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882
9월13일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연중 제24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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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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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imWJarsAY5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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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저는 성전(聖戰)을 치러 냈습니다. 달려야 할 길을 끝까지 달렸습니다!>
유럽의 한 교구 신자들은 사제들의 강론을 듣는 것이 얼마나 지루하고 힘겨웠던지, 이런 식으로 계속 할거라면 강론을 없애자는 제안서를 교구청에 전달되기도 했답니다.
저도 가끔씩 하기도 하고 듣기도 하는, 잘 준비되지 않은 강론, 그날 성경말씀의 주제와는 관계가 없어도 너~무 관계가 없는 강론, 담화문 발표식의 강론, 신자들과의 교감이라고는 전혀 없는 일방통행식 강론, 이야기가 계속 가지를 쳐서 원줄기로 돌아오지 않는 길고도 긴 강론을 들으면서, 때로 강론도 고문, 혹은 폭력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론은 신자들의 영성생활에 너무나 큰 의미가 있고, 큰 기여를 하기에 제1순위에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님의 살아있는 강론과 삶은 큰 경종을 울리며 다가옵니다.
주교님의 강론은 언제나 군더더기가 없고 명쾌했습니다. 거기다 재미와 감동이 더해졌습니다. 자연스레 수많은 사람들이 멀리서부터 그를 찾아왔습니다. 그의 강론을 통해 사람들은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그의 강론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바꿨습니다.
주교님의 강론은 결코 추상적이거나 구름 잡는 식의 애매모호한 강론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펼쳤던 강론의 특징은 핵심 키워드에로의 몰입이었습니다. 날카로움과 균형감각을 동시에 지녔습니다. 풍부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 스토리텔링으로 언제나 청중들을 압도했습니다.
그의 설교가 얼마나 감동적이었던지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 눈물과 탄성으로 인해 자주 설교가 중단되곤 했습니다. 환호와 박수, 눈물과 탄성은커녕 하품과 졸음, 분심과 분노를 유발시키는 오늘 우리들의 강론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주교님의 설교는 때로 쌍날칼보다 날카로웠습니다. 나누지 않는 부자들에게 강력한 경고장을 던졌습니다. 왕실의 부유하고 사치스런 생활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물 좋은 자리에 앉기 위해 뇌물을 상납한 주교들을 가차 없이 면직시켰습니다.
워낙 강경한 노선을 고수했던 주교님이었기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결국 그는 황실과 반대파 고위성직자들에 의해 파문되어 2차례나 유배를 떠나야 했습니다. 유배지에서 그는 238통이나 되는 보물 같은 편지를 남겼습니다. 407년 9월 14일 유배지에서 선종했습니다.
유배를 떠나기 전 남긴 말씀입니다.
“저는 성전(聖戰)을 치러 냈습니다. 달려야 할 길을 끝까지 달렸습니다.”
힘겹게 살아가는 가난한 백성들을 향한 위로의 말씀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넘실거리는 큰 파도와 높은 풍랑이 우리를 위협하고 있지만 결코 우리를 삼켜 버리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란 반석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바다가 아무리 화를 낸다 해도 그리스도의 바위를 파괴할 수는 없습니다. 파도가 큰 탑처럼 하늘 높이 치솟는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배를 삼켜 버릴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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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RxnSl0Od-g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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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있으면 법칙을 찾아낸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로마의 백인 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십니다. 그것도 보통 칭찬하시는 게 아닙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도대체 백인 대장이 이런 칭찬을 받을만한 일을 한 게 무엇일까요? 그는 예수님이 굳이 자기 집에 오시지 않아도 종을 치유할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죽은 딸을 살렸던 회당장 야이로는 딸을 살리려면 자신의 집으로 꼭 오셔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것도 큰 믿음이지만 성경을 공부한 적도 없는 이방인이 예수님의 능력에 대해 더 잘 알게 된 것은 왜일까요?
그는 세상의 법칙을 묵상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병을 고치는 능력도 하나의 권위입니다. 인간보다 높은 권위를 지닌 힘입니다. 자신도 로마 장교로서 자기 밑에 있는 군사에게 시키면 군사들이 알아서 다 하는 것처럼, 하늘의 권위를 지닌 분도 굳이 당신이 다 하지 않아도 그 능력을 실행해줄 천사와 같은 이들이 있을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는 굳이 예수님을 공부하지 않았음에도 평생 공부한 사람보다 더 잘 알았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의 법칙’을 추구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법칙이 있습니다. 법칙은 시공을 초월해 예외 없이 옳고 반박할 수 없는 것입니다. 법칙보다 낮은 것이 ‘론’입니다. 예를 들면 ‘진화론’입니다. ‘론’은 ‘논리’입니다. 그러나 이 논리는 증명이 되지 않습니다. 만약 증명된다면 ‘진화 법칙’이 될 것입니다. 법칙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자연계 내에서 스스로 진화 발전하지 않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질서와 에너지를 잃는다.’라는 열역학 제2 법칙처럼 증명이 되고 누구에게나 수긍이 갑니다. 반박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법칙은 하나의 믿음을 형성합니다. 그러나 창조론이나 진화론은 하나의 이론이기 때문에 증명할 수 없습니다. 단지 열역학 제2 법칙에 따라 모래가 뭉쳐 스마트폰이 된다는 식의 진화론보다는 스마트폰이 사막에 떨어져 있다면 진화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만든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창조론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론’이 ‘법칙’을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론’보다 하위개념이 있는데 ‘설’입니다. 설은 이론도 없고 그냥 개인의 주장입니다. 이 세상에서 ‘설’에 빠지는 이들은 자기 자신만 믿는 ‘자아 숭배교’라 할 수 있고, ‘론’을 따르는 이들은 인간을 숭배하는 ‘인본주의교’라 할 수 있으며, ‘법칙’을 따르는 이들은 그 법칙으로 세상을 창조한 분을 믿는 ‘신앙인’이 됩니다.
