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즈난에 온 지도 거의 6개월이 다 되간다. 오늘 세탁기 호스를 다시 꽂는 걸 잊는 바람에 6개월 만에 4번 홍수를 겪는 기록을 세웠다. 얼마 전에 알게 된 이라크에서 온 쿠르드 족 라싼 엄마는 2년 동안 두 번이라는데 아무래도 나는 미련한가 보다. 폴란드에 대한 소식을 알 수 있는 news.pl이라는 영자신문 사이트에서 셰익스피어 페스티발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발트 해 연안의 그디니아, 소포, 그단스크를 여기서는 세쌍둥이 도시라고 하는 모양이다. 처음에는 시큰둥하던 친구도 이리저리 알아보더니 공연 세편을 보기로하고 먼저 그디니아로 떠났고 나는 후발대로 두 편의 연극을 보기 위해 그단스크로 가기로 약속을 한 참이었다. 하지만 그단스크라면 포즈난에서 기차로 5시간 반.. 가서 연극 두 편 보고 다시 5시간 기차를 타고 올 자신이 없었다. 트램을 타고 가다 동전을 던져서 결정하기로 한다. 수중에 5그로슈 짜리 동전이 제일 큰 거라 휙 던져서 폴란드의 상징인 독수리가 나오면 안 가고 숫자 5가 나오면 가야지... 이런 5가 나오고 말았다.
모처럼 혼자 타는 기차의 달콤하고 즐거운 상상의 시간. 그단스크 역에 내려서 발트 해를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트램을 한 번 갈아타야 한다는 말에 포기하고 <한여름밤의 꿈>을 공연하는 Teatre Lesny를 찾아나섰다. 이런 다시 기차를 타고 그디니아 방향으로 세 정거장을 가야 한단다. 어제 그디니아에서는 영국에서 온 Wooster Group이 <햄릿>을 공연했다. 기대한 것의 한 7,80% 정도 만족한다는 친구의 말을 들어보면 괜찮았던 모양이다. 멀티미디어를 이용한 공연으로 유명한 배우가 주연으로 나온
(이름을 들었는데 까먹었다) 영화 <햄릿>을 영상으로 돌리면서 배우들이 그 장면을 똑같이 재연하는 장면이 흥미로왔다고. 영상을 등지고 움직여야 하는데 배우들이 기가 막히게 한 모양이다. 햄릿도 볼 걸 하는 후회가 잠깐 일었지만 이미 물 건너간 일.
기차에서 내려 레쉬니 극장을 물었더니 폴란드 어로 설명을 아주 자세히 해주시는데 알 길이 있나. 순간 같이 서 있던 네 사람은
웃고 말았다. 눈이 선한 그 아저씨 동네 아저씨 한 분에게 또 물어서 이 분이 근처까지 데려다 주셨다. 다리가 불편하신데도 걸음은 우리보다 더 빠르시다. 참고로 폴란드 사람들은 무지 빨리 걷는다. 한번은 동물원에 소풍나온 초등학생들 걸음을 쫓아가지 못해 쩔쩔 맨 적도 있다. 하여 왜 그리 빨리 걷는지 물어보면 전차 시간에 맞추느라 그렇다고 한다. 올림픽 경보 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폴란드 사람 이름을 들먹이면서. 그렇지 이렇게 빨리 걷는데 금메달을 못 따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 고마운 아저씨에게 한국에서 사온 책 갈피 하나를 드렸다. 인사동에서 사온 책갈피, 핸드폰걸이, 작은 주머니가방 같은 건 고마움을 표시하면서 사람들에게 한국을 알리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서 이만큼 사갖고 와서 고마운 분들에게 드리곤 한다. 아주 작은 거지만 받는 사람들은 대개 좋아한다. 그들의 다양한 웃음을 볼 수 있는 기회다.
한참을 걸어 찾아낸 공연장은 숲 속으로 가는 입구처럼 보인다. 밑창 얇은 샌달이 고생할 산길이시다. 벌써 꽤 많은 관객이 원형 객석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야외공연이라 무대가 클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작다. 가만 <한여름밤의 꿈>의 오베론과 티타니아를 생각하니 갱년기 부부의 상황이 아닌가. 요정 나라의 왕과 왕비는 사랑이 식을 대로 식은 터. 배우들의 의상은 현대인의 복장이다. 꾸러기 요정 '퍽'도 팅커벨이 아니라 뮤지컬 캣츠에 나올 법한 차림새다. 아름다운 허미어를 사랑하는 라이샌더. 드미트리어스와 결혼해야 한다며 딸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허미어의 아버지. 드미트리어스를 사랑하는 못 생기고 수다스런 헬레나. 공연을 보다보니 헬레나가 상당히 매력적인 배역인 것 같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구박받다가 상황이 역전되면서 두 남자의 구애를 받는 헬레나. 역시 셰익스피어 선생님은 대단하시다. 모든 이의 사랑을 받던 미인과 못 생겼다고 구박받던 추녀의 위치가 역전된 것이다. 뒤집어보기의 즐거움. 배우들의 발성도 상당히 좋다. 보텀과 퀸시의 연극연습 장면으로 전환할 때도 앞치마 하나를 두를 뿐인데 무대 위에서 춤을 추면서 순식간에 입는 저 순발력. 중간중간 노래 장면에서도 가벼운 흥얼거림으로 들릴 정도로 가볍고 경쾌하다. 역시 퍽의 역할은 기대가 큰 만큼 관객의 기대를 채우기 어려운 것 같다. 다들 잘 하지만 헬레나의 연기가 돋보인다.
