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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기 100년 11월 11일 수요마음공부방 초청강좌 _ 법인 스님
<인문정신과 마음공부>
설 법 : 법인 스님
타이핑 : 임도운, 배성해, 김지원
<인문정신과 마음공부>라는 주제로 오늘 말씀드리겠습니다. 체계적 강의라기 보다는 제가 출가생활 40년 통틀어 정직한 나의 신념들, 느낌들을 말씀드리려 합니다.
Ⅰ. 마음공부와 인문정신이란 무엇인가.
제가 사는 암자인 일지암 오신 분 계신가요? 차 좋아하는 분들은 일지암 아실 거예요? 저희 암자에 차 마시러 오는 분 중에, 종교가 없는 분들도 있습니다. “어느 종교를 믿을까요?” 라고 저한테 묻기도 합니다. 제가 뭐라 말할까요? “불교 믿으세요.” 할까요, “원불교 믿으세요.” 할까요? 제 답은 “종교 굳이 믿지 않으셔도 됩니다.” 입니다. 스님이 이게 할 소리예요? 사람들이 깜짝 놀랍니다. 사실 그렇게 질문하는 사람은 불교에 호감을 갖고, 불교를 믿고자 하는 마음이 있거든요. 그런데, 제가 “굳이 종교 믿을 필요 없습니다.” 라니요.
저는 이어서 대답합니다. “종교를 안 믿으셔도 되는데, 당신 인생에서 필수품 2가지는 꼭 가지십시오.” 그 첫째는 ‘지혜’입니다. 생각하면서 사는 것은 종교와 관계없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둘째는 ‘자비’입니다. 사람과 자연 만물을 사랑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지혜’를 마음공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나 불교나 원불교나 어느 종교에 관계없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 소위 ‘지혜’, 가장 소중한 마음공부는 하고 살아야 합니다. 또 우리가 함께 더불어 사는데, 종교에 관계없이, 우리는 서로를 존중해주고, 아껴주고, 그 사람에게 기쁨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웃에 고통스런 일이 있으면 같이 아파하는 마음은, 종교와 꼭 필수적으로 연결되는 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어느 종교를 믿을까요?” 라는 물음에 역설적으로 “종교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마음공부라고 하는 것은, 늘 ‘자기의 생각이 어떤 생각인지’, ‘어떤 감정으로 살고 있는가’,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나의 감정과 나의 언행 모든 것들이 올바른 것인가’, ‘지금 내가 품고 있는 감정과 모든 행위들로 지금 내가 행복한가’, ‘떳떳한가, 부끄럽지 않은가’를 거듭거듭 살피고, 정신을 성숙시키고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특정 신앙을 갖지 않더라도, 내 자신의 소중한 삶을 행복하게 가져가기 위해서는 마음공부, 지혜가 필수품입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 함께 사랑하는 것도 필수품이잖아요.
이렇게 마음공부(지혜)와 사랑(자비심)을 갖고 있다면, 종교가 굳이 필요하겠습니까? 오히려, 마음공부와 자비심을 보다 심화시키기 위해 종교의 힘을 비는 것이지요. 또 마음공부를 제대로 하기 위해 부처님, 대종사님 등 스승님을 믿고 그 분의 삶을 더듬고 그 분의 삶을 탐구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역으로, 교회나 성당이나 교당에 빠지지 않고 법회를 보고 기도를 하고, 외형적으로 열심히 신앙하는 사람들이, 실제의 삶 속에서 마음에 사랑이 없고, 배타적이고, 이기적이고, 불친절하고, 참지 못하고, 너그럽지 못하고, 평상시의 삶을 산다고 할 때, 그런 종교와 신앙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굳이 종교를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공부 하는 지혜와 모든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은 필수품으로 가지십시오. 성당과 교당과 절에 열심히 다니더라도, 당신의 마음과 당신의 일상의 삶에서, 마음을 성찰하는 것과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이기적 탐욕과 배제와 혐오로 산다고 한다면, 당신의 신앙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 지점에서 인문정신과 마음공부가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문정신과 마음공부는 이렇게 만납니다. 흔히 인문학이라고 하죠. 인문학 많죠. 어디 가서 강의를 할 때 뻔한 제목을 붙이면 사람들이 안 옵니다. 제목을 잘 붙여야 되요. 제가 최근에 쓴 책 제목은 <검색의 시대, 사유의 회복>입니다. 책 제목 좋지요?
제목에다가 ‘인문학’을 넣어야 솔깃해지더라고요. 인문학이라 하는데, 어려울 게 없어요. 인은 사람 인(人)고요. 인문학 규정할 때, 문사철이라 해서, 문학 역사 철학이라 하잖아요. 역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대한 것이지요. 문학은 ‘사람들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철학은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지난 수 천년 동안, ‘동서고금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가.’가 역사이고, 문학은 ‘사람들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어떻게 울고, 기뻐하고, 사랑하고, 무슨 가치와 의미로 살아가는가.’를 표현하고 있어요. 철학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고 탐구이지요.
‘왜 사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ㅡ 이것이 인문학 정신입니다. 마음공부의 가장 기초는 인문학이고 물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저 듣지 마십시오. 앞으로 여러분이 자녀교육을 시킬 때도, 질문을 다양하게 할 줄 아는 아이로 자녀를 기르셔야합니다. 우리 현재 교육은 모범답안을 잘 쓰고, 대답을 잘 아는 아이죠. 그런 교육들이 주류로 이루고 있습니다.