만약 여기저기서 ‘같은 모양의 돈’이 발견된다면 우리는 분명 그 돈을 개인들이 만들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한국은행과 같은 곳이 있어서 같은 모양으로 그 돈을 찍어냈을 것이라 믿습니다. 여러 명이 디자인해서 그 돈이 그렇게 일치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 명의 선수가 일제히 짜 맞춰진 ‘싱크로나이즈’를 한다면 분명 어떤 누구가 그것을 구성한 사람이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우연의 일치로 그런 것들이 맞을 리가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 모두 적용되는 법칙이 있다면 그 법칙을 만든 분이 분명히 계실 것입니다. 감독이 여러 명이면 분명 다른 모양의 공연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백인 대장은 ‘법칙’을 추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디서든 모든 힘의 서열이 있는 곳이면 상관이 명령하면 밑에 사람이 그 명령을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늘의 권능을 지닌 그리스도도 그럴 것이라 믿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더 잘 알게 되었으니 오히려 회당장 야이로의 믿음보다 크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세상은 그 믿음이 있는 이들이 성공하는 곳입니다. 많은 영화배우가 있지만 오랜 시간 탑으로 군림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처음엔 잘하는 것 같다가 중도에 넘어지는 이들도 있습니다.
‘유퀴즈 온 더 블록’에 황정민 배우가 나온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누적 관객만 1억 명이나 되는 꾸준한 노력파 배우입니다. 여기에서 그는 자기가 생각해도 연기가 점점 느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만큼 많이 노력하는 배우입니다. 캐릭터를 이해하기 위해 직접 그런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노트 한 권을 채우지 않으면 연기를 시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국제시장에서 노인을 연기하기 위해 파고다 공원에서 어르신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고 인터뷰도 하며 그분들의 말투를 배웠다고 합니다. 노숙자를 연기하기 위해 지하철에서 노숙자로 변장하여 그들과 일주일 동안 살아보기도 했습니다. 곡성에서 무당을 연기한 장면인 무당이 봐도 소름 돋는다고 할 정도입니다.
그가 그렇게 하는 데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렇게 노력하는 만큼 자신의 연기를 보는 사람들이 몰입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하느님을 믿지 않기가 쉽지 않습니다. 찾아보니 개신교라고 합니다. 이렇게 자기관리하고 노력한다면 그의 연기 인생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사용한 법칙이 진리이신 성자이시고 사용한 노력이 은총이신 성령이십니다. 자동차를 만들 때 만드는 사람이 아버지이고 설계도가 아드님이며 피와 땀이 성령이신 것입니다. 그러니 그 만들어진 자동차가 운행되는 법칙은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대로 살면 인간은 온전히 창조된 법칙대로 살기 때문에 고장 나는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영원히 산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주님이 계신다면 이 세상도 법칙대로 움직입니다. 그 법칙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도 잘 살아나가겠지만, 그것 자체가 창조주를 믿는 믿음이 됩니다. 헛된 개인적인 생각이나 증명될 수 없는 이론들을 따르지 맙시다. 시공을 초월하는 명확한 법칙이 있음을 믿읍시다. 그 법칙을 찾아내면 주님께 대한 믿음은 저절로 증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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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7,1-10 :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만 한 자격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로마의 백인대장이 자기 종을 고쳐 주십사고 청한다. 그 종은 죽어가고 있다고 했다. 그 병은 예수님만이 고쳐주실 수 있는 병이다. 영적인 의미로 보면 이 종은 치명적인 욕정으로 병들었거나 세속의 노예로 묶여 주님께서 깨끗하게 해 주시고 계시다. 하느님을 모르는 그래서 하느님과 거리가 먼 이방민족들의 구원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백인대장을 칭찬하고 있다. “그는 선생님께서 이 일을 해 주실 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 회당도 지어 주었습니다.”(4-5절) 주님께서는 그 백인대장의 정신을 인정해 주셨다. 아직 교회가 탄생하기 이전에 회당을 지어 주었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쓸 교회도 더욱 잘 지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회당을 지었지만,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백인대장의 집으로 가신다. 그러나 백인대장은 사람을 보내어,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6-7절) 이 말을 들으신 주님께서는 감탄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9절)
백인대장의 이 말은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저는 의로움의 태양을 받아들일 능력이 없습니다. 한 줄기 작은 빛살도 어둠을 물리치듯이 이 병도 주님의 한 말씀으로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의 원로들과 그 친구들에게 모두 백인대장과 같은 믿음이 없다고 꾸짖으시고 계시다. 백인대장의 믿음은 이방 민족들에서는 첫 번째의 신앙인이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와,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마태 8,11)라고 말씀하셨다. 백인대장은 스스로 자격없는 자라고 고백함으로써 합당한 사람으로 바뀌고 있으며, 그의 종이 치유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 이 사화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면 국적을 불문하고 구원하시는 구원의 보편성을 말하고 있다.
백인대장이 주님께 자기 종을 위해 간청한 이 말은 우리가 미사 중에 성체를 영하기 전의 기도문으로 사용되고 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한 이방인의 예수님께 간청한 말이 기도가 되었다면,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 주님을 따른다고 하는 우리의 믿음은 어떠한지 생각해보고 우리도 하느님 앞에 겸손한 자세로 그러한 신앙고백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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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로마 백인대장의 이 겸손한 고백은 우리가 성체를 받아 모실 때마다 바치는 기도입니다.
천주교 신자에게 영성체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으로 주셨고, 미사를 통하여 날마다 임마누엘 하느님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주님께서는 이 사랑의 성사를 통하여 우리와 일치하시고, 우리가 당신 안에 함께 살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늘 주님 안에서 살 수 있도록 오늘 복음의 백인대장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백인대장의 확신에 찬 말은 예수님께는 믿음에 대한 감탄으로, 그리고 그 종에게는 치유의 은총으로 다가갑니다.
