 욕구나 만족시키는 예배가 되고 있다면 그 예배는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참된 예배는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세상을 변화시키러 나아가는 영적인 군사의 결의에 찬 모습이 있게 만듭니다. 올 때는 비록 패잔병 같았으나 교회를 떠날 때는 예배를 통하여 새로운 힘을 얻고 자신의 죄를 참회하며 이제는 주의 뜻대로 살아야지 하는 믿음의 결의를 다지고 “하나님 오늘 깨달은 말씀대로 오늘 내가 드렸던 찬양대로 이 어두운 세상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이 참된 예배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예배의 결과입니다. 참된 예배는 언제나 예배를 통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며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죄를 깨달으며, 예배 중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진리를 붙들고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며 승리할 거룩한 능력을 공급받게 합니다.
죄인들의 굳은 마음들이 하나님의 성품에 감동 받는 시간이 언제입니까? 바로 예배시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누구인지 깨닫는 겸비함이 있고, 자신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에 얼마나 부적합한 존재인지를 아는 자기 인식과 회개가 일어나는 시간이 언제입니까? 하나님께 예배하는 시간입니다. 어둠 속에 살아가던 사람들이 진리의 참 빛을 붙들고 거룩한 뉘우침과 돌이킴 속에서, 다시 한 번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신적인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발견하고 삶의 모든 소망을 자신에게 두지 않고 오로지 자비로우신 하나님께만 두게 만드는 시간이 언제입니까? 바로 예배시간입니다. 뿐만 아니라 남은 자신의 생애를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겠다는 거룩한 결단이 생기는 때가 언제입니까? 바로 예배드리는 시간입니다. 사랑 없이 고통받으며 신음하던 사람들을 위하여 눈물 한 방울 흘릴 수 없었던 굳고 굳은 마음의 소유자들이 하나님 사랑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애통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살을 내어놓는 시간이 언제입니까?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예배시간입니다. 하나님은 구속받은 성도의 죄악 된 본성을 예배를 통해 바꾸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예배가 자신의 영혼에 아무런 변화나 영향을 주고 있지 못하다면 그것은 대단히 큰 문제입니다. 거기에서 어떻게 성도의 성도 됨이 드러날 수 있으며 교회의 교회 됨을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반면에 만약 그리스도인이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경험하고 만날 수만 있다면 그는 어떤 시대를 산다해도 시대를 이기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수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과 실제의 세상살이가 너무나 다르게 되어 있을까요? 왜 주일의 모습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모습이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늘어가는 것일까요? 왜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너무나 쉽게 이원론적인 삶에 빠져드는 것일까요? 이 모든 어리석음은 모두 예배 속에 살아 계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경험하지 못하고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떤 예배가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늘로부터 임하는 생명과 은총을 공급받는 참된 예배일까요? 오늘 주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바로 그런 예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헬라어 성경은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자들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어성경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in spirit and in truth....참된 예배는 장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산이냐 저 산이냐가 아닙니다. 자기 예배당이냐 전세냐 월세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참된 예배는 방식의 문제입니다. 어디서가 아니라 어떻게가 문제입니다.
성령과 진리안에서 드려지는 예배는 인간이 연출하는 예배가 아닙니다. 최선을 다해 예배를 준비해야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배 가운데 임하시는 성령의 은혜를 사모하는 태도가 더 중요합니다. 오늘 내가 드리는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임하게 해달라는 간절한 소망으로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예배,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된 예배자와의 그 좁힐 수 없는 무한한 간격을 이어주는 유일한 원천이 되시는 성령하나님의 교통하심이 우리 예배 가운데 있게 해달라는 열망과 사모함이 있는 예배, 그 예배가 바로 성령안에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성령안에서 드리는 예배란 곧 성령이 역사하는 예배입니다. 성령이 역사하실 때 그 예배는 성령안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는 예배자들의 영적인 상태를 하나님 앞에서 직시하게 만듭니다. 다시 말하면 예배자들이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죄에 대해서 돌아서고 싶은 거룩한 열망을 가지게 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예배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예배를 통해 예배자들이 죄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예배가 성령 안에서 드려지지 못하고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예배자들이 예배 가운데 자기 죄를 깨닫지 못하면 그만큼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갈망도 하찮게 됩니다. 성령이 예배 가운데 함께 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가 있을 때 거기에는 반드시 죄에 대한 자각이 있습니다.
