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명량> 영화가 한동안 관심을 끌었다.
충무공의 인장을 본 김에 여기 올린다.
강원감영에서의 거문고 연주 <여민락>과 함께 찬찬히 감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는 월전 장우성(1912-2005년) 화백이 20여년 수집해온 국내외의 역대 선현 인장/전각들을
1987년에 도록으로 펴낸 <반룡헌진장인보(盤龍軒珍藏印寶)>에 수록되어 있는 모습이다.
이미 80년대에 이처럼 인영만이 아니라 인면이나 인뉴 사진까지 수록한 점이 돋보인다. 이 인보는
1980년 국립민속박물관에서 '한국의 인장' 특별전을 열고 회정선생님 글*도 실린 도록이
나왔던 뒤로 아마 괄목할 만한 전각 관련 출판으로 한국전각사에 길이 기록될 것이다.
* 회정선생님 글은 pdf파일을 다운 받아서 볼 수 있음! ☞ http://www.nfm.go.kr/Data/daPub_view.nfm?seq=23&select_tab=0&searchYear=1980&searchWord=&nowPage=1&gubun_list=year
전각이 문화재로서의 가치까지 지닌다는 점이 서문에서도 강조되었지만, 역대 선현들의
인장만이 아니라 국왕 정조, 추사 김정희, 그리고 오창석이 판 운미 민영익의 인장들이 주목
되고, 특히 중국의 문팽 및 청대 전각작품들까지 수록되어 있는 귀중한 인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고, 지금 보아도 편집이나 장정 등이 잘 되었다고 보인다.
그런가 하면 일중 김충현, 청명 임창순 선생의 감수를 거치고 또 편집과정에서 확인되지 않는 전각
들을 뒤에 '대고( 待考)'라 하여 따로 수록하긴 하였으나, 지금 시점에서는 그래도 다소 미흡함이 눈에
띄는 것도 사실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거 같다.
책 표지 사진.
아래는 참고로 이 인보가 발간되었을 때 <동아일보>의 기사이다.
이 인보에서는 인명해설과 석문(인면/방각)을 달았을 뿐, 소장 연유나 그밖의 전각 유물 그 자체에
대한 언급은 따로 덧붙이지 않았다.
몇몇 주목되는 것들을 담아보았다(클릭해서 크게 보기 바람!).
정조 임금의 '만기'.
정다산의 인장.
추사 김정희. '완당 자각'이란 석문이 눈에 뜨임!
옹방강이 추사에게 보내온 전각.
같은 인문인데 여기도 '완옹작'이란 말이 보임.
대원군의 인장.
아래는 오창석이 운미 민영익(명성황후의 친정 동생)에게 파준 전각들 23방 중 둘.
아래는 위창 오세창의 전각들도 다수.
아래는 놀랍게도 북송대의 산곡 황정견 도장이라고!?
게다가 문팽 작품도 있다!
아래는 제백석 작품.
아래는 반룡헌 주인인 월전 장우성 화백의 사인.
이 콜렉션을 남긴 월전 장우성은 충주 태생으로 경기도 여주에서 자랐다.
그의 증조부는 원래 문경에서 이강년 의병에게 자금을 지원한 뒤 고향을 떠났고, 조부도 화서학파의
금계 이근원 제자였다고 한다. 게다가 월전 역시 처음엔 신학문보다 부친의 동문인 광암 이규현
(이필희 의병장의 조카)에게서 한학으로 시작하였다. 그러다 향리에서 채용신이 그린 인물화를 본
것을 계기로 화가가 될 생각을 하였고, 평생 현충사의 충무공 영정을 비롯하여 30여 점의 인물화를
그리게 되었다.
그는 화업(畵業)을 위해 향리를 벗어나 서울로 올라가 부친의 소개로 담원 정인보의 문하가 되었다고
한다. 이때 부친이 '월전'이란 호를 내려주었다고 하며, 서예는 성당 김돈희에게 배웠다고 하고
그림은 이당 김은호 문하에서 배웠다. 이후 월전은 총독부 주관의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1932년
입선한 뒤로, 일제가 전쟁으로 발악하던 1941년부터 1944년까지 내리 특선작을 냄 으로써
초대작가 대열에 올라섰다. 이런 이야기들은 그가 말년에 힘써 집필한 <화단풍상 70년>(2003,
미술문화 간) 앞부분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어 서화나 전각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흥미 로운 정보를 전해준다. 그러나 이 책에도 월전 자신이 전각을 어떻게 공부하였다는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그 역시 친일문제로 말많은 총독부의 '총후미술전'에 할당된 작품을 출품하려고 제작하였다. 하지만
그 작품을 트럭에 싣고 운반 하던 도중 비에 맞아 작품이 파손되었기에 사유서만 내고 말았다고 위
책에서 자술하였다.
