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써 복을 지어야 한다
『증일아함』제4권「호심품(護心品)」제7경에 보면, 부처님이 사위국 기원정사에 계실 때의 일을 말씀하고 있다. 어느 날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복 짓기를 권하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대들은 복 받는 과보를 두려워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것은 그대들이 오늘의 복된 즐거움을 누리는 원인을 만들었기 때문이니, 그것은 매우 사랑하고 좋아할 만한 것이니라. 그것을 복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좋은 과보가 있기 때문이니라. 그대들은 복이 없음을 두려워해야 한다. 왜냐하면 괴로움의 근본으로서 근심과 괴로움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으며 즐거움이 없기 때문이니, 이것을 복이 없는 것이라 하느니라. 그러므로 수행자들이여, 그대들은 복이 없음을 두려워하라. 왜냐하면 그것은 괴로움의 근본으로서 근심과 괴로움은 이루 다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행자들이여. 나는 기억한다. 나는 과거에 7겁이 지나도록 이 세상에 오지 않았다. 또 7겁 동안은 광음천(光音天)에 태어났고, 7겁 동안은 공범천(空梵天)에 태어나서 대범천(大梵天)이 되어 짝할 이가 없이 대천세계를 통솔하였다. 또 36번이나 제석천(帝釋天)이 되었고, 수없는 세상에서 전륜성왕이 되었다. 또한 금생에 이르러서는 보리수 아래에서 수행했는데, 그때 악마 파순이 수천만 억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를 방해했다. 그러나 나는 복덕의 큰 힘으로 마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리고 모든 번뇌의 때가 사라져 더러움이 없어졌으며, 위없이 바르고 참된 도를 이루었다. 그러므로 수행자들이여, 그대들은 ‘복 짓기(作福)’를 게을리하지 말라. 복이 있으면 즐겁고 복이 없으면 괴로우니, 금생과 내생에 즐겁기를 바란다면 복을 지어야 하리라.”
사람들이 누리고자 하는 복락은 크게 다섯 가지다. 경제적으로 풍족해서 부족함이 없는 것(財), 이성과 아름다운 사랑을 즐기는 것(色), 맛있는 음식을 먹고 건강하게 사는 것(食), 이름이 사방에 알려져 존경받는 것(名), 편안하게 잠자고 오래 사는 것(睡) 등이다. 이를 오욕락(五慾樂)이라 한다. 중국의 고전『상서(尙書)』에서는 오래 사는 것(壽), 물질적으로 풍족한 것(富), 편안하고 건강한 것(康寧), 덕을 좋아하여 행하는 것(攸好德), 명대로 살다가 편안하게 죽는 것(考終命)을 오복(五福)으로 들기도 했다. 문제는 이러한 복을 누구나 누릴 수는 없다. 그래서 ‘재수 없는 사람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는 말이 생긴 것 같다.
사람들은 복을 받기 위해 신이나 부처님께 의지하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두 손 모아 빈다고 해서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복은 지은 대로 받는 것이지, 누가 선물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불교의 입장은 어떠한가. 부처님은 복을 받고 싶으면 복 받을 일을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를 ‘복 짓는 일(作福)’이라 하는데, 선행을 실천하라는 것이다. 부처님은 복을 지었기 때문에 마군을 항복 받고, 위없는 도를 이루었다.
우리는 매년 정초가 되면 ‘새해에 복 많이 받으세요’라며 덕담을 나눈다. 그러나 덕담이 현실로 드러나려면 복을 많이 지어야 한다. 어쩌면 많은 복을 짓지 않았는데, 굶지 않고 사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남보다 못하다고 불평하기보다는 이만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매일매일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증일아함』제4권「일입도품(一入道品)」제3경에 보면, 부처님이 사위국 기원정사에 계실 때의 일을 말씀하고 있다. 어느 날 부처님은 병든 사람을 보살피는 일이 얼마나 훌륭한 공덕인지에 대해 말씀하셨다.
“병자를 돌보는 것은 곧 나를 돌보는 것과 같고, 병든 사람을 간호하는 것은 곧 나를 간호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몸소 병자를 간호하고 싶기 때문이다. 수행자들이여. 나는 어떤 사람이나 사문이나 바라문이 하는 보시 중에서 병자를 돌보고 간호하는 것보다 훌륭한 것을 보지는 못했다. 병자를 돌보고 간호하는 보시를 참다운 보시라 할 수 있고, 병자를 돌보고 간호하는 보시를 해야 큰 과보와 공덕을 얻을 수 있고, 병자를 돌보고 간호하는 보시를 해야 좋은 이름이 두루 퍼지고, 마침내 감로의 법(不死, 解脫)을 얻을 수 있다. 여래나 아라한과 같이 바르게 깨달은 이는 모두 다 이 공덕을 지었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모든 보시 가운데 병자를 돌보고 간호하는 보시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병자를 돌보고 간호하는 보시를 하면 그것이 곧 참다운 보시가 되어 큰 공덕을 얻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그대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병자를 돌보아 주는 것은 곧 나를 돌보는 것과 다름없다. 그렇게 하면 그대들은 큰 복을 얻을 것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그대들은 병자를 돌보기를 나를 돌보듯이 하라. 그렇게 하면 언제나 큰 복을 얻을 것이다. 그대들은 이렇게 수행을 해나가야 하느니라.”