인문학은 질문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다운 삶이지? 어떤 게 행복한 것이지?” 묻는 것입니다.
법인 스님 : 어떨 때, 행복할까요?
교도들 : 하고 싶은 걸 할 때, 행복합니다. 좋을 말씀 들을 때, 좋은 음식 먹을 때, 피곤할 때 쉬는 것, 좋은 사람 만나는 것, 다른 사람이 저를 알아 줄 때 등입니다.
법인 스님: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셨어요.
어떤 게 행복할까에 대해 말씀하셨지요.
인문학이라는 것이 다른 게 아니고, ‘사람답게 사는 것’ ‘생명답게 사는 것’입니다. 종교가 이와 다르지 않다는 점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인문학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행복하지, 어떻게 살아야 괴로움이 줄고 기쁨이 충만하지?’와 같은 것입니다. 이런 질문 다 갖고 계시잖아요. 여기서 종교도 출발해야합니다. 오히려, 인문학에서 종교 읽기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교라고 하면, 대종사, 예수, 부처라는 위대한 인물을 떠올리고, 그분들의 말씀을 떠올리고, 그분들에 대한 믿음과 기도를 하여, 내세에 구원을 받는다는 식의 생각을 먼저 떠올립니다.
불교와 원불교는 인문학과 종교 사이에 괴리감이 비교적 없는 종교입니다. 여러분 ‘마음공부’라는 말 많이 들으셨죠? 그런데 ‘마음공부, 마음공부’ 계속 듣다보니, 이제 지겹고 신물 나지 않나요?
저도 불교 신도들한테 “이럴 때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여쭈면, 교도님이 “다 마음먹기에 달렸지요, 다 생각하기 나름이죠.” 제가 “이거 왜 이렇게 하세요?” 여쭈면, 교도님이 “다 인연 따라 하는 것이지요” 대답하시면 (웃음), 저는 그럴 때 마다 ‘내 죄다’ 생각합니다.
불교로 돌아가 봅시다. 불교가 인도에서 태생됐잖아요.
서가모니 당시는, 그리스도교와 같은 종교 풍토와 다릅니다.
인도에서는 무엇과 무엇이 분리될 수 없어요. 인도인들은 인간의 중요한 가치로 재물, 건강, 욕망, 자유해탈을 듭니다. 인도인들은 ‘다르마’라고 해서 철학과 자기 마음인생이 분리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철학과 종교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죠. 인도에서는 모든 초점이 ‘나의 자유, 평화, 성숙’으로 다 모아지는 것입니다. 내세에 천상이나 극락에 간다는 것이 주요개념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라는 것이죠. 인문학도 ‘지금 여기서’입니다.
여러분의 마음공부가 ‘먼 훗날’입니까? ‘여기 지금’입니까? 자성일기 쓰십니까? 원불교에서 ‘앗, 경계다’라는 수행법이 있지요. ‘앗 경계다’할 때가 ‘지금 여기’지요? 지금 여기를 살피는 것입니다. 마음공부는 먼 미래의 어느 곳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여기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인문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왜 사는가’ ‘무엇이 의미 있고 가치 있는가.’ 를 탐구하는 인문정신과 ‘지금의 내 마음은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에 접점을 찾는 것입니다. 인문학으로 종교 읽는 게 낯선 게 아닌 거지요.
교당에 절이나 교회에서 자꾸 부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을 생각하다가 자기 자신을 도외시합니다.
김선우 작가라는 소설 <원효> 책에 나오는 글인데요, 서가모니 부처님이 계시는데 부처님께 엎드리고 찬양하면 부처님이 기분이 좋으실까요? 여기 대종사님이 여기 계신다고 할 때, 대종사님께 매일 찬양하고 인사드리고 공양드리면, 대종사님 기분이 좋으실 거 같아요? (교도: 피곤하실 것 같습니다.) 그럼 대종사님이 어떨 때 진정으로 기쁘실 거 같으세요? 대종사님을 진정 기쁘게 하는 방법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어떻게 하면 대종사님께서 기뻐하실까요?
(교도: 제자가 부처님의 말씀대로 공부하면 좋아하실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제 글을 읽고 온 교도님이 제게 와서 저를 너무 찬탄하면 저도 참 죽겠어요.
부처님께서는 제자가 나의 가르침대로 살 때’.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보다는 존재 자체로 삶의 기쁨을 산다고 할 때 흐뭇하실 것입니다..’나의 제자들이 서로 아끼고 도와주고 할 때 나에게 오는 횟수가 줄어들더라도, 어려운 친구들을 손잡아 주면 좋아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대종사님께 열 번 오는 것 줄이고 대종사님께 한 번만 가고, 아홉 번은 나의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사람에게 가서 더 도와줄 때, 대종사님 서운하실 거 같으세요? 아니지요? 바로 이것입니다. ‘나를 찬양하는 시간보다 많은 사색을 하고 많은 인격적 성장을 할 때’ 더 좋아하시겠죠. 이것이 인문정신입니다.