구약의 제사를 생각해 보십시오. 제물인 짐승 위에 손을 얹고 기도할 때 제사장의 선언을 통해 제사드리는 자의 죄가 제물에게로 전가되고, 이윽고 그 제물이 죽어갑니다. 제사 속에서 죽어가던 양을 상상해 보십시오. 하얀 양들이 그 털을 시뻘건 피로 물들이며 비명소리에 죽어가고 사지가 잘리며 온몸이 각떠집니다. 내장이 헤쳐지고 살과 기름이 분해되며 콩팥과 쓸개가 나누어집니다. 짐승들이 죽어가는 그 자리는 한 마디로 피바다입니다.
살아있는 양심과 영적인 예민함을 소유하고 있는 자라면 자기 눈앞에서 그렇게 죽어 가는 제물의 모습 속에서 무엇을 느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죄의 심각함과 구속의 은혜입니다. 죽음을 불러오는 죄, 자신을 그렇게 죽음으로 데려가야 할 죄의 값을 짐승에게 갚으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 이것이 제사 드리는 자들이 제일 먼저 깨닫는 사실이었습니다. 죽임을 당하는 것은 제물이지만 이미 그 아픔은 예배자의 심령깊이 다가왔고 피 어린 통곡과 참회의 눈물로 죽어 마땅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자신은 살수 없는 존재라는 자기 인식으로 다시한번 구속의 하나님을 붙들게 되는 것이 바로 예배의 원형인 구약의 제사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예배의 정신입니다. 정상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현장에서 졸거나 껌을 씹거나 딴 생각을 하며 제사가 끝나기까지 시간이나 때우고 있었을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오늘 많은 사람들이 이미 참회 없이 드리는 예배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비할 데 없는 죄인들이 타락한 세상을 살아가다가 교회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손수건이 필요 없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세상은 점점 악해져 감에도 불구하고 예배 중에 그 악한 세상 속에 살다가 온 성도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식하고 참회하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이 모든 이상한 일의 원인이 무엇일까요? 바로 예배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부재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끊임없이 예배드리면서도 여전히 공의와는 거리가 멀고 삶으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구현하지 못하며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백성으로서 독특한 빛과 맛을 드러내며 살지 못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현실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맛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영이신 하나님 앞에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의 예배가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까? 하나님이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우리와 만나실 때 영적으로 우리를 만나시고 교제하십니다. 하나님과 우리사이의 이러한 영적 교제가 가장 구체적이고 집약적으로 나타나는 때가 언제입니까? 바로 예배입니다. 성령이 예배 가운데 역사 하실 때 그 예배는 사람의 심령에 반드시 중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성령의 교통을 간절히 사모하면서 예배하는 자들에게 성령은 역사 하셔서 이 천년 전에 나무에 매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오늘 우리의 삶과 관계 있게 받아들이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불신하는 사람의 마음에 믿음을 심으시고 냉담한 사람의 마음에 신령한 열심의 불을 지피시는 것도 모두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무수한 예배 속에서 도무지 느낄 수 없었던 하나님의 인격을 경험하고 그분의 성품에 대하여 감격하며 찬송하게 만드는 분도 성령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예배자의 마음에 감화를 주시고 그의 영혼이 변화를 경험할 때 예배드리는 태도는 바뀌고 예배드리는 방식이 변화되며 그의 삶도 변화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인간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신령한 세계를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인격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죄인된 인생간의 거룩한 만남이 이루어져야 하는 예배야말로 마땅히 성령이 역사 하시는 가장 큰 주무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아무런 감화가 없고 영혼의 변화가 없는 예배가 오랜 세월 동안 지속되고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갈급함을 느끼기는커녕 구태의연한 자기 만족으로 예배에 임하고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살아 있는 예배는 반드시 침묵 이상의 어떤 사건을 동반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에 침묵을 능가하는 신령한 영적인 권세가 하나님과 설교자, 설교자와 교인, 교인과 예배순서 사이를 지배하고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 예배를 드리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우리의 연약함과 죄성을 드러내고 한없이 가난한 마음으로 성령의 은혜를 사모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그렇게 하나님만 바라보는 예배, 성령의 교통하심을 갈망하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기대하는 마음과 사모하는 심령으로 드려져야 합니다.
