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 번 |
작 자(생몰 연대) |
작 품 |
출 신 |
1 |
정극인(1401-1481) |
상춘곡 |
전북 태인 |
2 |
송 순(1493-1582) |
면앙정가 |
전남 담양 |
3 |
백광홍(1522-1556) |
관서별곡 |
전남 장흥 |
4 |
정 훈(1563-1640) |
용추유영가, 수남방옹가, 탄궁가, 우활가, 성주중흥가 |
전북 남원 |
5 |
윤현변(1616-1684) |
귀산곡, 태평곡, 청학동가 |
전남 나주 |
6 |
박사형(1635-1706) |
남초가 |
전남 보성 |
7 |
윤이후(1636-1699) |
일민가 |
전남 해남 |
8 |
박순우(1686-1759) |
금강별곡 |
전남 영암 |
9 |
위세직(1655-1721) |
금당별곡 |
전남 장흥 |
10 |
황 전(1704-1772) |
피역가 |
전북 고창 |
11 |
노명선(1707-1775) |
천풍가 |
전남 장흥 |
12 |
정 방(1707-1789) |
효자가 |
전남 창평 |
13 |
위백규(1727-1798) |
자회가, 권학가, 합강정선유가 |
전남 장흥 |
14 |
강응환(1735-1795) |
무호가 |
전북 고창 |
15 |
박이화(1739-1783) |
낭호신사, 만고가 |
전남 영암 |
16 |
김 익(1746-1809) |
권농가 |
전북 부안 |
17 |
김상직(?) |
계자사, 사향가 |
전남 장성 |
18 |
이상계(1758-1822) |
인일가, 초당곡, 권학가, 경독가, 독락가, 담락가 |
전남 장흥 |
19 |
김상성(1768-1827) |
서호별곡 |
전북 부안 |
20 |
남석하(1773-1853) |
초당춘수곡, 사친가, 원유가, 백발가, 애경당충효가 |
전남 담양 |
21 |
천형복(18c-19c) |
사은가 |
전남 장성 |
22 |
이방익(18c-19c) |
표해가 |
제주도 |
23 |
민주현(1808-1882) |
완산가 |
전남 화순 |
24 |
김경흠(1815-1880) |
삼재도가, 불효탄, 경심가, 성주선정가 |
전북 태인 |
25 |
김석정(19c-?) |
불효탄 |
전남 화순 |
26 |
이중전(1825-1893) |
장한가 |
전남 장흥 |
27 |
임도관(19c-?) |
경술가, 사미인곡 |
전남 창평 |
28 |
김영상(1816-1911) |
금릉세덕돈목가 |
전북 태인 |
29 |
정해정(1850-1923) |
석촌별곡, 민농가 |
전남 창평 |
30 |
권광범(1871-1931) |
용서별곡 |
전북 익산 |
31 |
문계태(1875-1955) |
덕강구곡가, 덕천심원가 |
전남 장흥 |
<표2> 호남 지방 가사 작품과 작가의 출신 지역별 분포
출신 시군 |
작가수 |
백분율(%) |
작품수 |
백분율(%) |
비 고 |
전북 태인 |
3명 |
9.68 |
6편 |
10.71 |
|
전남 담양(창평 포함) |
5명 |
16.13 |
11편 |
19.64 |
|
전남 장흥 |
7명 |
22.58 |
15편 |
26.79 |
작자 미상 2편 제외 |
전북 남원 |
1명 |
3.26 |
5편 |
8.93 |
|
전남 나주 |
1명 |
3.26 |
3편 |
5.36 |
|
전남 보성 |
1명 |
3.26 |
1편 |
1.79 |
|
전남 해남 |
1명 |
3.26 |
1편 |
1.79 |
|
전남 영암 |
2명 |
6.45 |
3편 |
5.36 |
|
전북 고창 |
2명 |
