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일상인들은 아무도 가까운 친구가 자신처럼 고통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물론 다른 사람이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추정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것은 완벽하게 합리적인 추리로서, 우리가 고통을 느끼는 상황에서의 그들의 행위를 관찰함에 근거한 추정이며 친구들이 우리와 같은 존재, 즉 우리와 동일한 기능을 갖는 유사한 경우에 유사한 느낌을 산출할 수 있는 신경체계를 갖춘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 추정인 것이다. 한편 다른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느낀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지만 동물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야 할 이유가 과연 있는 것일까?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추정할 수 있는 모든 외적인 몸짓이 다른 종에게서도 나타난다. 특히 우리와 가장 가까운 포유류와 조류 종에서 이러한 몸짓은 잘 드러나고 있다. 거기에 포함되는 몸짓으로는 몸을 뒤튼다거나 안면이 일그러지는 모습을 들 수 있으며, 이 밖에도 신음 소리를 낸다거나 고함을 지른다든가, 또는 다른 형태의 외침,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시도, 고통이 반복될 것에 대한 두려움 등을 들 수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동물들이 우리와 유사한 신경 체계를 갖고 있음을 알고 있다. 즉 동물들 또한 우선 혈압이 오르고, 동공이 팽창하며, 맥박이 빨리 뛰며, 자극이 계속되면 혈압이 떨어져 버리는 신경 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다른 동물들보다도 인간에게 대뇌피질이 잘 발달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대뇌피질은 기본적인 충동이나 정서, 그리고 느낌보다는 사고 기능과 관련이 있다. 충동이나 정서, 그리고 느낌은 간뇌(間腦)가 주로 담당하면서 이는 다른 종의 동물들, 특히 포유류와 조류에서 그 발달이 현저하다.
우리는 다른 동물들의 신경 체계가 인간이 고통을 느꼈을 때 보여주는 행위를 흉내 내도록 인공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동물들의 신경 체계는 우리와 유사한 진화 과정을 거쳤다. 사실상 인간과 다른 동물, 특히 포유류는 우리가 소유한 신경 체계의 중요한 특징이 나타났을 때까지도 분기(分岐)되지 않았다.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은 분명 종의 생존 가능성을 높여준다. 왜냐하면 그러한 능력으로 인해 종 구성원은 상해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통에 관한 책을 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모든 사실적 증거를 통해 볼 때, 고등 포유 척추동물은 최소한 우리와 마찬가지로 고통 감각을 예민하게 경험한다. 그들이 하등하다는 이유로 우리보다 둔감할 것이라는 말은 터무니없다. 그들의 많은 감각들이 우리보다 훨씬 예민하다는 점, 가령 어떤 새는 시각이 매우 잘 발달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야생 동물들은 청각이, 그리고 다른 동물들은 촉각이 예민하다는 것을 보여주기란 어렵지 않다. 오늘날의 우리와 비교해 볼 때 그러한 동물들은 매우 예민한 인식 능력을 사용하여 위험스러운 환경을 인지한다. 대뇌피질의 복잡성과는 별개로 비록 철학적, 도덕적 의미를 결하고 있지만 그들의 신경 체계는 우리의 것과 동일하며, 고통에 대한 반응 또한 우리와 유사하다. 동물들이 두려움과 화냄과 같은 정서적 측면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너무너무 명백하다.』
(중 략)
한편 서로 다른 종간의 고통 비교는 불가능하며, 이 때문에 동물과 인간의 이익이 상충될 때 평등의 원리가 아무런 지침이 될 수 없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물론, 서로 다른 종 구성원들끼리의 정확한 고통 비교는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확성이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인간이 침해받는 이익보다 동물이 침해받는 이익이 확실하게 클 경우에만 동물에게 가하는 고통을 방지하여야 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식사를 비롯해 영농법, 과학실험, 야생동물 보호, 사냥 등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 이와 더불어 동물을 장식품과 모피로 사용해서는 안 될 것이며 서커스, 로데오, 동물원 등도 재고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 결과 동물들은 상당한 양의 고통을 모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나)
동물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을 유도하려는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 중에서 극복하기 힘든 문제는 첫째, ‘인간우선’이라는 가정과 둘째, 동물에 대한 문제는 그 무엇이건 인간에 관한 문제와는 비교할 수 없다는 가정이다. 이러한 가정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첫째, 그러한 가정은 그 자체로 종차별주의적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어떻게 주제에 대해 전반적인 연구를 해보지 않은 자가 인간의 고통 문제에 비해 동물의 문제가 덜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그와 같은 주장을 하려면 동물의 문제는 진정으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고, 동물들이 아무리 고통을 받는다고 하여도 그들의 고통은 인간에 비해 중요하지 않다고 전제해야 가능하다. 하지만 고통은 고통이다. 그리고 불필요한 고통과 아픔을 방지하려는 노력은 고통을 받는 존재가 우리 종의 구성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 중요성이 감소되지는 않는다. 누군가가 ‘백인’이 우선이며, 따라서 아프리카의 빈곤이 유럽에서의 빈곤만큼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물론 세상의 수많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기아와 빈곤, 인종주의, 전쟁과 핵 파멸 위협, 성차별, 실업, 환경보존 이 모든 것들은 주요한 문제이다. 그리고 누가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감히 말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일단 종차별주의적 편견을 걷어 치우면 우리는 인간에 의해 자행된 인간 아닌 존재들에 대한 억압이 이러한 문제들과 비슷한 대열에 끼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인간 아닌 존재들에게 주는 고통은 매우 클 수 있으며, 그에 연루된 동물들의 숫자는 어마어마하다. 미국에서만 해도 매년 1억 마리의 돼지나 소, 그리고 양들이 고통을 받는다. 10억 마리의 닭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매년 최소한 2,500만 마리의 동물이 실험용으로 사용된다. 만약 1천 명의 인간을 가정용품의 독성을 실험하기 위해 동물들이 경험하는 바와 같은 실험을 겪게 만든다면 국가적인 소동이 벌어질 것이다. 실험용으로 수백만 마리의 동물을 사용하는 것은 최소한 인간에 대한 실험과 동일한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말하는 이유는 동물에 가하는 고통은 매우 불필요한 것이며, 만약 멈추려는 의사만 있으면 쉽사리 멈출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합리적인 사람들은 대부분 전쟁, 인종간의 불평등, 빈곤, 그리고 실업을 방지하고 싶어한다. 우리는 수 년 동안 그러한 병폐들을 막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여 왔다. 하지만 문제는 그와 같은 병폐들의 대부분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를 실제로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데 있다. 이에 반해 인간의 손에 의해 초래되는 동물들에 대한 고통을 줄이는 것은 일단 인간이 착수하기만 하면 상대적으로 해결이 용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