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이
새 옷을 한 벌 입은 것 같은 좋은 시간..
언젠가는 내속에 잠자던 언어들이
실타래 풀리듯 토해질 것이다.
: [김후란] 감동을 캐는 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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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가 써지는 날이 있다. 그것도 기분좋게 한 편의 시가 써지고, 며칠을 덮어두었다가 다시 보아도 별로 손댈 곳이 없는 듯 여겨질 때 정신적 충족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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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다. 시가 가슴에 고여 잘 풀려나갈 때도, 혹은 문득 떠오른 한 구절에 매여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지지 않을 때도 낯선 길을가듯 조심스럽기는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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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의 첫구절은 신의 선물이요. 그 다음은 스스로 열어가야 한다고 말한 발레리의 명언대로 한 편의 시가 쓰여지기까지에는 어떤 심정적인 계기가 있고 그 상(想)은 내부에서 오래 익혀가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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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전에 무딘 동경(銅鏡)을 오래오래 문질러 반짝이는 거울로 만들었듯이 평소 시인으로서의 잠재의식으로 부단히 시를 생각하고 시의 생활화를 체질화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일반인이 무심히 보아 넘기는 평범한 대상도 시인에게는 신선하게 수용될 수 있고, 마치 베일을 벗겨낸 듯 새롭게 보이도록 작품화하는 것이 그 시인의 능력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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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능력을 지니기 위해서 시인은 본능적으로 끊임없이 감성을 녹슬지 않게 연마하게 된다. 마치 음악가가 손이 무디어지지 않도록 쉬임없이 악기를 다뤄야 하고 화가는 매일 캔버스 앞에서 붓을 들어야 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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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다가 바람이 확 불어 나뭇잎들이 현란하게 뒤척이듯이 어떤 시상이 살아 꿈틀거릴 때가 있다. 나는 그런 때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게 되고 언어로 형상화된 구절을 메모한다. 물론 그렇게 얻어진 첫구절이 완성된 시의 첫머리에 살아 있기도 하지만 다른 행 속에 바뀌어 들어가기도 하고 퇴고 과정에서 슬그머니 소멸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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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70년대 작품인 [鑛夫들]은 앞의 경우에 해당되며 주제가 선명한 만큼 비교적 한달음에 쓰여진 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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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 저 안쪽/가장 깊숙한 말씀을 찾아서/어둠을 캐는 사람들//어둠 속에 잠든 돌을/흔들어 깨워/두드리고 쪼으고/ 함께 검은 숯으로 일어나서//너는 나를 위해/나는 너를 위해/다시 한번 지상의 눈물이 되기 위해//밤의 어둠을 캐내어/ 불꽃을 피우는/선량한 광부의/뜨거운 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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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어느 탄광에서 붕괴 사고로 광부들이 사망하고 한 사람이 여러 날만에 구출되었다는 보도가 세간을 놀라게 한 적이 있다.
: 그 광부는 매몰된 지하에서 쇠파이프를 두드려 생존 사실을 알렸고, 그 파이프를 통해 마실 물을 공급받다가 마침내 담요에 싸여서 구출되는 장면을 TV 화면으로 보게 되었다. 뻐근한 가슴으로 감격스럽게 바라보던 중 문득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 "지구 저 안쪽 어둠을 캐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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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한구절이 며칠 동안 줄곧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사로잡혀 상(想)을 익혀가는 동안에 그들(광부들)의 작업은, 곧 우리(시인들)의 작업과 공통된다는 공감지대에서 새롭게 조명되었고 비로소 한 편의 시가 탄생하였다. 퇴적된 석탄을 캐내는 광부야말로 시인이 언어로 대상에 생명감을 부여하는 일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다만 셋째연의 경우는 갈등이 없지 않았다. "너는 나를 위해 나는 너를 위해"라는 표현이 그 자리에 있을 수 밖에 없는데 써놓고 보니 어쩐지 다른 시에서 쓰였던 것 같은 감이 들어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한번 자리잡고 앉은 그 구절 이외에 다른 표현은 합당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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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 속에 묻혀있던 석탄이 광부에 의해 지상으로 나온 것은 열을 내어 인간에 기여하는 데에 그 존재가치가 있다. 그것은 곧 다시 살아난 생명으로서의 ‘눈물’에 이르는 길이어서 무기물인 석탄과 피가 도는 인간과의 만남은 숙명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너아 나의 상호 교감을 도저히 다른 표현으로는 살릴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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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부가 잠자던 시커먼 석탄을 캐내어 불꽃을 피우듯이 우리들 시인은 한편의 시로 읽는 이의 가슴에 불을 켜주는 어떤 고차원적의 사명 같은 것이 공통분모로 창출되어 이 시의 주제를 이루게 되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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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대체로 간결한 문장으로 다듬어진 시가 좋다. 나 자신 잔가지를 모두 쳐서 최소한의 문장으로 정리하되 깊이 있는 사상이 은은히 배어 나오는 시로 탄생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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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이 침적된 동경이나 진주처럼 내부에 깊은 숨결을 간직한 시, 그런 생명력을 지닌 작품을 쓰고 싶다. 이런 욕구 때문에 한 편의 시를 완성하기까지엔 여러 번 퇴고하는 시간이 주어지며, 한동안 잊고 지내고자 덮어두었다가 전혀 다른 시각으로 재검토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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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시를 쓴다는 건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으나 시를 생각하고 시를 쓰는 시간은 나에게 기쁨이 되고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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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래에 나의 관심사는 생명의 존재 가치에 쏠려 있다. 작은 풀꽃 하나에게서도 진솔한 생명력을 발견하고 그것을 존중해 줄 필요를 느낀다. 새삼 우리 인간세계의 모든 생명체와 무한한 생명성에 연민을 가질 때 시가 갖는 세계는 무언가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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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발췌:포엠토피아 시창작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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