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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芳秀 河淸高敎 時節
장목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진학을 포기했다. 한해 뒤에 몰래 장목 중학교 입학 시험에 합격을 하였으나 아무도 도와주는 가족이 없고 방해만 했다.
장목중학교를 다니다가 3학년에 올라가 휴학을 하다가 1959년에 2학년 담임이셨던 김기태 은사님의 도움으로 하청고등학교에 월반을 하여 관포에서 걸어서 하청고등학교를 1년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다녔다.
1959년 기해년 하청고등학교 1학년 재학시절 매동에서 장목 고갯길로 넘어 가는 길목에서 장목 월광 사진관을 경영하시던 한 재운 고모부님의 카메라를 빌려와서 촬영했다.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낫지만 추억을 더듬어 가면서 글을 남긴다.
좌측으로 부터 徐福光(서복광), 黃相根(황상근). 李光基(이광기), 유계리 동문인데. 이름은 기억이 안난다. 金浩根(김호근), 筆者(필자) 梁芳秀(양방수), 女同生(여동생) 梁京子(양경자), 長木(장목)에 살던 金宗順(김종순). 1959년 己亥年(기해년) 하청고등학교 시절 매동에서 장목을 넘어오는 고갯길에서 방과후 집으로 오다가 촬영했는데, 장목 월광 사진관을 경영하시던 한재운 고모부님의 카메라를 빌려와서 촬영했다.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追憶(추억)을 더듬어 가면서 歷史(역사)와 글을 남긴다.
황상근(黃相根)군은 1942년 2월 11일생으로, 기록했으나, 실제는 1940년생으로 알고있다. 항상근군의 형님이 1938년생으로 양명생 형님과 초등학교 동문이며, 대금 본복에 사시던 김송자 이모님의 동생이신, 金東子(김동자)이모님과 결혼하였다가 황상근군의 형님 황한택 선배님이 어떤 연유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아래 경주김씨 족보의 내용이다.
(27) 二十七世祖母(이십칠세조모) - 允濟(윤제)의 三女(삼녀)
이름은 金 東子(김 동자)이시다.
長木面(장목면) 冠浦里(관포리) 昌原黃氏(창원황씨) 黃漢澤(황한택)씨에게 出嫁(출가)를 가셨는데 死別(사별)하시고, 再嫁(재가)를 가셨다고 들었다.
황상근군은 장목중학교, 하청고교, 졸업후 1966년 부터 1967년까지 한해를 고향 관포에서 제 15대 里長(리장)으로 1년을 재임했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경찰학교를 졸업하고, 경감,경정,총경을 승진, 의령경찰서장, 경남 지방청 보안과장, 사천 경찰서장, 거창 경찰서장, 마산 중부경찰서장으로 정년 퇴임했다는 기록을 보아 학창시절 부터 배움에 열심히 정진[
위성사진에 나타나는 사진촬영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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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목 국민학교 제 19회 동창회 모임에서 장목국민학교 교정(지금의 장목중학교 운동장)에서
뒷줄 좌로부터 서근숙, 황광용, 故김황수, 양방수, 故김정용,이수태, 故강영애.황애자.
앞줄,두모리의 김문자, 황호수, 황경래, 안정애, 양선금, 서옥자, 박문자.
이중에 유일하게 서옥자가 마산여고를 졸업.황애자는 필자의 숙모가 되었다.
장목 국민학교 제 19회 동창회 맨 오른쪽에 필자 양방수
거제시 장목면 장목 국민학교 제 19회 졸업자 명단 무 순위
長木里 : 김용부, 김순용, 김 욱, 김석랑, 김광수, 김수동, 김충도, 김정호, 김전식, 김무성, 김승길, 김길선, 김경옥, 김행복,
김정홍, 김석열, 문조형, 민영호, 서일남, 서정언, 신화자, 서두수, 송복여, 안선송, 이월봉, 유문향, 정길행, 조동안
(경찰학교를 졸업후 서울 마포 경찰서 수산 반장을 하다가 퇴직), 한성범, 주수석(이북 피난민-장목 중학교 입학시
장래 희망이 무엇이냐? 질문하자 ~ 부산 나아 가겠습니다.로 답변 폭소를 자아내게 한 일화는 동문들의 추억에 남아
있다.), 채부흥(이북 피난민-서라벌 예대를 졸업후 영화사 조감독을 거쳐, 광고영화 제작 회사를 설립하여 운영중
사망하여 친구들의 안타까움을 사게 하였다.),
매 동 : 강성기, 강인순, 강성칠, 강찬순, 강의웅, 김성차,
冠浦里 : 김황수, 김남길, 김정용, 김호경, 안정애, 강영애(관포 우리집 뒷집에서 살았는데, 4살 많은 37년생으로, 숫한 사연을
안고, 목사의 사모가 되어, 독학으로 교회 찬양 반주로 남편 목사를 도우다가 은퇴하여 교통 사고를 당하여 돌아
갈때까지 한국과 미국에서 전화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박문자(집안 형수님이 되셨다. 양학배 형님의 부인),
반대봉, 서옥자(2008년 한국을 방문했을때 고현 자택에서 대금 황춘자와 밤을 지세우며, 옛이기로 날밤을 세웠다).
서근숙, 양방수(사진과 글을 남긴 筆者(필자), 양평자, 양장수, 양선금, 여 해운, 이 소순, 정 명기, 정 명현, 허 종근,
하명곤, 황광용, 황 애자(양인조 삼촌과 결혼하여 숙모님이 되신분), 황효수, 황경내, 황관연,
頭毛里 : 김 문자, 신 유민, 송 근수, 이 수태, 조 정일, 황 길웅, 황 옥석, 황 기봉, 황 부웅, 황 수도, 황 부길, 황 정남,
栗川里 : 강 동복, 강 부성, 김 재일, 김 경묵, 구 용환, 박 평태, 옥 부촌, 송 병순,
大錦里 : 김 영식, 김 정명, 김 영태, 김 정자, 김 이부, 김 상수, 박 영대, 서 점두, 이 효정, 정 석만, 정 광자, 황 춘자,
矢方里 : 김 둘선,
宮農里 : 반 미지,
舊永里 : 김 대성.
여름철 방학때 장목 月光(월광) 사진관 한재운 고숙부님께서 촬영.