세상의 수많은 방해와 불신 속에서 하느님을 진심으로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요. 우리의 눈은 한계가 있어 실지로 많은 것을 볼 수 없고, 우리의 뇌는 기억하고 있는 것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왜곡하고 조작하기도 한다고 뇌과학자들은 말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가 본 것, 우리가 경험한 것만을 진실이라고 믿기도 합니다. 백인대장이 보여 준 믿음은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가능하게 하고, 스스로 삶을 성찰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영원의 시간, 신비 안으로 초대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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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가셨다. 그런데 백인대장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르셨을 때, 백인대장이 친구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아뢰었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매인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에게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군중에게 돌아서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심부름 왔던 이들이 집에 돌아가 보니 노예는 이미 건강한 몸이 되어 있었다."(루카 7,6-10)
이 이야기에서,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라는 말은 백인대장의 ‘겸손’을 나타내고, “그저 말씀만 하시어”라는 말은 그의 ‘믿음’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나 가족의 치유가 아니라 ‘종’의 치유를 예수님께 간청한 것은 그의 ‘자비’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믿음’입니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라는 예수님 말씀은, 뜻으로는 “인간 세상에서 이런 믿음을 고백한 사람은 그가 처음이다.”입니다. (그때까지는 이스라엘 안에서도, 이스라엘 밖에서도, 백인대장과 같은 믿음을 고백한 사람은 아직 없었습니다.)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병이라는 것’에게 떠나라고 명령하시면 그것이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하고 떠날 것이라고 믿는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백인대장의 믿음은, “예수님은 병을 잘 고치시는 분”이라는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은 ‘병이라는 것’을 지배하시는 분”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은 권능을 가지고 계시는 주님이신 분”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께서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시는 말씀만 있고, 그의 종을 고쳐 주시는 ‘치유의 말씀’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치유의 말씀’을 하셨지만 복음서 저자가 백인대장의 믿음에 초점을 맞추려고 생략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예수님께서 ‘치유의 말씀’을 하시지 않고, 당신의 의지만으로 병을 고치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중요한 것은 ‘말을 하는 행위’가 아니라, 병자를 고쳐 주시려는 예수님의 자비와 의지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하시지 않아도 당신이 고쳐 주기를 원하시는 병자는 의지만으로도 고쳐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 주제는 분명히 ‘백인대장의 믿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청하기만 하면 병이 낫는다.”라고 이 이야기를 단순하게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권능’만 가지고 계시는 분이 아니라, ‘권한’도 가지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권능은 죽은 사람도 살리는 권능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권한은 어떤 일을 하거나 하지 않을 권한, 즉 결정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병을 고쳐 달라고 주님께 간청했지만, 주님께서는 그 청을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2코린 12,7-9) 예수님께서 누구의 병은 고쳐 주시고, 누구의 병은 고쳐 주지 않으시는지, 그 기준이 무엇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모르니까 포기할 수밖에 없다.”가 아니라, “모르니까 믿어야 한다.”가 신앙인의 올바른 태도입니다.)
1) 예수님은 ‘주님이신 분’으로서 우리 인생을 주관하시는 분이고, ‘착한 목자이신 분’으로서 우리에게 행복과 생명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그 사랑을 믿고,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예수님께 간청해야 합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께서 주신 ‘치유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청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청하지 않는 것은 은총을 받기를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2) 믿고 청한다고 해도 자신이 할 일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해야 합니다. 병원에 가야 한다면 병원에 가고, 약국에 가야 한다면 약국에 가야 합니다. 수술이 필요하면 수술을 받고, 약을 먹어야 한다면 약을 먹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알아서 해 주실 것이라고 말하면서 자기가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또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도 안 하는 것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3)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 드려야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 4)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고 봉사하는 것은, 신앙인이 실천해야 할 중요한 ‘사랑 실천’이고, 이 실천은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부르십시오. 원로들은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십시오. 그러면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남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병이 낫게 될 것입니다. 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냅니다."(야고 5,14-16)
믿음으로 병을 고치고 건강을 되찾는 것은 ‘좋은 일’이고 ‘선한 일’입니다. 그러나 ‘몸의 건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혼의 건강’입니다. 현세에서 ‘무병장수’를 누리는 것보다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것이 더 중요하고, 그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희망입니다. 우리는 현세에서의 인생은 우리 인생의 아주 작은 일부일 뿐이고, 진짜 인생은 하느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인생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우리의 이 지상 천막집이 허물어지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건물 곧 사람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을 하늘에서 얻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2코린 5,1) 늙고, 병들고, 죽는 우리의 현실은 그 자체로 우리가 받아들여 할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길은 짧고, 그 길 끝에 있는 생명과 영광은 영원하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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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입니다. 예전에 이 성인의 세례명을 ‘요한금구’라고 하였습니다. 금구(金口)는 황금의 입이라는 뜻입니다. 주교님께서는 강론을 잘 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신자들에게도 생활을 윤리적으로 쇄신하도록 가르쳤습니다. 또 가난한 이들을 위한 여러 구호사업을 진행했습니다. 그러자 성인의 개혁에 불만을 품은 고위성직자들이 성인을 적대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적대자들은 근거 없는 비난으로 성인을 고발했습니다. 결국 403년 성인은 면직 후 유배생활을 하게 됐습니다. 신자들은 성인의 유배에 반발했습니다. 첫 유배에 신자들은 성인의 유배에 반대하는 폭동을 일으켜 잠시 유배를 취소시켰습니다. 404년 성인이 다시 유배되자 성인을 만나기 위해 신자들의 순례행렬이 계속됐습니다. 이에 황제가 성인을 더 먼 곳으로 유배를 보내자 성인은 새 유배지로 가던 중 선종하고 말았습니다. 성 인노첸시오 1세 교황은 412년 성인의 명예를 회복시켰고, 성인의 유해는 1626년 5월 1일 이후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 성가대 경당에 안치됐습니다.