인문정신은 철저하게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 나, 지금 여기 우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 나’를 벗어날 수가 없어요. 여기서 설법을 듣든, 집으로 가든, ‘지금 여기 나’입니다. ‘지금 여기 나’를 도외시하고 ‘먼 미래 어떤 곳에서 달라지겠다, 먼 미래 어떤 곳에서 행복하겠다.’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고, 인생은 굉장히 비효율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천당을 중시하는 종교보다 ‘지금 여기 마음’을 중시하는 불교와 원불교가 중시해야할 ‘마음에 대한 개념들’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음이 어디 있어요? 여러분 마음을 살필 수 있어요? 마음은 찾을 수 있는 것입니까? 마음은 볼 수 있는 것인가요, 볼 수 없는 것인가요? 공부하실 때 여러분이 이렇게 물으셔야합니다.
여러분이 정전을 읽고, 대종경 읽을 때 의문 나는 게 있으면, 메모했다가 수시로 교무님께 질문해야합니다. 교무님을 굉장히 못살게 하는 것들이 여러분의 권리이자 의무입니다. 교무님의 잠을 재우지 말아야 해요(웃음). “내가 교도님 저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할까?”해서요. 질문이 다양하고 깊어질수록 마음공부가 향상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마음공부를 조용하게 정(靜) 중에서 집중하고 몰입하면 마음공부가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건 일부분이에요.
질문하지 않는 마음공부는 공부에 진전이 없습니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는 훈련이 없으면 마음공부는 진전이 안 됩니다. 인문학의 기본정신은 ‘낯설게 보기’입니다. ‘새롭게 보기’입니다. “여태껏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생각하는 게 맞을까?”하는 것이지요. 잘 산다고 한다는 개념, 행복하다고 하는 개념들은 사회적으로 통념으로 잡혀있습니다. 잘 산다는 것에 돈이 많고, 집은 몇 평이고 하는 기준이 있잖아요. 행복도 마찬가지고요. 누구나 익숙하게 생각하는 행복의 개념자체를 새롭게 뒤집어 보자는 것입니다. 낯설게 보고 새롭게 보려면 질문을 해야죠. “교무님, 행복이 뭐에요?” “교무님은 지금 마음이 편안하세요?” 라고 물어봐야죠. “교무님은 업무에 시달리고 행사에 시달려서 마음에 짜증이나 피곤함이 있으신가요?” 물어보세요. “교무님은 바쁘실 때 제가 전화해도 반갑나요?”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인문학과 마음공부에 대해, 종교인들이 자칫 잘못 생각하면 마음을 ‘고요한 것 내 속에 뭐가 있는 것’으로 보아서 마음공부를 고요하게만 하려고 합니다. 일시적인 마음의 편안함은 있죠. 그러나 현장에서 시비분별과 내가 원하지 않는 상황, 수 없이 맞닥뜨려야하는데 그때 효용성이 있나요? 여러분 어떻게 사실 거예요? 세속에서 치고받고 살다가, 시비분별이 너무 많으니 조용한 곳으로 가서 마음 편안하게 하는 삶을 산다고 쳐요. 그런 곳에서 마음공부 됐다고 생각하세요?
여름 겨울 수련회하면 교도들이 ‘4박 5일 묵언수행으로 충전해서 그 힘으로 나중에 산다.’고 말하는데, 그런 사람들을 보면 마음공부의 진전이 없어요. 마음공부는 생각을 완전히 바꿔야 합니다. 내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마음공부는 대상 존재에 대한 재인식입니다. 그것이 낯설게 보기, 새롭게 보기라는 인문학 정신과 통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흔히 익숙한 사고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제가 산길을 가는데, 생각해보니까 ‘나무나 풀이나 새나 짐승에게 겸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절에서 우리가 살 때 먼저 있는 주인이 누구인가요? 어느 날 제가 생각해보니, 나무와 흙과 새와 짐승들이 잘 살고 있던 것을 우리가 허가를 받지 않고 무단침범해서 살았더라고요. 그렇게 생각했을 때 굉장히 고마웠습니다. 미안스러워 지더라구요. ‘벌레만도 못한 사람’이라고 할 때 벌레에 대한 모독이겠구나 생각이 듭니다. 벌레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 하는데, 짐승이 어때서요? 짐승이 인신매매하는 모습 보셨어요? 저는 짐승이 증권조작하는 것도 못 봤어요. 짐승끼리 세계1차 대전, 2차 대전을 일으킵니까? 짐승끼리 노예를 부립니까? 이런 식으로 새롭게 낯설게 보자는 것입니다. 짐승 벌레에 대한 생각들이 바뀌는 것이죠.
인문학이라는 것이 그저, 문학책, 철학서적, 역사서적을 읽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보기, 낯설게 보기, 끊임없이 묻기’입니다. 기존의 생각과 관념들을 다시 해체하고 수립하자는 것입니다. 제가 짐승과 벌레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것은 벌레에 대한 기존의 통념들을 해체하고 재구성한 것입니다. 그러면, 짐승과 벌레와 산천초목을 보는 눈들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대상과 존재를 보는 눈이 달라지면 우리의 관계가 달라지게 됩니다.
