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8년 즉위한 엘리자베스 1세 영국 여왕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의 토대를 만들었다. 그의 재위 45년 간 영국은 중상주의,북미 버지니아 식민지화 등으로 상징되는 절대주의 전성기였다. 셰익스피어 등 대문호 배출로 국민문학 황금기가 도래한 것도 그 때다. 독신이었던 그는 그 이유를 "국가와 결혼했다"는 말로 압축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을 가장 존경한다는 박근혜 의원이 한나라당 대표가 됐다. 모르긴 해도 그의 마음은 오래 전 엘리자베스 1세를 닮아 그렇게 되는 데까지 갔을 것이다
파산 직전의 영국을 세계 최강으로 탈바꿈시킨
엘리자베스 1세의 탁월한 리더십과 경영 전략
영국과 결혼한 처녀 여왕 엘리자베스 1세(1533~1603). 그녀는 ‘지난 1천년간 가장 탁월한 지도자’(뉴욕타임스), 부도 직전의 영국을 세계 최대 제국으로 키워낸 여장부로 꼽힌다. 그녀가 추진한 개혁 드라이브와 리스크 관리, 군주로서의 국가경영 이념은 오늘날의 경영자들에게도 훌륭한 모범이 되고 있다.
『위대한 CEO 엘리자베스 1세』는 그의 경영철학과 통치 스타일, 리더로서의 풍모를 집중적으로 분석하였다. 이 책이 많은 경영서적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까닭은 ‘역사로 배우는 지혜경영’의 정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비즈니스 위크지 베스트셀러인 『패튼 리더십』으로 유명한 경영저술가이다. 그는 엘리자베스가 영국이라는 나라를 거대한 기업처럼 이끌고 경영했다면서 4백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리더십의 요체는 빛을 잃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그녀가 즉위했을 때의 영국은 그야말로 사면초가였다. 화폐가치 하락과 급격한 인플레이션, 종교분쟁으로 인한 내분,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운 왕권, 강대국 에스파냐와 프랑스의 위협 등등. 잇단 금융 위기와 주가 폭락, 환율 상승, 유가 폭등, 정치권의 불안 등은 지금 우리와 너무 닮은 상황이었다.
이 같은 시점에서 영국호의 선장을 맡은 엘리자베스는 즉위하자마자 과감한 개혁 드라이브로 승부를 건다. 종교문제에서 원칙을 일관되게 밀고 나가고 의회와 타협해 왕권을 안정시켰으며 화폐개혁으로 인플레이션을 잡았다. 집권 초반기에 국내 안정을 꾀한 다음에는 대외 문제 해결에 나섰다. 해적 선장인 드레이크를 중용해 최대 강적 에스파냐의 무릎을 꿇게 했으며 프랑스와 스코틀랜드 왕통의 제임스 1세를 왕위 계승자로 선정함으로써 대륙과의 구원을 풀었다. 셰익스피어와 스펜서로 대표되는 ‘영국 르네상스’의 영화는 그 부록인 셈이다.
저자는 이 같은 여왕의 리더십을 현대 감각에 맞게 하나씩 분석하고 곧바로 현장에 활용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이를 136개의 메시지와 교훈으로 정리하고 각각의 의미를 짚어냈다. 책을 다 읽다 보면 엘리자베스 1세라는 한 사람의 리더로부터 136명의 21세기형 CEO를 만날 수 있다. ‘급진적인 변화를 조심하라’ ‘리스크를 면밀히 계산하고 승리할 수 있는지를 먼저 판단하라’ 등 난세의 국가․기업 경영비법을 이만큼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책도 드물다. 저자는 엘리자베스 여왕을 통해 리더십과 관련된 10가지 주요 교훈까지 추출해낸다.