저는 신학교에서 논문을 쓸 때 ‘설교학’을 선택했습니다. 감동을 주는 신부님들의 강론을 들으면서 저도 강론을 잘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길고 지루한 강론을 들으면서 저라면 다른 방법으로 강론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제가 되면 매일 강론을 하는 저를 위해서, 저의 강론을 듣는 교우 분들을 위해서 설교학을 선택했습니다. 학사논문은 ‘현대인을 위한 설교’라는 제목으로 준비했습니다. 제가 논문을 쓸 당시에는 주일학교에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초등부 주일학교, 중고등부 주일학교 미사에 학생들이 참 많았습니다. 보좌신부에게 주일학교 미사는 학생들을 만나는 시간이었습니다. 어린이와 학생들을 위한 강론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게 강론을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석사논문도 ‘설교학’을 선택했습니다. ‘현대인을 위한 설교’라는 제목으로 준비했습니다. 논문을 지도하는 신부님께서 설교는 곧 선교라고 하시면서 ‘설교와 선교’라는 제목으로 수정해 주었습니다. 30년 사제생활을 하면서 매일 강론을 준비하면서 제가 준비했던 논문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강론을 준비하면서 신학교에서 후배들에게 ‘설교학’을 가르치면서 강론에 꼭 필요한 4가지 요소를 강조했습니다. 첫째는 ‘말씀’입니다. 음식에는 늘 주된 재료가 있기 마련입니다. 케이크에는 크림이 필요하지만 주된 재료는 빵입니다. 집에는 창문과 문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사람이 머무는 공간인 방입니다. 말씀이 중심이 되는 강론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이 빠진 강론은 진정한 강론이 될 수 없습니다. 둘째는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쁘신 중에도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늘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하는 사제는 말씀이라는 밭에서 보물을 찾을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제는 말씀을 통해서 참된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셋째는 ‘시대의 표징’입니다. 허리가 아픈데 다리를 주무르면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현대인들이 목말라하는 것이 무엇인지 식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문을 정독하고, 책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교우들의 이야기를 경청해야 합니다. 넷째는 실천입니다. 감기약을 파는 사람이 늘 감기를 달고 살면 사람들이 그 감기약을 신뢰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제가 선포한 강론을 삶으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이 또한 모래 위에 지은 집이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백인대장’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율법과 계명을 몰랐지만 마음은 이미 하느님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삶은 참된 신앙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을 위해서 회당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었습니다. 병든 종을 내치지 않고 정성껏 돌보아 주었습니다. 주님께서 한 말씀만 하시면 종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은 피부색, 신분, 학식에 따라서 커지는 것’이 아님을 늘 말씀하셨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 시로페니키아 여인, 백인대장’은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그분들의 믿음을 칭찬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 해도, 교만과 욕심에 사로잡혀있으면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야단치셨습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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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웅태 요셉 신부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루카 7, 1-10) 이야기의 주인공은 로마의 백부장 즉, 부하 100명을 거느리고 있는 100인 대장이다. 로마 군대에서 백부장이란, 일반 서민의 신분이 아니었으며, 로마 군대에 중추적인 역활을 하는 사람이다.
역사가 폴라비우스가 백부장의 자격에 대해서 쓴 바를 보면, "백부장이란, 명령을 내리는 자로서, 지나치게 위험을 자처해서는 안되고, 행동에 있어서 침착하고, 믿음직한 인물이어야 하며, 성급하게 전투에 뛰어 들어서도 아니되고, 절박한 상황에 처했을 때는 자신의 위치를 사수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고 한 점으로 보아 사나이 중에 사나이였다고 하겠다.
그 백부장은 자기 종에 대해서 대단히 자비심을 많이 가진 사람이었다고 하겠다. 로마 법률에 의해서 볼 때 "종"이란 살아있는 도구로 취급되어, 주인은 그를 학대할 수 있었으며, 원한다면 주인은 그를 죽이기까지 할 수 있었고, 나이가 들어 일을 할 수 가 없으면 밖에 내어버려 죽게 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백부장의 종에 대한 태도는 그렇지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자기 종을 위해서 어떠한 어려움도 치루려는 태도였다. 그래서 이방인인 예수께 간청하려 나온 것이다.
"이방인인 예수께 간청한다"는 것이 지금의 우리가 듣기에는 별 이상할 것 없다고 하겠지만, 그러나 그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로마인들은 신앙 안에서 죄인시하는 생각을 가졌었기 때문이다.
그런 속에서 이상하게도 그 백부장은 인간적인 관례를 넘어서, 유대인들의 회당을 지어줄 만큼 야훼 하느님께 대한 호의를 가지고 있었던 백부장이었다.
그는 독실한 믿음을 가졌다고 할 수 있는데, 그의 믿음은 눈에 보이고, 자기가 하는 일 속에 하고 있고, 이루어지는 일에 근거를 두고 시작해서 하느님께로 이르는 논리를 가지고 있는 믿음이었다.
즉, 삶의 경험에서 출발해서 하느님께 이르는 논리를 가지고 있는 믿음이었다. 다시 말해서, 백부장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권위를 사용할 때, 따라오는 결과가 있다면, 하물며 예수님이 당신 권위를 사용하신다면, 그 결과는 어떠하리라는 것을 알고 고백한 그였다.
그래서 그는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만한 사람이 못되며, 감히 주님을 나가 뵐 생각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낫겠습니다." 하는 겸손한 믿음을 보였던 것이다.
이러한 백부장의 믿음을 보신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하셨는가? "이러한 믿음은 이스라엘 사람에게서도 본 일이 없다!"고 칭찬하시며, 그의 소청을 들어 주셨던 것이다.
겸손한 마음을 가진자는 친구를 얻으나, 교만한 자는 친구도 멀어진다. 겸손한 자는 비록 적이라 하더라도 친구가 될 수 있으나, 교만한 자는 아군이라도 적처럼 경계하게 된다. 우리들의 믿음은 어떠한지 오늘 복음의 말씀 앞에 다시 한번 생각해 봄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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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예진광 이레네오 신부님]
<백인대장>
“나는 하느님의 손 안에 있는 몽당연필에 불과합니다. 그 분이 쓰시고, 생각하시고, 그 분이 결정하십니다.”