6.45 |
2편 |
3.57 |
|
전북 부안 |
2명 |
6.45 |
2편 |
3.57 |
|
전남 장성 |
2명 |
6.45 |
3편 |
5.36 |
|
제주 |
1명 |
3.26 |
1편 |
1.79 |
|
전남 화순 |
2명 |
6.45 |
2편 |
3.57 |
|
전북 익산 |
1명 |
3.26 |
1편 |
1.79 |
|
계 |
31명 |
100.00 |
56편 |
100.00 |
|
2. 장흥의 가사 작가와 작품
(1) 岐峯 白光弘과 ‘關西別曲’
종래의 국문학사에 조선조에 ‘관서별곡’이라는 가사 작품이 있다고 하여 그 제목을 언급하였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인멸하여 그 내용이 현전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져 왔으며, 작자에 대해서도 玉峯 白光勳1)으로 오인한 전적이 많았다.2) 심지어 두 편의 별개의 가사인 ‘箕城別曲’과 ‘香山別曲’을 합쳐서 ‘관서별곡’이라고 제하였을 것이라는 추론도 있었다.3) 그러던 중 李相寶 박사가 1961년에 수원 백씨 기봉공파 종가4)에서 기봉 백광홍의 시문집인 ‘岐峯集’5)을 발굴하여 거기에 게재되어 있는 ‘관서별곡’을 분석 평가, 소개한 ‘關西別曲 硏究’(국어국문학 26호, 국어국문학회, 1963)를 발표함에 따라 ‘관서별곡’의 진면목이 알려지게 되었다. 따라서 이 때부터 관서별곡과 작자인 기봉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졌고, 기봉의 인품과 문학이 평가를 받기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다.6)
‘기봉집’이 발견되어 소개되면서 거기에 실려 있는 洪直弼(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兼成均館祭酒 經筵官) 序의 序文, 白師謹(嘉善大夫刑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 撰의 서문, 홍직필 찬의 墓碣銘, 奇宇萬 白厚鎭 白采寅 白羲寅의 跋文 등을 근거 삼아 기봉의 생애와 인품에 대하여 단편적으로나마 논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白光弘의 號는 岐峯7)이며 字는 大裕로 1552년(중종 17년) 장흥군 안양면 기산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당시 詩山(태인)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었던 호남의 거유인 一齋 李恒(1499-1576)에게 가서 학문을 닦았다.
기봉은 靈川 申潛, 石川 林億齡, 河西 金麟厚, 栗谷 李珥, 高峰 奇大升 등 당대의 쟁쟁한 학자 문인들과 道義之契를 맺어 덕업을 쌓았다. 천품이 빼어나 뜻이 높았고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여 행동 규범에 빈틈이 없었다. 홍직필이 쓴 ‘묘갈명’에 의하면 그는 일찍이 “富는 가히 구할 것이 아니요 貴는 가히 도모할 것이 아니다. 구하지 아니하고 도모하지 아니함은 하늘의 이치로 되기 때문이다. 가난해도 족히 근심할 바 아니요, 천하다고 족히 슬퍼할 바 아니다. 담연히 빈방에 있어도 맑은 바람 밝은 달이다. 임금과 상제가 계시거늘 내 누구를 믿을 것인가”8)라는 좌우명을 지었다고 한다.
