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1944년 7월 일단의 미군 관찰조 정보장교들이 옌안에 갑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1947년까지 머무르면서
옌안의 물정을 파악하고 중국공산당과 접촉합니다.
옌안에서 미군 관찰조와 공산당과의 관계는 매우 화기애애 했다고 합니다.
마오쩌둥과 격의없이 만나 식사하고 어울렸다고합니다.
목적은 대일항전 작전협의.
(주로 격추된 미군 조종사 구출 작전 등)
중일전쟁 이후에도 미군 정보장교 관찰조는 중국 옌안에 머물면서 미 국무부에 계속해 보고서를 올립니다.
그 보고서의 핵심내용은 국공내전에서 마오쩌둥이 이길것이고..
미국은 부패한 장제스가 아니라 마오쩌둥에 협상을 해야 한다고.
옌안에 파견되어 그들을 관찰했던 미군 정보장교들인 존 서비스(https://en.wikipedia.org/wiki/John_S._Service?wprov=sfla1 ), 존 데이비스 등이 그런 분석을 주로 올렸습니다.(반면, 제2차 국공내전 초기만해도 소련은 중국공산당보단 중국국민당쪽에 딜을했었죠. 국공내전의 전세가 뒤바뀌는 47~48년까지만해도 소련은 국민당 정부에 간접적인 지지를 하기도 했었습니다. 중국국민당을 공식적으로 중국 정부로 인정했었던.. 의외로 스탈린은 마오쩌둥을 그렇게 썩 긍정적인 협력대상자로 보지않았다고 합니다.)
이들 미군 정보장교들은 선교사 아들들로 중국에서 태어나 자란 중국통들이었습니다.
물론 미국내에서는 그들의 보고서에 경악했습니다.
친 국민당 세력의 로비, 반공주의가 강한 미국에서
그들의 보고는 용인될 수 없었던 것.
미소 냉전이 격화되면서 관찰조에 참여했던 미군장교들, 많은이들이...
매카시즘 광풍에 휘말려 빨갱이로 몰려 해고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분석은 결국 20년이 지나서 현실이 됐습니다.
1970년대 닉슨의 중국방문과 미중화해, 수교는 옌안 관찰조의 분석 및 처방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결국 미중은 20년이란 시간을 까먹은것.
1949년 미국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했었더라면..
지금과는 크게 다른방향으로 갔을거라분석하는 오늘날 미국의 역사학계의 평가가 있습니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지금도 옌안에 파견했던 미군 정보장교 관찰조를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다고합니다.
그 요원들 유가족을 모셔다 기념하기도 한다고합니다.
또한 관찰조를 파견보내는데 공헌 한..
당시 국민당 정부의 군사고문이자 미군 사령관 조지프 스틸웰도 높이 평가합니다.(물론 장제스의 국민당으로서는 스틸웰은 철천지 웬수 관계였죠.)
-출처 - 미중카르텔 ( http://www.yes24.com/Product/Goods/92513256?OzSrank=1 ) p67~82 참조
첫댓글 삐딱이조는..옌안콩사탕놈들은 진심 사당만들어서 절하고 감사해야할 존재죠..신편 육군주력도 말아먹고..국민당에게 가야할 물자들도 지가 다 휘둘러서 해처먹고 말아먹으면서 날려먹은 아주 거한삽질을 하신분이니..얼마나 감사한분입니까..
재밌는게 오늘날 중국 충칭가면 조지프 스틸웰 미국 장군을 기리는뜻에서 그의 흉상과 그가 거주했던 사저등 정돈 잘되어있고 박물관으로 전시하며 높이기리고있다는점입니다.. 중국 국민당입장에서 스틸웰은 견공자제분이지만, 중국 공산당측에선 스틸웰은 상당히 높이평가받는 존재..
오늘날 시간이 흐를수록 스틸웰에대한 평가는 더 나락으로 가는듯한 느낌입니다..
@Wehrmacht 많이 밝혀졌으니까요.....병력이고 뭐고 다 말아먹은게 온전히 그 고집쟁이의 삽질덕분이었고, 그렇게 말아처먹은게 결국 옌안콩사탕놈들을 도와준격이니까요.. 42년 버마전선부터 시작된 삽질은 그냥 답없는 수준입니다.
우리는 장난으로 무다구치 독립군 드립을 치는데 쟤들은 진심으로 스틸웰 빠는 건가요...
사당지어서 절해도 모자를지경..ㅡㅡ;;;;저 ㅆㅂㄹㅁ가 중국, 버마전역에 싸지른거보시면..진심 답없습니다.
스틸웰, 일제 아니었으면 멸망엔딩 후 파르티잔으로나 남는 지역반군이었을게 중국공산당이죠.
일제는 명백히 존재하는 위협이었지만..삐딱이 새끼는..진짜..저 정도로 트롤링할꺼라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