필자(筆者)가 하청 고등학교에 다닐때다. 부산 남여중에 다니던 김 경자라는 여학생이 관포에 사는 이모님댁에 방학을 이용해서 오면 항상 나를 만나러 왔고, 우리는 그냥 만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꼭 사진을 같이 남겼고, 편지로 서로의 소식을 전했다. 돌이켜 보면 그때가 사춘기 연애 감정을 가졌던 아름다운 추억이 남아있고, 하여 남긴 사진을 여기 남긴다. 그냥 손도 잡아 보지않고 만나기만 하면 좋았던 철부지 시절이다. 여름이 가고 겨울이 와도 나를 찾아 준 마음이 고마웠다. 그 애는 아버지가 나는 엄마가 없어 늘 같은 마음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며 만났다. 그리고 부산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무엇이든지 말해 주었다.
친구 이야기도 집안 이야기도 동생 이야기도.... 본래 고향이 칠천도인데, 아버지가 돌아 가시자, 먹고 살길이 없어 엄마는 3남매를 데리고 부산으로 나가 염주동 개천가에서 밥장사를 하며, 3남매 공부를 가르쳤다. 그 날 배고플꺼라며, 따끈따끈한 흰쌀밥에 생선구이로 챙겨 주시던 저녁밥은 표현하기가 힘들도록 맛있고, 고마웠다. 경자따라 집을 가 보니 하꼬방 판자촌에 판자집 움막과 같은 집에 起居(기거)하면서 살았다, 당시 6.25 직후 우리나라의 실태가 비참하였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훌륭한 엄마요. 강인하신 의지의 한국인의 模範(모범)적인 어머님이였다고 생각 되어 진다.
뒷줄 좌측에서 2번째 웃는 애가 김경자란다. 편지속에 설명했다.
1958년에 부산 초량동에 친구 김경자 따라 경자네 식당에 갔었는데, 친구의 모친 바로 옆집에서 식당을 하셨는데, 고향을 물어서 고향이 거제 관포라고 했더니, 너가 그려면 양 두조 아들이냐!!! 하시면서 참으로 신기 하다며, 너가 이렇게 長成(장성)하였느냐며, 어머님 시집와서, 시집살이 이야기며, 어머님의 性品(성품)등등 관포 동네 고향의 옛 追憶(추억)을 그리며 그 때 그 시절의 고향 관포 동네의 나로서는 생소한 이야기를 참으로 많이 하셨다. 내가 다섯살 되던 해인 1946丙戌(병술)년 음력 5월 29일 밤 12시경 26세의 어머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셨으니, 내가 누구라고 했어도 나로서는 생소할수밖에 없었다.
따지고 보면 내가 30세손이니, 나는 25세조 둘째이신 양재관 고조부님 자손이고, 넷째이신, 양관열 선조님의 장남이신, 양진필 선조님의 넷째이시니, 나로서는 그 당시 알길이 없었다.
25세조 양 수경(梁 守京)의 자녀
232. 26世祖(세조) 장남 - 양 유관(梁 有寬) - 의령여씨(宜寧余氏) - 여 봉연(余 奉連).
233. 26世祖(세조) 차남 - 양 재관(梁 再寬) - 김해배씨(金海裵氏) - 배 묘아( 裵妙兒). 나의직계 조상님
234. 배씨(裵氏)의 인물(人物).
235. 26世祖(세조) 삼남 - 양 관철(梁 寬哲) - 제 순남(諸 順南) -초계정씨(草溪鄭氏) 정창악(鄭昌岳).
236. 26世祖(세조) 사남 - 양 관열(梁 寬烈) - 해주오씨(海州吳氏) 오 율금(吳 律今).
237. 26世祖(세조) 오남 - 양 관업(梁 寬業) - 초계정씨(草溪鄭氏) 정 건아(鄭 件兒).
http://blog.daum.net/bangyang/155
26세조 양 관열(梁 寬烈)의 자녀
261. 27世孫(세손) 장녀 - 양 명아(梁 命兒) - 김씨(金氏).
262. 27世孫(세손) 차녀 - 양 영아(梁 永兒) - 구 세희(具 世喜).
263. 27世孫(세손) 삼녀 - 양 명선(梁 命先) - 서씨(徐氏).
264. 27世祖(세조) 장남 - 양 진필(梁 振弼) - 김 말악(金 末岳). - 부산에서 만났던 양봉찬 할아버님의 부친이시다.
27세 梁 振弼(양 진필)의 자녀
315. 28世祖(세조) 장남 - 양 봉기(梁 鳳琪) - 행방불명(行方不明)
316. 28世祖(세조) 차남 - 양 봉운(梁 鳳云) - 김 순악(金 順岳)
317. 28世祖(세조) 삼남 - 양 봉염(梁 鳳廉) - 정 일선(鄭 一善)
318. 28세손(世孫) 사남 - 양 봉상(梁 鳳尙) - 서 윤수(徐允守)
319. 28세손(世孫) 오남 - 양 봉생(梁 鳳生) - 경주최씨(慶州崔氏)
320. 28世祖(세조) 육남 - 양 봉찬(梁 鳳贊) - 이 점순(李 占順) - 부산에서 만났던 할머님
28세 양 봉찬(梁 鳳贊) - 梁 振弼(양 진필)의 四男(사남)
- 이 점순(李 占順)
양 진필(梁 振弼) - 김 말악(金 末岳)의 4남 .
1916년 병진년(丙辰年) 12월 26일 생. 주민등록 번호 - 161226-112
주소지는 관포리(冠浦里) 428번지
묘소(墓所) : 묘소는 알길이 없다. 연락이 안된다.
李 点順(이 점순) - 부:李今春(이금춘)-모:金氏(김씨) 慶州金氏(경주김씨)
1923년 계해년(癸亥年) 4월 26일 생. (호적 기록 참조)
1922년 임술년(壬戌年) 4월 26일 생. (1986년 병인보(丙寅譜) 참고)하청면 대곡리 461의 3번지 李今春(이금춘)의 아들과 1939년 己卯年(기묘년) 5월 5일. 양 봉찬(梁 鳳贊)과 婚姻(혼인) 신고, 칠천도 李氏(이씨) 가문에서 출가오심.(문중초단 기록), 1986년 丙寅譜牒(병인보첩)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 하고 있다.
