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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에서 만나는 성경 말씀] 파스카 축제
오늘 복음에는 파스카 축제를 맞아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고 그곳에 홀로 남았던 어린 예수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루살렘과 예수님 유년기의 고장인 나자렛은 버스로 두 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입니다. 부모는 어린 아들을 잃고 매우 당황하였지만, 정작 예수님은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하고 반문하였지요.
성가정이 성전을 방문한 때인 파스카 축제는 이집트 맏배들에 내린 재앙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기적적으로 구원받은 일을 기념하는 명절입니다. 파스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페싸흐]는 보통 ‘건너뛰다’라는 뜻으로 옮겨집니다. 그래서 한자로 ‘과월절’(過越節)이라고 하는데요, 사실 이보다 더 정확한 뜻은 ‘보호하다’ ‘방어하다’입니다. 그래서 탈출 12,13의 “내가 이집트를 칠 때, 그 피를 보고 너희만은 거르고 지나가겠다.”라는 구절은 ‘그 피를 보고 너희만은 보호하겠다.’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파스카 축제는 또한 “무교절”이라고도 칭해졌는데(탈출 12,15-20 등), 이는 탈출 당일 급히 집을 나가느라 누룩 없는 빵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탈출 12,21에 따르면, 파스카는 본래 가족 단위로 지내던 명절입니다. 곧 초창기에는 파스카를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필요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다 기원전 7세기, 곧 왕정 시대 후반부에 들면서 국가적 축제로 탈바꿈합니다. 당시 남왕국을 다스리던 요시야 임금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신명기로 추정되는 율법 두루마리를 발견한 뒤, 그 율법 규정(신명 16,2.7 등)에 따라 모든 경신례를 성전에서 지내는 것으로 통합하였기 때문입니다(2열왕 23,21-23). 이후, 파스카를 비롯한 주요 명절들도 성전에서 함께 지내게 되었습니다. 기원후 1세기 역사가 요세푸스의 「유다 전쟁사」에 따르면, 당시 곧 예수님 직후 시대에 파스카를 지내려고 예루살렘으로 모여든 사람들은 삼백만 명가량 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이는 과장된 수치이지만, 엄청난 인파가 모였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파스카 축제는, 무교절이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농경 절기이기도 하였습니다. 이즈음 이스라엘에서는 보리 수확을 시작하였습니다(탈출 9,31-32 참조). 하지만 보리 수확철임에도 백성은 마냥 기뻐할 수 없었는데요, 왜냐하면 파스카 이후 건기로 접어들면 농부들이 걱정해야 할 문제가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직 한창 밀이 자라는 중인데, 이때 비라도 내리면 밀 농사를 망칠 수 있었습니다(1사무 12,17 참조). 그래서 옛 이스라엘에서는 파스카의 마지막 날 온 공동체가 모여 이런 아슬아슬한 기간이 무사히 지나가기를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와 새 성전을 봉헌한 후, 곧 제2성전기에 들어 이런 분위기가 바뀌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때부터는 농경에만 의지하지 않고 상업에 종사하는 이들도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수의 백성이 파스카 때도 걱정 없이 성전 순례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고, 목수 요셉도 파스카를 맞아 가족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린 예수님이 성전을 방문한 일에는 이런 배경이 숨어 있습니다.