행복에 대한 개념도 봅시다. 영국 산업혁명시대가 있었습니다. 급격한 변화지요. 그 당시에 6살짜리 사내아이가 하루 16시간 일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전율이 오지 않습니까? 일상적으로 많은 6살짜리 아이가 공장에서 노역에 시달린다고 하면, 끔찍하죠. 당시에 또한, 아프리카의 어린아이 노예들을 잡아다가 금광 갱도로 들어가서 금을 채취한 것이 역사죠. 당시의 사업주들은 돈을 많이 벌고, 유흥을 즐겼겠죠? 우아하게 살았겠죠? 상상을 해보세요. 아프리카 노예들, 아이들을 잡아다가 강제 노역을 시켜서, 아주 좋은 집과 정원에서 클래식 음악을 듣는 삶이 행복을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가 무비판적으로 보면 행복해보이지요. 그러나 행복이라는 것이 남에게 고통을 주어서 행복을 만들 때, 과연 그것이 행복일까 하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그래야만이, 세상을 바꾸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을 바꾸게 하는 것입니다.
마음공부는 감정의 요소를 순화시켜서, 고요하게 가라앉히는 식의 정태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에 머물러 버릴 때, 인간에 대한 애정과 사회와 역사에 대한 비판과 안목이 없이, 그저 내 마음만 공부하는 것이 마음공부가 아닙니다. ‘내 마음하나 다스리면 세상이 행복하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일 수 있습니다. ‘일심청정이면 국토가 청정이다’는 식의 해석 말이에요. 남의 고통을 통해서 갖는 행복은 정말 행복일까요?
이집트 피라미드 가보신분 계시나요? 중국의 만리장성 가보신분 계시나요?
만리장성 가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거대한 피라미드를 보고, 만리장성을 볼 때, 북촌의 성곽 길을 볼 때 저는 고통이 느껴집니다. 당시에 강제노역을 한 남자들의 고통이 느껴지고, 그 남자를 기다리는 부인 자식들의 고통이 느껴집니다.
중국의 한시에 보면, 두보의 시에는 이러한 강제노역에 끌려가고 군역에 끌려가는 사람과 그 가족들의 고통들이 표현됩니다. 인문학 정신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의 지평을 넓혀야 합니다. 화엄경에서 ‘하나의 존재에서 시방우주를 봅니다.’라고 합니다. 이 게 신비적인 소리가 아닙니다. 인간의 어리석음과, 남을 정복해서 잘 살아야겠다는 잘못된 세계관, 당시 강제노역에 끌려온 사람과 가족들의 고통이 만리장성 성벽 하나하나에 다 있습니다.
종교에서 사랑을 이야기하고, 자비심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자비심과 사랑이 시설에 가서 무료급식 봉사하는 차원인가요? 아니죠. 사람의 고통을 소멸시켜주는 것, 고통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우리가 세상을 보는 눈을 바꿔야 합니다. 이렇게 인문학 정신이라는 것은 만리장성이라고 하는 대상, 존재에 대해 생각을 뒤집는 것입니다. “중국 대단하다, 강대국의 문화유산이다”라는 식의 통상적인 생각에서 물구나무서기해서 생각해야 됩니다. 만리장성 지을 당시에 수만, 수십만 명의 고통의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인문학 정신은 이렇듯 돌 하나를 볼 때마다 역사를 보는 눈을 바꾸고, 새롭게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Ⅱ. 마음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2부는 ‘마음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1법칙은 ‘넉넉하게 먹여라’입니다. (웃음) 제가 교육부장할 때 일입니다. 원불교는 훈련이라고 하는데, 그런 식으로 스님들은 연수교육을 2박 3일 받습니다. 연수교육 10년, 20년 된 스님들 교육하니까, 직원들한테 10만원 더 추가해서 떡도 커피도 넉넉하게 좋은 것을 준비하라고 합니다. 넉넉하게 많이 드리니까, 불평이 없습니다. (웃음)
먹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두달 전에 인도 다람살라 가서 달라이라마 존자 법회를 4일간 들었습니다. 중간에 한 시간 반 정도 되면, 인도의 차와 빵을 돌립니다. 신도들이 법회 중간에 앉아서 빵을 먹고 차를 마십니다. 달라이라마 존자도 법상에서 차와 빵을 드시더라구요.
먹는 것이라는 것에 대해 새삼스레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마음이라는 것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봅시다. 마음을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는 누구나 어떤 사물이나 대상을 보면 인지하죠. 꽃이다, 사람이다, 동남아 사람이다, 라는 식으로 인지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한 판단과 생각과 이미지와, 좋고 싫음이라고 하는 감정들이 생깁니다. “아 저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는 언행도 생기고요.
이것을 마음이라고 합니다. 자, 여러분, 요즘 해외이주 여성들이 많죠. 해외이주 여성들의 자녀들도 익숙하죠. 제가 해남에 사는데, 해남에 해외이주 여성들의 자녀들이 굉장히 많아요. 얼굴을 보면 일곱여덟살 때, 필리핀 사람의 모습이 나타나요. 그런데 재밌는 게, 이 아이가 전라도 사람 다 된거예요. 재밌는 것은 할머니 빨리 오라고 말하는데 “빨리 오랑께”라고 말합니다.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그저 가슴속에 고요하게 그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은 표면에 있고 심층에도 있습니다.
특강 중에 성해영 교수님 수업이 있더라고요, 이때 더 자세히 들으실 겁니다.
마음을 이렇게 봅시다. 여러분 혹시 해외이주 여성과 그 2세를 봤을 때, 여러분의 마음이, 보는 눈이 다 다르겠죠. 어떤 사람은 아무 생각 없이 판단할 수 있고, 스스럼없이 편견 없이 대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혐오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죠.