참으로 겸손한 이 말은 누가 하였을까요? 바로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버려진 사람들의 어머니였던 마더 데레사입니다. 평생을 헌신하신 수녀님에게는 말할 수 없는 시련과 고통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과 함께 모든 것을 이겨나갔습니다. 겸손하신 수녀님은 오직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살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도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율법학자도 아니고 예언자도 아닙니다. 그는 유대인이 아닌 로마의 백인대장입니다. 백인대장은 말 그대로 백사람을 부하로 두고 있는 대장을 뜻합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제국의 속국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군인들이 속국의 치안과 통치를 위해서 이스라엘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한 백인대장은 예수님께 사람들을 보냅니다. 자신이 아끼는 하인이 병에 걸려 거의 죽게 되었는데, 살려주십사 청하기 위해서입니다. 백인대장의 간절한 청을 전해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그를 찾아가십니다.
그런데 백인대장은 자신의 집에 예수님께서 거의 당도하시기 전에 사람들을 보내어 자신의 말을 전합니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유대인의 관습과 종교적 전통을 잘 알고 있는 백인대장은 예수님께 이방인인 자신의 집에 ‘모실 자격’, 아니 ‘만나 뵐 자격’조차 없다고 말씀드립니다. 그의 겸손함이 배어나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합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주십시오.’ 예수님의 능력에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백인대장의 태도에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도 이러한 믿음을 본적이 없다.’고 감탄하십니다. 그리고 그의 집에 방문하지 않으시고도 그의 종을 낫게 해 주십니다. 겸손과 신뢰. 겸손과 신뢰는 기적이 일어나게 합니다.
우리는 미사 때 성체를 모시기 전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미사 중에 우리는 예수님께 자신의 종을 낫게 해달라고 청한 백인대장처럼 간청합니다. 지존하신 주님의 몸을 받아모시기에는 너무나도 우리자신이 부당하다고 겸손되이 고백합니다.
병든 이를 낫게 하시고 죽은 이를 다시 살리시는 주님께서 한 말씀만 하시면 우리 영혼의 병이 나으리라고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느 누구보다도 겸손한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겸손되이 하느님께 청합시다.
“주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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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믿음은 교리나 규범을 잘 알고 지키는 것만으로 생기지 않습니다. 믿음에는 인격적 신뢰가 중요합니다. 한 사람에 대한 확고한 신뢰, 그리고 그 신뢰가 자신의 삶을 지탱해 주고 있다는 체험이 있어야 믿음은 성장합니다.
오늘 예수님께 자기 노예의 치유를 청하는 백인대장의 모습 속에는 이러한 인격적 신뢰가 엿보입니다.
그는 이방인이었지만 더불어 사는 유다 민족에게 회당을 지어 주며 우호적인 태도로 유다인의 원로들의 신뢰를 얻습니다. 자신의 종마저 소중한 한 인격체로 받아들여 그의 고통을 치유해 주고 싶어 합니다.
이런 백인대장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기만 했을 뿐인데도, 예수님을 신뢰하고 ‘주님’으로 부릅니다.
그리고 친구를 보내어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을 전할 정도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백인대장의 믿음에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고 하시며 예수님마저도 감탄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신다는 확신을 이방인의 믿음에서 보셨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믿음에는 간절함과 확고함, 인내와 끈기가 필요합니다.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손길이 내 인생에 절실하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에게 믿음은 진정성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영성체할 때 바치는 이 백인대장의 청원을 일상의 삶에서도 매 순간 바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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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루카복음>에서 이방인을 위한 최초의 이적으로서, 비록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믿음이 있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평지설교를 마치시고 가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을 때, 병들은 노예를 위한 백인대장의 청을 전하는 유다인 원로들의 말을 듣고 백인대장의 집으로 가는 도중에, 백인대장의 친구들이 와서 이렇게 전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매인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루카 7,6-8)
이 말씀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감탄하시며 군중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루카 7,9)
그런데 그러한 믿음은 대체 어디에서부터 온 것일까? 백인대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매인 사람입니다.”(루카 7,6-7)
그렇습니다. 실로, 그는 자신이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실 자격이 없는” 이방인임을 알았으며, 또 자신이 군사력을 지닌 백인대장이지만 왕에게 속해 있듯이, “상관 밑에 매인 사람”, 곧 자신이 누구에 속해 있는 지를 철저히 깨닫고 있었습니다. 곧 자신의 한계와 무능함에 대한 깨달음과 ‘주님께 속한 이’라는 각성입니다. 바로 이 깨달음, 곧 자신의 부족과 한계와 무능함을 깨닫고, 자신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 존재인가를 깨달은 데서 한편으로는 ‘겸손’이 다른 한편으로는 ‘믿음’이 흘러나온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자신이 누구 ‘밑에 매인 사람’인지를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신에게 매여 있고 속해 있는 이를 소중하게 여길 줄을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자신이 속한 분께서 자신을 소중히 여기실 것에 대한 믿음을 가졌고, 무엇보다도 그분의 말씀에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가 청한 것은 오로지 한 마디의 “말씀”뿐 이었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루카 7,7)
그는 말씀의 권능을 믿었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시어 은총을 입은’ 성모님처럼, 그도 은총을 입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 앞에 선 자신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속해 있는 존재임과 우리의 무능과 나약함을! 그러나 그분께서 소중하게 여기시는 존재임을! 그러기에 우리 또한 주님께서 소중하게 여기시는 이들을 소중하게 여겨야 함을! 그리고 주님의 말씀의 권능을 믿고 의탁해야 함을! 하오니, “주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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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루카 7,7)
주님!
당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게 하소서!
‘오라’ 하면 오고, ‘가라’ 하면 가게 하소서!
머리 위에 계시되 누르지 않으시는 분,
당신을 머리 위에 두고 살게 하소서.
소유하시되 속박하지 않으시는 분,
당신께 속한 이로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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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루카7,9)
<백인대장의 믿음!>
'백인대장'은 백 명 정도의 군인들로 구성되어 있는 단위 부대를 지휘하던 '로마제국 군대의 지휘관'입니다. 그러니 당시 로마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었던 유다인들에게 백인대장은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런 이방인인 백인대장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병들어 죽어가는 자신의 종을 살려달라고 유다인의 원로들을 통해 예수님께 청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백인대장의 집으로 가십니다. 그런데 백인대장은 다른 친구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이렇게 아뢰도록 합니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루카7,6.7)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 감탄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그리고 백인대장의 종은 다시 건강한 몸이 됩니다.
