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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단 조성 이전 사상구는 낙동강하구의 넓은 논과 늪지대였다.
수많은 종류의 물고기와 철새 떼가 노닐며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운 들판으로 이루어져,
지금 세계적인 늪지대로 알려진 순천만보다 더 넓고 아름다운 지역이었다
또한 엄궁의 낙조, 삼락 재첩·꼬시래기·게, 포프라마치 수문의 잉어·뱀장어, 삼락·모라의 늪과 호수,
주례에서 강둑까지 이어지는 늪과 갈대숲 등 참말로 천연의 寶庫 였다.
지금까지 제대로 관리가 되었다면 세계적인 철새도래지 및 천혜의 자연유산이 되었을 것이다
1970년대 사상공단은
금사공단과 함께 부산의 대표적인 공업단지로 발전되었다.
그 당시 괘법동을 통과하는 버스는 32, 33, 59,69,75 번이다
기존 괘법동과 감전동 주거지역을 그대로 보존 한 채로 , 주변에 단지를 조성하고
공단을 관통했던 괘법천, 감전천, 삼락천의 물길을 인위적으로 바꿔 직선화하였기에
세 개의 하천 모두 초창기에는 하천 오염 문제가 매우 심각했었다.
사상공단이 들어서면서 그 넓은 늪지대가 八景臺의 흙으로 메워지기 시작하면서
공장이 하나 둘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물레방아 돌리는 물이 꽁꽁 언 괘법천에는 나무로 만든 썰매로 애들은 얼음을 지치곤 했었다.
사상 철도역이 저 멀리 보이는
그루터기가 곳곳에 쌓여 있는 들판에 검은 연기를 내뿜는 높은 굴뚝 하나가 외로이 서서
산업화의 서막을 알리고
기와지붕 밑 중앙에 자전거 점방이 있고 양옆에는 ㅇㅇ 복덕방 간판이 ㅇㅇ부동산 소개소로
바꾸어 단 점포 미닫이문으로 복부인이 들락거린다
조선시대 사천면이 上 , 下로 나누어져서 위는 沙上, 아래는 沙下 정했던 사상구는
모래밭에서 위 쪽으로 나 있는 풍요로운 자연마을이었다
이제는 이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조차도
사상구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오염, 악취, 문화의 불모지가 되었다.
지금은 그때의 공장들이 큰 기업이 되어 타 지역으로 다 떠나버리고
지금은 소규모 기업, 공구상가, 점포, 버스터미널 주위의 유흥가,
개발이 시급한 검은 하천 등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동萊郡誌 :1937」에
沙上八景臺의 위치는 ' 沙上面 昌津里' 라고 기록돼 있다.
창진리는 창날포로 지금의 사상구 괘법동이다.
괘법동의 원래 명칭은 괘내리(掛乃里)이고, 괘내(掛乃)는
바닷가나 또는 물이 고여 있는 곳에 있는 동네라는 뜻이다.
주민들은 풍부한 갈대를 이용해 갈 자리나 채반, 갈꽃 빗자루를 엮어 수입을 올렸다.
어업을 생계수단으로 했다니 와닿지 않는다ㅐ
이는 "공단"이라는 단어에 우리가 가스라이팅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지역에서 옛날 진상품이던 농어를 비롯하여 감성돔,전어 ,뱀장어, 꼬시레기, 잉어, 붕어 등이
이곳으로 몰려들었고
민물새우 ,백합 ,굴 ,제첩 등 패류 등도 풍부했다
양쪽에 백양산 지맥으로 둘러싸인 육지가 바다로 이어진 포구에는
육지의 산물과 해산물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 지고 있었다.
낙동강 하굿둑이 생기기 전에는
삼락동 끝 지점에서 재첩이 많이 잡혀 '삼락 재첩국 거리'가 생겼다
이러한 모든 자연이 만든 환경을 공단과 시가지의 오폐수가 사라지게 했다
니체의 "동일성의 원형 회귀"는
生은 圓의 형상을 띠면서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고 ,
彼岸의 세계에 이르는 것도,
還生하여 다음 세상에서 새로운 생활로 들어가는 것도 모두 부정하고
" 항상 동일한 것이 되풀이된다 "라는 思想이다.