[마르코와 함께 떠나는 복음 여행] 에필로그 – 마르코가 전한 복음의 시작, 그리고 우리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는 말씀과 함께 시작된 예수님의 복음 선포 사명은 예수님의 승천과 함께 끝이 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느님의 사랑과 평화로 통치되는 나라로서 결코 저 멀리 죽은 뒤에나 갈 수 있는 어떤 장소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손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와있는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이를 증명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주변의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 곁으로 달려가십니다. 그리고 죄에 짓눌려 있는 이들에게는 하느님의 무한한 용서를, 병고에 좌절하는 이들에게는 치유를, 마귀의 권세 아래 놓여 있는 이들에게는 참된 해방의 기쁨을 전해주시며 수많은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또한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권위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침을 전하시면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밝혀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복음 선포 사명을 수행하시면서 열두 명을 제자로 뽑아 세우셨습니다. 그들과 3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보내며 당신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보고, 느끼고, 체험케 하시어 당신께서 이루신 구원의 기쁜 소식이 온 세상에 마지막 날까지 전파되도록 교육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교육 과정 중에 제자들은 스승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깨닫지 못하고, 그분이 걸어가셔야 할 수난과 죽음을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잡히시자 그분을 버리고 달아나는 치졸함을 드러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인간의 모든 죄악을 용서하시고 십자가의 희생 제사를 통해 인류의 죗값을 당신의 죽음으로 갚으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습니다. 되살아나셨습니다. 이 믿기 힘든 놀라운 사건으로 예수님께서는 모든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인간을 죽음의 권세에 내버려두지 않고 당신만이 누리시는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은총을 베풀어주셨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다고 하여 모든 이가 자동으로 그분의 구원에 참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이 남기신 사명, 곧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 그리고 그분을 향한 믿음에서 생기는 기쁨과 평화를 온 세상 모든 피조물에게 전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러한 복음 선포의 사명을 실천한 제자들의 모습을 전하며 자신의 복음서를 마무리합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마르 16,20)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것, 그래서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값싼 믿음만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전 존재를 하느님께 투신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되어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사랑을 전할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구원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마르코가 우리에게 전하는 복음이며, 우리가 전해야 하는 기쁜 소식입니다.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52)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에게 희망 준 유딧
고통을 극복하고 자신의 뜻에 따라 삶을 꾸려 가는 사람만이 삶의 행복을 체험한다. 디즈레일리(1804~1881)는 영국의 수상으로 유다인의 집안에 태어났다. 영국의 영토를 넓히고, 정당제에 의한 의회 정치를 실현했던 인물이라 존경받는다.
디즈레일리는 영리하고 재주도 많았는데 이상하게 하는 일마다 실패를 거듭했다. 사실 디즈레일리 개인보다 그의 환경에 문제가 있었다. 당시 유럽인들 사이에는 유다인에 대한 나쁜 편견이 존재했는데, 그는 유다인이었다. 디즈레일리는 영국을 사랑하는 애국자였자만 영국 사회는 그를 받아들여 주지 않았다.
고민을 거듭하던 디즈레일리는 소설가가 되었고 차별이 비교적 적은 예술 분야에서는 인정을 받았다. 그는 실패를 거듭하며 진정한 영국인으로서 인정받기 위해 드디어 정치가로 변신했다.
디즈레일리가 주는 교훈은 사람은 누구나 어려움에 닥쳤을 때 굴복하지 말고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만약 실패에도 계속 반성과 사색을 통해 목적을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면 결국 성공할 수 있다는 귀한 메시지를 남겼다. 누구나 삶에서 고통을 겪지만 이를 반성의 계기와 자기발전의 발판으로 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구약의 유딧기는 실제 역사를 다루고 있는 책은 아니다. 유딧기는 토빗기의 경우처럼 교훈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는 역사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유딧기에는 유딧이라는 과부가 전쟁 중에 홀로 적진에 가서 적장인 홀로페르네스를 죽이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아시리아 임금인 네부카드네자르는 홀로페르네스 장군을 이스라엘을 토벌하라고 명령했다. 유다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지키기 위해 완강하게 저항했다. 평화조약을 체결하자는 의견이 나왔지만 당시 우찌야 왕은 닷새 동안만 기도하고 그 후에도 하느님의 도움이 없으면 항복하자고 주민들을 설득했다.
이때 유딧이 등장해 위기에 빠진 유다인들을 구해냈다. 유딧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과부였으며 남편과 사별한 뒤 경건하게 살아가던 여인이었다. 그녀는 빼어난 용모와 지혜와 용기도 갖추고 있었다. 그녀는 우찌야의 주장을 반대했는데 이는 하느님을 시험하는 행위이며 하느님을 향한 흔들리지 않는 굳은 믿음만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유딧은 이스라엘 백성을 지켜달라고 하느님께 기도를 바친 후 홀로 적진으로 향했다. 빼어난 미모로 홀로페르네스의 환심을 산 유딧은 술에 취해 잠든 홀로페르네스의 죽인 후 돌아온다. 이스라엘 백성은 적장을 잃은 홀로페르네스의 군대와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다.
유딧은 과거와 달리 고통을 우상숭배나 죄악의 결과라기보다는 더 높은 차원의 믿음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자 하시는 배려와 자애라고 해석했다. 유딧이란 인물은 많은 박해를 당하고 살고 있는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에게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을 믿고 살아갈 수 있는 커다란 희망의 아이콘이 되었다.