오늘 복음은, '이방인에게 열려져 있는 구원'과 '믿음으로부터 오는 구원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사를 드릴 때마다 영성체 바로 직전에 백인대장의 이 큰 믿음을 확인합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미사를 드릴 때마다 얼마나 정신을 차리고 깨어있는 믿음으로 나의 구원과 직결되어 있는 이 기도를 소리를 내어 바치고 있는가?
한 번 각자의 모습을 되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완전한 사랑에 이르지 못한 죄인'입니다.
우리는 '죄인인 이방인'이기 때문에, 미사를 드릴 때마다, 온 마음으로 이 백인대장의 기도를 바쳐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나, 그래서 오늘 구원받는 내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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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러하신 당신>
루카 7,1-10 (백인대장의 병든 종을 고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백성에게 들려주시던 말씀들을 모두 마치신 다음, 카파르나움에 들어가셨다. 마침 어떤 백인대장의 노예가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그는 주인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 이 백인대장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유다인의 원로들을 그분께 보내어, 와서 자기 노예를 살려 주십사고 청하였다. 이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이렇게 말하며 간곡히 청하였다. “그는 선생님께서 이 일을 해 주실 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회당도 지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가셨다. 그런데 백인대장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르셨을 때, 백인대장이 친구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아뢰었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매인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에게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군중에게 돌아서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심부름 왔던 이들이 집에 돌아가 보니 노예는 이미 건강한 몸이 되어 있었다.
<그러하신 당신>
차마
바라볼 수 없음을
아는 이에게
기꺼이
당신은 보여주십니다
차마
말씀드릴 수 없음을
아는 이에게
기꺼이
당신은 들으십니다
차마
모실 수 없음을
아는 이에게
기꺼이
당신은 가십니다
차마
마주할 수 없음을
아는 이에게
기꺼이
당신은 마주하십니다
차마
함께할 수 없음을
아는 이에게
기꺼이
당신은 함께하십니다
차마
품을 수 없음을
아는 이에게
기꺼이
당신은 안기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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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신부가 미사를 하는데 곁에서 복사를 서던 소년이 실수로 포도주와 물이 담겨 있는 주수병을 떨어뜨려 산산조각을 냈습니다. 그 순간, 이 신부는 너무 화가 나서 “당장 성당에서 나가! 그리고 다시는 복사 서지 마!”라고 소리쳤습니다. 이 소년은 눈물을 흘리며 성당을 나갔습니다.
이와 비슷한 일이 다른 성당에서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신부는 “괜찮아. 나도 어렸을 적에 복사 서다가 그런 일이 있었어. 너는 이미 잘하고 있단다.”라고 따뜻한 말을 해주었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의 소년은 그 후 성당에 간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커서는 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요시프 브로즈 티토’로, 그는 37년간 독재자로 있으면서 많은 사람을 탄압했던 주인공이었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주교 ‘풀턴 쉰’이 되었습니다. 내가 하는 말의 힘은 정말로 대단합니다. 그런데 용기와 힘을 주는 말이 아닌, 순간의 내 기분을 푸는 말에 멈춰있는 것이 아닐까요?
자신의 기분이 제일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변화를 위한 말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말하는데 늘 조심해야 한다고 옛 성인들은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어떤 말이었을까요? 죽이는 말이 아닌 살리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볼 수 있듯이, 말씀 한마디로 백인대장의 노예를 깨끗하게 치유해주셔서 죽음에서 생명의 길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조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믿음’이었습니다. 주님께 대한 강한 믿음이 있을 때, 그 믿음을 보시고 그들이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이는 복음의 다른 부분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일관된 모습이었습니다. 말씀 한 마디로 치유될 것이라 믿는다는 것이 쉬웠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직접 보고 직접 들어야 또 직접 만져봐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이지요.
그런데 보이지 않은 말씀 한 마디에 믿음을 둔다는 것이 어떻게 쉬울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백인대장의 믿음이 대단한 것입니다. 그는 말씀 한 마디로 분명히 치유될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이 있었기에, 굳이 힘들여 오실 필요가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주님의 말씀 한 마디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질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이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말씀 한 마디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것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의심 없이 믿을 때, 주님의 커다란 은총과 사랑은 우리 곁에서 멀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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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힘 덕분에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호가호위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남의 권세를 빌려 위세를 부린다는 뜻으로, 여기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호랑이가 사냥해서 여우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여우가 스스로 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호랑이는 그럴 리가 없다면서 자신이 왕이라고 말했지요.
그러자 여우는 자기 뒤를 쫓아오면 모든 동물이 자신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어떠했을까요? 모든 동물은 여우 뒤의 호랑이를 보고 두려워 도망쳤습니다. 호랑이는 이렇게 도망치는 동물들을 보면서 ‘여우가 진짜 왕인가 보다.’라면서 여우를 풀어줍니다.
이 우화를 읽으면서, 우리 뒤에 계시는 하느님을 떠올려봅니다. 하느님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가 잘 나서 그런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 시대의 종교지도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지요. 그들이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것은 하느님을 따라 율법을 지켰기 때문이지, 스스로 잘나서가 아니었습니다. 이 종교지도자의 모습을 따라서는 안 됩니다.
주님도 겸손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듯이, 우리 역시 겸손해야 합니다. 하느님 덕분에 내가 살고 있음을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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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음은 하느님의 능력을 만나는 기회>
“저는 기도를 잘 하지 않습니다. 믿음도 부족합니다.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잘 안 됩니다. 마음은 간절한데 실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 기도를 하는 대로 들어 주신다면 매달려 보겠는데 확신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일에나 성당을 찾는 발바닥 신자가 되고 말았습니다.”하고 말씀하신 분이 계셨습니다.