이 관념적인 思想은
현실에서 삶의 고뇌와 기쁨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순간만을 충실하게 생활하는 데에 생의 자유와 구원이 있다고 주장한다.
내가 아는 沙上은
시외버스 터미널이 있어 늘 가고 오는 사람들의 숱한 마음들이 머물다 가는 곳이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 라는 命題가 있다.
역사를 통해서 현재의 내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능력과 교훈을 얻어 실천함으로
이 沙上에서는 이 명제가 명제가 아니기를 바란다.
口傳에 의하면 八景臺는 지금의 시외버스 터미널 인근 벼랑산에 있었다고 한다.
1970년대 중반 공업 단지 조성 시 이 산을 깎아 매립토로 사용하면서
沙上八景을 볼 수 있는 팔경대가
사라지자,
沙上八景의 옛 경관도 사라지고 없다.
사상 팔경은 현재 다음과 같은 글귀로 남아 예전의 아름다운 풍광과 정취를 짐작케 한다.
구덕 조무(九德朝霧),원포 귀범(遠浦歸帆),평사 낙안(平沙落雁)
칠월 해화(七月蟹火),팔월 노화(八月蘆花), 서산 낙조(西山落照)
운수 모종(雲水暮鐘),금정 명월(金井明月)
학장천이 고향의 강으로, 삼락천과 괘법천에 '꺽지'가 뛰어놀 수 있는
아름다운 하천으로, 지역민의 자연 쉼터로 돌아 가야 할 것이다.
이제는 역사가 보여준 그 因果를 다시금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는
"역사는 진전을 해야 하는데 실수가 반복되고 있다"라는
격언을 되새겨봐야 할 것이다
영혜 아버지 곽중환씨는 곽남환 곽창환 등 4형제 중 맏이었다.
키가 6척 장신이었고 豪放한 성품이었다.
죽을 짓을 하지 않은 이상 상대방이
.웬만한 무례한 짓을 저질렀을 때도
" 괜찮네 ! 이 사람아 , 모르고 그랬겠지 " 라고만 할 분이었다
기장군 장안읍 좌동 처가에도
논마지기를 사주는 등 물질적인 지원하는데 아까워하지 않아
영혜 외삼촌 등이 학업을 마치는 데 도움을 주었다 .
그중에는 대우 김우중 회장의
첫 사업인 베트남에 의류를 처음 선적할 때 부터 친구인 친척도 있었다
이런 것들이 내가 고리원전
2호기 건설 사무소에 근무할 때
나는 영혜의 "외갓집이 내 외갓집인 양 "하며 주변의 民怨을 해결해 주며
이 지역 텃세를 견뎌 내는데 많은 힘이 되어 주었다
막걸리에 사이다를 타서 마시기를 좋아했고 나도 대작을 하곤 했다
" 내가 밀어낸 것이 내게 좋은 것일 수도 있음을 자각하라" 라고 하며
세상살이의 어려움과 배신 당한 쓰라림에 관한 것들을 암시하기도 했다
그때 장인이 "김군! 이 집에 무상으로 출입해도 좋네" 라고 했다
나는 이 말을" 김서방! 영혜 잘 부탁하네" 라고 이해했다.
영혜도 옆에 있었다.
나에게 "김군 ! 나는 돈이 평생 있는 줄 알았다"
내가 기억하는 몇 마디다
나뭇가지들이 부대끼는 소리에 잠을 설쳤다.
전화가 왔다
외사촌 처형이다
"고모부 돌아갔셨습나다"
나는 " 좁은 부엌에서 연탄을 갈다 돌아가셨다."라고 하는 말을 의아하게 여겼다
가족에 대한 책임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것이
죽음에 이르게 하지 않았나 싶다
부산 시립 추모공원에 모실 때에 영구를 옮겼다.
