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기독교 오순절교회가 그 모체인데, 이 교회는 1928년 M.C. 럼시가 개인자격으로 오순절교회의 복음을 가지고 일본을 거쳐 입국,
당시 救世軍 본영에 근무하던 충청남도 保寧 출신 허홍을 만나 선교를 개시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원래 뉴욕시 근교의 감리교회 성가대원이었던 럼시는 06년 4월 이른바 로스앤젤레스 대부흥 때 로스앤젤레스 천막집회에서 은혜를 받아
〈한국으로 가라!〉는 신의 음성을 듣고 감리교 계통 신학공부를 하였다.
럼시 선교사는 R.A. 하디 목사가 기거하던 한국 최초의 병원 施病院에 여장을 풀고 발길 닿는 대로 걷다가 구세군 본영의 문을 두드렸고,
허홍을 만나게 되어 함께 선교를 하며 처음 세운 것이 '西氷庫교회'였다.
1932년 일본에서 오순절계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귀국한 경상북도 軍儀 출신 朴聖山이 이 교회를 담임하였다.
박목사는 오순절적 방법으로 방언(方言)ㆍ신유(神癒)ㆍ권능을 강조하며 〈성령세례의 증거는 방언〉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한국 기성교회들은 〈의미모를 발성(發聲)은 광언(狂言)이요, 망언(妄言)〉이라고 이단시(異端視)하였고, 신랄한 비판을 가하며 〈방언파〉니 〈딴따라파〉니 하고 불렀다.
30년 럼시의 요청으로 미국 오순절교회 신도 팔선 선교사가 개인자격으로 선교차 내한했고,
그는 또 영국 오순절교회 신도 베시라 메르테드를 불러들였는데 그들 역시 개인자격으로 들어온 선교사들이었다.
그들은 박성산의 후배로 그 이듬해 신학교를 마치고 귀국한 배부근(裵富根)과 함께 사직공원 앞에다 수창동교회를 세웠다.
38년 10월 첫 안수식이 조선오순절교회 선교본부인 정동의 시병에서 있었고, 허홍ㆍ박성산ㆍ배부근 등이 임직되었다.
그러나 40년 10월 일제의 선교사에 대한 완전 철수 강요에 따라 선교사들이 다 철수하고 교회도 자연폐쇄되었다.
한편 8ㆍ15광복이 되자 광화문에서 서점을 경영하던 박성산 목사가 다시 배부근ㆍ허홍 목사 등과 합류, 교회 재건에 발벗고 나섰고 마침 일본에서 오순절 신앙을 전파하던 곽봉조ㆍ윤성덕ㆍ김성환 목사 등이 귀국해 자기 고향에 교회를 세웠다.
50년 4월 순천(順天)에서 〈제1회 대한기독교 오순절대회〉를 개최하였으나 6ㆍ25로 인해 박헌근장로가 순교를 당하는 등 또다시 수난기를 맞았다.
전란 속에서 미군 군종목사인 엘라우드의 주선으로 52년 미국 하나님의 성회 동양선교부장(東洋宣敎部長)인 오스긋 목사가 내한, 오순절교회의 현황을 살펴보고 들어가, 12월 최초의 하나님의 성회 선교사로 A.B. 채스넛 목사가 한국에 파송되어 옴으로써 미선교부와의 인연이 맺어졌다.
그들은 전국을 순회하며 신앙동지를 규합, 교단을 만들고 〈기독교 대한하나님의 성회〉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미국 〈하나님의 성회〉의 시작은 〈말씀과 증언(Word and Witness)〉지의 편집인이던 E.N. 벨 목사가 13년 12월 20일자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과 오순절파 성도의 총회 소집에 대한 광고를 실어, 14년 4월 2일부터 12일까지 아칸소주(州) 핫스프링에서 대회를 열 것을 알린 데서 그 뿌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대회의 목적은 성령받은 오순절교회 신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연합체를 조직, 서로 결속ㆍ협력하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53년 용산구 한강로 남부교회에서 순복음신학교가 문을 열었으나, 57년 동교 동맹휴학을 둘러싸고 교단 분열로까지 치달았다.
허홍 목사는 대한기독교 오순절교회로 복귀하고, 곽봉조ㆍ윤성덕 목사 등은 구도 선교사가 입국하자 그와 손잡고 대전에 중도(中都) 성서신학교를 세워 극동사도선교회(極東使徒宣敎會)의 주역이 되었다.
교단 분열로 인해 교세는 분산됐으나 더욱 단합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미국 하나님의 성회는 59년 12월 아시아선교부장 케참 목사를 통해 한국 교회에 기쁜 소식을 전해왔다.
미국 하나님의 성회는 세계 70여 후보국 중에 한국을 선택,
세계복음화운동의 지정국으로 선정하고, 1차 사업으로 5만 달러를 투입하여 교회사업ㆍ문서사업ㆍ선교사업ㆍ신학교 확장에 쓰기로 결정했다는 요지였다.
그리하여 대부흥집회를 열고 신학교를 신축하고, 서대문 로터리에 순복음 중앙회관을 짓는 등 전국 복음화 운동을 강력히 추진하였는데 이 회관은 결국 순복음중앙교회로 바뀌었다.
특히 60년대는 오순절 신학의 태동기(胎動期)이기도 하였다. 신진 조용기(趙鏞基) 목사는 『월간순복음』을 통해 〈병을 짊어지신 예수〉라는 글을 연재하고, 박정근(朴定根) 목사는 『오순절 진리를 변증(辯證)함』이라는 책자를 내어 오순절 신학의 정립을 꾀했다.
이때 〈순복음(pure gospel)〉 운동을 내세워 교단명칭에도 〈순복음〉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72년에는 56년에 갈라져나간 〈대한기독교 오순절교회〉 총회와 16년만에 기적적인 통합이 이루어져 선교부와 협력, 순복음신학교의 군포(軍浦)로의 이전 신축과 아울러 학교인가를 받는 등, 많은 발전을 이룩하였다.
81년 4월에는 73년에 여의도에 새로 지은 여의도 순복음중앙교회와 총회회관(서대문)에서 700여 명의 교역자와 30만 교인들이 모여 〈교단창립 30주년 기념대회〉를 성대히 열어 이 교단의 발전상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해 9월 순복음중앙교회의 목사 불법안수(按手)ㆍ부활처녀 사건 등이 문제가 된 데다가 81년 9월 20일자 〈교회연합신문〉에 〈조용기 목사 이단시비〉 기사가 보도됨으로써 사태가 복잡해지자
여의도 순복음중앙교회의 조용기 목사가 교단을 떠났고, 그 추종세력 일부가 탈퇴, 새로운 교단 총회를 구성ㆍ분립하였다. 이것이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순복음〉측이다.
84년 4월 순복음측 교단 일부를 제외하고 대다수가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로 복귀, 그해 9월 교단화합 및 발전을 위한 개헌총회를 열어 총회장 임기를 1년으로 개정하고 오랫동안 끌어 오던 女목사 제도를 인정하는 등 분열의 상처가 아무는 듯했다.
그러나 85년 1월 순복음중앙교회를 중심으로 〈예수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 교단이 형성되자 100여 개의 미자립교회들이 쌍수를 들고 동조하는 바람에 분열의 상처가 다시 터지는 아픔을 겪어야만 하였다.
교리는 중생(重生)ㆍ성령(聖靈)충만ㆍ축복ㆍ신유(神癒)ㆍ재림(再臨)의 오중교리(五重敎理)를 근간으로
일반 그리스도교회와 거의 같은 17개항으로 분류되는 신조를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