1922년 壬戌年(임술년) 4월 26일 생. 주민등록 번호 - 230426-21
그때는 그분들이 누구이신지 몰랐다. 그 분이 바로 봉찬(鳳贊-1916년 생)이 할아버지의 부인이신, 이점순(李占順-1923년생) 할머님께서 나를 알아보시고, 무척 반갑다며, 내가 모르는 많은 이야기를 하시면서 돌아가신 어머님의 이야기를 너무나 자상하게 하시면서 반가워 하시면서 여러가지 말씀을 들려 주셨다.
장목 월광 사진관을 경영하시던 한 재운 고모부님은 돈 안받으시고, 언제나 친구들 데리고 가면 사진을 촬영해 주셨던 추억이 남아있다.
고모부님은 엄마없이 고생하는 모습을 지켜 보면서 늘 격려 하셨다. 마산에 사진 인화지나 필림을 사 오라며, 신부름을 많이 시켰다. 초등학교 졸업 후 집에서 할아버지 농사 거들고 시간이 있다고 생각하고, 마산에 인화지를 구입하여 갈때는 꼭 고모부님은 정심값은 따로 챙겨 주시면서 밥 사먹고 오라고 했다. 그래서 때로는 떡도 사먹었던 추억이 있다. 동생 성영이는 믿지 못하고, 성권이는 마산에 유학 보내고, 금이야 옥이야 키웠다. 1960년 경 서울에 오시면 남산에 근무하던곳도 꼭 찾아 오셨다. 식사 대접한다고 식당에 가도 신세를 지지않으시던 칸칸하시던 고모부님의 성격 많이 생각 난다. 서울에서나 미국에서나 전화하면 반갑다고 하시던 고모부님 ~ 그 音聲(음성) 귀에 쟁쟁 합니다.
고모부님의 추억은 교회를 다니시기 전, 가끔 술이 곤드래 만드래 되어 몸을 부축 하지 못할 정도가 되어, 겨우 시루성(甑城증성)에 오시면 할머님께서 항상 나를 부축하고, 송진포까지 같이 따라 가라고 해서 갈때는, 우리 성권이랑 사이 좋게 도우면서 살아야 한다고, 하시던 모습이 선 하다. 취중에 말이 진담이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부축하고 같이 가다가도 때로는 도로에 같이 넘어지면서 자정이 훨씬 넘은 깊은 밤에 도착하면, 고모님께서 잠도 못 주무시고, 기달렸다가 가까스로 부축해서 눞이고는, 팔다리 상처난곳을 "빨간 아카칭키"를 발라주면서 얼굴에도 군데 군데 바라주시면, 따갑다고 소리도 지르면서, 잠이 들곤 했다. 아침 일어나면 논두렁에서 야채 뽑아 국끓여 주시던 고모님 생각난다.
고모부님께서는 일본에 누님 따라 가셔서 사진학을 전공 하시고, 고국으로 歸還(귀환)하실때 金(금)을 가지고 오셔서, 그 金(금)을 팔아 큰 운반선을 구입하셔서 관포 동네 바다에 띄워 둔 큰 배를 본 생각이 난다. 그러다가 태풍으로 배를 잃었는지 사업에 실패했는지 배를 잃고, 장목 손근수 장노님과 항상 술에 곤드레 만드레 되어 주정을 많이 하셨던 것으로 기억 난다. 그러다가 교회를 나가기 시작하여 180도 사람이 달라지셨다.
1959년 그때에 인기리에 공개된 영화로 《비극은 없다》였다. 라디오 방송을 통해 흘러나오는 곡은 삽시간에 젊은 학생들에게 전해졌다. 그 때에 불렀던 추억의 유행가다. 이 영화의 배역은 김진규, 김지미, 최무룡, 양미희, 최남현, 장동휘, 황정순, 김칠성, 방수일, 김정옥, 최승이, 1960년 제3회 부일영화상을 받고 김진규가 남우 주연상을 받았다. 고등학교 시절의 선망의 대상이였던 분들이다. 그 영화의 주제곡이다.
가을학기 하청중고등학교에서 학예를 개최할때 각 학급 대항 노래자랑에 나가 나는 " 방아타령" 타령을 불러 인기리에 박수갈채를 받았었다. 연습이 필요없었다. 그때는 학교에 있던 풍금에 두어번 곡을 마추고, 무대에 올라섯다. 이 곡은 장목초등학교 때 부터 학년에 올라가서 학예때 마다 음악합창단에 뽑혀 불렀던 노래였기 때문에 쉽게 부를수 있었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에라 ~ 봄이 왔네 ~ 삼천리 강산 ~ 우리네 동산 안에 다시 봄이 돌아왔네 ~ 수양버들 가지들 사이로 물찬 제비떼 놀아있고, 맑은 시내 졸졸졸 흘러서 병든 이땅을 싯쳐가네~ 에에라 ~ 씨를 뿌리며~ 우리네 봄을 노래하자 아~ 에헤헤야아~ 에라 우겨라 방하로구나~ 꽃이랑 꺽어서 어깨에 매고 가자 ~ 돌아 가자 ~ 우리네 마을로 돌아가자아아~ 에헤헤야아 에라 우겨라 방하로구나~ 훈육주임 선생님댁에서 가정교사를 하면서 다닐때 그날 저녁 김성재 선생님께서 양군 ~ 자네 ~ 노래는 언제 그렇게 배워 그렇게 잘하느냐고 저녁 식사 시간에 말씀하시던 추억이 떠 오른다.
겨울 방학때 장목 月光(월광) 사진관 한재운 고숙부님께서 촬영.
1959년 하청고등학교 1학년 겨울 방학때 그애는 부산 남여중 다닐때이고, 이후 몇장의 사진을 보내 왔는데 ....
1960년 서울에서 서라벌 고등학교 3학년에 월반하여 다닐때도 편지와 사진을 보내왔다.