28세 때인 1549년(명종 4년, 을유)에 진사 생원을 뽑던 司馬兩試에 급제하였고, 3년 후인 1552년(명종 7년, 임자) 11월에 문과에 올라 홍문관 正字에 임명되었는데, 그 해에 왕명으로 성균관에서 영호남의 문신들이 모여 재주를 겨루게 되었다. 이 때 기봉은 賦 ‘冬至’를 지어 장원으로 뽑혀 임금으로부터 ‘選詩’ 10권9)을 특사 받았다. 다음 해인 1553년에는 湖堂에 뽑혔다. 그리고 1555년(명종 10년, 을묘) 봄에 평안도 評事에 임명되어 서도관방에 부임하였다. 그 곳에서의 삶과 정취, 자연 풍광을 시문으로 음영하던 중에 가사 ‘관서별곡’을 지으니 당시에 이 노래를 즐겨 부르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전한다.10) 특히 ‘관서별곡’은 기행서경가사의 효시로서 송강 정철이 25년 뒤에 지은 ‘관동별곡’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사실은 두 작품을 분석하여 비교한 여러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여 극명하게 증명되었다. 즉 이상보, 丁益燮(전남대)교수의 연구는 ‘관서별곡’이 모티프, 구성 형식, 표현 기법에 있어서 ‘관동별곡’의 모체가 되었음을 적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관서별곡’은 ‘金塘別曲’을 지은 魏世稷, ‘人日歌’와 ‘草堂曲’ 등을 지은 李商啓, ‘自悔歌’와 ‘勸學歌’와 ‘합강정선유가’를 지은 魏伯珪, ‘天風歌’를 지은 盧明善, ‘長恨歌’를 지은 李中銓, ‘德剛九曲歌’, ‘德泉尋源歌’를 지은 文桂泰 등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주어 소위 ‘장흥가단’을 이루는 바탕이 되었다. 정익섭 교수는 “이 가사가 나오게 되자 정철의 「관동별곡」이 나오게 되고, 같은 유형의 조우인의 「속관동별곡」, 위세직의 「금당별곡」 등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백광홍의 관서별곡은 조선조의 모든 기행가사의 모체가 되었다는 점에서 크게 평가받아 마땅하리라 생각한다.”11) “그는 湖南詩歌史 뿐만 아니라 우리 문학사에서 길이 찬양 받아 마땅한 존재”12)라고 그 문학사적 가치를 평가하고 있다. 또한 고경식 교수는 신재 조우인의 가사 작품 전반에 ‘관서별곡’이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음을 고증하고 있다.13)
가사는 주로 한문으로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던 당시에 우리 말 우리 글 우리 가락으로 표현한 예술 양식의 하나이다. 따라서 ‘관서별곡’은 언어 의식에 가치를 둔 현대의 국문학 연구의 경향에 힘입어 비교적 활발한 연구가 되어 온 셈이다. 그러나 기봉의 문학 세계는 ’기봉집‘에 전하는 많은 한시문(賦 9편, 五言絶句 9편, 五言古詩 3편, 七言絶句 52편, 七言四韻 17편, 七言古詩 11편, 詩山雜詠 28편 등)들을 이해하여야만 비로소 드러나리라고 생각된다. 기봉은 특히 칠언에 능하였고, 사상은 유가에 바탕을 두었다. 유가적인 군신의 도를 읊은 것으로는 ‘天行健’ ‘令名德之輿’ ‘德法御民之具’ ‘富貴在天’ ‘孝悌’ 등 제목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는 작품들이 많이 있다.
기봉은 ‘관서별곡’을 지은 이듬해인 1556년(명종11년, 병진)에 병환으로 벼슬을 내놓고 돌아오게 된다. 그해 음력 8월 27일 부안의 처가에서 생을 마치니 35세의 젊은 나이였다. 선생의 스승인 一齋는 부음을 듣고 “문재와 학덕이 드물게 뛰어났는데 이를 크게 펴지 못한 것이 아깝다하고 크게 슬퍼하였다.”14) 1808년(순조8년, 무진)에 岐陽祠15)에 8문장의 한 사람으로 배향되었다.
(2) 守愚翁 魏世稷의 ‘金塘別曲’
‘금당별곡’은 처음에는 존재 위백규의 조부인 삼족당 魏世寶의 작16)으로 알려졌으나, 후에 위세보의 삼종형인 수우옹 위세직(1655-1721)의 작17)으로 정정되었다.
