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우리겨레에게 남아 있는 몇 안되는 명절 중의 하나인 정월 대보름날이다.
1년 중에는 보름이 열두번이나 있다. 그런데 8월 대보름과 정월 대보름만이 명절로 지켜 오고 있다.
하나는 추석이란 명절이고 하나는 그냥 정월대보름날로 불린다.
왜 그런 이름이 붙었고 왜 명절이 되었는지는 잘 모른다.
아마 농사와 관계가 깊지 않나 싶기도 하다.
정원 보름날은 새해 농사를 시작하는 의미에서 풍년을 빌고,
추석은 한 해 농사가 결실할 때라 추수감사절의 의미를 띈 것이라라.
정월 보름날 아침에는 오곡밥에 나물 반찬을 먹는다.
아주까리 잎사귀 나물에 쌈을 싸 먹으면 봄에 꿩 알을 주줍는다는
말이 전해져 내려 오고 있었다.
그래서 은근히 기대를 해 보았으나 꿩 알을 주어 본 기억은 없다.
다만, 추억으로 남아 있는 정월 대보름날에 대한 이야기를 되새겨 보는 것이다.
어렸을 적에는 설 명절에 많은 음식을 만들어서 나누고,
떡이나 강정 같은 것은 한 열흘 동안 먹을 수 있었다.
그것들이 떨어질 때가 되면 다시 대보름 명절이 있다는 것이 즐거웠다.
대보름 장날은 설 대목장 다음으로 큰 장날이 선다
오곡잡곡과 갖가지 나물류와 부름으로 쓰이는 밤이나 땅콩, 호두 같은 과일과
명태를 비롯한 생선들이 활발하게 거래된다.
그런데 우리 마을에서는 호두를 먹어본 일은 없다.
농사를 짓는 가정에서는 잡곡이나 나물은 자급자족이 되었으므로
생선류만 사오고, 술만 담그면 되었다.
보름날 아침이면 오곡밥에 여러가지 나물을 장만하여 아침을 먹는데,
생선을 먹지 않으면 비리(진딧물)가 오른다고 하면서,한두가지 생선도 곁드렸다.
어른들은 물론 아이들에게도 귀밝이 술을 나누는 풍습이 있었고,
밤이나 땅콩 같은 것을 깨무는 풍습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떡이나 전을 준비하지 않는 것이 퍽 섭섭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점심을 먹고 나면 동네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달집 만드는 일로 부산해진다.
키 큰 소나무로 얼개를 만들고, 대나무로 그 사이를 엮고는 소나무 가지들로 지붕처럼 만든다.
집 안에는 볏집으로 방처럼 만들어서 저녁이 되기를 기다린다.
그 때까지 부정한 사람이 달집 근처에 와서는 안되다는 금기가 있었다.
달집은 달이 뜨는 시간에 맞추어 불을 지른다.
불을 지르는 사람은 부정타는 일이 없는 사람 중에 그해 큰 소원이 있는 사람으로 정해진다.
우리 마을은 산골짜기에 있었기 때문에 달이 뜨는 시간이 늦다.
산 위 마을이나 들판에 있는 마을에서 달집을 사르는 시간에 맞추기 위해서는
앞산 위로 올라가 달이 뜨는 것을 맞이를 체크 하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 사람들이 신호나 연락을 보내 오면 지체 없이 달집에 불을 지르는 것이다.
달집에 불이 오르면 마을 사람들은 각기 자기의 소원을 빌기도 하고
횡액을 불에 살아 보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옛날 다리미에 콩이나 쌀을 담아서 달집 사른 불에 구워 먹는 풍습이 있었는데,
그것을 먹으면 머리에 부스럼이 나지 않는다거나 잇발이 단단해진다고 하였다.
그리고 지금도 전해지고 있는 쥐불놀이가 생각난다.
동네 아이들은 깡통에 숯불을 넣어가지고 빙빙 돌리며 돌아다니고
논 언덕에 불을 지르기도 하였다.
그 당시는 깡통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는데, 6.25 후에는 흔해졌었다.
달집을 사르고 난 다음날에는 품물을 치면서 집집마다 돌아가며 지신을 밟았다.
그해의 풍년을 기원하고, 그 집의 평안을 비는 축제인 것이다.
그날 농악을 울리면서 술을 나누고, 거기서 나온 곡식을 모아서
농악기를 보충하거나 마을 발전 기금에 보태기도 하였다.
그 당시에 농악놀이를 하던 분들이야 모두 마을 앞뒷산에
누워계시겠지만 , 쥐불놀이를 하던 친구들은 다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들 중에도 많은 친구들이 먼 나라로 가고 남아 있는
친구들도 일흔이나 여든을 넘어 인생의 황혼을 맞이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