1960년 11월 27일, 겨울 방학때를 이용해서 부산에 갔을때 만나, 경자동생과 촬영한 사진과 독사진등 사진을 전해주고, 혜어졌고, 그 다음날 11월 28일은 동아고등학교를 다니던 강호원군과 영도 입구 천사당 빵집에서 만난후 서로의 삶에 쫓기면서 우리는 영영 만날수가 없었다. 그후 소식에 의하면 마산으로 出嫁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때 염주동 개천옆에는 노점 식당들이 즐비하게 있었는데, 6.25사변 이후 염주동 개천 옆으로 수 많은 노점 식당들이 즐비하게 있었다. 6.25동란 직후 자손들의 교육을 위해 미래를 바라보고 부산으로 이주하여 수많은 곤란을 당하면서 꿈을 이루어 지금은 자손들이 成家(성가)하여 잘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리고 미국에서 수차에 걸쳐 수소문하여 찾아 전화를 걸어 족보도 올려 줄려고, 대원이 철원이와 통화를 할려고 시도 했지만 소식이 끓겼다. 양 대원(梁 大原)이 아저씨가 암으로 고생하신다며, 金 祐廷(김 우정)숙모님과 수차에 걸쳐서 통화를 하다가 이제는 소식을 알길이 없다.
새벽에 보리밥 한그릇 우물물에 말아 먹고 왕복 40리를 걸어서 다니던 무리로 온종일 지칠대로 지친 모습이다. 사진관에 고종사촌 동생 셋째 성덕(成德)이가 음력으로 1956년 병신년(丙申年) 8월에 태어났으니 이때가 3살때인가 생각 된다. 고모부님께서 수업을 마치고 하청에서 걸어서 오는 나를 만나 사진을 촬영해 준다며 3장을 촬영하시면서 급하게 현상을 해야하니 필림을 버리기 아깝다고 하시며, 독사진을 2장 촬영하시고 아빠 따라 나온 성덕이와 같이 촬영해 주신 사진이다.
새벽에 보리밥 한그릇 우물물에 말아 먹고 왕복 40리를 걸어서 다니던 무리로 온종일 지칠대로 지친 모습이다. 사진관에 고종사촌 동생 셋째 성덕(成德)이가 음력으로 1956년 병신년(丙申年) 8월에 태어났으니 이때가 3살때인가 생각 된다. 고모부님께서 수업을 마치고 하청에서 걸어서 오는 나를 만나 사진을 촬영해 준다며 3장을 촬영하시면서 급하게 현상을 해야하니 필림을 버리기 아깝다고 하시며, 독사진을 2장 촬영하시고 아빠 따라 나온 성덕이와 같이 촬영해 주신 사진이다.
새벽에 보리밥 한그릇 우물물에 말아 먹고 왕복 40리를 걸어서 다니던 무리로 온종일 지칠대로 지친 모습이다. 사진관에 고종사촌 동생 셋째 성덕(成德)이가 음력으로 1956년 병신년(丙申年) 8월에 태어났으니 이때가 3살때인가 생각 된다. 고모부님께서 수업을 마치고 하청에서 걸어서 오는 나를 만나 사진을 촬영해 준다며 3장을 촬영하시면서 급하게 현상을 해야하니 필림을 버리기 아깝다고 하시며, 독사진을 2장 촬영하시고 아빠 따라 나온 성덕이와 같이 촬영해 주신 사진이다.
양 봉화(梁 鳳化) - 尹 有粉(윤 유분)의 三女(삼녀)
1924년 甲子年(갑자년) 陰曆(음력) 10월28일 새벽 4시 寅時(인시) 生(생)
1924년 甲子年(갑자년) 陽曆(양력) 11월24일 생 (호적:1924년12월 9일 생)
1942년 壬午年(임오년) 8월11일 경남 창원군 진동면 사동리 248번지 청주한씨(淸州韓氏) 한 재운(韓 載雲)씨와 혼인 재적.
墓所(묘소) 長木(장목) 共同山(공동산) 1991년 4월 15일에 비문을 세웠다고 기록하고있다.
고모님께서는 타고난 성품이 어질고 착하고 고왔으며, 장노교회 장노이신 남편을 따라 기독교 신앙생할을 열심히 하셨다. 墓所(묘소)는 2012년 임진년 12월 14일 금요일 밤 9시 남편 한재운 고모부님 사망으로 고성으로 遷墓(천묘)
셋째 딸 성선(成仙)이와. 한 재운(韓 載雲)고숙부님.(57세때의 모습) 항상 多情多感(다정다감)하시던 梁又岩(양또암)숙부님의 배필(配匹)이신 徐宗今(서종금-36세때의 모습))숙모님께서 손을 흔들며 다정하게 잘가라고 한다.
장례식을 마치고 그 다음날 떠나는 장목 부두에서~ 1973년 建國(건국 26년) 계축년(癸丑年) 음력 10월 11일.(양력 11월 5일 토요일)
한 재운(韓 載雲) - 음력 - 1916년 병진년(丙辰年) 12월20일생 - 양력:1월13일생.
- 2012년 임진년 12월 14일 금요일 밤 9시 선종 壽(수) 96세
- 묘소는 경남 고성으로 모셨고 선대 부친의 산소는 진동에 모셨다고 함.
- 일본 동경에서 오리엔탈 사진전문학교에서 사진 전공을 수학하시고 평생을 장목에서
- 월광사진관을 경영하시면서 거제 특히 장목 면민들의 추억어린 사진을 수십년 동안 만들었는다.
- 면민들은 모든 경조사의 사진하면 월광사진관 한 재운 고숙부님을 찾았다.
양 봉화(梁 鳳化) - 尹有粉(윤유분)의 삼녀이신 양연이(梁連伊)고모님과 뒤에 한재운 고숙부님의 모습이 보인다.
양 연이(梁 連伊) 고모님께서는
1924년 甲子年(갑자년) 陰曆(음력) 10월28일 새벽 4시 寅時 生
1924년 甲子年(갑자년) 陽曆(양력) 11월24일 생 .
(호적:1924년12월 9일 생)
1942년 壬午年(임오년) 8월11일 경남 창원군 진동면 사동리 248번지 청주한씨(淸州韓氏) 한 재운(韓 載雲)씨와 혼인 재적.
墓所(묘소) 長木(장목) 共同山(공동산) 1991년 4월 15일에 비문을 세웠다고 기록하고있다. 장례식을 마치고 그 다음날 떠나는 장목 부두의 전경 1973년 建國(건국 26년) 계축년(癸丑年) 음력 10월 11일.(양력 11월 5일 토요일) (49세때의 모습)
장목 사진관 梁演伊(양연이) 셋째고모님 1942년 18세 결혼때의 모습.