‘금당별곡’의 내용은 배로 금당도와 만화도를 유람하면서 느끼고 생각한 감정을 서경적으로 읊은 일종의 기행가사이다. 이 작품의 영향 관계를 따지자면, 정철의 ‘관동별곡’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창작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기봉의 ‘관서별곡’은 정철의 ‘관동별곡’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고, ‘관동별곡’은 ‘금당별곡’에 영향을 준 것이기 때문에, 결국 ‘금당별곡’은 ‘관서별곡’의 간접적 영향관계에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런데 기봉과 송강의 가사가 북방의 승경을 노래한 기행가사라고 한다면, 이 작품은 남방의 해양 도서 지방의 승경을 노래한 가사라는 점이 특이하다고 하겠다. 이종출 교수는 이 작품에 대하여 “作者의 자유로운 詩想이 마음껏 펼쳐져 있고, 비록 隱逸的 思想이 多少 엿보이기는 하되, 平民的이면서도 自然에 純化된 정도로서는 오히려 關東別曲보다 勝한 느낌마저 없지 않다. 그리고 이 作品이 前代 歌辭에서 이른바 換骨奪胎는 못될지언정, 그 表現 및 構成에 있어서도 前代 歌辭들에 비하여 결코 못지 않은 스스로의 값어치를 지니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18)
(4) 靑沙 盧明善의 ‘天風歌’
‘천풍가’는 청사 노명선(1707-1775)의 작으로 장흥의 명산인 천풍산(천관산)의 자연 풍경을 서경적으로 읊은 가사 작품이다. 이종출 교수가 발굴한 가칭 ‘三足堂歌帖’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인데, 거기에는 한글로 “천풍가라, 노청사라”고만 기록되어 있어서 작자의 본명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나 「長興誌續錄」 卷之三 學行條 夫山面項에 “盧明善, 光山人 光原君毅后 號淸沙 從遊閔老峰 鼎重文學名世 作天風歌 行于世”라는 기록이 있어 천풍가를 지은 노청사의 본명을 확인할 수 있었고, 「光山盧氏族譜」를 통해 그의 생몰 연대를 알 수 있었다.19)
이 작품도 일종의 기행가사로서 작자가 겨울에 천풍산의 여러 골짜기와 봉우리, 절과 암자 등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내용이다. 표현의 기법도 관동별곡과 흡사한 점이 발견된다. 이 작품의 내용으로 보아 지은이는 부귀공명과는 거리가 먼 청빈한 선비이며, 창작 시기는 “빈발이 호백하고, 기력이 쇠잔하니”의 구절로 보아 노년으로 추정된다.
(5) 存齋 魏伯珪의 ‘自悔歌’, ‘勸學歌’, ‘合江亭船遊歌’
존재 위백규(1727-1798)는 생전에 「政絃新譜」 등 수십 권의 저술을 남긴 조선 후기의 대표적 실학자이다. 그는 전 생애를 거의 고향인 관산에서 학문에만 전념하였으나 만년에 옥과 현감의 벼슬에 1년여 동안 나간 적이 있다. 그의 작품으로는 세 편의 가사(‘자회가’ ‘권학가’ ‘합강정선유가’)와 시조(農歌) 9수가 전한다.
자회가는 효사상을 바탕으로 작중 화자가 생전에 불효했던 과거를 참회하고, 사친지도를 술회하는 내용으로 되었다. 이 작품의 내용상의 구조는 ①父母恩功 (序詞) ②忘恩不孝 ③老後悲哀 ④天運猜忌 ⑤風樹之嘆(不孝懺悔) ⑥善行顯親 ⑦孝行勸獎 ⑧再緣祝願(結詞)과 같이 8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학가는 제자 혹은 젊은이들을 위하여 지은 것으로 보인다. 그 내용은 제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본연 심성을 방실하고 자포자기하여 박혁음주하고 이욕여색 탐을 하면 금수되기 멀지 않고 사람되기 어려우니, 효제충신 예의염치 뿐만 아니라 선대명자를 알기 위하여도 배워야 하며, 사람이 할 일은 문필밖에 없다고 술회하여 학문을 권장하고 있다.