[성경 속 기도 이야기] (23) 죽음을 눈앞에 둔 시메온의 기도
세상 풍파에도 하느님과 함께 나아가야
“주여 말씀하신 대로 이제는 주의 종을 평안히 떠나가게 하소서. 만민 앞에 마련하신 주의 구원을 이미 내 눈으로 보았나이다. 이교 백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시오,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되시는 구원을 보았나이다”(루카 2,29-31, 성무일도의 본문)라는 시메온의 기도로 성무일도가 하루를 맺습니다.
이 기도는 모사의 달인인 루카 복음사가가 ‘이방인들의 빛’이라는 희망의 인물을 다루는 제2이사야서의 신학을 이용해서 직접 지었으리라 추정됩니다.(이사 40,5; 42,6; 46,13; 49,6.9; 52,10 참조) 루카는 구약을 대표하는 노인인 시메온과 안나가 구약을 상징하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만나게 하면서 구약과 신약을 매끄럽게 연결합니다. 두 노인을 통해 복음의 길이 시작되기도 전에 ‘세상 끝’까지 이르는 구원의 예표인 아기 예수님이 드러납니다.
루카의 두 번째 작품인 사도행전은 바오로 사도가 당시 세상의 끝 또는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에서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다”(사도 28,31)는 말로 끝납니다.
루카는 이로써 시메온이 노래한 만민의 구원이라는 자신의 전망이 실현되었음을 기록합니다. 구약과 신약을 아우르는 루카의 전망에서 이방인들의 구원은 이스라엘 백성의 빛을 감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백성을 더욱 빛나게 한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이방인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위해서 복음을 집필한 루카이지만 복음 앞에서 주저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배척하지 않고 통합합니다.
평생 메시아를 고대했던 노인은 죽기 전에 부르는 마지막 노래에서 ‘이제는!’이라고 외칩니다. 이 외침은 오랫동안 신앙 속에 희망을 간직했던 이만이 할 수 있습니다. 저출산 노령화 사회 안에서 젊은이들이 더 귀하게 여겨지고 노인분들은 무시당하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그분들의 경험과 지혜와 신앙은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줍니다.
일찍 남편을 잃고 두 아들을 뒷바라지하시기 위해 갖은 고생을 하시고 10년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나시는 나이 칠십 자매님이 “저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저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라며 당신의 마지막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지금은 제가 그 노랫말을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그것을 깨달을 날이 언젠가 오리라 기대합니다.
하루를 마치면서 끝기도를 바치듯이, 지난 반년 동안 연재를 마치면서 성경의 도움으로 기도에 대해서 함께 나눌 수 있었음에 독자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새해에는 세상이 제 자리를 찾기를, 권력을 지닌 이들이 정신을 차리고 모든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이룩하기를 기원합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2,34-35)라는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 성모님께 고통을 초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분으로 상징되는 이스라엘 백성을 고통스럽게 갈라놓을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신앙은 결단을 요구합니다. 세상의 풍파에 휩쓸릴 것인지, 세상의 풍파에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과 함께 앞으로 나갈 것인지는 신앙의 선택입니다. 예상되는 온갖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구원은 이루어진다”는 루카의 전망에 기대어 여러분들과 함께 새해를 맞이합니다.
[성지에서 만나는 성경 말씀] 한나의 노래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1사무 1,2에서 에프라임 땅에 살던 엘카나의 첫째 아내로 소개됩니다. 당시 상황은 한나가 오랫동안 불임이라 엘카나 집안에 후처인 프닌나가 들어온 것으로 보입니다. 한나는 둘째 부인 프닌나에게 조롱 당하며(6절) 괴로움을 겪다가 주님께 서원하는데요(11절), 서원의 내용이 역설적입니다. 아이를 얻게 된다면 아이를 주님께 바치겠다는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얻기 위해 아이를 포기하겠다고 서약한 셈이니, 당시 한나의 신세가 얼마나 암담했는지 알 듯 합니다.