세상에 장애인들이 많습니다. 발달장애인 사람들을 볼 때, 우리의 눈은 어떻게 되나요? 발달잘애인들은 얼굴들이 찌그러져있습니다. 제가 장애인 교도들 법회를 봤는데, 그분들과 적응하는데 6개월이 걸렸습니다. 생각에 편견은 없지만, 정서 감정은 잘 안되었던 것입니다. 6개월 되니까 아무렇지 않아요. 이후에는 일그러진 표정 속에서 아름다움이 느껴지더라구요. 이제는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최근에도 함께 1박 2일 템플스테이를 했는데, 즐거워요. 예전에는 의도적으로 사명감으로 노력을 했는데 지금은 아무렇지 않아요. ‘잘해주어야겠다’는 생각마저 없어졌더라고요. 제가 “마음은 이렇게 만들어지고, 마음은 이렇게 만들어지고, 변화하고 훈련되는 것이구나.” 알았습니다. 마음은 훈련의 과정인 것입니다.
또 하나 절실히 느낀 것은, 마음공부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정’ 이 아닙니다.
대종사님께서도 정과 동의 마음공부를 강조하셨죠?
좌선을 쭉 하면서 이미지 연습을 한다고 해요, 장애인들을 생각하면서 “자비로워야지” 생각하면, 고요한 곳에서 이미지 연습을 한다고 해서, 잘 될까요? 그 사람들과 동화가 잘 될까요? 마음공부는 그럴 필요가 없어요.
자주자주 스킨십하고 접촉하면 돼요.
여러분 연애해보셨지요?
처음에는 낯설고 어색하고 이상하죠. 한번 두 번 만나다보면 자연스러워지죠.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고요한 것인 것이 아니라, 다양한 관계 속에서 내가 적극적으로 다가가고 접촉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불교적 해석은 그렇습니다. “마음은 만들어진다”고 했을 때, 여러분은 당황하실 거에요. 김찬호 교수의 <모멸감>이라는 책이 있는데, 제가 요즘 권하고 있습니다. 사회학자입니다. ‘굴욕과 존엄의 감정사회학’이라는 것입니다. 감정이라는 부분에 주목한 책입니다.
감정은, 좋다싫다 수치스럽다 모멸감이 느껴진다는 것이죠. 우리에게 이성보다 감정이 지배하고 있어요. 프로이트가 감정은 가솔린이고 생각은 엔진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다 경험하시지요. 생각은 ‘아니’라고 하고 판단은 하는데, 실제 감정은 생각을 제어 못합니다. 감정이라고 하는 것도 마음의 한 요소입니다.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좋다, 싫다, 화가 난다’는 것도 있고, 무엇을 어떻게 인지하고 판단하는 요소가 있고, 뭔가 하고 싶다는 의도욕구도 있습니다. “쓰다듬어 주고 싶다. 밉다” 등이 의도입니다.
이런 것들이 합해진 것이, 마음의 작용이라는 것입니다.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감정노동자’라는 말 아시지요? 여러분들이 백화점에서 일하는 감정노동자라고 상상해보세요. 끊임없이 부당하게 손님들이 말하고, 손님들이 부당하게 주장하고 멸시하는 눈초리로 말을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가끔 서점에서 보면, 점잖은 신사와 아주머니들이 그럴 듯한 책을 사면서, 계산을 할 때는 반말을 쓰는 분이 있어요. “이거 얼마지? 할인 안 해줘?” 그럴 때 마다 저는 “저 사람은 왜 책을 사지? 왜 책을 읽지?” 생각합니다.
인문적 삶은 지금 여기서, 지혜와 사랑, 인간을 존엄하고 서로 싸우지 않고 상생하면서 살자는 것입니다.
법구경에 “모든 생명은 채찍은 두려워한다. 모든 생명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이를 비추어, 남을 죽이거나 때리지말라.”는 말이 나옵니다. 논어에서는 “기소불욕물시어인 [己所不欲勿施於人], 생각에. 내가 싫은 것은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고 합니다. 어떤 관계로 사는가가 인문학입니다. 책으로는 그럴듯한 것을 읽으면서, 점원을 대하는 눈과 말투가 그렇지 않은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인문정신과 마음공부라고 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마음, 감정은 만들어지는 거예요. 백화점, 호텔, 항공기 여성승무원들의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닙니다. 얼굴은 미소 짓지만, 안에서는 자존감이 무너지는 상태를 생각해보세요. 처음부터 그랬을까요? 만들어진 것이죠.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백화점의 모든 손님들이 친절하고 웃고 공정하게 직원들과 대화하면 어떨까요? 그러면 백화점 직원들은 감정이 상할 리 없고 스트레스 받지 않고 넉넉해지겠죠. 돈 있는 사람들에 대한 편견을 가질 수 없겠죠? 마음, 감정은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이죠.
마음을 나의 가슴에, 나의 고요함에 가두어 생각하면 안 됩니다. 마음 자체가 관계성 자체에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불교 교리에 의하면 육근(안이비설신의)이 색성향미촉법 속에서, ‘좋고 싫음과 기쁨’이 형성이 됩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누가 인사를 했는데, 인사를 건성으로 받고 멸시하는 태도를 볼 때, 내 감정은 어떻게 됩니까? 인사할 때 웃으면서 맞이하면 어떨까요? 사람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생기겠지요.