‘합강정선유가’는 존재가 옥과 현감에 재임시(71세, 1797년) 순찰사가 도임하여 전라남도 곡성군 옥과면 합강리 소재의 합강정에서 인근 지역의 여러 수령들과 함께 선유하는 내용을 읊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작품의 내용상의 구조는 ①船遊悲感 ②苛斂享樂 ③守令揶楡 ④冠蓋相望 ⑤官人接待 ⑥泰平祈願 ⑦竭力輔民과 같이 7단으로 구성되어 있다.20)
(5) 止止齋 李商啓의 ‘草堂曲’, ‘人日歌’, ‘勸學歌’, ‘耕讀歌’, ‘獨樂歌’, ‘湛樂歌’
지지재 이상계(1758-1822)는 장흥군 용산면 묵촌리 아양골 사람으로 자는 군옥(君沃)이며 호를 관송(觀松)이라고도 했다. 이상계는 어릴 적부터 성도(性度)와 의범(儀範)이 남달리 뛰어나고, 그의 성덕이 군자적 자질을 가졌다. 그는 자라서는 성현의 본을 받는 유도적 학문에 전념하였으나 벼슬에는 별로 뜻을 두지 않았다. 그는 남의 어려운 일을 자기 일처럼 돌보고, 오직 의와 덕을 좇아 살고자 하였다. 특히 부모에 대한 효성이 돈독하였다. 그의 문집으로 「止止齋遺稿」(1958년 간행)가 있다. 그의 사손에 의해 보관하여 온 필사본인 ‘草堂曲全’이라는 가첩이 남아 있는데, 여기에는 그의 가사 작품 ‘초당곡’과 ‘인일가’를 비롯하여 아직 작자가 확실히 밝혀져 있지 않은 ‘勸學歌’ ‘闕里歌’ ‘耕讀歌’ ‘獨樂歌’ ‘湛樂歌’ 등 모두 7편이 실려 있다. 이 중 ‘궐리가’는 분명히 이상계의 작이라고 볼 수 없다. 왜냐 하면, 이 가사는 내용은 동일하나 ‘안택가’ ‘도덕가’ ‘퇴계선생 안택가’ 등의 다른 이름으로 널리 가창되었던 작품이다. 따라서 ‘초당곡’과 ‘인일가’는 확실히 이상계의 작으로 확인되었으며, 나머지 네 작품도 이상계의 작으로 간주해도 무방하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권학가’ ‘경독가’ ‘독락가’ ‘담락가’의 작자에 대한 문제는 앞으로 좀더 정확한 확인 작업이 필요하리라고 판단된다.
‘초당곡’의 창작 연대는 묵촌리 아양골에 초당을 구축(1908년 정월 20일)한 시기와 가사 내용 중 “知命年이 되온後에”라는 구절을 근거로 지지재가 51세 때이며 초당을 준공한 후인 1908년 3,4월로 추정하고 있다. ‘인일가’의 창작 연대에 대하여는 문집의 기록이나, 가사 내용 중에 짐작할 만한 단서가 없어서 추정하기가 어렵다. 다만 초당을 짓고 기거한 후, 즉 초당곡과 거의 같은 무렵인 만년의 작이 아닌가 생각된다.21)
초당곡은 그 내용을 구분하면 ①醉起言志(序詞) ②學而時習 ③草堂風景 ④草堂淸遊 ⑤月下仙遊 ⑥安貧樂道의 6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속된 세상을 벗어나 자연을 벗삼아 안빈낙도하고자 하는 작자의 심경을 읊은 것이다.
인일가는 유가적 사상과 인륜 도덕을 가사라는 형식으로 술회한 작품으로, 그 내용을 구분하면 ①人日讚美(序詞) ②和親敦睦 ③道心警覺 ④堯舜欽仰 ⑤千古貽笑 ⑥五倫解義 ⑦博覽習訓 ⑧人日醉興으로 구성되어 있다.22) 정월 초이렛날 밤에 인일회를 열고 친족 친고들이 모여 놀며 이 ‘인일가’를 수창케 하였다고 전한다.