해방 뒤 그를 서울대 미대로 끌어들인 이는 일제 때부터 조선화 및 문화재 공부를 해왔던
근원 김용준 이었다. 1949년 제1회 국전에 출품한 월전의 <회고>(두 노인이 해금을 연주하고 듣는
모습의 그림)에 대해 근원은 아래와 같이 극구 칭찬을 하며 그에게 기대를 걸었었다.
"씨의 동양화적 교양과 일본화에서 배운 사실의 정신이 합쳐져 우리가 늘 꿈꾸고 있는 조선화의
길을 가장 정당하게 개척하였다. 씨는 종래의 일본화적 인상을 주기 쉬운 호분의 남용도 없고
일본화 선조(線條)의 무기력하고 억양을 잃은 선조도 없고 의문(衣紋)의 처리, 체구의 운염(暈染),
결구의 허실, 부채(賦彩)의 담아(淡雅) 그리고 낙점운획(落點運劃 )이 모두 그 자리를 얻었다."
하지만 그러던 근원은 북으로 갔고, 월전은 서울대에 남아 전쟁을 거쳐 자유당 시절을 지냈고, 그 뒤
원로 작가가 되자 70년대엔 작품보다는 대기업 회장들과 골프 치는 화백으로 더 이름이 나게 되었다.
그의 그림들을 보며 아쉬워하는 마음이 드는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더불어서 해방 뒤 한국화단에
대해 늘 아쉬움과 함께 지녀왔던 의문, 곧 왜 우리 화가들은 굴곡 많은 역사를 거쳐오면서도 후손
들에게 따끔한 교훈이 될 만큼 중국 유검화의 <유민도(流民圖)> (1943년)처럼 깊은 감동을 주는
대작을 남기지 못하였을까 하는 궁금함이 여전히 남는다.
지금은 경기도 이천에 월전의 기증품들을 소장한 이천시립월전미술관(2007년 개관, 인터넷
주소는 http://www.iwoljeon.org 임)에서 월전이 수집한 인장들이 전시되고 있다.
아직 가보기 전이지만 그곳 '전시소개'에는 위의 인보에 수록되지 않은 퇴계선생의 인장도 있다고
소개되어 있다.
한편 월전미술문화재단/동방예술연구회에서는 매년 <한벽문총(寒碧文叢)>이라는 논문집 을 발간
해오고 있다.
첫댓글 도장과 월전 위주로 설명한 얼마 전 글을 그냥 스크랩하였다.
영화 <명량>도 그렇지만, 이 도장을 보면서 충무공을 더 가까이서 느껴보자는 생각이다. 요즘처럼 군대란 것도 본분보다는 곁가지가 더 커져 군산복합체가 생기다 보니 여기저기서 썩어 물크러진 냄새가 진동하는 듯하다. 3면이 바다인 우리나라는 아직도 여전히 충무공과 조상들한테서 배울 점이 많다. 세월호 사건으로 한해 내내 깊어진 사회 각 부문의 마음의 상처가 헤어날 길이 안 보인다. 바다의 과거, 현재, 미래의 문제를 다룬 책을 번역해본 사람으로서, 우선 드는 생각도 바로
해양과학의 토대를 키우지 않고 어찌 해군이 강해질 것이며 어업이나 해운업이 제대로 발전할까 싶단 것이다. 솔직히 다이빙벨이란 게 등장했을 때도, 다들 저게 과연 우리의 수준이란 말인가 하고 놀랄 정도로 한심하다는 생각뿐이 아니었나? 10년, 30년, 50년을 내다보며 차근차근 최선을 다하여 기초부터 든든히 다져나가면서 더는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 수밖에 더 있을까! 그게 또 충무공의 '충' 아닐까 싶기도 하단 생각이 든다.
저 거문고를 연주한 강원감영은 건물을 보건대 선화당 마루, 거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