장남:성권(成權) - 음력-1942년 임오년(壬午年) 8월 15일.묘시생.
양력-1942년 9월 25일생.- 055-248-8787-마산거주
배위(配位) - 초계정씨(草溪鄭氏)정 정자(鄭 貞子)
음력 1942년 임오(壬午)년(음)12월 30일생. (양) 2월 4일생
차남:성영(成榮) - 음력-1944년 갑신년(甲申年) 11월 일 생.- 055-635-1023-장목거주
장녀:복선(福仙) - 음력-1949년 기축년(己丑年) 9월 10일생.
양력-1949년 기축년(己丑年) 10월 31일생.- 02-534-9292-서울거주
서(壻)-조 남상(趙 南相) 풍양조씨 - 음력-1949년 기축년10월14일생. 양력:12월 3일
딸-주연(珠姸) 일본인(日本人)에게 출가하여 日本(일본)에서 거주(居住)
음력-1975년 을묘년(乙卯年) 4월 21일 아침 6시 묘시생
차녀:복이(福伊) - 음력-1951년 신묘년(辛卯年) 12월 28일생. -055-244-2063-마산거주
서(壻):김 성충(金 成忠) - 장남:김 동욱-차남:김 종욱
삼녀:성선(成仙 -19세대의 모습)
삼녀:성선(成仙) - 음력-1954년 갑오년(甲午年) 월 일생. -052-264-3655-울산거주
삼남:성덕(成德) - 음력-1956년 병신년(丙申年) 8월 일생. -055-688-3205-거제거주
사남:성만(成萬) - 음력-1958년 무술년(戊戌年) 월 일생. -055-295-4382-마산거주
사녀:성신(成信) - 음력-1962년 임인년(壬寅年) 월 일생. -011-855-5475-거제거주
오녀:성자(成子) - 음력-1963년 계묘년(癸卯年) 11월 5일생. -051-895-4102-부산거주.
梁鳳化(양봉화)할아버님, 장례식을 마치고. 그 다음날 떠나는 장목 부두에서~ 1973년 建國(건국 26년) 계축년(癸丑年) 음력 10월 11일.(양력 11월 5일 토요일)
梁鳳化(양봉화) 할아버님, 장례식을 마치고 그 다음날 떠나는 장목 부두의 전경
1973년 建國(건국 26년) 계축년(癸丑年) 음력 10월 11일.(양력 11월 5일 토요일)
이제는 거가 대교로 없어진 부산 거제간의 여객선은 항상 가고 오는 사람들로 붐볐다.
양봉화(梁鳳化) 할아버님, 장례식을 마치고 그 다음날 떠나는 장목 부두의 전경 1973년 建國(건국 26년) 계축년(癸丑年) 음력 10월 11일.(양력 11월 5일 토요일)
장례식을 마치고 그 다음날 떠나는 날 저도섬을 지나자 태풍이 불어 심한 뱃 멀미를 하여 요안나는 너무 힘들어 했다.
1973년 建國(건국 26년) 계축년(癸丑年) 음력 10월 11일.(양력 11월 5일 토요일)
장례식을 마치고 그 다음날 떠나는 날 저도섬을 지나자 태풍이 불어 심한 뱃 멀미를 하여 요안나는 너무 힘들어 했다.
1973년 建國(건국 26년) 계축년(癸丑年) 음력 10월 11일.(양력 11월 5일 토요일)
1973년 建國(건국 26년) 계축년(癸丑年) 음력 10월 11일.(양력 11월 5일 토요일) 할아버님, 장례식을 마치고 그 다음날 떠나는 부산 자갈치에서 김 황수군과 작별을 하고 기념 촬영.
1973년 建國(건국 26년) 계축년(癸丑年) 음력 10월 11일.(양력 11월 5일 토요일) 할아버님, 장례식을 마치고 그 다음날 떠나는 부산 자갈치에서 김 황수군과 작별을 하고 기념 촬영.
좌측이 필자 양방수 가운데는 농소에 사는 장목중학교 동기로 장목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진학하지 않아 이후로는 영영 만나지 못한 잊지 못한 다정한 친구였다.
1959년 11월 하청고등학교를 찾아와 같은반에서 同門修學(동문수학)하던, 鄭虎雄(정호웅)군과 만나 기념 촬영한 사진이 남아있어 남긴다. 정호웅(鄭虎雄)군은 누님의 도움으로 착실히 공부할수있었던 幸運兒(행운아)였던 것 같다. 1942년 8월 16일에 출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뜻밖에 댓글 첫번째 소식이 왔다.
대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현재 버드레(유호)에 살고 있는 올해 42세인 김원영입니다. 이렇게 훌륭한 대선배님이 계시다는 것이 저에게는 엄청난 영광입니다. 사진에 정호웅교수 고교시절 사진을 보니 엄청 교수님이 그립습니다. 대학 2학년때 우연히 만나서, 알고보니 이모랑 농소국민학교 동창이시고, 정호웅교수님과 왕래도 많이 했고, 도움도 많이 받았고,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돌아가시기 전 경상대 병원에서 두발이 절단된 모습을 보고,얼마나 슬퍼던지,지금 살아 계셨더라면 자주 찾아 뵐건데 아쉽습니다. 앞으로도 대선배님 자주 인사 올리겠습니다.
김원영(장중39회) 이메일:won8356@hanmail.net, H.P)010-4548-0611
김원영 2016년.04월.19일 05시:01분
두번째 소식이 왔다
대선배님,저는 장목초등학교 52회 졸업생입니다.
저는 옛날에 MBC 내고향 버드레 주인공(고. 김자옥역)이주림님의 막내 아들 입니다.
★네번째소식에서 사진까지 보내주신 후배님에게 감사 합니다.★
아버지는 충청북도 출신이신데 거제에서 초등학교 주로 장목면에서 교편생활을 하시다가 거제 고현에 있는 거제신현초교 교장을 끝으로 정년퇴임하신 분이십니다. 과거 저는 모르겠는데 저의 외조부님께서 장목면에서 날리시던 이상고님의 외손자 됩니다. 그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열심히 공부하시어, 지금 미국에 살고 계시는 대선배님의 블로그를 보니, 정말 한편의 드라마 같고 소설 같습니다.
