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https://youtu.be/AoJVBNg2_1A?si=YfxUG8pNlyFxFCEM
(2024.11.24. 주일 낮 예배)
본문말씀 : 누가복음 18:1-8
주 제 : 기도하고 낙심하지 않는다는 것은 기도를 생활화 하는 것이다.
1.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
우리는 지금 예루살렘을 향하여 마지막 여정을 가시는 예수님의 행적을 더듬어 가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마땅히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에 대하여 깊이 감사하면서 살아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주시려고 들려주신 과부와 재판장의 이야기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어떤 도시에 한 재판장이 있었는데 그는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합니다. 또 한 과부가 있습니다. 과부는 대체로 가난하고 어디에도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 과부가 억울한 일을 당했는지 재판장에게 가서 자기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하소연했지만 재판장은 눈 하나 끔뻑하지 않습니다. 과부의 억울함을 풀어주어봤자 자기에게 덕 될 것이 하나도 없기에 그렇게 했겠지요. 그래서 못된 재판장이라고 했겠지요. 그렇지만 과부는 날마다 재판장을 찾아갔습니다. 나중에는 재판장이 이 과부가 날마다 자기를 괴롭히니까 그것에 질려서 그 과부의 억울함을 풀어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7절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않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 하셨습니다.
여기까지 읽으시면 이 비유의 뜻은 명확합니다. 앞에서도 나왔듯이 ’낙심하지 말고 들어주실 때까지 기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기도에 대한 가장 기본이 되는 말씀은 마태복음 7:7에 나타납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이 말씀이 기도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말씀인데 여기에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말은 전부 같은 뜻입니다. 전부 구하라는 말씀인데 같은 말을 계속 하는 것보다는 같은 뜻을 가진 다른 말을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기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말은 전부 같은 뜻으로 구하고 또 구하고 또 구하라는 말씀이며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낙심하지 말고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신 구하라, 찾아라, 두드리라는 말씀을 한 번 더 강조한 것이됩니다.
2. 낙심하지 말고,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한 번 더 깊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지금 가시는 길은 마지막 순레길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시는 길인데 아무 생각없이 대충 가시겠습니까? 말씀 한 마디를 하셔도 신중하게 하셨을 것입니다.
특히 이 글을 전하는 누가는 이 글의 첫머리에 ‘그 모든 일의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펴서’ 이 글을 썼다고 했습니다. 절대로 그때 일어났던 모든 일을 기록한 것도 아니고, 있었던 일을 그냥 순서대로 기록하지도 않았습니다. 분명히 전하고자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낙심하지 말고 구하라‘는 것입니다. 또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라는 말씀입니다. 낙심하지 말고 구하라는 것은 기도를 하다가 보면 낙심할 때가 많다는 것을 뜻합니다. 또 낙심해서 기도를 하지 않다가 보니까 믿음도 상실하고 믿지 않는 자가 될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낙심해서 기도를 하지 않으면, 믿음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런 비유를 주시는 겁니다.
사실 기도를 하시면 제까닥 제까닥 잘 들어주십니까? 구하는 것마다 다 들어주신다면 기도하지 않을 사람 없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만 된다면 아마 이 교회가 미어터지겠지요.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그렇게 말할 것도 없습니다. 구하라 한 마디면 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한다고 해서 다 들어주시는 것 아닙니다. 물론 다 들어지시기는 하겠지만 그렇게 쉽게 기도하는 대로 다 들어주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다가 그만 두는 사람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이렇게 낙심하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고 이런 비유까지 들어가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 이 비유의 끝에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경고하시는 것처럼 이 모든 것을 이기고 끝까지 기도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처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는 그러면 어떻게 하면 낙심하기 쉬운 상황에서도 끝까지 기도를 할 수 있을 것인가? 답을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3. 기도의 생활화
그 답은 기도를 생활화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생활화! 무척 어려운 일 같지만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항상 기도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16에도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좋은 일이든지 나쁜 일이든지 기도하는 것입니다. 잘 될 것같은 일도 기도하고 쉽지 않을 것 같은 일도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 입에서 기도가 그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참 어려운 일 같지만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조금만 방향을 바꾸시면 됩니다.
제가 요즈음 집에서 식사가 끝나면 설겆이를 합니다. 참 이상한 일도 있는데 제가 설겆이를 한다고 한 번 말했어요. 작심하고 앞으로는 내가 설겆이를 하겠다. 선언을 한 것도 아닙니다. 그냥 넌지시 이제 설겆이는 내가 해볼까 하고 며칠 설겆이를 했는데 그때부터 집사람은 아예 설겆이는 자기하고는 전혀 아무 관계가 없는 일인 것처럼 아무 일없이 테레비를 보고 있으면서도 설겆이 근처에도 오지 않아요. 설겆이 하고 무슨 원수나 진 것처럼 전혀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기로 여자들이 이것 참 싫어하는구나 이렇게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때로는 설겆이가 싫을 때도 있어요. 그때는 그냥 두고 가버립니다.
