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 장 / 최후의 일격
* 이 책은 도서출판 안티오크에서 출간한 것이므로 무단 복제하는 것을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누가 내게 죄를 깨닫게 하겠느냐?"
이같은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답은 시편 39:8-10에 나오며, 그 답은 어리석은 자이다.
"나로 어리석은 자의 질책거리가 되지 않게 하소서. 나는 잠잠했고, 주께서 이를 행했기에 나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나이다. 주의 징책을 내게서 옮기소서, 나는 주의 손의 치심으로 소멸되었나이다."
어리석은 자는 그분을 비난하나, 어느 누구도 그분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할 수 없다. 도대체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죄있다 비난하겠는가?
"성경기록관들이 서서 맹렬히 그분을 비난하더라."(눅 23:10)
새로운 역본들을 기록한 이들은 예수님을 '죄 있다' 비난하며 마지막 일격을 가한다. 그들의 음모는 마태복음 5:22에서 한 부분을 삭제함으로써 그 모습을 드러낸다.
NIV, NASB 등
* 킹 제임스 성경
자기 형제에게 화를 내는 자마다 심판에 처하여 질 것이며
* 아무 까닭 없이 자기 형제에게 화를 내는 자마다 심판의 위험에 놓이게 되고
이
고소자들은 예수님께서 화가나사 성전에서 돈을 바꾸어 주던 자들은 상을 뒤집어엎으신 사건을 끄집어낸다(요 2:15). 또한 그들은
종교 지도자들이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고치신 것에 대해 비난했을 때 그분께서 화가 나서 그들을 둘러보신 것을
상기시킨다(막 3:5). 어떤 관주성경은 이 구절에 대해 이렇게 서술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이 예수님께서 아직 성화되지 않아 그 안에 '옛 사람'을 갖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고 말한다.(163)
위
구절의 "아무 까닭 없이"라는 절은 대부분의 사본에 있으며 A.D. 150년의 타티안과 이레니우스에 의해서도 증거되고 있다.
그렇지만 웨스트코트는 예수님께서도 죄를 지었다고 믿었기에 이 구절을 삭제해 버렸다 (164)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슈퍼스타」나
「예수의 마지막 유혹」과 같은 영화에 나타나는 이 나약한 예수는 이제 새로운 역본들에도 등장하게 되었다.
NIV, NASB 등
* 킹 제임스 성경
자기 자신도 약함에 지배를 받음이라.(is subject to)
* 자기 자신도 연약함에 싸여 있음이라.(is compassed with)
나자렛 사람
패
커는(J. I. Packer) "예수의 인격과 장소에 대한 성경적 증거의 이음매 없는 옷이 나뉘어짐"에 대해 기독교인들에 경고하고
있다.(165) 밀교주의자들은 계속해서 '나자렛 사람'(Nazarene)이나 '나자렛 사람 예수' 라는 직함을 사용하여 그분을
한정된 곳에 속한 분으로 국한시키려 한다. 대표적인 예로서 장미십자회에서 발간한 「영혼의 과학」이라는 책은 이 직함을 수없이 많이
인용한다.
나자렛 사람 예수는 육체적 인물이요 슬픔의 사람이다. 그리스도란 우주적 깨달음으로 인해 개인적으로 신적의식을 획득한 거룩한 광채이지만... 나자렛 사람은 단지 에쎄네파를 이어 받은 전수자에 지나지 않는다.(166)
신
약 성경에서는 사도 바울을 가리켜 "위험한 자이며... 나자렛 사람들의 종파의 지도자"로 불렀던 사람들 즉, "형제들을 비난하던
자들" 외에든 아무도 이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행 24:5). 이같은 용어 전쟁에서 사탄의 도구로 자처하는 새로운 역본들은 여러
곳에서 예수님을 '나자렛 사람'으로 부르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이 용어에 익숙한 뉴에이지 저작자들에게 매우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새로운 역본들은 정관사 'the'를 일관성 없이 사용함으로써 (예, 행 26:9)이 이들의 음모를 더욱 드러내고
있다.)
NASB 등
* 킹 제임스 성경
나사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
행 4:10
* 나사렛의 예수 그리스도
이 나사렛 사람, 예수
행 6:14
* 나사렛의 예수
나사렛 사람 예수(JESUS THE NAZARENE)
요 19:19
* 나사렛의 예수(JESUS OF NAZARETH)
지푸라기 인형
지
금까지 살펴본 대로 새로운 역본들에서 100여군 데가 넘게 그리스도의 신성이 빠진 것을 보게 될 때, 이 역본들의 옹호자들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독자들께서는 궁금해 할 것이다. 새로운 역본을 열렬히 지지하는 칼슨은 자신의 책과 또 다른 곳에서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인다.