(6) 愚谷 李中銓의 ‘長恨歌’
우곡 이중전(1825-1893)은 장흥군 부산면 금자리 사람인데, 그의 유고집인 「愚谷集」 단권1책이 전하는데, 664구에 달하는 장가인 ‘장한가’는 여기에 실려 있다. ‘장한가’의 창작 시기는 이 작품의 말미에 “丙子臘月”의 기록과 내용에 “時年이 半百이라 人間公道 저白髮이 의頭上 오것구나”로 읊고 있는 것으로 보아 우곡이 52세 때인 1876년 12월임을 알 수 있다. 이 가사는 내용 구조상 다른 가사 작품과 다른 특색을 가지고 있다. 모든 가사가 대개 일관된 주제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것인데, 이 작품은 전반부는 작가의 기구한 인생 역정을 도덕 사상에 근거하여 읊은 것이고, 후반부는 금강 유람을 소망하는 작자의 심경을 읊고 있다. 따라서 한 작품 안에 두 개의 주제를 담고 있는 특이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경세적이고 교훈적인 내용이 강하게 표출되어 있는 장한가는 ①太極造化 ②早失父母 ③勸農勸學 ④禁酒禁色 ⑤喪故不絶 ⑥逍遙自適 ⑦願遊金剛의 7단으로 구분할 수 있다.23)
(7) 謙齋 文桂泰의 ‘德岡九曲歌’, ‘德泉尋源歌’
겸재 문계태(1875-1955)는 장흥군 유치면 덕산리 사람으로, 구한말에 태어나서 일제시대를 거쳐 6.25 동란 이후에 생을 마쳤다. 그는 한학자로 일생을 학문과 함께 보냈다. ‘덕강구곡가’는 구곡의 서경에 빗대어 지은이의 나라 잃은 설움을 간접적으로 나타낸 구한말, 혹은 일제 시대에 창작된 작품으로 추정된다. ‘덕천심원가’는 인간이 갖추어야 할 덕의 연원을 찾아가는 내용을 읊은 것이다. 공맹을 역람하고 나서, 우리 나라 여러 학자의 댁을 구경하는 식으로 그들의 학문적 업적과 도의 높음을 칭송하고 있다. 가령 “-圃牧兩宅이分明히尙存엿구나靜菴宅을잠관진여退溪宅을차져가니道學은泰山고 德義은河海터我東方大君子라만도다” 식으로 되어 있다. 문계태의 이 두 작품은 비교적 최근의 가사로 그 형식에 있어서 3.4조 혹은 4.4조의 정형이 많이 파괴되어 산문적으로 변화되는 과정에 있음을 볼 수 있다.
(8) 그 밖의 가사 작품
필자는 연전에 고향집(장흥군 안양면 기산리 94번지)에서 필사된 가첩을 하나 발견하였다. 이 가첩은 원래 두 책으로 되어 있던 서로 다른 책을 그간 유전되어 오면서 누군가가 임의로 합책한 것으로 보인다. 앞부분은 동양의 유명한 경서의 서문만을 모아 필사한 것이며, 뒷부분은 국문 가사가 필사되어 있다. 여기에 들어 있는 가사 작품은 모두 다섯 편이다. 이 작품을 게재 순서대로 그 제목을 나열해 보면 ‘退溪先生安宅歌’ ‘人日歌’ ‘草堂曲’ ‘相思曲’ ‘英宗大王處士歌’이다. 이 중에 ‘퇴계선생안택가’는 ‘안택가’ 혹은 ‘도덕가’라는 이명으로 널리 애창되던 곡인데 작자 미상으로 이미 학계에 알려진 작품이다. 이는 지지재 가첩에 ‘궐리가’와 내용이 같은 작품이다. 이 작품을 혹자는 이퇴계의 작이라 보기도 하는데, 이 가첩을 필사한 이는 ‘퇴계선생안택가’라 적은 것으로 보아 퇴계 작으로 간주한 모양이다. ‘인일가’와 ‘초당곡’은 앞에서 소개한대로 이미 지지재 이상계의 작으로 알려진 작품이다. 내용은 같으나 필사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표기 방법이나 자구가 약간 다른 부분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가첩에는 작자를 명기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 가첩에 필사되어 있는 5편 중에 아직 알려지지 않은 작품은 ‘상사곡’과 ‘영종대왕처사가’의 2편이다. 아쉬운 것은 두 편 모두 작자 명이 기록되지 않아 지은이를 짐작할 수 없다는 점이다.
‘상사곡’은 서사와 결사를 갖춘 전형적인 달거리 가사인데, 형식이 매우 정제되어 있다. 내용은 열두 달의 각 민속 명절날 떠나고 없는 ‘님’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다. 영종대왕처사가’ 역시 지은이를 알 수 없다. 가사의 내용과 필사의 의도로 보아 ‘퇴계선생안택가’와 마찬‘가지로 필사자는 ‘영종(영조)’를 작자로 본 듯하다. 영조는 1664년에 나서 1776년에 서거한 조선의 21대 왕이다. 그는 인쇄술을 개량하여 많은 서적을 발간하고, 많은 학자를 양성하는 등 문교를 크게 일으킨 임금이다. 그러나 영조가 가사를 지었다는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 가사의 내용은 필자가 세상 공명을 하직하고 운림처사가 되어 자연 경개를 벗삼아 인생을 유유자적하게 즐기는 자연 친화의 사상을 담고 있다.