하지만 성소에서 기도한 뒤에는 한나의 마음이 누그러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나의 개인 사정을 모르는 사제 엘 리가 그를 축복해주자, 그가 음식도 먹고 얼굴도 전처럼 어둡지 않았다고 합니다(17-18절). 그리고 바람대로 아이를 낳은 뒤, 약속대로 아이를 봉헌하며 부른 노래가 2,1-10에 이어집니다. 사실, 찬양의 내용이 한나의 상황과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지만, “아이 못낳던 여자는 일곱을 낳고”(5절)라는 구절은 그에게 일어난 변화를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한나의 찬양이 성경에 기록되었다는 건 그가 성경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하게 합니다. 여인이 부른 노래가 성경에 기록된 예는 정말 소수이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누이이자 여예언자인 미르얌은 탈출 15,20-22에서 승리의 노래를 불렀고, 이스라엘 역사상 유일한 여자 판관 드보라가 부른 노래는 판관 5장에 나옵니다. 한나의 찬양이 특별한 점은, 그가 찬미 노래를 부른 시점이 소원이 이뤄진 임신 때나 출산 때가 아니라, 서원대로 아이를 바칠 때였다는 것입니다. 아이와 떨어지게 되면 슬프고 괴로울 텐데 한나는 하느님께 찬미를 드립니다. 이는 일종의 ‘환희의 신비’라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환희의 신비는 성모님 이전에 한나에게서 먼저 이루어진 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위기의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사무엘을 낳아 이를 극복하게 해준 어머니 한나의 이야기는 이후 문헌에도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루카 1-2장이 대표적입니다. 이 대목 역시 불임 부부였던 즈카르야 사제와 엘리사벳이 세례자 요한을 얻게 되는 사연으로 시작합니다(루카 1,7). 한나의 노래는 “마리아의 노래”, 곧 ‘마니피캇’에도 비슷하게 반영됩니다. 또한 한나의 사연은 신약 외경 「야고보 원복음」에도 영감을 주었습니다. 거기서 불임 부부 요아킴과 안나는 아이를 청하며 탄원하는데, 안나는 히브리어 한나의 그리스식 이름입니다. 그리스어에는 [ㅎ]에 해당하는 문자가 없어 ‘안나’로 옮겨진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수태고지를 받자 부부는 ‘아이를 주님께 예물로 바칠 것’을 서원합니다. 이어, 요아킴과 안나의 딸 마리아가 세 살 되던 해 성전에 봉헌합니다. 이런 일련의 이야기는, 프닌나의 조롱을 악으로 되갚지 않고 간절한 바람을 진취적으로 풀어낸 한나가 하느님 백성이 지나온 역사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51) 교만으로 처참한 최후 맞이한 우찌야왕
오래전 한 방송국에서 <태조 왕건>이란 사극이 방영되었을 때 정작 고려를 건국한 왕건보다 이상한 주문을 외우던 한쪽 눈이 먼 궁예가 주목을 더 받았다. 나도 열심히 시청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삼국사기」 등에 따르면 궁예는 태어날 때부터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다고 한다. 어릴 때 한쪽 눈을 다쳤고 늘 말썽을 피우다가 출가하여 세달사(世達寺)라는 절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 신라 말기에 각지에서 반란이 들끓어 혼란해지자 궁예는 891년 절에서 나와 한창 득세하던 세력에 들어가 활동을 했다.
「삼국사기」에서 “부하들과 함께 고생하며, 주거나 빼앗는 일에 이르기까지도 공평무사하였다”라고 한 점을 보면 그는 귀족들의 수탈에 질려 있던 백성들에게 환영받았다. 세력을 넓혀가던 궁예는 901년 스스로 왕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라 정했다. 궁예에게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지방 호족의 협조가 절실했다.
궁예는 군사적이고 현실적인 이익만을 중시하였다. 궁예는 카리스마와 동시에 애민 정신이 매우 강한 지도자였지만, 정치가에게 꼭 필요한 덕목인 인내심, 친화력, 융통성을 갖지 못했다.
집권 후반기에는 스스로를 미륵불이라고 불렀으며, 관심법(觀心法)으로 인간의 생각을 꿰뚫어 본다고 주장하고, 법봉(法棒)으로 신하들을 때려죽이는 등 광기를 일으켰다.
궁예의 무리한 왕권 강화책은 너무나 큰 부작용을 가져왔다. 공평무사한 인물이었지만, 왕이 된 후 민생파탄과 공포 분위기로 결국 백성들도 등을 돌렸다. 궁예는 쿠데타 현장에서 황급히 도망쳤고 분노한 백성들에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우찌야는 16살의 나이에 유다 왕국의 왕이 되어 52년간이나 나라를 다스렸다. 그는 선대 왕의 정신에 따라 나라의 국방을 강화하고 영토를 확장했다. 우찌야는 필리스티아인들에게 중요한 성읍을 점령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우찌야의 권력은 매우 막강해졌다. 우찌야는 백성들을 사랑하여 농업을 발달시켰다. 그가 그렇게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의 은총 덕분이었다.