우리 마을에 양장근이라는 어르신이 계신데, 그분을 통해서 대선배님 이야기를 얼핏 들었습니다. 농소마을에 가서 철저히 알아보고 사진속의 인물이 누구신지 조사한후 대선배님께 연락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라도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보낸 사람: won8356@daum.net이 김원영(won8356@hanmail.net)
보낸 날짜: 2016년 4월 20일 수요일 오전 3:34:07
받는 사람: YangBang (bangyang@hotmail.com)
1980년 경에 KBS에서 인기리에 방영하였던 [전설의 고향]편중에 [살아서는 鎭川이 좋고, 죽었서는 龍仁이 좋다]라는 이야기로 유명한 鎭川(진천)이 김원영군의 아버님께서 태어 나신곳이 라니, 참 神氣(신기)하네요. 1980년경에 기록영화 제작을 依賴(의뢰)받아 촬영을 하기 위해 증권감독원 양만석 부장의 안내로 그곳을 찾아가던 추억이 있는곳입니다. 아래는 진천군에서 만든 [生居鎭川의 由來]를 담은 鎭川郡(진천군)의 이야기 입니다. 疊疊山中(첩첩산중)으로 알았던 鎭川(진천)땅을 양방수도 가 보았읍니다.
아래 진천땅 크릭 하세요
http://blog.daum.net/bangyang/2106
세번째 소식이 왔다
선배님,선배님의 연배가 우리 아버지 연배라서 극존칭을 썼습니다. 양해해 주십시오. 원래 저는 성격이 어릴때부터 남을 돕는것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제가 무슨 댓가를 바라거나 불순한 의도로 선배님께 잘보이기 위해서 그런것도 아닙니다. 훌륭한 선배님을 안다는 것이 저에게는 행운이 아닐까요? 정호웅 교수님은 농소에서 하청중학교 1학년까지 다니시다,칠천도로 이사를 가셨다고 언젠가 교수님께서 사석에서 저한테 그런 애기를 하셨습니다.
그후,진해 고교를 거쳐 동국대학교 경영대에 입학하셔서,경영대 학생회장도 하셨고,군대는 면제 받은걸로 알고 있습니다. 미국유학도 갔다오셨고, 그후 서울 명지대등 기타 대학에서 강사를 하시다가 경상대학교 교수로 임용되셨는데,경상대및 거제시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셨습니다.
슬하에 1남 2녀를 두셨는데,장남인 큰아들은 연대 졸업후 서울에 살고 있고,큰딸은 숙대 약대를 졸업하고 진주에서 약사롤 일하고 있고,막내딸은 부산대 졸업후,결혼후 전업 주부로 일하고 있습니다. 정교수 사모님은 현재 진주에 살고 계시고,아주 가끔 저희 집에 전화가 옵니다. 선배님,거제에 궁금한 점이나 지인들의 근황등이 궁금하시면,언제 든지 메일 보내십시오. 도와 드리겠습니다.
★소식 고맙습니다. 지난 반세기를 회고해 보면 참으로 많은 사건이 있었던 추억이 주마등 처럼 지나가네요, 한세대가 지나고, 다음 후손들의 세대에는 더 많은 꿈과 이상으로 인류의 행복과 정겹고 즐거운 삶을 엮어가는 보람차고 행복한 세대가 하루속히 이루어 지도록 기도 합니다.
네번째 소식이 왔다.
저 김 원 영 사진입니다. 그리고, 어머니께서는 관포에 사시는 양평자(일명 :양숙자:부산남성여고 졸업후 장목중학교에서 교편생활)씨하고 장목중학교 1학년때, 아주 친하게 지냈셨다고 하군요. 선배님, 집안 분같은데? 어머니께서는 장목중 1학년 2학기때, 마산여중으로 전학을 가셨고,그후 마산여고를 졸업하시고 아주 잠시 교편을 잡으셨습니다. 저 사진 보냅니다. 아주 못생겼죠?
보낸 사람: | won8356@daum.net이 김원영(won8356@hanmail.net) 대신 보냄 이 보낸 사람이 대화 상대 목록에 있습니다. |
보낸 날짜: | 2016년 4월 24일 일요일 오전 7:55:48 |
받는 사람: | YangBang (bangyang@hotmail.com) |
1950년 6,25사변이후 정치 사회 경제가 혼란하고 문화 시설이 미비하여 요즈음같이 T,V.나 라디오같은 시청각 시설이 없었던 때여서 어쩌다가 육지에서 "마당치기" 假設劇場(가설극장)이 사시사철(四時四節) 가리지 않고 오면 국민학교 교실에서, 혹은 운동장에서, 장목 부두에서. 때로는 논 바닥에서 포장을 치고 公演(공연)하면 온 面民(면민) 男女老少(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몰려와서 구경했지 않았습니까?!
연극으로는 장화홍련전" "심청전" "이 수일과 심 순애" 無聲(무성)영화가 유행하던 그시절 그 때는 辯士(변사)가 구수한 음성으로 "아리랑" "자유부인" "정의의 진격" "피아골" 등등 특히 "우리들의 心琴(심금)을 울려준 "檢事(검사)와 女先生(여선생)" 등은, 당시의 농어촌 시골 청소년들에게 유일한 꿈과 낭만을 심어 주었던 좋은 추억으로 생각 됩니다.
그때 선배들께서 그랬듯이 저 역시 1958년(음력 8월 15일:양력 9월 27일)추석때 동네 우리 또래 친구들을 모아서 "공포의 밤 12시"라는 제목으로 추석맞이 연극 공연을 하려고, 秋夕(추석) 전날 리허설(rehearsal)을 할 때인데, 그때 軍(군)에서 휴가중인 아저씨께서 소문을 듣고 저의 집으로 찿아 오셔서 대견하게 생각 하시고 격려해 주시면서 자상하게 지도해 주시고 갔지 않았습니까?
그때 저는 각본, 연출을 시험무대로 올렸던 꿈 많던 시절의 경험으로 1961년 藝高 졸업후 박영식 감독과 함께 기록영화 제작을 할때, 아동 문학가로 아동동화 작곡가로 유명한 주평씨를 자주 만났읍니다. 그분의 선친은 관포 어업조합 理事로 근무 할 당시, 관포 저의 집 아랫채에서 살았다면서 우리 고모님들의 이름을 다 기억 하고 있었읍니다.