근데 설겆이를 하고부터 저는 밥을 먹을 때가 되면 항상 설겆이 생각을 먼저 합니다. 우선 그릇을 여러개 사용하는 것이 싫어요. 가능하면 그릇을 적게 사용하려고 해요. 후라이판처럼 무엇인가 음식물이 붙어 있는 것 보면, 얼른 물을 끼얹어 불려두려고 합니다. 또 냄비나 도마 긴 칼 같은 덩치 큰 것이 있으면 얼른 식사 전이라도 씻어서 싱크대에서 치워버립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얼마 되지도 않은 그릇들이 엄청 많아 보여요. 그러니까 항상 설겆이를 생각을 하면서 밥을 먹어요. 이런 것을 제 말대로 정의를 내리면 ’설겆이의 생활화‘입니다. 설겆이를 하다가 보면 설겆이의 생활화가 이루어집니다.
뿐만 아니라, 요즈음은 저녁 밥도 제가 준비할 때가 많아요. 집사람이 늦게 들어와서 그때야 저녁 준비를 하면 너무 늦게 밥을 먹게 되요. 빨리 먹어야지요. 그래서 저녁에 무엇을 준비하면 될까 생각하다가 하루는 양념 불고기를 준비해 보았습니다. 어떤 집사님이 가르쳐주었는데 가장 쉬운 것이 고기를 굽는 것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양념 불고기를 준비해봤는데 진짜 쉬웠어요. 양념된 고기를 사서 후라이판에 올리고 굽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양파를 한 번 넣어보았습니다. 그것도 할 만했어요. 쉬워요. 그러다가 계속해서 양념 불고기만 할 수도 없어서 유투브를 보고 마파두부도 해봤습니다. 그렇게 쉽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래도 제 나름대로의 마파두부도 만들어보았습니다. 그렇게 하고 나니까 이제는 어느 정도 저녁 준비는 제 일처럼 되어 버렸어요. 저녁 때가 가까워지니까 교회에 앉아 있어도 자꾸만 오늘 저녁은 무엇을 해야 하지 하면서 자꾸 생각이 그쪽으로 가요. 자꾸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제야 집사람이 입버릇처럼 오늘 저녁을 무엇을 해야 하지 그런 말을 자주 했던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것이 무어냐? 요리를 한 번 두 번 하니까 자꾸 요리 생각이 나요. 이런 것을 제 마음대로 이름을 붙이면 요리의 생활화입니다.
기도의 생활화도 이런 것입니다. 계속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간단한 것이든 잘 되지 않을 것 같은 것이든 항상 기도하는 것입니다. 잘 될 것 같지 않아도 기도합니다. 기도를 자꾸 하다가 보면 자연히 기도를 하게 되요. 그것이 기도의 생활화입니다.
4. 선배들처럼
아브라함을 생각해봅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쳐라고 하셨어요. 이게 쉽습니까? 그에게 아들 이삭은 그의 전부였어요. 그 아들이 없어지면 그는 살아갈 이유를 잃게 됩니다. 우리들에게 네 아파트 전부 팔아서 내게 바쳐라 그렇게 말씀하시면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쉽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하나님 있을 수가 없다 하지 않겠습니까? 그때 아브라함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 명령이 있고부터 사흘 후에 떠났다고 하는데 그 사흘 동안 그는 고민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고민이 되어도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시험에 합격했을 때 그때 그는 비로소 믿는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욥은 영문도 모르고 온갖 시련을 당했습니다. 그가 그런 시련을 당한 이유가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내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가 알았습니까? 알았다면 그렇게 괴로워하지 않았겠지요. 몰랐으니까 그렇게 괴로워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끝까지 하나님을 향하여 자기의 원통함을 하소연 했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을 받았습니다. 이런 것이 기도의 생활화입니다. 기도를 생활화하려면 언제나 어떤 일이나 기도하는 것입니다. 자꾸 하면 생활화가 됩니다.
기도한다고 만사를 제쳐놓고 기도만 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다. 책상에서 보고서를 작성하면서도 기도할 수 있고,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면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책을 보면서도 오늘 저녁은 무엇을 해야할까? 생각합니다. 책을 덮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다보면 오늘 저녁은 아침에 끓인 된장이 있으니까 괜찮겠다라는 답이 와요. 그러면 되잖아요.
진정 믿음의 사람이라면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기도를 하여야 합니다. 쉬운 일이든 어려운 일이든 항상 기도하여야 합니다. 기도를 생활화해야 합니다. 그것이 믿는 사람의 특징인줄 믿습니다. 항상 기도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