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른 김장하 ]
김장하(金章河, 1944년생)는 MBC경남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로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경남 사천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중학교를 간신히 졸업한 후 친구들이 학교를 다닐 때 삼천포의 한 한약방에서 점원으로 일하면서 낮에는 약을 썰고 밤에는 공부를 했다. 열아홉 살 최연소의 나이로 한약업사 자격을 얻 1963년 사천시 용현면 석거리에 한약방을 개업했고, 10년 뒤인 1973년 진주시 동성동으로 이전했다.
그가 운영한 '남성당한약방'은 50년간 운영되다가 2022년 5월 말까지 운영했다. 그러나 정작 김장하 선생은 한약방을 운영해 번 돈을 개인을 위해 쓰지 않고 이 돈을 지역사회를 위한 지원으로 돌렸다.
일평생 동안 나눔을 실천해온 인물로, 대표적인 사례로는 1983년 학교법인 남성학숙을 설립해 이듬해 100억 원이 넘는 사재를 들여 명신고등학교를 설립해 10여년 간 이사장을 하면서 체육관과 도서관 등 모든 학교시설을 완비한 후에 1991년 국가에 기부 채납한 일이다.
그는 20대 젊은 시절부터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남몰래 장학금을 주었고, 지금까지 김장하의 장학금을 받은 사람이 1000명을 웃도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의 지원은 교육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 예술, 역사, 여성, 인권 등 지역사회 모든 영역에 걸쳐 있다.
그는 진주 지역의 각종 문화예술단체나 언론·역사·환경운동 등 시민사회 전 영역에 걸쳐 조건없이 지원해왔다. 1990년대 시민주로 창간했던 옛 <진주신문>의 주주·이사로 참여했고, 1995년부터 27년간 '진주가을문예'를 지원했다.
국립 경상대학교 최초의 기부 건축물인 남명학관을 건립하는데 앞장섰으며 '진주문화를 찾아서'라는 문고 발간사업도 계속하고 있다. 형평운동기념사업회와 진주문화연구소는 직접 설립에 앞장섰고, 남성문화재단을 통해 장학사업도 꾸준히 진행하는 등 건강한 지역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이외에도 지금은 진주를 대표하는 지역서점이 된 '진주문고'가 어려웠던 시기 지역서점을 살리기 위해 두 차례나 큰 도움을 주었고, 여성평등기금 조성으로 가정폭력, 피해여성 지원에도 힘쓰는 등 여성운동에도 아낌없이 지원했다.
극단 '현장'이 현재의 위치에 자리 잡을 때도, 진주여성민우회가 창립될 때도 김장하의 도움이 있었다. 남명학, 진주오광대, 진주솟대놀이가 재조명되는 데도 그의 손길이 닿았다.
2000년에 설립한 남성문화재단을 통해 다양한 후원을 이어왔던 김장하는 재단 해산(2021년) 당시 남은 기금 34억 원을 경상대학교 발전기금재단에 기탁하며 사회에 환원하였다.<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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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줬으면 그만이지 ]
(지난 설연휴 때 MBC 전파를 타고 알려진 (전) 진주 남명학숙 재단 김장하 이사장님의 얘기입니다)
선생님은 열아홉에 한약업사 자격을 얻어 1963년 고향 사천에서 한약방을 개업했고, 10년 뒤 진주로 이전해 남성당한 약방을 50년 간 운영했습니다.
한약방은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마이크로 순서를 호명할 정도였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 점심시간에는 빵을 나눠주기도 했고, 전국 한약방 가운데 세금을 가장 많이 내기도 했습니다.
선생님은 20대 젊은 시절부터 가난한 학생들에게 남몰래 장학금을 주기 시작하여 1,000명을 웃도는 학생들이 혜택을 보았고, 40대에 100억원이 넘는 돈을 들여 세운 진주의 사학 '명신고등학교'를 국가에 헌납하고, 30억 원이 넘는 재산을 국립경상대학교에 기부했고, 진주의 사회, 문화, 역사, 예술, 여성, 노동, 인권단체들을 지원했습니다.
선생님은 명신고등학교를 설립 뒤 이사장실을 없애고, 양호실로 쓰도록 했고, 학교에 갈 때는 버스나 자전거를 타고 갔는데
이사장이 자전거를 타고 학교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은 학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선생님이 명신고등학교 이사장 퇴임식 때 하신 말씀입니다.