이 가첩에 실린 가사로 보아 널리 전창되던 ‘안택가’가 이 지방서도 애창된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지지재 이상계의 ‘인일가’와 ‘초당곡’이 당대에 이 지방에서 애창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상사곡’과 ‘처사가’는 비록 그 작자를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발견된 지역으로 보아 장흥 지역의 작가에 의해 창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밖에 장흥군 용산면 월림리 출신 月圃 安洪軾의 가사 작품 ‘聖臺歌’와 ‘思親曲’이 유전되고 있다고24) 하나 그 내용을 접할 길이 없다.
3. 결 론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장흥 지역은 전국 어느 지역보다 가사 문학이 가장 융성한 곳이다. 작가 수, 작품 수에 있어서 단연 으뜸일 뿐만 아니라, 개개의 작품이 갖는 문학적 가치에서도 우리나라 가사문학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기봉의 ‘관서별곡’은 우리나라 기행가사의 효시로서 정철의 ‘관동별곡’과 조우인의 여러 작품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고, 위세직의 ‘금당별곡’ 노명선의 ‘천풍가’ 문계태의 ‘덕강구곡가’ 등의 기행 가사와 위백규, 이상계, 이중전의 작품에 영향을 주어 장흥 지방 가사 문학 발전의 시원이 되었다.
위세직의 ‘금당별곡’은 기봉의 ‘관서별곡’이나 송강의 ‘관동별곡’과는 달리 남방의 해양 도서 지방의 승경을 노래한 가사로서 작자의 자유로운 시상이 마음껏 펼쳐져 있고 평민적이면서도 자연에 순화된 정도와 그 표현 및 구성에 있어서 전대 가사들에 비하여 뛰어난 가치를 지님을 알 수 있었다.
노명선의 ‘천풍가’는 작자가 겨울에 천풍산의 여러 골짜기와 봉우리, 절과 암자 등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내용으로 된 기행가사로서 표현 기법이 뛰어나고, 청빈한 선비 정신이 깃들어 있는 작품이다.
위백규의 작품에는 그의 효사상과 학문에 대한 열정이 잘 드러나 있다. 이상계의 ‘초당곡’에는 속된 세상을 벗어나 자연을 벗삼아 안빈낙도하고자 하는 작자의 심경이 잘 표현되어 있다. ‘인일가’는 유가적 사상과 인륜 도덕을 가사라는 형식으로 술회한 작품이다. ‘권학가’ ‘경독가’ ‘독락가’ ‘담락가’ 등은 현재로서는 이상계의 작품으로 추정되지만 앞으로의 고구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이중전의 ‘장한가’는 664구에 달하는 장가로서 전반부는 작가의 기구한 인생 역정을 도덕 사상에 근거하여 읊은 것이고, 후반부는 금강 유람을 소망하는 작자의 심경을 읊고 있다. 한 작품 안에 두 개의 주제를 담고 있는 특이한 형식을 갖춘 이 작품은 경세적이고 교훈적인 내용이 강하게 표출되어 있다.
문계태의 작품은 비교적 최근의 작품이기는 하지만 가사 문학이 쇠퇴하고, 운문 시대에서 산문 시대로 이어지는 과도기적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 문체와 내용에 대한 연구가 더 필요하리라고 본다.
이밖에도 장흥 지방에는 작자 미상의 몇몇 작품이 발견되었으며, 앞으로도 장흥 지방에 산재되어 있는 가사 작품의 자료가 계속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이러한 추정은 이상의 논의에서도 드러났듯이 장흥 지방은 가사 문학의 매우 활발한 창작, 가창 지역이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가사 문학의 융성과 그 전통은 현대문학에 이르러 장흥을 송기숙, 한승원, 이청준, 이승우 등의 걸출한 소설가를 배출할 수 있는 터전으로 만들었다. 이같은 사실은 장르적 특성의 측면에서 가사문학이란 서정문학인 시에서 서사문학인 소설로 변전해 가는 데 교량적 역할을 한 독특한 장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자료츌처: 장흥안양기산마을 문학코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