그 때 내가 맨 뒤에서 운 관했는데 추웠던 것도 같고 ~
마누라는 코물을 흘리며 울어댔다.
처참하고 절망적인 모습이다
살아 생잔에 진지 한 번 제대로 대접한 적 없으니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같이 안타까운 마음이 겠지
棺 뒤 쪽으로 발이 흰 헝겊에 쌓여 나와 있다.
주검을 이렇게 가까이 한 것은 처음이라 疑訝했다
장인 키에 맞는 棺 준비 못 할 정도로 초라하게 장례식을 치렀다
죽은 사람이 살아온 세월을 원망할리 없고 살아있는 사람에게 고통만 더 할 뿐이다
그러니 사람은 棺 속에 들어갈 때까지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
영혜를 아버님 어머님께 먼저 보내드리니
" 생전에 해주셨듯이 저승에서도 잘 보살펴 주세요"라고
장인 장모가 계시는 봉안당에 부탁하러 갔다
이곳에서 적지 않은 지인들과 이별을 했건만
50여 전 옛 날에 장인 영구를 짊어지고 갈 때 그 길만 보였다
그때 그 길 그대로 였다 . 변할 리 없지만 변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신기하게 느껴진다
장례를 치른 후 처형, 나 ,영혜 세 사람은 죄인처럼
웅크리고 앉아 방구석만 내려 보고 있었다
진실한 것도 없고, 허망한 것도 없다
참된 사랑도 없고 참된 우정도 없다
실타래처럼 얽힌 쓸데없는 邪念에서 벗어 나야 한다
" 이 나이에 나의 삶은 무엇을 먹고 사는 것일까"
"정과 사랑을 먹고 싶다."
풀벌레 구슬피 우는 밤이라
파도 소리가 요란하다.
먼바다에서 일어난 너울이
해안으로 둥글게 모이고
소슬 바람에 떨어진 단풍이 갯바위로 밀려오는 송도 바닷가에서
서로의 추위를 느껴 따뜻한 곳을 찾아 들어갔다.
방에 들어서자 서로에 대한
愛情 ,友情 , 憐愍의 정을 느끼면서
둘은 그동안 마음속에 쌓였던 답답함을 내보내고
새로운 精氣를 받아 하나가 되는 전율을 느꼈다
강렬하고 극적인 直射光과 부드럽고 포근한 天空光이 합하여
자연의 빛이 되었다.
이제 우리 둘은 어떻게 해야 의미있는 삶을 이루어 나갈지를 끊임없이 성찰해야 한다.
이제는 지금처럼 世情모르는 여자로 있어서도 안된다
온실 속의 꽃이 아니다.
온실 밖으로 나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
괘법동에서 영혜와의 관계가 벼랑 끝 위에 섰다.
스트리트댄스가 갑자기 움직임을
즉흥적으로 변형하듯
" 우리 이제 그만 만나자"라고 한다
영혜의 말은 아직 성숙되지 않은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서슬 퍼런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나는 무너지고 말것 같은 예감이 엄습해왔다
언젠가 영혜가 " 나에게 엄마가 '너 윽곤이와 얼마나 깊이 사귀었는냐
' 고 물었다.
영혜는 ' 육군이 엄마에게 인사드렸어' 대답했다"라고 한다
"이제 부터 욱곤이와 만나지 마라"
장모에게 매를 많이 맞았다고 한다
,떼거리를 걱정해야 하는 때
딸이" 엄마인 사람에게는 아무런 말도 없이" 이런 말을 들은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날 이후로 이틀 동안 밤 낯으로 대문을 두드렸다
대문은 열리지 않았다.
헤어지고 싶지 않다는 절박한 마음에 담벼락을 주먹으로 쳤다
" 엄마 욱곤이 손목 좀 봐라"
나의 진심을 믿어라는 뜻일 것이다
그때 장모가 처한 경제적 상황을 고려해 보면 영혜가 일방적으로 "만나지 않겠다"라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장모가 나의 진심을 느꼈는지
집에서 나와 " 이리 들어와 집에 전화해 식구 한 분 이리로 오시라고 해라" 라고 한다.