말씀을 증거하는 설교자로 하여금 하나님께 사로잡히도록 만들어주고 그로 하여금 자신이 선포하는 말씀에 매이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주는 신적인 강제력의 기원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무엇을 통해서 설교자는 남의 말하듯이 설교하지 아니하고 진실을 규명하고자 하는 처절한 증언자의 심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됩니까? 하나님의 장 중에 사로잡힌 설교자의 메시지에 대하여 신실함과 사랑으로 어우러진 교인의 감격적인 반응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불신앙으로 가득 찬 냉담한 무리들의 마음에 믿음을 불러일으키고 좌절과 패배로 가득한 사람들의 마음을 소망으로 가득 차게 하는 원동력이 무엇입니까? 예배자의 마음을 지배하던 세속적인 욕망과 더러운 탐심을 축출하고 하늘의 거룩한 은혜로 충만해지도록 만드는 분이 누구입니까? . 지난날의 상처와 오늘날의 고난으로 억눌렸던 사람들의 영혼을 자유하게 하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이야말로 이 같은 모든 변화의 유일한 조건입니다.
오직 성령만이 죽음의 침묵이 무겁게 깃들인 교회당을 뒤흔들어 생명의 함성이 가득 차게 만드실 수 있으며 마른 뼈와 같은 자들을 일으키셔서 함성을 지르는 군대와 같은 교인들로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예배할 때 어떤 예배자들은 기쁨 때문에 어떤 예배자들은 죄에 대한 애통함으로 눈물이 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아니고서는 한 주 동안을 험악한 세상 속에서 오직 믿음으로 싸워 이겨야겠다는 결의와 함께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며 교회당을 나서는 일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예배 가운데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넓은 의미의 예배인 엿새 동안의 삶에서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며 이렇게 실패한 삶 때문에 주일에 드리는 좁은 의미의 예배가 더욱 답답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믿음을 가집시다. 그리고 우리의 예배가 이런 영으로 드리는 예배, 성령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이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예배가 되기를 사모합시다. 지금 우리에게 우리의 예배가 성령 안에서 드려지지 못하도록 막고 우리의 영혼을 무감각하게 만들고 예배에 대하여 아무런 기대감도 가지지 못하게 하는 죄들이 있다면 우리의 죄들을 고백하며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죄로 말미암아 무감각해진 우리의 마음을 씻고 정결한 상태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영향을 받으며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심으시는 바를 체험할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합시다.
우리 한우리교회 가운데 고요한 침묵과 무감각한 예배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며 예배 중에 성령을 통하여 부어지는 하나님의 생명과 은총과 생명을 공급받아 하나님 앞에 우리의 삶들이 회복되며 예배의 영광을 회복되는 축복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교회가 이렇게 성령 안에서의 예배를 회복하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찾으시는 신령한 예배자들이 될 수만 있다면 우리에게는 놀라운 하나님의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일들이 우리에게 있게 해달라고 간구합시다. 우리가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가 되고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성령 안에서 불꽃처럼 드려지는 예배가 되기 위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합시다. 예배회복의 간절한 열망들이 여러분의 심령 속에 일어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