당시의 장소팔 고춘자 漫談(만담)은 人氣絶頂(인기절정)이였읍니다. 희극
지금 생각해 보면 유치하다고 생각 하겠지만 ~ 그 내용이란 이렇다. 무대에 오른 고춘자를 따라 장소팔이 고춘자에게 건네는 수작소리가 들려 온다. 오~ 신이시여 ~ 사하라 사막과 같이 쓸쓸한 이 가슴에 아름다운 장미꽃 한 송이를 주시옵소서~ 저 강가에 휘늘어진 수양버들 모양으로 날씬한 저 허리~ 그리고 팡파짐하고 탐스러운 저 엉뎅이 ~ 아 ~ 저 가슴~ 이하 생략 ~
finale를 裝飾하는 노래 ~
① 당신이 나아를 사랑하신다면 파마머리 한번만 해 주세요 ~ 파마머리는 행팬없단다. 단발 머리 어떻냐? 싫어 싫어 나는 싫어~
남이 부끄러워요~
② 당신이 나아를 사랑 하신다면 뻬딱구두 한컬레 사아 주세요 ~ 뻬딱구두는~ 행팬없단다. 짚신이 어떻냐? 싫어 싫어~ 나는 싫어 ~
남이 부끄러워요~
③ 당신이 나아를 사랑하신다면 베리또(비단)치마 한 감만 사아 주세요 ~ 베리또(비단)치마는 행팬없단다. 삼베치마 어떻냐?
싫어 싫어 나는 싫어 남이 부끄러워요~ 이하 생략 ~~~
뒷줄:강양명, 김정용, 김호근, 양방수. 황수복.
앞줄:황상근, 양학윤, 양종아, 황광용, 추복부.
"공포의 밤 12시"는 장목중학교 2학년 김기태 담임 선생님으로 부터 수업시간에 들려주었던 이야기로 저가 직접 각본을쓰고, 연출을 한다고, 연습장이 없어 우리집 안방에서 연습을 했을때, 동네 친구들의 극성으로 안방 구들이 내려 앉아 할아버님께 야단을 맞을 정도로 철부지였다고 생각합니다.
[공포의 밤12시] 脚本(각본scenario)과 演出(연출):양방수-주인공: 인호(황광용), 계모(황상근),인호아버지(김정용),
엄마귀신(양종아), 장비호탐정(양방수), 동네사람들:황수복,추복부,양학윤, 키타반주(강양명).
장소팔,고춘자의 만담역으로 분장한 筆者(필자)의 모습. - 양숙자(평자) 누님. 부산 남성여고 시절.
漫談(만담) 脚本(각본scenario)과 演出(연출
양평자 누님은 부산남성여고 졸업후 1960년 11월 12일부로 장목중학교에서 강사로 시작하여
교편생활을 하다가 1964년 4월 1일부로 그만두고, 出嫁를 하였습니다. 그 내용입니다.
공연날에는 인근 동네 마을, 등밑에서 궁농, 두모, 장목, 심지어 농소에서도 대금에서도 친구들이 구경하러 와서 관포 洞舍(동사)에는 超滿員(초만원)을 이루었읍니다. 부산 남성여고에 다니던 淑子(숙자) 누님의 모자, 시계, 원피스, 구두까지 빌려 신고 숙자 누님께서 분장까지 해 주셔서 개회사를 했읍니다. 평소에 情(정)이 많았던 누님께서는 참으로 열심히 도와 주셨읍니다. 추석날! 공연장에서도 아저씨께서 찬조 출연으로 노래도 불러 주셨던 추억이 지금도 走馬燈(주마등)처럼 떠오르며 잊을수 가 없읍니다. 그때 불러 주신 내용도 기억합니다. 그 노래 다시 한번 불러 봄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ZGzWUaF31Ak
Trot곡으로 2/4 박자 D major "손 로원 작사. 백 영호 작곡. 방 태원 노래"인 " 마음의 자유천지 " 라는 제목으로 내용은 "白金(백금)에 보석 놓은 王冠(왕관)을 준다해도, 흙 냄새 땀에 젖은 배적삼만 못하더라. 순정에 샘이 솟는 내 젊은 가슴속에 내 마음데로 버들피리 꺽어도 불고 내 노래 곡조 따라 참새도 운다"라는 노래 였는데, 노래가 끝나자마자 관객 모든 분들이 열렬한 박수로 재창(再唱)을 요청 하였던 추억이 떠 오름니다. ~장목중학교 교사였던 양종식 아저씨 추모사에서 ~
1960년대에 어쩌다가 고향에 내려가면 언제나 문중 어른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오라는 부친의 말씀데로 중학교에 잠시 들려서 아저씨에게 인사차 방문했을 때인데, 마침 學藝會(확예회) 발표를 앞두고 "효동왕자와 낙랑공주"라는 제목으로 劇(극)을 만들어 열심히 지도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때 촬영한 사진도 한장 주셔서 저가 보관하고 있던 사진입니다.
~장목중학교 교사였던 양종식 아저씨 추모사에서 ~
거제관포 남원양씨의 소원록 아래
http://cafe.daum.net/akfrkf/DqmX/5
1962년 10월 1일. 보병 제25사단 71연대 인사과 근무 시절의 양명생(前 부산지방 식양청장). 서근숙군이 군입대 기념으로 촬영.
국군의 날을 기하여 면회후 서울에서,김옥녀,양정자, 서옥자. 장목중학교, 동창들과 양방수.
그때 그시절 아래
① http://blog.daum.net/bangyang/1990
② http://blog.daum.net/bangyang/1986
오른쪽부터 1959년 Miss Korea 오현주, 복혜숙, 양방수.
眞에 당선된 오 현주 여사는 미스 유니버스에,참가하여 3개 부문에서 입상하였다. 한국전쟁 직후 미스코리아 대회에서 진(眞)을 거머쥐고 세계 무대에서, 한국의 미(美)를 알렸던 오 현주 여사도 2010년 5월 11일 오전 2시15분 숙환으로 자택에서 향년, 71세로 세상을 떠나셨다.