저를 두고 하는 말씀으로 알아들었습니다. 미사를 봉헌하고 성무일도를 바치는 것에 급급해하는 자신을 보면서 기도가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성경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들은 대로 행함으로써 하느님을 체험하라고 강조하면서도 정작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루의 끝맺음에 서면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한 가지도 못하고 후회하며 부끄러워합니다. ‘내일은 잘해야지’하고 결심하고서는 아무 의식도 없이 또 하루를 보냈습니다. 이러고서도 굳센 믿음의 소유자가 되길 바라고 있으니 뻔뻔합니다.
민수기 14장 28절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내가 살아있는 한, 너희가 내 귀에 대고 한 말에 따라, 내가 반드시 너희에게 그대로 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간절한 청은 물론 불평 불만하면서 뱉어버린 말도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투덜대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내가 원하고 바라는 때가 아니라 당신이 보시기에 가장 좋은 때에 당신의 뜻을 이루어 주십니다.
따라서 오늘 이루어 주실 수도 있고, 내일 이루어 주실 수도 있으며 내 세대가 아니라 다음세대에 이루어 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이루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저 믿고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백인대장은 자기 종이 병들어 죽게 되자 예수님께 ‘저는 제집에 주님을 모실 자격도 없고,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청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당신을 의심하는 고향 사람들 앞에서는 별로 기적을 베풀지 않으셨지만(마태13,58), 믿음으로 준비된 사람에게는 당신 말씀의 능력이 살아났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하고 자신을 낮추는 그곳에서 큰 힘을 만났습니다.
사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할 일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복종하는 것입니다. 성체를 모실 때에도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하고 받아들일 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의 능력은 늘 작용합니다. 다만 내가 믿음으로 준비되지 못한 탓으로 그 능력을 체험하지 못할 뿐입니다. 주님의 능력은 언제 어디서나 한결같습니다. 물론“예수님은 연민의 정신과 사랑의 정신으로, 때로는 그자가 믿든지 말든지 일방적으로 기적적인 역사를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 편에서 신앙이 합쳐질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재창조 역사가 일어납니다.”(김정원신부) 그러니 열린 마음과 겸손으로 그분의 능력을 믿고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구하는 바대로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그대로 얻게 될 것입니다. 열매는 행동하는 데서 맛보게 됩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능력을 만나는 기회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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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사람들>
-하느님 중심의 삶-
“마음이 사랑으로 활활타올라, 그열정 뜨겁게도 솟아오르고, 황금의 입이뿜는 열정의 말씀, 듣는이 가슴마다 깊이찌르네.”
오늘 축일을 맞이하는 ‘황금의 입’이라는 별명을 지닌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단면을 보여주는 아침성무일도 아름다운 찬미가 한연입니다. 성인들은 물로 우리 하나하나의 존재가 하느님 계심의 생생한 증거입니다.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의 특징은 참되고 선하고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어제 미사는 아브라함 수사가 첫 강론을 했던 각별한 미사였습니다. 미사후 잠시 나눈 대화도 생각납니다.
“수사님 강론인데 내가 가슴이 두근 거리더군요. 수고많았습니다. 강론은 늘 해도 어렵지요.”
요지의 말에 아브라함 수사도 크게 웃었습니다. 어제는 최선을 다해 사는 분들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이런저런 하느님 중심의 아름다운 삶을 사는 분들을 보면 예수님을 닮아 ‘그 삶자체가 기도이고, 시이자 강론’이란 생각이 들곤 합니다. 성인들은 한결같이 기도이자 시이고 강론같은 삶을 살면서 하느님의 꿈을 꽃처럼 활짝 피어냈던 분들입니다. 바로 오늘 기념하는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학자도 이런 분중의 한분입니다.
성 바실리오, 성 아타나시오, 성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와 함께 동방의 4대 교부에 속하며, 제37대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였던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출신인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감동적인 설교로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황금의 입’(크리소스토무스)라는 영예로운 별명을 얻었던, 또 한평생 치열하게 불꽃처럼 살았던 성인입니다. 성인의 감동적인 강론의 일부를 나눕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지겹고 응답을 받지 못한다면, 얼마나 자주 가난한 사람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는지를, 그리고 듣고서도, 얼마나 자주 그들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손을 뻗기 때문에 여러분의 기도가 받아들여 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손을 하늘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에게 뻗으십시오!”
성인의 삶이 요약된 고백의 다음 강론도 감동적입니다.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죽음입니까? 아닙니다. 내 생명은 하느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내가 땅에서 쫓겨나는 것이 두렵겠습니까? 아닙니다.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다 주님의 것입니다.
내 소유물을 잃어버리는 것이 두렵겠습니까? 아닙니다. 나의 보화는 하늘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저들이 나를 쫓아내면 나는 엘리야처럼 될 것이고 구덩이에 던져 넣으면 예레미야처럼 될 것입니다.
굴에 던져 넣으면 다니엘처럼 될 것이요 바다에 던지면 요나처럼 될 것입니다.
돌로 친다면 스테파노처럼 될 것이고 목을 벤다면 세례자 요한처럼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매질한다면 사도 바오로처럼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의지하고 믿으니 아무런 두려움도 없습니다.
내가 당하는 모든 고난과 사건을 통해서 하느님은 높임을 받을 것이며 나는 환난중에 주시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성인의 임종전후의 일화도 감동적입니다. 유배길에서 임종전 성인은 ‘바실리쿠스 경당’에서 흰 수의를 덮어 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자기 옷은 사막의 은수자 안토니오가 했던 것처럼 둘러서 있는 사람들에게 선사한 후 사제로부터 성체를 받아 모신 후, “하느님은 모든 일에 찬미받으소서.”라는 임종기도를 바치고 만58세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참 신비로운 것은 ‘바실리쿠스’ 순교 성인이 임종 전날 꿈에 나타나 요한 성인과 경당의 사제에게 했다는 말입니다.
“마음을 편히 가지시오. 요한 형제. 아침이면 우리가 함께 있을 것이오.”
“요한 형제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게. 그가 오고 있네.”