마음은 인간과 인간의 사회적 관계에서 형성됩니다. 내가 어떻게 표정 짓고 말하는 것에 따라서 사회적 파장으로 가는 것입니다. 내가 표현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받아들입니다. 이 파장 속에서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제가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서 내가 올곧게 살아야겠다.’는 말을 했습니다. 내가 존엄하게 인식되고 내가 존엄함을 느끼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다른 사람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은 철저히 개인의 차원, 내재적 차원이라 생각하곤 합니다. 내면이라고 하는 것은, 가둬서 독립되어 존재하지 않습니다.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은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물질과 정신을 둘로 나누면 큰일 납니다. 우리가 먹고 사는 것이 매우 빈곤하고 처참하다고 쳐봐요. 마음이 존엄해질까요? 인견과 지성과 교양과 예의가 갖추어 질까요? 안되는 거예요.
보통 마음공부는 감정을 잘 다스리고 순하게 하는 정도로 생각하곤 하는데, 감정과 행동이 제대로 가기 위해선, 존재와 사물을 보는, 인간을 보는 생각과 시선 인식이 방향을 제대로 잡아야 합니다. 그저 “화를 가라앉혀야지”라고 하는 차원아 아닙니다. 화가 왜 생기죠? 자존심 상할 때 화가 왜 생깁니까? “저 사람이 나를 대우해주지 않네, 내가 누군데, 내 나이가 몇인데, 내가 얼마만큼 배웠는데, 내가 재력이 얼마인데, 내가 사회적 지위가 얼만데” 이러한 인식이 자기를 서운하게 만들고 화나게 만듭니다. 이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프랑스의 정치철학자 루이 알튀세르 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유명한 격언을 했습니다. “히말라야에서 사는 토끼가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고 합니다. 평지에 사는 코끼리보다 자기가 더 크다는 착각입니다.
장관이든 교수든 종교인이든 기업 총수이든 직위 자체가, 그대로 인격하고 동일하지 않습니다. “내 직위가 무엇이기 때문에 대우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세상 사람들을 우습게 보는 것입니다. 직업에 귀천이 있습니까? 현대사회에서 곤란한 질문인데요. 직업에 귀천이 있죠. 말도 안 되는 대부업을 하는 사람은 귀한 직업인가요, 천한 직업인가요? “빌린 돈 갚아 드립니다.” 광고하는, 대부업 하는 사람들 그런 직종에 있는 사람이 고귀한 직업인가요? 천한 직업이지요. 왜 천하다고 생각합니까? 그 행위가 순수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그렇게 때문에 그 직업이 순수하지 못한 것이죠. 환경미화원이 귀한 직업입니까, 천한 직업입니까? (청중 : 귀한 직업입니다.) 정말 귀한 직업이라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익숙하게 “그렇게 공부안하거든 농사나 지어, 너 공부 안하면 청소원 된다. 공부 못하면 택시나 몰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사람을 보는 우리의 시선을 생각해봅시다. 환경미화원이 어때서, 택시기사가 어때서, 농사짓는 분이 어때서요?
우리는 마치 히말라야에 사는 토끼가 평지의 코끼리보다 크다고 생각하듯, 직업 그 자체가 인격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에서 남을 보는 눈들이 달라집니다.
이런 생각이 인문학적 사고와 마음공부입니다. “청소해주는 환경미화원이 정말로 고맙다”고 생각해야지요. ”우리가 낸 세금으로 일을 하는데, 뭐가 고마워“ 라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공부입니까? ”저분들이 추위에도 온갖 악취나는 쓰레기를 치워주니까, 우리들이 쾌적한 곳에서 산다.“라는 생각에서 고마움과 은혜를 아는 이러한 시선이 환경미화원에 대한 인식을 바꿀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문정신입니다. 동시에, 환경미화원이 고맙고 은혜로운 존재라고 생각하면 내 마음공부는 방향을 잡은 것입니다. 아쉽게도 어느 대학에서 환경미화 아주머니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해서 신문에 나오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그 지점에서 마음공부를 생각해야 합니다. “저 사람에 대한 나의 마음공부는 어떠한 것인가?”라는 지점에서요.
제가 흔히 재밌게 묻는 질문인데요, 여러분 “목탁이 소중합니까? 걸레가 소중합니까?” 걸레에 대한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합니까? 쓰레기통에 대한 생각은 어떻습니까? 부부싸움하고 쓰레기통 발로 차신 분 있으세요? 우리가 깊은 마음공부를 했다면 걸레와 쓰레기통에 대한 생각도 바꿔야 합니다. 새롭게 보고 낯설게 보는 것입니다. 쓰레기통에 대한 진지한 사색을 해보셨습니까? 걸레에 대해서 시선을 한번 두어봤나요? 방이 굉장히 더러운데 목탁과 경전으로 닦을 수 있나요? 방이 더러운데 대종경으로 닦을 수 없지요. 방안이 더러울 때는 걸레로 닦아야지요. 그런데도 우리는 걸레에 대해서 이상한 수식어를 씌웁니다. 걸레에 대한 시선을 바꾸어보세요. 걸레가 굉장히 고마운데요. 쓰레기통은 어때요? 쓰레기통이 쓰레기를 담아주니까 얼마나 고마워요. 제 말을 듣고 쓰레기통과 걸레에 대한 생각이 바꿔지죠?