‘리더의 첫째 의무-생존’
기업이나 경영자의 생존 문제는 회사의 흥망을 좌우한다. 그러나 엘리자베스에게는 실제로 목숨이 달린 문제였다.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 생명을 지켜야 했다. 자신의 어머니(앤 볼린)처럼 처형되는 운명을 피해야 했던 것이다. 정적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여왕이 되고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한 뒤에도 여느 리더들과 마찬가지로 신체적 생존, 힘과 건강, 침착하고 명료한 정신을 유지하는 게 중요한 일이었다.
그녀의 배다른 언니 메리가 여왕에 올랐을 때 엘리자베스는 여러 가지 혐의를 뒤집어쓰고 런던탑에 갇혔다. 이미 친어머니는 반역죄로 처형됐고 엘리자베스는 사생아로 낙인찍혔다. 런던탑에서 풀려난 뒤에도 우드스톡에 가택연금됐고 감시의 눈길은 여전했다. 이 때 그녀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과는 달리 언니인 메리의 가톨릭 신앙을 반대하지 않았고 편지에도 늘 ‘폐하의 확실한 친구’라고 써서 경계심을 없앴으며 언니를 공개적으로 비난하지 않았다.
그것은 부정직한 태도였을까. 진심으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위기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터득했다. 폭풍우에 순응하면서 필요성에 따라 처신하는 것은 리더가 취해야 할 가장 어려운 행동 중의 하나다. 죽은 자는 리더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그녀가 느낀 긴장감은 엄청났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타협으로 생존기술을 배웠다. 이 기나긴 정치적 수습 기간의 경험은 그녀가 여왕이 됐을 때 더없이 귀중한 자원이 되어주었다.
‘이미지를 창출하라’
엘리자베스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처녀로 살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 당시 상황으로 봐서 만약 외국인과 결혼한다면 동맹으로 손발이 묶이고 그에 따른 종교분쟁에 휘말릴 것이고 영국인과 결혼한다면 다른 귀족들의 시기와 파벌이 생겨날 것이다. 그녀는 “이미 영국을 남편으로 두었기 때문에 결혼하지 않겠노라”고 말했다.
어차피 독신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그녀는 자신의 위치를 최대한 활용하여 처녀의 이미지를 구축하기로 했다. 르네상스 문화에서 여성의 처녀성은 자동적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이미지를 연상케 하는 고귀한 이념이었다. 이는 신교와 구교의 틈새를 이어주는 이미지이기도 했다. 그녀는 동정녀 마리아가 사람들의 마음 속에 만들어 놓은 이미지의 빈 구멍을 자신의 처녀성으로 메우면서 새로운 신교 왕국의 동정녀로 자신을 이미지업 시켰다. 외모에서도 흰 피부를 한껏 과시하면서 설화석고를 갈아 만든 분말을 발라 더욱 희게 만들었다. 흰 얼굴과 대조를 이루기 위해 입술을 붉게 만드는 석간주와 코니칠 염료까지 사용했다.
엘리자베스는 이미지의 중요성을 오늘날의 리더들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었다. 리더도 역시 살과 피로 된 인간이며 생각하고 의사결정하는 사람이지만 그와 동시에 기업 전체를 대표하는 하나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녀는 이런 측면을 고려해 자신의 이미지에 걸맞도록 완벽하게 스스로를 다듬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이는 기업의 목적과 조직의 응집력을 키우는 비결이기도 하다.
‘소박한 풍모를 리더십에 결합하라’
그녀는 종교적인 질서나 규율을 준수하는 것과 쾌락을 금지하는 것을 혼동하지 않았다. 오락과 여가활동을 신민들에게도 장려했다. 스캔들이 일어날 것을 무릅쓰고 궁정의 보수파에게 “난 실크 스타킹이 아주 마음에 들어요. 편하고 멋있고 우아하죠. 그러므로 더 이상 모직 스타킹은 사양하겠어요” 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인간적 유대감을 확보하는 데 놀라운 능력을 발휘했다. 1564년 8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한 연설은 유대감의 표본이었다.