대중적인 문헌들을 통해 목회자나 일반 성도들에게 이런 이론이 제시되고 있지만 이들은 같은
수준에서 반박하는 자료를 읽어 본적도 없고, 이 이론이 틀렸음을 보여주기 위한 고차원의 일을 할 수 있는 능력도 갖고 있지 않다.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자들은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진리를 가려버렸다... 만약에 예수를 하나님이라 번역할 수 있는
신약성경 내의 모든 구절들을 비교한다면, 우리는 킹제임스 성경이 그 중의 반이나 빠뜨린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67)
칼
슨은 새로운 역본들을 많이 팔기 위해 만들어진 소책자에서 작은 표를 이용해 자신의 '진보된 작업'을 제시한다. 그러나 우리는 즉시
이것이 '진보된 사기수단'이지 결코 '진보된 학문적 작업'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표는 단지 8개의 성경구절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것이 통틀어 그가 소위 "예수를 직접적으로 하나님이라 번역할 수 있는 신약성경내의 모든 구절들" 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다 (그는 아마도 새로운 역본들을 사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이 8구절 중에서 단지 3구절만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다루고 있다.「네이브의 주제별 성경」이나 록키어의 고전 「성경의 모든 교리들」같은 책은 '그리스도의 신성' 이라는 제목하에 나머지
5구절은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다. 반면에 이런 책들은 새로운 역본들은 생략했지만 본 저서는 다루고있는 많은 구절들을 인용하고
있다.
다음은 새로운 역본의 출판자들과 칼슨이 사용한 날조된 표를 요약한 것이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동일시하는 구절들
요1:1
요1:18
요20:28
롬9:5
살후1:12
딛2:13
히1:8
벧후1:1
*KJV
Yes
No
Yes
Yes
No
No
Yes
No
NIV
Yes
Yes
Yes
Yes
No
Yes
Yes
Yes
NAS
Yes
Yes
Yes
Yes
No
Yes
Yes
Yes
"
킹제임스 성경이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성경구절 중 반이나 빠뜨렸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칼슨이 사용하는 성경구절들(위
표의 KJV 줄에 'No'로 표시된 4구절)은 사실 학문적으로 조사해보면 쉽게 넘어지는 지푸라기 인형에 불과하다.
1. 요 1:18 :
'유일하게 나신 하나님'이냐 아니면 '유일하게 나신 아들'이냐는 이미 23장에서 언급되었다. 요한복음 5:17-26은 KJV가 사용한 '아들'이라는 단어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 만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2. 데살로니가후서 1:12 :
모
든 역본들이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our God and Lord Jesus Christ)라고 기록한다. 이 표를
만든 사람은 아마 여기에도 'Lord'와 'Jesus'사이에 콤마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새 역본들에서 12번이나
생략된 '주'(Lord)라는 칭호는 그분의 신성을 증명해준다(22장 참조.)
3. 디도서 2:13 :
모
든 그리스 본문은 킹제임스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 곧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the great God and our
Savior Jesus Christ)로 되어있다. 따라서 새로운 역본들에서처럼 'the great God and our
Savior, Jesus Christ'로 번역될 수는 없다[중간에 컴마가 들어간 것에 유의 할 것.]
4. 베드로 후서 1:1 :
NIV와 NKJV 편집위원인 포스터(Lewis Foster)는 새역본의 편집자들이 베드로후서와 디도서에서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넣고 다른 100여 곳에서는 빠뜨렸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어
떤 이들은 디도서와 베드로후서의 구절에 있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표현이 심지어 자유주의적인 역본들에서도 그리 번역됨으로써 더욱
견고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바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확고히 한데는 또 다른 목적이
있다는 점이다. 자유주의적 번역자는 대개 바울이 디도서를 썼고 베드로가 베드로 후서를 썼다는 점을 부인한다. 그래서 그는 바울과
베드로가 이것들을 쓸 수 없는 훨씬 후기에 이것들이 쓰여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로 그리스도를 신성화하는 바로 이 구절들을
이용하는 것이다.(169)
5. 디도서 2:13과 베드로후서 1:1에 있는 "하나님 곧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은 갈라디아서 1:4, 데살로니가전서 1:3, 빌립보서 4:20에서 하나님의 신성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 "하나님 곧 우리의
아버지(God and our father)"라는 표현과 문법 상으로 같다[익 구절을 하나님과 우리 아버지로 번역하면 오역이
됨.] 데살로니가후서 1:12, 디도서 2:13, 베드로후서 1:1은 그리스어인 '헨 디아 디오인' (hen dia dyoin) 즉
'둘에 의해 하나'(one by two)에서 유래된 '헨디아 디에스'(hendiadies)로 불린다. 문법적으로 이는 명사와
형용사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그리고'(and)에 의해 연결된 두개의 명사에 의한 개념의 표현으로, 자기의 아내를 "나의 아내이고
가장 좋은 친구(my wife and best friend)"라고 표현하는 것과 같은 개념이다.
6. 100여 군데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것 외에도, 새로운 역본의 유다서 25절은 마치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아닌 것 같은 인상을 준다.
NIV, NASB 둥
* KJV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통하여... 하나님 우리 구세주께 있을지어다. [하나님이 구세주가 됨.]