제가 대학생 때부터 봐온, 아는 여자 분이 남편하고 아주 잉꼬부부입니다. 52살이신데 말이죠. 제 앞에서는 닭살 애정표현을 안했으면 좋겠어요. 내 앞에서 애정표현하면 어떡하자는 거야 (웃음)
여자분이 그런 말을 합니다. “저는 다음 생에도 이 남자와 결혼할겁니다”라고 합니다. 남자에 대한 최대의 찬사이지요. 결혼을 결심한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청년시절에 음식점에 있을 때 보면, 그 남자가 음식이 오면 종업원님께 “고맙습니다.” 말하고, 목례하고, 식당 나갈 때는 “잘 먹었습니다” 인사하고 나가더라고요. 연애할 때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예의와 진심이 너무 깍듯하더래요. 그래서 이 남자와 살면 “인격이 좋아질 것이”라고 확신이 들어서 결혼 했다고 합니다.
소비할 때 사람들이 이상하게 갑의 감정을 느낍니다. 여러분도 주의 하셔야해요. 비행기 탈 때 승무원이 인사 꼬박하는데, 여러분은 응답하시나요? 응답하는 사람 거의 없더라고요. 인문학이라고 하는 것, 마음공부라는 것은 ‘지금, 여기서’ 모든 사람들에 대해 존엄한 대우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먼저 인사합니다. 인사는 먼저 보는 사람이 하는 거죠. 한 때 제가 광주에서 비행기 탈 일이 많았는데, 아시아나 항공기에서 제가 인기가 참 좋았습니다. 인사를 잘하니까요.
인문학 정신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요약을 하겠습니다.
우리 마음공부가 행복한 삶이라고 했는데, “인생에 할 것이 무엇인가?” 에 대해 다섯 가지를 세웠습니다.
첫째는 공부입니다.
저는 인생에서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음공부입니다. 공부를 해야, 자기 정신이 녹슬지 않아요. 책을 읽고 교당 와서 법문 듣고 기도하고 염불해야합니다. 인간의 공부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느냐’입니다. 이는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입니다. ‘어떤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의 삶의 내용이 어떠한 것인가?’ ‘어떤 사람들의 말과 삶을 보고 들을 것’인가 입니다. 여기에서 인격마음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교육과 손주교육을 할 때 세 가지가 중요합니다. 첫째, 도서관으로 인도할 것 둘째, 자연으로 인도할 것, 셋째, 다양한 훌륭한 사람들에게 인도할 것입니다. 이러면 교육이 됩니다.
공부하는 것 중 마음공부가 가장 중요합니다. 대학원에 가서하는 공부가 아니라, 내가 말하는 공부는 내 마음 내 삶을 끊임없이 반성하고 통찰하고 성숙시키고 성장시키고 새롭게 만들고 무한한 상상력과 창의력으로써 내 삶을 풍부하게 만드는 것이 공부입니다. 여러분은 공부에 얼마나 좋은 조건을 타고났습니까? 교당에 오면 대종사 말씀을 들어야 되죠. 끊임없이 책을 읽고 생각하게 되죠.
제 또 하나의 마음공부는 책에서만 찾으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공부라고 말할 때 왜 학교에 간 일, 책 읽은 일만 얘기합니까? 내 삶을 바꿀 수 있는 모든 것이 공부입니다. 공부는 자연에서도 길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사람을 잘 관찰하는 일에서 공부가 됩니다. 좋은 영화를 보십시오. 좋은 음악을 들으십시오. 좋은 다큐를 보십시오. 좋은 팟캐스트를 들으십시오. 요즘 아주 좋은 팟캐스트가 많습니다. 인터넷에 인문학 강의 좋은 것 많습니다. 부지런하면 돼요. 눈이 침침하다고 변명하지 마세요. 팟캐스트에서 강의들으시면 됩니다. 공부의 끈을 평생 놓지 말아야 합니다.
두번째는 일입니다.
일 안하고 살 수 없습니다. 일을 직업이라고만 생각하지 마세요. 일, 직업, 돈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어느 사람이든 노동을 해야 합니다. 돈을 벌어서 생계를 책임져야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직업이 아니어도, 보람을 느끼고 사회적 기여를 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책을 읽든, 일을 하든, 놀든, 그 자체가 좋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좋아야 합니다. ‘지금, 여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의 결과와 보상, 타인의 평가로 일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삶이 팍팍해지는 것입니다. 그때 그때 그 일의 과정을 즐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가 절 밭에서 채소를 키우면 신도가 “해먹지 마시고 사다먹으세요” 라는 말합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공부를 해도 “어떤 책을 읽었다. 몇 권 읽었다. 인용해서 자랑해야지”라는 생각으로 책을 읽으면 안 됩니다. 책을 읽는 순간순간이 삶의 희열이 되고 행복이 되어야 합니다.
일도 마찬가지이고, 집안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거지 집안청소에 대해 편견을 가지면 안 됩니다. 생각을 바꿔보셔야 해요. 청소와 설거지가 마음공부입니다. 그 과정이 매우 즐겁습니다. 저는 아침에 40분 정도 걸레로 청소하는데, 참 재밌습니다. 깨끗해지는 것도 좋지만, 몸을 쓰는 것 그 자체가 굉장히 즐겁습니다. 물론, 우리 교도님들이 바쁜 것은 다 압니다. “너는 산중에서 할일 없으니까 그런 소리 하지”라고 말씀마세요(웃음). 결론은 일을 하는데 일 자체가 즐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돈이나 보상을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셋째는 노는 것입니다.