“여성으로서의 수줍음, 매우 유명한 대학, 매우 진실한 신민들을 염두에 둔다면 내가 이렇게 많은 지성인들을 앞에 두고 어쭙잖게 즉석 연설을 하는 게 마땅치 않겠지만, 귀족들의 권유도 있고 또 이 대학에 가까이 가고 싶은 나 자신의 의지도 있어서 무언가 말해야겠다는 용기를 냈습니다. 나를 움직인 것은 두 가지 동기입니다. 하나는 내가 그토록 원하고 열심히 기도하는 바대로 훌륭한 학문이 크게 성장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여러분이 원하는 바를 듣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 연설에서 그녀는 의도적으로 지식인들의 언어인 라틴어를 사용해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리더가 아래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명예는 바로 그들의 희망, 요구, 욕구를 말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라는 점을 그녀가 꿰뚫고 이를 활용하는 대목도 놀랍다.
‘전횡을 피하면서 대의명분을 창조하라’
엘리자베스는 나라를 단일 종교로 이끌고 그럼으로써 전국적인 통일을 이뤘지만 단일 신앙을 강요하거나 개인의 양심을 손상시키지는 않았다. 그녀는 1558년 배다른 언니 메리 1세의 가톨릭식 장례를 허락했다. 영국 국교회로서 가톨릭 장례식을 금지할 수도 있지만 그녀는 아직 대관식도 치르기 전에 종교 문제로 불화를 일으키고 싶지는 않았다. 모든 일에는 시기가 있고 ‘타이밍’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충직한 측근과 충직한 반대파를 동시에 구축하라’
그녀는 훌륭한 자문관들을 많이 거느렸다. 왕위에 오른 뒤, 오늘날의 내각과 비슷한 추밀원의 유능한 위원들을 그대로 유임시키고 확실한 반대파만 배제했다. 그에 따라 로마 가톨릭 위원들도 상당수 유임됐다. 그리고는 현재의 위원들을 참석시킨 자리에서 우호적인 분위기로 새로운 위원 몇 사람을 임명했다.
빗자루를 새로 만들면 청소를 더욱 열심히 한다는 옛말처럼 새로운 리더들이 여러 가지를 고치며 난리를 피우는 것은 흔한 일이다. 하지만 더 유능하고 숙련된 리더들이라면 전부 쓸어내야 할 정도로 썩은 조직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기존 조직에서 최선의 것을 보존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녀는 연속성과 개혁성을 잘 조율했다. 그러면서 충성스러운 참모와 자신의 뜻에 무조건 순종하는 예스맨이 아닌 참모까지 균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녀는 가장 신뢰하는 자문관을 자신의 ‘눈’이라고 부르며 그들과 함께 전략을 짜고 결정을 내렸다.
‘기업을 성장시켜 경쟁자를 분쇄하라’
엘리자베스는 프랜시스 드레이크, 험프리 길버트 같은 항해자, 해적, 탐험가, 식민지 기업가들을 공식적으로 격려하고 개인적으로 재정을 지원했다. 그 덕분에 영국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성장을 거듭해 마침내 19세기에는 거대한 글로벌 제국으로 발전하게 됐다. 해적왕 드레이크는 최대 강적 에스파냐 왕 펠리페 2세의 보물선을 강탈해 엄청난 황금을 노획했다. 드레이크의 활약은 여왕의 공식 혹은 비공식 지원을 받아 눈부시게 이어졌다.
후에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물리친 뒤에 그려진 초상화에서 엘리자베스는 지구에 한 손을 얹고 있는데 그녀의 손가락은 당시까지 에스파냐의 식민지였던 아메리카 대륙을 가리키고 있다. 배경에는 영국 함대가 자연스럽게 돛을 활짝 펴고 있고 에스파냐 함대가 비참하게 침몰하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초상화는 시사적이다. 겉으로 드러난 메시지를 보면, 엘리자베스의 리더십으로 영국은 에스파냐를 물리쳤고 신세계 정복의 길로 나섰음을 나타낸다. 배경의 영국 함대를 보면 그 의미는 더 분명해진다. 엘리자베스는 직접 에스파냐를 물리치지 않았으며 그녀가 몸소 신세계 정복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함대에게 승리하라고 명했고 신세계를 정복하라고 명했던 것이다.