그런데 사람이 천신만고 끝에 성공을 이루면 교만해지기 쉽다. 우찌야도 강하고 능력있는 지도자였지만 교만해져서 결국 몰락했다. 그는 모든 일에 성공을 거두고 주위 사람들의 찬양을 받자 교만한 마음이 들었다. 우찌야는 주변의 찬송에 취해 하느님의 율법마저도 자신이 마음대로 고쳐 실천하려고 했다.
이때 대사제들이 말렸지만 교만해진 우찌아는 하느님의 법을 거스렀다. 우찌야가 사제들에게 화를 내려 하자 한센병에 걸리고 말았다. 아들에게 왕위를 이양한 우찌야는 별궁에서 홀로 한센병을 앓으며 쓸쓸히 지내다 죽었다.
인간은 자신이 약하거나 실패하면 오히려 하느님의 뜻을 겸손하게 구하지만, 높이 올라가거나 성공하면 마음속엔 하느님이 사라지고 교만해지기 쉽다. 교만은 인간의 삶에서 가장 경계해야 하는 마음이다. 교만은 한순간에 모든 것을 물거품이 되게 한다. 훌륭한 지도자는 초심을 잃지 않는 겸손한 지도자이다.
[성경 속 기도 이야기] (22) 성모님의 찬양 마니피캇
하느님 자비 기억하며 마리아의 겸손 본받길
즈카르야의 노래(루카 1,68~79)와 성모의 노래(루카 1,46~55)와 시므온의 노래(루카 2,29~32)는 성무일도의 아침기도·저녁기도와 끝기도에서 불리는 복음서의 찬가로, 구약의 오랜 약속이 예수님을 통해 실현된다는 사실을 알립니다.
레지오 단원들이 매일 바치는 까떼나(사슬 기도)의 주요 부분인 성모의 노래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가 마주치는 곳에 자리합니다. 천사와 만난 마리아는 두려운 마음으로 믿을만한 친척 엘리사벳을 찾아 나섭니다. 마리아의 인사말만 들은 엘리사벳이지만, 태 안에서 아기가 뛰노는 것을 느끼며 성령으로 가득 차 외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마리아가 수태 사실을 입에 올리기도 전에 그것이 알려지는 놀라운 순간에 마리아에게서 하느님 찬양이 터져 나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노래(1사무 2,1~10)가 큰 영향을 끼치고, 시편 및 구약의 여러 대목을 인용하는 이 노래는 마리아의 찬양 시편입니다. 그 전반부는 메시아의 어머니인 마리아 개인의 감사를, 후반부는 높이고 낮추는 세 개의 반대되는 움직임 속에 당신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을 노래합니다.
<1절>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1사무 2,1; 시편 34,3~4)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시편 35,9; 이사 61,10; 하바 3,18)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창세 29,32; 1사무 1,11)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창세 30,13; 시편 72,17; 루카 1,45 참조)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신명 10,21)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시편 72,19; 111,9)
<2절>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시편 89,2; 100,5; 103,11.13.17)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시편 89,11; 118,15-16)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시편 147,6; 집회 10,14).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시편 107,9)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시편 98,3)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이사 41,8-10)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2사무 22,51; 미카 7,20)
마리아는 자신의 힘을 믿지 않고 모든 것을 하느님으로부터 기대하는 가난한 여인입니다. 기도하는 이는 마리아와 같이 겸손함과 경외심을 가지고 하느님께서 채워주시리라 기대하며 그분께 자신의 빈손을 내밀며, 실제로 하느님이 당신의 이들을 구하시기 위해 ‘능하신 팔’을 뻗치신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분은 당신의 계약에 충실하시고 약속을 지키십니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현실에서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은 불가능한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시고, 달리 보인다고 할지라도 실제로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분이십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을 ‘나의 구원자’로 칭하는데, 이는 아들인 예수의 이름과 같고 루카 복음과 사도행전의 핵심 주제와(루카 1,69.71.77; 2,11.30; 사도 5,31; 13,23 등) 동일합니다. 이름 ‘예수’는 하느님이 구원하신다는 뜻을 지닙니다.(하바 3,18; 마태 1,21; 루카 1,31 참조)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은 없는 이를 구원하는 분으로 드러나십니다. 하느님은 도움을 주시고 구하시는 분입니다.
이 노래는 끊임없이 백성을 향하는 하느님의 충실한 모습을 강조합니다. 그분은 나에게 충실하신 분이고 나를 알고 계시며 자비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항구함에 걸맞은 응답은 결코 끊이지 않는 우리의 감사와 찬양일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