새벽 교황님 홈페이지도 종파를 초월해 살아 있는 성인으로 존경 받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항가리와 슬로바키아 나라를 어제 9월12일부터 9월15일까지 34차 국외 사목방문 순례여정에 오른 기사 내용으로 가득했습니다.
“종교들은 관상과 활동안에서 일치해야 한다.”는 제목과 항가리 주교들에게 “하느님께, 서로에게, 사제들과 당신 양떼들에게, 가까이 있으십시오(Be close to)”라는 기사 제목도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어제 저녁 병고중인 어느 자매와 주고받은 카톡 메시지도 잊지 못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저를 늘 반겨주시는 프란치스코 신부님, 고맙습니다.”
“하느님은 물론 저에게 자매님은 아무 것도 아니라 전부지요!”
"아, 눈물나게 감사합니다. 신부님."
만나는 사람마다 그가 전부인 것처럼 만난다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입니다. 아마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 백인대장은 물론 만나는 모든 이들에 대해서도 전부처럼 대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의 말을 전부처럼 대하며 경청하는 예수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참으로 예수님께 겸손과 절대적 신뢰의 믿음을 지닌 백인대장은 자기 친구들을 통해 자기가 아끼는 종을 살려줄 것을 간청합니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지붕에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주십시오.”
백인대장의 겸손하고 진실한 믿음에 감동, 감탄하신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군중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일이 없다.” 주님의 말씀과 더불어 동시에 건강한 몸으로 치유된 백인대장의 종입니다.
바로 미사중 백인대장같은 겸손한 고백과 더불어 주님의 성체를 모시는 우리들입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주님의 성체성사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백인대장과 같은 겸손한 믿음과 더불어 영육의 치유를 선사하심을 믿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감동케 하는, 영육의 치유에 특효약인 믿음임을 깨닫습니다.
기도와 삶은 하나이자 함께 갑니다. 기도하는 대로 살고 사는 대로 기도합니다. 우리 믿음의 여정중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모든 이들을 위한 보편기도의 요청이 시공을 초월하여 공감을 줍니다.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청과 기도와 전구와 감사를 드리라고 권고합니다.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여, 우리 아주 신심 깊고 품위 있게, 평온하고 조용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구원자이신 하느님께서 좋아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시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성을 내거나 말다툼을 하는 일 없이, 어디에서나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바오로 사도의 간곡한 기도의 권고입니다. 거룩한 손은 화해하는 사람의 손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입니다. 참으로 진실하고 간절한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성장하는 믿음이요 예수님을 닮아가는 우리들이고, 만나는 사람마다 전부처럼 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주님의 미사은총입니다.
"하느님 곁에 있는 것이 내게는 행복, 이몸 둘곳 하느님 나는 좋으니, 하신 일들 낱낱이 이야기하오리다."(시편 73,2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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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구원의 보편성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는 주인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루카 7,2)
한 백인대장이 병들어 죽게 된 노예를 위해 예수님께 도움을 간청합니다. 이방인인 자기가 예수님을 직접 찾아뵙기에 합당치 않다고 여겨 유다인 원로들을 보낸 것입니다.
백인대장은 유다인 입장에서 보면 구원에서 제외된 이방인이지만, 실상 그의 겸손과 믿음, 통찰력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거기에 더해, 종에 대한 사랑 역시 놀랍게 다가옵니다. 당시 신분제도와 관습으로 보면 종은 소유물로 취급해도 되는 존재이지만 백인대장은 그를 인격적으로 대하고 소중히 여기며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발벗고 나섭니다.
"당신 자신을 모든 사람의 몸값으로 내어 주신 분이십니다."(1티모 2,6)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소개합니다. "모든 사람"의 범주에는 자유인과 종, 유다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계급이나 지위나 신분을 막론하고 하느님의 존재를 나누어 받은 모든 사람이 다 포함됩니다. 예수님은 구원 대상을 가리지 않고 모두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것입니다. 모든 이가 그분께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모든 이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되라고 당부합니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루카 7,9)
예수님께서 "그저 말씀만 하시"라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보고 감탄하며 칭찬하십니다. 백인대장과 같은 이방인도 당연히 하느님의 모상을 나누어받은 그분의 피조물입니다. 게다가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백인대장은 이미 예수님을 꼭 닮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1티모 2,4)
이것이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바람입니다. 서로를 구분하고 차별하고 소외시키는 태도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힘이 아님은 명백합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은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복음 환호송)
믿는 사람은 "누구나"라고 하십니다. 오늘 믿음을 칭찬받은 복음 속 백인대장처럼 사실 우리도 역시 믿음으로 구원받은 이방인이지요. 믿음 덕분에 우리는 인간이 규정지은 구원의 기준, 범주, 조건에 솔직히 그리 부합하지 않는 처지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벗님! 소박하고 단순하나마 우리가 지닌 믿음을 주님께 보여 드리는 오늘이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 자신을 규정하는 온갖 조건이 그리 합당하거나 찬란하지 못해도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귀하게 반기시지요. 각자 소중히 여기는 바를 믿음과 겸손한 기도로 지켜내며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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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m.youtube.com/watch?v=3dXySVchnT0&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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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루카 7, 7)
믿음은
끝없이
주님을
향해 있다.
믿음은
우리를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 한다.
간절함이
믿음이다.
우리 마음을
깨어나게 하는
믿음이다.
백인대장과
노예를
소중한
사람으로
바꾸어 놓는
사람의
믿음이다.
믿음 안에
우리가 있다.
힘들고 아픈
현실은
믿음을 딛고
다시 일어서게
된다.
믿음은
사랑을 위해
살아야 할
우리의
삶이다.
믿음과 삶은
말씀과 치유로
깊어간다.
믿음은
삶을
뒷받침하는
삶의 힘이다.
믿음의 힘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 모두를
변화시킨다.
투명한 믿음
겸손한 믿음을
백인대장의
믿음에서
만나게 된다.
사람이
사람에게
주님을
가리키는
믿음이 된다.
다시
간절해지는
믿음이다.
아픔을
치유하는
믿음이다.
사람을 살리는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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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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