관객들은 숲 속에 들어서면서 이미 한여름밤의 꿈으로 들어선다. 공연 시간에 맞추느라 공연장 까지
가는 숲길을 찍지 못했다. 공연 중간중간 나무들이 사르랑대는 소리, 나부끼는 모습을 지켜보며 잠시
무대를 벗어나는 즐거움도 있으니...
셰익스피어 글로브 극단의 이 공연을 끝까지 보았다면 좋았겠지만 다음 공연을 위해 거의 끝나갈 무렵 자리를 떠야했다. 다음 공연은 피터 브룩의 <Warum, Warum>. 셰익스피어 페스티발이 있다고 했을 때 눈에 띄었던 것이 Wooster Group, 셰익스피어 글로브, 피터 브룩이었다. 피터 브룩. 왜 이렇게 낯이 익지? 알고 보니 그의 대표작 <빈 공간> 때문인 것 같다. 1968년 작이니까 꽤 오래 전 책이다. 워낙 오래 전 책이라 지금 <빈 공간>으로 그를 얘기하면 혼난다고 친구는 말한다. 읽어보고 싶었으나 못 읽은 책이다. 팔순을 넘은 나이에 그가 올리는 공연에 대해서 많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공연이 시작되면서 일인극이라는 얘기는 들었지만 이 여배우 어느 나라 말을 하는 것일까? 알아들을 수가 없다. 얼마 지나서야 그가 독일어로 말하고 있다는 걸 알았고 자막은 폴란드어, 그 밑에 영어가 있었지만 워낙 흐릿해서 당최 읽을 수가 없다. 아.. 일인극에 대사를 못 알아듣는다면 이건 정말 위기상황이다. 급기야 나는 무대 가까운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래도 역시 읽기가 쉽지 않다. 친구는 굳세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예상대로 그는 자신이 평생을 바쳐 작업한 연극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보따리를 풀어놓는다. 빈 의자가 대신하는 연출자와 무대에선 배우가 '공포'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를 놓고 벌이는 연습장면. 공포에 떠는 곰이 되라는 연출자의 요구에 갈팡질팡하는 배우의 모습이 코믹하게 그려진다. 그 상황은 흔히 공연연습 장면에서 볼 수 있는 연출과 배우의 줄다리기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겠다. 공포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대사 중 인상적이었던 건 다음과 같은 내용. 하느님이 7일동안 세상을 창조하고 나서 인간들은 너무 많은 시간을 어찌해야할지 몰라 매우 권태로웠다. 하여 하느님은 뭐 하나를 더 만들어볼까하고 "빛이 있어라" 하셨다. 아 그건 이미 만들었군. 그럼 "연극이 있어라" 그리고 "Perform!" 이라고 말씀하셨단다. 자막을 띄엄띄엄 읽어서 확실치는 않지만 아마 천사를 통해 중요한 밀지를 인간에게 전달하신 모양인데. 쬐만한 종이에 딱 한 단어를 써서 보낸 모양이다. 어허 그런데 이 종이가 분실되고 말았다. 아주 나중에 우연하게 다시 발견된 그 종이에 씌어있던 말은. "Why" 노장 연출가가 던질 법한 화두이다.
나중에 폴란드 학생에게 물어보니 독어로 Warum이 바로 Why란다. 결국 공연제목은 "Why, Why" 였던 셈. 자막 읽으랴 무대 보랴 바빠서 그랬는지 좀 지루했다고 하니 자막도 없이 끝까지 자리를 지킨 친구는 좋았단다. 몇가지 구상도 떠 오르고. 동종업계의 사람들은 말 없이 통하는 모양이다.
이번 축제는 EU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졌고 2012년에는 그단스크에 셰익스피어 극장을 건립할 모양이다. 우리나라도 아시아연합 같은 걸 결성해야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장장 11시간 기차를 타고 본 두 편의 공연관람기는 이렇게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새벽 세시 쿨쿨 자고 있던 나는 친구가 "포즈난이래!" 하는 바람에 주섬주섬 물건을 챙겨 기차에서 내렸다. 하마터면 브로츠와프까지 갈 뻔 했다.
요즘 말타호수에서는 Kino Letnia(여름극장)이라고 해서 매일 밤 10시에 영화를 무료로 상영한다. 기숙사의 정적을 피해 어제 가서 본 영화는 "Just Friends". 기대하지 않고 봐서 그런가 한 시간 반짜리 코메디가 깔끔하다. 돌아올 때는 밝은 달을 보며 열심히 페달을 밟아야했다. 오늘의 포즈난 일기 끝!!
어느 날 옆 방 친구가 알려줘서 무지개를 보았다. 완벽한 무지개가 하늘에 둥근 호를
그리고 있었다. 가만히 보면 옆에 무지개가 하나 더.. 쌍무지개를 생전 처음 본 나는
무척 흥분했지만 카메라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첫댓글 와 저도 폴란드 비얄리스톡 기숙사에서 저런 무지개 봤어요. 한참 사진찍었는데 ^^
아 봤구나.... 정말 굉장했죠? 우리집이 더 잘 보여서 옆방 친구들 들어오라고 해놓고 보니 방이 엉망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