태국 방콕에서 북쪽으로 150km 떨어진 롭부리에 왓 프라 밧남푸라는 사원이 있는데, 에이즈에 걸린 환자들을 돌보는 에이즈호스피스(Aids-hospice)를 하는 절이다. 이 절의 아롱콧 스님은 에이즈로 고통받다가 죽어가는 사람들을 외면할 수 없어서 사람들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에이즈 문제가 정점으로 치달았던 1992년부터 과감하게 사찰을 개방했다. 그동안 이 절에는 수많은 에이즈 환자가 찾아와 몸을 의탁했다가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했다.
스님의 손으로 화장한 환자가 9천여 명이 넘는다고 하니, 밧남푸가 어떤 일을 했는지 짐작이 간다. 밧남푸는 호스피스 활동 외에도 에이즈박물관, 교육관, 학습장, 화장장 등을 운영했다. 이제 이 절은 국제적으로 유명한 곳이 되었고, 세계 곳곳에서 자원봉사자들이 찾아와 환자들을 돌보고 있다. 이에 힘입어 아롱콧 스님은 에이즈로 사망한 부모로 인해 고아가 된 아이들을 돌보는 에이즈 고아원, 노인을 위한 양로원을 운영하는 사업도 시작했다. 그야말로 에이즈 환자들이 편히 쉬다가 떠나는 ‘평화의 집’이 되었다. 스님이 에이즈 환자를 돌보기 시작한 이유는 단순한데, 에이즈 환자를 유기하는 것은 인간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누군가가 돌봐주는 가운데 죽을 권리가 있다. 그것이 에이즈든 무엇이든 간에…”
『법화경』에 등장하는 상불경보살(常不輕菩薩)은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공경해야 할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일체중생은 모두 장래의 부처님이다. 일체중생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존경하는 것은 부처님을 존경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증일아함』제11권「선지식품(善知識品)」제5와 제11경에 보면, 부처님이 사위국 기원정사에 계실 때의 일을 말씀하고 있다. 어느 날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은혜를 갚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 말씀하셨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은혜를 알고 은혜를 갚을 줄 안다면 그는 마땅히 공경할 만하다. 조그만 은혜도 잊지 말아야 하거늘, 하물며 큰 은혜이겠는가. 그는 나에게서 천리만리 떨어져 있어도 내 곁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나는 항상 은혜 갚는 일을 찬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은혜를 기억할 줄 모르고, 갚을 줄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나와 가깝지 않다. 비록 가사를 입고 내 곁에 있어도 내 제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항상 은혜 갚을 줄 모르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대들은 크든 작든 항상 은혜 갚길 좋아해야 하느니라.”
부처님은 모든 은혜중에서 부모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에 대해 말씀하셨다. “이 세상에서 두 사람에게는 아무리 착한 일을 많이 해도 그 은혜를 갚을 수 없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 두 사람이다. 수행자들이여. 어떤 사람이 왼쪽 어깨에 아버지를 모시고 오른쪽 어깨에 어머니를 모시고 천년만년 의복과 음식과 평상과 침구와 의약을 풍족하게 하여 공양했다고 하자. 또 그 부모가 어깨 위에서 오줌과 똥을 누더라도 자식은 그 은혜를 다 갚지 못할 것이다. 그대들은 알아야 한다. 부모의 은혜는 너무나 지중하다. 우리를 안아주고 길러주고 때때로 보살펴 주기를 쉬지 않은 까닭에 우리가 저 해와 달을 보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 은혜를 갚기 어렵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행자들이여. 부모에게 공양하고 항상 효순해야 하는데, 그 시기를 놓치지 말라. 그대들은 이처럼 생각하고, 공부해 나가야 하리라.”
옛날 중국에 양보(楊)라는 청년이 집을 떠나서 사천으로 가던 중에 어떤 나이 든 스님을 만났다. 스님은 그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그가 ‘무제보살(無際菩薩)의 제자가 되러 가는 길’이라고 하자, 스님은 ‘보살을 찾아가느니, 차라리 부처를 찾아가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라고 했다. 양보가 ‘부처는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물으니, 스님은 이렇게 일러 주었다.
“집에 가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신발을 거꾸로 신은 채 뛰어나오는 사람이 있을 거요. 그분이 바로 부처님이요.”
양보가 스님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듣고 곧장 집으로 돌아오니,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양보가 문을 두드리자, 잠자리에 들었던 어머니가 옷 입을 새도 없이 담요를 둘둘 말아 몸을 가리고는 신을 거꾸로 신은 채로 뛰어나왔다. 그 모습을 보고 크게 깨달은 양보는 이후 정성껏 부모를 봉양했다고 한다.
『부모은중경』에 보면, 부모님의 은혜를 열 가지를 말씀하고 있다. 잉태한 후 열 달 동안 지키고 보호해 준 은혜(懷耽守護恩), 출산하는 고통과 수고를 감내하신 은혜(臨産受苦恩), 출산 후 모든 근심을 잊어버린 은혜(生子忘憂恩), 쓴 것은 삼키고 단 것만을 먹여준 은혜(咽苦吐甘恩), 진자리 마른자리를 가려서 뉘어준 은혜(廻乾就濕恩), 젖을 먹여 길러준 은혜(乳哺養育恩), 더러운 몸과 옷을 깨끗하게 해준 은혜(洗濯不淨恩), 먼 길을 떠나면 항상 걱정해 준 은혜(遠行憶念恩), 자식을 위해서는 죄짓는 것도 감수한 은혜(爲造惡業恩), 끝까지 자식을 연민하게 여기는 은혜(究竟憐愍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