공부하고 일하고 삶의 필수품은 노는 것이라고 합니다. 잘 놀아야 합니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노는 것에 대한 편견이 있습니다. 노는 것은 쓸모없는 것 헛된 것 불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놀면 재밌지요? 여러분 노는 것에서 행복감을 느끼지 않습니까? 바둑을 두고, 등산을 하고, 노래를 부르면 행복하지 않습니까? 부부 신도들에게 제가 춤을 굉장히 강조합니다.
마음공부 종교에서 엄숙한 것에 갇히면 안 됩니다. 잘 노는 것도 마음공부입니다. 노는 것의 질과 방법이 중요해요.
특히 젊으신 분들 지금부터 잘 생각해보세요. 고령화 사회입니다.
60, 70, 80세에 잘 노는 것이 중요합니다. (60세-80세) 마음이 잘 무너집니다. 작은 일에 서운하고 존재감이 없어지죠. 그럴 때는 당위성으로 마음공부하면 안 다스려져요. 존재 의미를 느낄 수 있는 공부를 하고, 나름의 사회적 기여를 하고, 또 잘 놀아야 합니다. 놀려면 놀 거리를 젊을 때부터 많이 만드셔야합니다. 기타 등 다양한 악기를 배우고, 그림을 배우고, 요리를 배우고, 운동을 배우셔야 합니다. 사회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나름의 전문의 소양을 갖추고요.
해남에 전문가들이 있습니다. 학벌이 높지는 않아도, 어느 한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가가 된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지역에서 나름의 사회적 기여를 합니다. 그런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젊고 힘 있을 때 다양한 것을 배우길 바랍니다. 그래야 그거로 잘 놀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노는 것에 경직되고 이상한 편견과 시선을 가지고 있습니다.
노는 것 좋죠? 저는 부부 교도들은 춤을 배우면 좋겠어요. 인문학적 삶으로 춤에 대한 생각도 바꿔보자는 거지요. 춤추고 노래 잘하는 것이 마음공부에 도움이 됩니다.
네 번째는 서로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공부하고 일하고 놀고 사랑하고.
다섯 번째는 함께하라는 것입니다.
‘연대’하라는 말입니다.
육바라밀, 팔정도를 제가 이런 식으로 재구성했습니다. 놀랍게도, 신영복 선생님의 <담론>, 유시민의 <어떻게 살 것인가?> 책을 보니까, 그분들도 그렇게 쓰셨더라고요. 하마터면 제가 표절할 뻔 했네요 (웃음)
서로 사랑하는 것은 상대방을 존중하고 상대방의 고통을 덜어주고 상대방에게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당신을 존중합니다. 당신을 존중하기 때문에 당신의 고통에 제가 마음이 아픕니다. 당신이 존엄하기 때문에 함부로 말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에게 보다 기쁨을 주겠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할 때 함께 하게 됩니다. 연대하게 됩니다.
인생에서 필수품은 공부하고 일하고 놀고 사랑하고 연대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총체적으로 말하면, 이것이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인문학이고 마음공부입니다. 사람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것이 마음공부입니다. 함께 어울려 좋은 것을 나눌 때 마음공부가 됩니다. 책을 읽고 다른 사람의 삶을 깊이 관찰하는 속에서 마음공부가 되는 것입니다. 일을 하며 보람을 느낄 때 마음공부가 됩니다. 또 하나, 정말로 품격 있게 잘 놀면, 마음공부가 됩니다. 감정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는 마음공부가 됩니다.
이렇게 살면, 삶과 종교가 둘일 수 없고, 가정과 교당이 둘일 수 없는 삶이 이루어집니다.
<문답>
Q. 잘 놀라고 말씀하셨는데, ‘잘 노는 것’의 기준이 무엇인지 여쭙고 싶습니다.
답
잘 놀라는 말씀은 유쾌하라는 말씀입니다. 기분 좋은 감정, 기쁜 감정을 갖고 사셔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잘 노셔야합니다. 호모 루덴스라고 하는데요.
어떤 게 잘 노는 걸까요? 결과를 보세요. 어느 책이 좋은 책인가요? 책을 읽고 나서 자기 마음과 생각에 결과가 어떤지에 따라 좋은 책인지 아닌지가 판가름 납니다. 어떤 게 잘 노는 것인지는 놀고 나서 판단해보세요.
사람은 ‘거리’를 갖고 노셔야합니다. 저는 암자에 사람을 불러서, 2시간 등산을 합니다. 산에서 수다 떨고 노래 부르고, 내려와서는 요리하고 떠들고 차마십니다.
가끔 해남 사람들이 암자에 달구경도 옵니다. 멍석깔고 달 구경하다가, 기타 치고 노래 부르고요. 제가 맥주 2캔까지는 허용합니다. (웃음) 저는 술에 대해서는 편견을 갖지 않아요. 맥주 한 두 캔 마셔서 기분 좋다면, 중생이 기쁘면 부처는 기뻐할 수밖에 없습니다.
노는 것을 단순히 휴식과 재충전으로 가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놀이 자체가 기쁨이 되고, 환희가 되고, 삶의 보람이 되어야합니다.
너무 파격적인가요? 여러분 그렇다고 암자 오실 때 맥주 갖고 오지 마세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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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와~ 감사합니다. 도운, 성해, 지원교우님~ ^^
감사합니다. 세세한 부분도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