그날 밤 깨끗한 이부자리를 큰 방에 깔아 주었다.
영혜는 그동안의 일이 " 미안하다는 듯이" 이불 속으로 들어 왔다.
큰 처남은 해양대학교 기숙사, 작은 처남은 공군 자원입대, 처제는 사촌 처형 집으로
각자도생하기로 했다
우리도 거취를 결정해야 했다
그 당시 엄마가 차린 " 원화 양장점"
에 일손이 부족할 때다
엄마와 의논하니 몇 번 본 적이 있은지라 반대하지 않았다.
우리가 결혼한 날은 있으나 결혼 기념일은 없이 지내 온 원인이다
매년 초가을이 되면
" 해주아빠! 당신 집에 들어온 날짜가 모년 모월 모일이다 "라고 한다
영혜는 우리 집에 보잘것없는 가방 하나를 들고 들어 온날을
중요한 날인 듯이 이야기 했다
나에게는 이날이 반갑게 맞이할 날은 아니었다.
"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냐 !"하고 투명스럽게 대답했다
마누라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괴 있었다.
그때 귀담아 둘걸!
결혼기념일로 정하고 축하하고 ~
나는 이제 그날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나는 "왜 너의 그 소중한 '기억을 기념해야 한다'라고
소리치며 강요라도 하지 못한 네가 밉다."라고 소리치고 싶다
누가 " 안 살이 내 살이면 천 리라도 찾아가고
밭 살이 내 살이면 십 리라도 가지 마라 " 라고 했던가
윤재, 은성이를 생각하니
바람은 불지 않아도 낙엽이 시나브로 날려 발밑에 쌓이듯이
우리가 꾸역꾸역 살아오면서도 행복은 시나브로 시나브로 쌓여 온 모양이다
曠野 - 이육사
"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백마 타고 오는 초인"
"짜라투스트라의 초인"
이 두 초인에 대한 해석은 수백 가지일 것이다
이제는 자유와 책임의 시대이다
자유의 이름에 걸맞은 책임을 다해야 한다
적이 사라졌으니 대결의 상대는 오직 본인뿐이다.
시인이 이야기하는 " 백마를 탄 초인" 은 우리가 쟁취한 것이 아니다.
초인은 분명히 제시된 모습이 없으니 그를 형상화는 것은 나의
몫이다
" 망치를 든 초인" 은 늘 사회적 통념을 부수고 늘 새로운 것을 추구 하는
거대담론 대신에
미시담론에서 한몫하는 옆집 아저씨 같은 초인은 없을까.
청마 유치환의 깃발은
허무한 현실의 상황을 이겨 내려는 생명의 강한 의지를
깃발이 바람에 맞서 제 온몸을 자랑스레 펼치는 모습을 통하여
형상화한 작품이다.
"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哀愁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사랑이란 자신만의 정의가 반드시 필요하다."
사랑이 남녀간의 사랑 뿐이냐마는
그래도 "至高至純" 한 사랑은 남녀
간의 시랑이다
사랑이란 서로가 성숙을 향해 가는 책임있는 관계가 사랑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
사랑은 시간을 두고 서로가 이루어 가는 것이므로 어떤 상태가 아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사랑해야 한다.
특히 중매든 연애든 부부가 돠었다면 여러 가지 일들로 서로 부대끼면서
정을 쌓아 가기 마련이다.
남편은 위엄을 지켜야하나
그 태도에 있어서는 예의를 다해야 하고 의식주에 불편함이 없도록 해야 하며
때로는 아내가 치장도 할 수 있게 열심히 일해야 한다.
아내는 남편을 공경하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행동하며 먼저 일어나고
뒤에 잠이들며 남편의 뜻을 미리 알아 처신한다면 금상첨화다
서로의 다름을 경험하고 그것을 받아들여 빈 곳은 채워 주고 넘치는 곳은 덜어내어
서로가 균형을 이루도록 서로가노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