한국영화의 어머니로 불리는 복혜숙(본명: 복마리아)여사는 1904년 4월24일 동대동에서 후일 감리교목사가 되는 아버지 복기업씨와 어머니 이씨 사이에서 셋째딸로 태어나셨다고 한다. 그 분들의 주옥같은 이야기는 아래 꿈많던 그때 그시절 그 사람들 이야기에 남아있다. 아래를 크릭 하길 ....육사의 아버지 서근구형님도 떠나셨다....
꿈 많던 그때 그 시절 그 사람들 아래.
① http://blog.daum.net/bangyang/1257
좌로부터 = 농소:김복권.관포:양방수, 율천:구천영, 관포:서근구 夫婦, 경북의성:박경덕 夫婦, 관포:황광용,
1960년대 陸士(육사) 제17기 生徒 結婚 記念式場, 陸士校庭에서
머나먼 타국에서 이렇게 고향 후배와 서로 대화를 할수있다는것은 컴퓨터가 발달하기 전에는 상상도 하지도 못했는데, 컴퓨터의 開發(개발)로 세계 어디든 이웃같이 소통이 가능하다.
컴퓨터 하면, 발명가 Thomas Alva Edison(1847년 2월 11일 ~ 1931년 10월 18일)의 노력으로 발전한 電氣(전기)의 연계선상에서 발전했고, Steven Paul Jobs( 1955년 2월 24일 ~ 2011년 10월 5일)의 노력의 결과이다. 이처럼 한사람의 노력과 희생으로 발전하여 인류의 삶이 편리하게 되었다. 고마운 일이다.
원컨데 김군의 앞날에 찬란하고 무한한 가능과 행복이 주어지기를 빈다. 고향 친척 형제간에도 고개를 돌리는 세상에 소식주고 신뢰하는 마음으로 사진까지 보내준 마음 깊이 간직하겠네~ 그 동안 핏줄의 연결 고리를 찾기 위해 머나먼 타국에서 전화로 족보를 만들면서 많은 수난과 멸시를 당했는데 김군의 소식을 보고 또다른 생각이 앞선다. 남들은 老妄이라고 할까 !? 아무튼 어제는 BEST BUY에서 3.1여성 단체에서 카메라 구입을 도와 달라는 요청을 받고 회장님 이하 몇몇 이사님들과 Nikon 5300을 구입해서 보니, 동영상 4k장치에 8시간 풀 촬영이 가능하고, 촬영한후 사진이나 동영상이 내 PC로 바로 연결되는 장치까지 개발하여[
오늘 정호웅군의 소식을 거제도 지방 史學家이신 이승철 선생님으로 부터 사진과 소식을 받았다. 당뇨 합병증으로 고생하다가 운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이 왔다. 학창 시절에는 꽃미남으로 학우들에게 조롱도 많이 받았고. 같은 반 김종순이 동생을 너무 좋아해서 학우들에게도 놀림도 많이 받았던 추억이 있다.
서울 재경 거제향우회에서 만난 김종순이는 장목에서 유일하게 여자로서 당시 고려대학교를 나와 촉망 받던 후배였는데 정호웅군이 만나서도 아는 척을 해 주지 않는다고 나에게 와서 투정을 부리던 추억도 있다. 담임선생님 훈육은 안들어도 양방수 소리 한번치면 조용하던 추억도 아직 남아 있다. 2살 아래 동생들과 학우가 되다보니 동창들이 선배라고 까불어 말 안들으면 주먹이 먼저 가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는 거제시 개발 자문위원, 거제시 경제 세무 자문위원, 거제시지 편찬위원, 경남 수필문학회 부회장, 경상대학 교수로 재직시에 크리스마스 카드를 날려 보내 주기도 하던 꿈많고 소박하던 학창 시절의 모습이 떠 오른다. 그는 경상 대학교 대학원장을 역임하고는 필자에게 소식이 영영 오지 않았다. 하청고등학교 다닐때 부터 항상 회계학을 전공하겠다고 포부를 밝히던 소박하던 그의 추억이 남아 있다.
하청고교 시절 정호웅군의 모습
말하지 안해서도 고등학교 1학년 때 동문수학 하던 시절의 친구가 궁금해 하며 가끔 소식을 띄우기도 했지만 서로가 제각기 주어진 일에 바쁘다 보니 연락을 못하고 결국 얼굴 한번 보지도 못하고 먼저 떠난 정호웅군이 저세상의 꿈이 이승에서 못다 이룬꿈 아름답게 이루어지고 아울러 회한(悔恨,)이 없도록 기원해 본다.
여기 하청고등학교 1학년 담임이셨던
朴 東俊(박 동준) 선생님께서 그 동안 나에게 보내온 소식이다.
- 1929년 己巳年(기사년)음력:8월23일(양력:9월25일) 巳時(사시)생.
문교부 중앙교원 자격 검정고시에서 중등학교, 고등학교 국어과에 동시에 합격하시어 1957년 4월 1일부로 敎員(교원)으로 발령을 받아 37년간 敎職(교직)에 몸 담아 오시다가 1994년 8월 31일 통영여자 중학교 교장으로 정년 퇴직 하셨다. 국어를 전공하신 은사님의 국어 고어교육시간에 나랏 말쌈이 하시면서 참으로 또렸 또렸하게 가르치시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필자가 1959년 하청 고등학교 재학 시절 1학년 담임이셨다.
국어를 전공하신 선생님께서 국어국문에 의문이 생겨 방학을 이용하여 국어국문학 양주동박사를 찾아 면담하신 이야기도 공부 시간에 들려 주시던 추억어린 이야기도 남아 있다. 우리 시대의 선생님들의 교육은 지금으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폭력이 많아지만 선생님께서는 참으로 자상하고 인정이 넘쳤다고 생각 되어 아직까지 대화를 나누는 실정이다. 2012년 9월 현재까지 건강하신 은사님과 자주 통화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주소 - 마산시 합포구 자산동 한우아파트 5동 402호. 전화 - 055-221-0776 ~
아들 : 박 정원 - 전화 : 031-711-0707
그 동안 박 동준 담임 선생님으로 부터 보내주신 글과 소식
1979년 원단 마산시 자산동 322의 6번지에서 1978년 12월 26일 우체국 소인
남원양씨 거제문중 병부공파 30세손 양 방수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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