* 영광이... 하나님 우리 구세주께 있을지어다. [우리의 구세주는 예수님이시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단지 서 있는 곳
이 부분은 새로운 역본의 편집자들이 이단과 뉴에이지 추종자들과 함께 편히 소파에 앉아있음을 보여주는 인용구절로 가득차 있다. 「이단들에 대한 이해」라는 책에서 맥도웰은 이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분명히 보여준다.
이단들이 추종하는 예수는 성경에서 말하는 영원하신 하나님보다는 낮은 자이다. (170)
성경기록관들이 이 '영원하신 하나님'께 일격을 가한 것을 보고 나면, 그들이 요한복음 4:12에서 내린 결론은 전혀 이상한 것이 못된다.
"당신은 우리의 아버지 야곱보다 못한 자이죠? 그렇지요?" (NIV, NASB 등)
성
경기록관들은 갑자기 '조롱하는 자리'에서 '사탄의 자리'로 옮겨앉는다. 구약성경은 '사탄의 깊이' 즉 그가 행한 것 중 가장
저질적인 것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봄으로 기쁨을 취하는 것이다(겔 32:31). 그와 연합한
자들은 로마의 원형 경기장에서 사자에게 물려 죽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모습을 멍청히 바라보는 자들이다.
성
경기록관들의 뿌리깊은 타락은 편안히 앉아서 고통받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성경기록관들의 모습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마태
27:33-44). 그들은 고통과 괴로움속에서 처형의 나무에 달리신 그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성경기록관들은 그들의
'가장 높은 자리'에서 새디즘의 '사탄의 자리'로 옮겨앉은 것이다. 그러나 이윽고 그들이 앉아있는 장면은 곧 바뀌게되어 그들이
왕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서게 될 것임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다.
"또
내가 크고 흰 왕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을 보니, 땅과 하늘이 그분의 얼굴을 피하여 간데 없고, 그들이 있을 자리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작은 자나 큰 자나, 하나님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펼쳐지고 또 다른 책이 펼쳐지니, 곧
생명의 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들에 따라, 책들에 기록된 것들로부터 심판을 받으니..."(계20:11,12)
*
본문에 포함된 성경말씀은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그리스도 예수 안에 출간, 생명의 말씀사 판매 대행, 말씀보존학회에서 발행한
"한글 킹제임스 성경"이 아닙니다.)"에 나오는 한글 성경을 기준으로 했습니다.(khi4040 ; 터나누기)
* 자료출처 : 그리스도 예수안에(http://www.inchristjesus.net)
첫댓글 기록된 성경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변개되지 않아야만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번역자들에 의하여 다른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번역자의 사상이 가입되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번역하여 옮기는 번역자의 믿음과 본성과 습득한 지식의 수준 등등 모든 것들이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이며, 번역자의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들은 결코 표현해 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참된 진리의 말씀대로 번역본을 내놓고자 한다면 성경을 기록케 하시기 위하여 감동케 하셨던 성령께서 번역자에게 동일한 감동을 주신다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하심에 의하여 기록이 되었습니다.
게시판 ---8024번 "신약성경이 이렇게 변개가 되었다"
게시판 ---8060번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의 내용이 바로 신약성경이 다른 영 다른 사상으로 변개가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말라기 3장 1절의 예언의 말씀은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말라기의 예언의 말씀에서 예언의 말씀을 하시고 계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여호와)가 내(여호와)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여호와)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라고 밝히어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자 "엘리야"를 자신의 길을 준비하도록 자신의 앞서서 보내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은
이사야 40장 3절 개역개정
3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엘리야는 침례요한의 이름으로 여호와 하나님 앞서서 왔고 여호와 하나님의 길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번역자들이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변개가 이루어졌다는 것이 바로 제가 게시판에 올린 8024번과 8060번의 내용인 것입니다.
나=내, I, MY, ME 입니다.
나=내는 결코 너=네,인 you, your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 10절 개역개정
10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마가복음 1장 2절 개역개정
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누가복음 7장 27절 개역개정
27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준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은 그대로 인용이 되었어야만 합니다.
나=내가 너=네로 변개가 되었습니다.
말라기 3장 1절의 예언의 말씀을 신약성경을 번역한 번역자들이 다른영 다른 사상의 '너=네인 you, your'로 바꾸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말라기 3장 1절의 예언의 말씀의 뜻은 오실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변개된 신약의 말씀은 내(여호와)가 아닌 이에수스'Iesus', 지져스'Jesus'라는 것입니다.
신약에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은 구주=구세주=구원자의 이름을 가진 구약성경 창세기 49장 18절에 "구원"으로 번역된 히브리어의 성호 "예슈아"이신 것입니다.
창세기 49장 18절 개역개정
18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창세기 49장 18절의 "구원"의 뜻은 "여호와께서 구원 하신다"입니다.
구원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예슈아"이시라는 것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슈아" 라 하라"
사도행전 13장 26절 개역개정
26 형제들아 아브라함의 후손과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예슈아께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시는 "구원의 말씀"이시라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기록되었어야 할 구주=구세주=구원자의 성호는 "예슈아=Yeshua"이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이 신약에서 인용되었을 때에 "나=내"가 아닌 '너=네'로 변개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