"부끄러운 고백일지 모르겠습니다 마는 저는 가난 때문에 하고 싶었던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과 같은 한약업에 어린 나이 부터 종사하게 되어 작으나마 이 직업에서는 다소 성공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제가 본교를 설립 하고자 하는 욕심을 감히 내게 되었던 것은 오직 두 가지 이유는,
ㆍ내가 배우지 못했던 원인이 가난이었다면 그 억울함을 다른 나의 후배들이 가져서는 안 되겠다 하는 것이고,
ㆍ그리고 한약업에 종사하면서 내가 돈을 번다면 그것은 세상의 병든 이들, 곧 누구보다도 불행한 사람들에게서 거둔 이윤이었기에 그것을 내 자신을 위해 쓰여서는 안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두 가지 요건을 충족시키는 가장 좋은 일이 곧 장학 사업이 되었던 것이고 또 학교의 설립이었습니다."
김장하 선생님의 <줬으면 그만이지> 책 내용을 소개하면,
“똥은 쌓아두면 구린내가 나지만, 흩어버리면 거름이 되어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는다.
돈도 이와 같아서 주변에 나누어야 사회에 꽃이 핀다.”
“나는 그런 것 못 느꼈어, 돈에 대한 개념도 그렇게 애착이 없었고 그리고 '재물은 내 돈이다'는 생각이 안들고, 언젠가 사회로 다시 돌아 갈 돈이고, 잠시 내가 위탁했을 뿐이다 그 생각 뿐이야. 이왕 사회로 돌아갈 돈인 바에야 보람 있게 돌려줘보자 그런 거지.”
“맹자의, 仰不愧於天 (앙불괴어천)하고 俯不作於人(부부작어인)을 나의 생활신조로 삼고 있어요.
풀이하자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고개를 내려 사람들한테도 부끄러울 게 없는 삶을 뜻한다."
"한 스님이 눈보라가 치는 어느 추운 겨울날, 고개 마루를 넘어서 이웃 마을로 가고 있었습니다.
저쪽 고개에서 넘어 오는 한 걸인을 만납니다.
곧장 얼어 죽을듯한 그런 모습입니다. 저대로 두면 얼어 죽겠는데~
그래서 가던 발길을 멈추고 자기의 외투를 벗어줍니다.
자기 외투를 벗어 주면 자기가 힘들 것이나, 지금 안 벗어주면 저 사람이 금방 얼어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엄청난 고민 끝에 외투를 벗어준 것인데 그 걸인은 당연한 듯이 받고는 그냥 가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스님이 기분이 나빠진 거에요.
나는 엄청난 고민을 하고 벗어준 것인데, 저 사람은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 없구나 싶은 것이죠.
그래서 “여보시오.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는 해야 할 것 아니오?” 했더니 그 걸인이 하는 말이,
“줬으면 그만이지. 뭘 칭찬을 되돌려 받겠다는것이오?”
그래서 그 스님이 무릎을 칩니다.
아, 내가 아직 공부가 모자라구나. 그렇지, 줬으면 그만인데 무슨 인사를 받으려 했는가,
오히려 내가 공덕을 쌓을 기회를 저 사람이 준 것이니 내가 저 사람한테 고맙다고 인사를 했어야지.
왜 내가 저 사람한 테서 인사를 받으려 한 것이냐.
탄식을 하면서 그 고개를 넘어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봉사를 할 때,
어떤 마음으로 봉사를 할 것인가를 느끼게 해줍니 다. 저는 이런 마음에서 살아가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 학교의 이름 '명신'은 대학(大學)에 나오는 명덕신민(明德新民)을 뜻하며 풀이하자면,
'참된 나를 찾아(明德), 세상을 이롭게 한다(新民)'라는 걸출한 뜻을 가지고 있다.
이 학교는 진주시 초전동에 위치하고, 1983년 4월19일 개교하였으며
100억대의 재산을 1991년 10월 9일 국가에 헌납함.
~ 옮긴 글 ~
첫댓글 참으로 대단한분이시죠!
평생을 한약사로 일하면서학교를 설립 국가에 기부하고 장학사업에 몸바처온 분 , 학교의 이사장 공간도 마다하고 양호실 옆에 마련했으며, 그흔한자동차도 타지않고 자전거로 타면서 평생을 사회를위해 살아온 사람 입니다.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