‘위기를 승리로 전환하라’
엘리자베스는 호전적인 리더가 아니었으며 무력보다 노련한 외교력을 훨씬 선호했다. 그러나 외국의 침공이나 폭력적인 위기에 접했을 때는 웅변, 용기, 영감을 최대한 동원했다. 그런 면에서 여왕은 윈스턴 처칠이 리더십을 발휘한 2차대전 이전까지 영국 역사상 최고의 전략가였다. 그녀는 위협을 전국민적인 힘으로, 위기를 집단적인 기회로 탈바꿈시켰다.
1588년 130척의 에스파냐 무적 함대로부터 공격을 받았을 때 엘리자베스는 안전한 런던에 몸을 사리고 있는 대신 영국군이 주둔한 틸베리로 갔다. 여왕이 주둔지로 들어오자 전 군이 무릎을 꿇었다. 여왕은 그 모습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막사에서 장군과 함께 식사를 하고 이튿날 한 기병대 장교의 흉갑을 빌려 입고 빛나는 천사 같은 차림으로 군마를 달려 행진했다. 이처럼 참호 속으로 직접 들어가는 용기로 그녀는 위기를 승리의 발판으로 만드는데 앞장섰다.
‘권력을 장악하라’
엘리자베스는 언제나 합의와 조화에 의한 리더십을 펼쳤으나 양보해서는 안되고 남에게 침해당해서도 안되는 영역에서는 분명하고 절대적인 선을 그었다. 물론 신속하고 단호한 처분도 따랐다. 1568년 영국 북부에서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를 영국 왕위에 올리려는 반란이 일어났을 때 그녀는 반군이 회유의 선을 넘었다고 판단, 군사력을 동원해서 싹쓸이해 버렸다.
‘실질적인 사업을 추진하라’
여왕은 실용적인 경제학을 좋아했다. 그녀가 즉위했을 때는 통화가치가 크게 하락하고 있었다. 비금속 함유량이 많은 화폐였으므로 외국 상인들이 돈을 받기를 꺼려하고 금을 대신 요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녀는 비밀리에 국무대신과 상의해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당시로서는 놀라운 일이었다. 70만 파운드에 가까운 비금속 화폐가 환수되고 새 주화가 탄생했다. 백성들과 더불어 비용을 부담하겠다고 공언한 그녀는 워낙 효율적으로 사업을 진행한 탓에 오히려 개인적으로 4만 5,000파운드의 이익까지 봤다.
‘위대한 리더는 스스로를 평가한다’
그녀는 1601년 12월 마지막 의회 연설에서 그동안의 여러 정책들을 요약해서 얘기했다. “나는 모든 명분에 대해 반드시 사전에 널리 홍보하고 나서 검토에 들어갔으며 정의와 진리를 바라보는 유일한 눈을 가지려고 애썼습니다. 나는 편견이나 선입견을 갖지 않기 위해 언제나 그 안건이 마치 아무 것도 없는 백지인 것처럼 여기고자 했습니다”
리더는 정당해야 하고 스스로 책임져야 하며 후세의 평가까지 염두에 둬야 한다. 편견과 불투명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궁극적인 결과를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훌륭한 리더의 마지막 조건임을 엘리자베스는 몸으로 보여줬다.
첫댓글 저도 세계 여성 위인들 중 퀸 엘리자베스 1세를 가장 존경합니다. 물론, 전 이공계라 퀴리부인도 존경하지만, 역시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훌륭한 정치인이 훨씬 존경받을만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