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력
김임순
경남 창녕 출생.
부산교육대학교 대학원 졸업.
2013년《부산시조》 신인상과
《시와소금》으로 등단.
시조집 『경전에 이르는 길』
『비어 있어도』, 『 첼로를 품다』
시선집 『그 침묵에 기대어』.
수상
연암청장관문학상,
공무원문예대전 행정안전부장관상,
월간문학상, 부산문학상 우수상,
부산시조 작품상등.
한국시조시인협회,
오늘의시조시인회의,
국제시조시인협회,
부산시조시인협회, 한국문인협회,
부산가톨릭문인협회 외 단체 활동.
soonplip@hanmail.net
시인의 말
아득한 길이었다
산, 언덕 골짝 넘어
헛딛는 걸음 사이
낮은 풀꽃 와서 피고
햇살 든 우듬지까지
가야 할까 난 몰라
2025년 초가을
김임순
숲, 기억 만 리
비 그치자 숲에 들면 나무들의 젖 내음
아득한 기억 타래 기척 없이 뛰어든다
앞섰을 풀어놓은 듯 그 향기 등천하네
팽나무 때죽나무 나이테에 쟁여둔
깊은 속내 은근슬쩍 굼턱마다 비친다
유월 숲, 잊어도 못 잊은 저편 시간 여기 있네
호박이 굴렀네
잡풀 속 호박 넌출
명함도 못 내더니
절기 알람 된서리에
일제히 기절한 풀
세상에,
풀 죽은 풀숲에
벌거벗은 달덩이
가을 개막식
새벽을 걷어내고 일어나 창을 열면
확 밀고 들어오는 바람의 메시지
달라진 신선한 공기 돌아든 가을이네
태풍의 눈에 들면 풍비박산 뜬눈의 밤
한바탕 썰물 시간 낡삭은 여름 가고
이 아침 빗물 자리에 맑은 햇살 고였네
죽녹원에서
대숲에 선듯 들면 서늘한 울림 있지
펼쳐 든 경전 따라 독경 소리 들릴 듯
도도한 댓잎의 흔들림 신내림 서걱인다
천년을 돌아 돌아 막 당도한 바람인가
주눅 든 어깻죽지 들숨으로 힘이 솟고
죽비로 맞지 않아도 스스로 비워낸다
아득히 먼 기억 울창하여 더 쓸쓸한
무한정 그리워서 하늘 향한 내달음
꼭대기 흩어지는 바람 길어 올린 젓대 소리
운주사
애당초 도암 들판 돌이었고 바위였네
하늘 자리 별자리를 땅으로 끌어와서
빚은 돌 천불천탑은
새 세상을 꿈꾸었네
하나같이 어진 부처 말없이 말을 걸고
쫓긴 듯 다 던지고 이슬 밟고 떠난 도공
그 자리 와불이 된 채
기다림에 잠겨 있는
쏟아지는 별빛에 소쩍새 우는 밤도
기대는 듯 가고 마는 바람에 이골 나고
천 년도 살면 또 살아진다
품에 가만 누우란다
해설
아파서 아름다운 삶과
인간의 정체성을 묻는 서정
이경철 문학평론가
"낮달 진 무덤가에/ 은빛 노을 흔들린다//
억새의 환한 손짓/ 가을 한필 보쌈하려다//
꺾어도 꺾이지 않는/ 빈손엔 맑은 눈물"
(「억새를 꺾다가」 전문)
날로 발전하며 새롭게 새롭게 바뀌는 문명의 속도를 따라잡기 힘든 이 시대 왜 시는 계속 쓰이고또 읽히는가. 생성형 인공지능AI이 신체적 역량을 대신하는 기계적 차원을 넘어 머리는 일까지 대체해 들어오고 있는 현실에서 인간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시는 무엇이고 지금 우리 시대와 사회와 인간 개개인에 어떤 효험을 주고 있는가. 시는 어떻게 써야 하며 어떤 시가 좋은 시인가.
김임순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숲, 기억 만 리』를 찬찬히 읽으며 찾아든 물음들이다. 그만큼 이번 시집은 삶과 시간과 시대, 그리고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변할 수 없는 본질을 떠올리게 하고 있다. 때론 감동으로 툭 터져 나와 자연스럽게 흐르는 시로, 때론 머리 싸매고 어렵게 어렵게 공들여 가며 쓴 시로, 때론 극히 응축된 서정으로, 때론 길게 늘어지는 서술로 인간의 정체성과 시의 존재 이유와 효험을 묻게 하고 있다.
제사題詞 식으로 맨 위 제목 아래 인용한 「억새를 꺾다가」는 가을날 은빛 출렁이며 피어나는 억새꽃을 소재로 한 단시조다. 45자 안팎의 단시조의 짧은 정형, 틀에 서정을 응축하고 있다. 두 수, 세 수의 연시조로 나가는 시편들도 이번 시집에는 적잖이 보이는데 자유시에 비해 시조의 맛과 멋은 아무래도 이런 단시조에서 나온다. 시는 짧아야 시답고 야무지다. 짧고 응축된 서정이라야 예술 작품 자체로서 우뚝할 수 있는데 많은 연시조 쓰기의 공력으로 이른 시이기에 맨 위에 인용해 본 것이다. 위 시에서는 시인과 가을과 억새가 순하게 한 몸 한마음이 돼가고 있다. 하나둘 떠나가고 텅 비어가는 가을날의 서정이 은빛 억새 출렁이며 손짓하고 또 꺾는 상호 적극적인 행위로 하나가 되고 있다.
이번 시집 「숲, 기억 만 리』에서 김임순 시인은 AI가 그럴듯하게 시를 쓰는 시대 참으로 인간다운 시를 쓰려 애쓰고 있다. 시 「AI, 게섰거라」의 제목에서 볼 수 있듯, 또 "헐어진 가슴 넌 속울음 울어봤니?"라고 시 본문에서 묻고 있듯 시대가 아무리 빠르게 변하더라도 변할 수 없는 인간의 정체성과 세계의 본질을 보여주기 위해 속울음을 환하게 울고 있다. 시인의 추억, 전 생애의 진솔한 체험을 현재화해 지금 이 순간 눈앞에 생생한 우주의 서정적 풍정으로 응축해 보여주려 애쓰고 있다. 그래 따라가기도 힘든 최첨단 문명 시대의 속도에 다친 마음들을 위로하며 우리 인간과 사회를 끝끝내 인간다운 세상으로 나아가도록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